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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민족·통일문제 연구는 주님이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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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김병로 안수집사(서울대 통일연구소 교수)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나는 서울시 육상대회에 나갈 학교대표 선수로 뽑혔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경기가 일요일에 열린다고 했다. 나는 주일을 성수(聖守)할 것인가, 대회에 참가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경기 당일 학교에 말도 않고 교회로 가버렸다. 물론 다음 날 체육선생님에게 불려가 엄청나게 얻어맞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고3 때도 토요일 밤 12시부터 주일 밤 12시까지 교과서조차 펴보지 않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주일을 성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신앙생활은 이렇듯 비교적 일찍부터 강인하게 훈련된 전사처럼 시작되었다.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가정예배와 주일학교에 충실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방의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전학을 와서도 내수동교회, 남서울교회를 거치면서 훌륭한 믿음을 가진 선배들과 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처럼 철저히 훈련된 외면적인 신앙생활의 이면에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의문과 회의로 가득찬 내면세계 또한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수동 교회 중고등부 시절은 이런 고민과 갈등의 클라이막스였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과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은 사건과 같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선배와 목사님께 따지고 들었다.

이러한 방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김의정 전도사님이 내게 건네준 한 권의 책이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불가능은 없다’라는 작은 문고판 책이었다. 이 책은 나의 비판적, 회의적 태도를 긍정적이고 적극적 가치관으로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자 내 신앙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10·26과 5·18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서 당시의 목회자나 교회가 이렇다 할 정치적, 사회적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나마 매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현장으로 나의 시선을 집중시켜준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힘겹게 버틸 수 있었다.

사상적 혼돈 속에서 198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결국 ‘남북한 비교’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됐다. 신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이 학창시절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더 민족문제, 통일문제의 연구로 나를 인도해 간 것 같다. 남·북한을 비교 연구하면서 나는 점차 통일에 대한 비전과 열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됐다.

1991년 귀국해 ‘통일연구원’에서 연구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내 생애의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1998년 겨울 중국 옌볜지방 출장이었다. 그곳에서 탈북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접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옌볜 길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탈북자들과 버려진 탈북고아들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연구실 안에서 북한을 분석하고 평가할 줄만 알았지, 죽어가는 북한사람들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무지했었다. 머리로 하는 연구를 넘어 이들을 실천적으로 돕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1999년 5월, 사도행전의 중풍병자 애니아 사건을 읽는 도중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나는 부랴부랴 야간에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2001년 또 한차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안식년 휴가를 이용해 미국 풀러신학교의 교환 교수로 갔고, 그곳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면서 ‘안수로 병고치는 내과의사’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한 안우성 집사를 만난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성령의 뜨거운 불을 처음으로 체험했고 심각했던 위궤양이 완치됐을 뿐 아니라, 기도노트를 만들기, 시간과 장소를 정해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미국서 돌아와 10년을 근무하던 ‘통일연구원’ 생활을 접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으로 직장을 옮겨 북한선교학을 강의하면서 신학과 선교에 대한 배움과 큰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북한의 그루터기 신자(북한의 자생적 기독교인)들에 관한 소중한 연구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작년 8월 서울대학교에 통일연구소가 설립되면서 3년 만에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하나님이 왜 이곳에 나를 보냈는지 아직 그 이유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소와 양의 희생제사를 받으셨듯이 이곳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주님께서 또 어떻게 인도하실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은 분명하다. 그것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화해만이 나와 우리 민족을 참으로 자유케하는 진리임을 믿는다.

◇누구인가

1960년에 태어나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주립대학교 사회학 석사, 미국 럿거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국방부 합참 민사심리전 자문위원, 미국 풀러신학교 방문 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남서울교회 안수집사이며 통일선교부 부장.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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