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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친구 삼자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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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로마서 3장 21절~23절

설교제목 : 예수를 친구 삼자

 

<영성 시>

 

태양의 찬가

 

* 성프란치스코

 

오 감미로와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리로와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물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 노래 부른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로마 3:21~23)】

 

 <바울에 대한 비판 이야기>

  바울 선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데, 또 예수에 대한 그 나름의 헌신이 눈물겨울 정도인데 기독교의 목회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바울을 비판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특히나 바울 선생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지 2천년 가까이 되셨는데, 그이를 상대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일은 난감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이는 답변할 수 없는 입장이고, 우리는 그이를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 선생을 비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 혹은 세계교회가 바울 선생에게서 비롯된 사상을 수원지(水源池)로 해서, 적절하지 않은 신앙의 수도(水道)를 배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울 선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바울을 인용해서 잘못된 바벨탑을 세우는 ‘과거와 현재’의 기독교 세력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수, 그 상관관계>

  바울 선생은 율법과 예수를 구분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이라 함은, 이스라엘의 유대교 전통에서 내려왔던 윤리준칙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보여지는 많은 계명들, 아마 그런 류를 ‘율법’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로마 3:20). 그래요. 적절한 말씀입니다. 윤리적 준칙들을 지킨다는 것으로 인간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준수는 최소한의 윤리이지, 인간영혼에게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대한의 가치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예수를 분명하게 구분한 바울의 태도는 대단히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에 대한 바울의 과도한 자세였습니다. 예수와 율법을 구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바울은 예수를 너무 높게 자리매김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바울 선생은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로마 3:23). 바울은 예수에 대해서 인식하기를, 유대교 전통이 고수하고 있는 속죄양의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양 한 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낸 후,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양 덕분에 구원받는 것처럼, 바울 선생 역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가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는 바울 선생에 의해서 온 인류의 죄 값을 홀로 다 치루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속죄물이 되었습니다. 바울 선생에 의해서 예수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 큰 존재, 신령한 존재, 높디 높은 존재, 보통의 사람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신비화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조금 더 진전된 이야기>

  물론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충분히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이시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너무 높여지셨기 때문에 그가 인류와는 상관 없는 존재로 갇혀지게 되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를 높디 높은 하늘의 성(城)에 가두어 놓아서, 이 땅 인류의 삶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누구에게 대해서건 수직적 관계를 설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 자신에 대해서나, 제자들에 대해서나 - 사실은 제자라는 표현도 잘못된 것입니다 -, 당시 대제사장이나 임금에 대해서나 … 예수는 항상 수평적 관계로서 응대하셨습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높이지도 않았고, 남을 낮추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낮추지도 않았고, 남을 높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이는 그 누구든 수직적(계급적)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고, 수평적 인간(친구, 벗)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설교의 결론>

  바울 선생 식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를 숭배하는 일은 가능해지지만, 예수를 친구 삼는 일은 불가능해 집니다. 하늘의 높은 성(城)에 예수를 가두어 놓고 눈물 흘리면서 숭배하는 일은 가능해 지지만, 이 땅의 삶터에서 예수를 친구 삼아 ‘예수처럼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해 집니다. 그게 문제의 핵심이고, 비극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그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로 떠 받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네 인생살이의 친구로서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찾아오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일러주는 ‘진리의 벗’이고자 했습니다. 그게 예수의 참뜻이었습니다. 예수를 친구 삼읍시다. 예수에게 물어봅시다. 예수처럼 삽시다. 예수를 숭배하는 삶에서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처럼 살아가는데서 구원의 길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예수를 친구 삼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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