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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비온 후에 하늘은 더욱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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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영화상을 수상한 감독이며 연출자이고 작가인 우디알렌은 뉴욕 주립대학과 뉴욕 시립 대학의 영화 제작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받았다. 또 뉴욕 주립 대학의 영어 과목에서도 낙제점을 받았다.

베스트셀러 (엑소더스)의 작가 레온 우리스는 고등학교 영어 과목에서 세 차례나 낙제 점수를 받았다.

미국 최고의 여자 코메디언 루실 볼은 1927년에 배우 수업을 시작했다. 이때 존 머레이 앤더슨 드라마 학교의 지도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직업을 구해 보시오. 어떤 직업이라도 좋으니 제발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을" 1959년에 유니버셜 영화사의 책임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버트 레이놀즈를 동시에 해고시켰다.

버트 레이놀즈에게는 "당신은 배우가 될 소질이 전혀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앞니가 하나 깨졌고, 목의 울대가 너무 많이 튀어나왔어, 게다가 당신은 너무 말을 천천히 하거든." 모두가 알다시피 버트 레이놀즈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훗날 할리웃 영화 산업의 대스타가 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오디션에서 코가 너무 크고 치아가 튀어나왔기 때문에 배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잉그리드 버그만은 "난 내 코가 좋아요." 하고 소리쳤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가스등), (카사블랑카) 등에 출연해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1944년에 블루 북 모델 에이전시 회사의 책임자 에멀린 스니블리는 모델을 희망하는 노르마 진 베이커 (마릴린 먼로)에게 말했다. "당신은 비서일을 찾아 보든지 아니면 일찌감치 결혼을 하는 게 좋겠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에 두번이나 후보로 오른 리브 울만은 일찍이 노르웨이의 국립 연극 학교 오디션에서 탈락했었다. 시험관은 그녀에게 전혀 배우가 될 가능성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말콤 포브스는 프린스톤 대학 시절에 학교 신문기자 시험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하지만 그는 훗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최고의 경제 잡지 (포브스)의 발행인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1962년에 젊은 음악도 네 명이 긴장한 얼굴로 데카 레코드 회사의 간부들 앞에서 첫 번째 레코딩 오디션을 받았다. 간부들은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훗날 (비틀즈)라고 불리는 영국 록그룹이 된 이들 젊은이에게 한 간부는 말했다. "우린 자네들의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 통키타를 쳐 대는 것은 이미 한물 갔거든." 데카 레코드 회사의 파울 코헨은 1956년에 버디 홀리를 해고하면서 홀리에게 "내가 여지껏 함께 일한 가장 재능 없는 친구"라고 혹평했다. 이십 년 뒤 (롤링 스톤) 지는 척 베리와 함께 버디 홀리를 '6o년대 록 뮤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했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매니저 짐 데니는 1954년에 단 한번의 공연을 한 뒤에 곧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해고했다. 그는 프레슬리에게 소리쳤다. "자넨 음악적인 미래가 없어. 트럭 운전수로 돌아가라구." 엘비스 프레슬리는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사랑 받는 대중 가수가 되었다.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이 1876년에 전화기를 발명했을 때 주위에는 그를 후원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시범 통화를 해본 뒤 루더포드 헤이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놀라운 발명품이오. 하지만 세상에 누가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사용하게 되겠소?"

토마스 에디슨은 미국 역사상 아마도 가장 위대한 발명가일 것이다.
에디슨이 미시간 주의 포트 휴론 초등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사들은 그가 너무 '느려 터지고' 다루기 힘들다고 불평을 했다. 그 결과 에디슨의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직접 에디슨을 가르쳤다. 어린 에디슨은 특히 과학에 높은 흥미를 보였다. 불과 열 살에 에디슨은 자신의 첫 번째 화학 실험실을 꾸밀 정도였다. 에디슨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천재성은 일생 동안 1,300가지의 발명품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전구를 발명할 때 토마스 에디슨은 무려 2천번의 실험 끝에 성공했다. 한 젊은 기자가 그에게 그토록 수없이 실패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가를 묻자 에디슨은 말했다. "실패라니요? 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난 단지 2천번의 단계를 거쳐 전구를 발명했을 뿐입니다."

1940년에 또 다른 청년 발명가 체스터 칼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20개회사에 제출했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기업체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회사들 모두는 칼슨의 아이디어를 되돌려 보냈다. 무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끝없이
거절당한 끝에 마침내 1947년 칼슨은 뉴욕에 있는 할로이드 컴패니라는 작은 사업체에다 특허권을 팔 수 있었다. 칼슨의 발명품은 다름 아닌 전기 복사기였다. 할로이드 컴패니는 이 발명품으로 복사기 전문 회사로 발돋움했고, 칼슨과 회사 모두 돈방석에 앉았다.

- 열린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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