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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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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김정숙 집사(안동교회)

  뽀오얀 안개가 살며시 모습을 감추기도 전에 농부들의 부지런한 일손이 부산스레 움직이는 곳,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굴뚝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장독대 옆으로는 옥잠화 잎이 싱그럽게 너울거리며, 싸릿문을 열면 탐스러운 과일과 먹음직스러운 야채가 펼쳐지던 평화로운 곳, 이곳이 바로 나의 고향 충청남도 서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홉 살 되던 해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전해 듣게 되었다. 작은 초가집을 성전 삼아 모였던 교회는 커다란 오동나무 옆에 위치해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재미있고 은혜로운 곳이었다. 여름성경학교 때가 되면 밤늦게 예배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마치고 등잔불로 어둠을 밝히며 가파른 언덕을 넘어 집으로 향하곤 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컴컴한 주위가 무서워 숨을 헐떡거리면서 찬송가를 있는 힘껏 부르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곤 했었다.

그런데 철도청에 다니셨던 아버지께서 삼환기업으로 직장을 옮기시면서 우리 가족의 도시생활은 시작되었고, 그 후에도 나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비포장 도로를 지나 저수지를 끼고 한참동안 걸어야 하는 교회에 다녔다. 그 당시 어린 나는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또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주일마다 하나님의 전에 열심히 나갔었다. 특히 그 교회에서 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늘 온유한 모습과 사랑스럽고 정감있는 말씨로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던 분이다.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그 모습을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현재 아동부 교사를 하고 있는 우리 큰 애에게 나는 종종 당부한다. 귀한 어린 생명을 하나님께서 네게 맡기셨으니 사명으로 감당하라고 말이다.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능력을 입어 어린 양떼들을 잘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라고. 어린 시절 나는 그 선생님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지냈다.

그러나 얼마 후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으니'(욥 5:7)라는 말씀같이 나에게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평소 허약하셨던 어머니께서 병석에 눕게 되셨고, 잿빛이 유난히 감돌던 72년 1월에 3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게 되셨다. 당시 나는 열 여섯 살이었다. 철없이 어렸던 우리 두 자매를 두고 차마 떠나실 수 없어 병 낫기를 간구하며 고통 속에서 힘겹게 매달리셨을 어머니! 어린 두 딸을 주님께 부탁드리며 두려움과 싸우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사무치는 그리움과 안쓰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나는 주님께 더욱 매달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속에서 동생과 밝게 성장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주님의 예비하심으로 나는 결혼을 했고, 그로 인해 또 한 분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나의 시어머니 윤 집사님 이시다. 나비처럼 곱고, 때로는 여장부처럼 강인하셨던 어머니. 처음 뵈었을 때 안경 너머로 유난히 빛나는 눈과 또렷하고 단정한 말씨, 깔끔한 인상에서 28세에 사별하시고, 오직 두 남매를 헌신으로 양육하시며, 교육하셨다고 주위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일찍이 엄마를 잃은 나는 이 다음에 결혼하면 시어머니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다정하게 팔짱끼며 시장도 다니고, 허물 없는 모녀처럼 지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셨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은 나의 교만과 허물, 그리고 자아를 깨뜨리시고 연단하시려는 계획을 이미 하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와 나와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성격도,  식성도,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도 비슷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관절염으로 인해 이미 온 몸이 굳어져 있었고, 앉고 눕는 것조차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중환자이셨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밝은 성격을 주시지 않았는가. 잘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간병과 바쁜 생활로 인해 자유로이 외출도 할 수 없었고, 육체적으로 엄습하는 고단함 또한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간간이 다가오는 중압감에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는데…,

주님은 내가 어찌하기를 진정 원하실까? 내 노력과 결심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올 때마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입장을 되돌아 보면서, 어머니의 손발이 되는 착한 며느리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어머님을 휠체어에 모시고 여의도까지 철야예배를 다녔고, 기도원에 가서 함께 금식으로 목놓아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며 치료의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다. 육체의 연약함을 치료받기 전에 영적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했고, 죄와 고난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저 성전 뜰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이 아닌 하나님을 찬양 중에 만나고, 가정예배에서 만나고, 말씀을 묵상하다 만나는 확실한 체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갔다.  내 손길이 어머니께는 불편한 곳을 가장 잘 알아주는 손길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시려고,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시려고, 세상 줄을 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와 나를 함께 붙여주시고 주님만 바라보며 매달리게 하셨다. 때로 내가 곁길로 가려할 때면 '내가 너 때문에 못 박힌 손이 아프구나. 창에 찔린 옆구리가 아프구나'하시는 음성으로 나를 책망하시는 주님 때문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부족한 나를 믿으시고 어머님을 내게 부탁하신 주님께 한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자유스러운 손을 들어 손뼉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영하 19도가 되는 날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전을 기쁘시게 찾으시던 어머니! 이 땅에 사시는 날 수가 다하던 날, 90년 5월 5일 새벽 5시 곱게 눈을 감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시던 그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꽃게 알이 가장 영글어 맛이 좋을 때인 5월이면 꽃게탕을 좋아 하시던  어머니 생각, 잘 익은 누런 호박만 보아도 호박김치를 좋아하셨던 생각에 그 옛날을 떠올린다.

어머님과 함께 한 13년 동안 나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요셉이 13년 간의 연단 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말이다. 어린 시절 고향동산에서 함께 지냈던  나를 낳아주신 친정 어머니와 13년 동안 영적인 동반자였던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늘 감사를 드린다. 특히 요즈음엔 율동하며 찬양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젊은 날에 나를 부르셔서 자녀삼아 주시고, 맵시와 솜씨가 있으셨던 두 분의 어머니를 만나게 하심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귀한 교제를 하게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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