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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고의 예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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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예배는…     
 
- 김병삼 목사 (만나교회)
 

예배를 표현하는 많은 말이 있다. 한때 한국교회에서 ‘열린 예배’라는 논쟁이 일었던 이유도 사실은 예배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표현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더는 이런 논쟁이 무의미하며 이런 문제로 논쟁할 정도로 한국교회가 미성숙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함에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는 우리의 체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가 경험했던 ‘스랍의 체험’은 그가 예배자로서 반응할 때 나타난 현상이지, 그가 스랍의 체험을 하려고 나아갔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하는 “은혜 받았어!”라는 말이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켜주는 체험을 두고 한 말이라면 예배를 오해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그의 길을 걸으라’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경은 예배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사람이 ‘체험’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 어떻든, 심지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있는지조차 상관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다. 체험은 그러한 예배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나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의 흔적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자신이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흔적’이란 ‘상처’라는 말로 그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몸에 가져야 했던 아픔의 상처일 수 있다.

오래전 전병욱 목사가 쓴 ‘낙타 무릎’이라는 책에서 낙타는 무릎을 꿇고 일어서기 때문에 굳은살이 박여 구부러진 것처럼 신앙인에게 기도의 무릎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도전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의 흔적이 있을 때 비로소 예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반응한 것 때문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당신이 드린 그 예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응하는 삶을 살다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상처를 경험했는가.

지금은 추억처럼 되어버린 어떤 시골교회에서 드려지는 저녁예배의 장면을 상상해 보라. 지금처럼 능숙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어도 눈물과 감격이 있었던 예배를 말이다.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너무 긴장해서 설교하는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했단다. 분명히 머릿속에서는 ‘이제 목사님 나오셔서 하나님 말씀 전해주시겠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그만 “하나님 나오셔서 목사님 말씀 전해주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회중의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단에 오르신 재치 만점 목사님의 “하나님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에 이내 교회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덕분에 마음이 열린 성도들은 그날 최고의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최고의 예배는 우리가 최고로 완전하기 때문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최고이신 하나님 앞에 최고의 반응을 보일 때 드려지는 것이다. 실수 없음의 완전함이 아니라 실수 가운데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신실한 반응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 이것이 예배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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