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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빛을 품는다면

  • 김부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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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 로마서 7장 19절~25절

설교제목 : 우리가 빛을 품는다면

 

너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하느님이 와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때까지

너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의 힘을 스스로 밝히는

그러한 신이란 의미가 없다.

태초에서부터 너의 내면에

하느님이 바람처럼 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너의 마음이 감격에 겨워서 신비로운 마음이 풍성해질 때

하느님은 그 속에서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로마 7:19~25)】

 

  <바울은 어떤 인간형일까?>

  성서의 기록을 통해 유추해보면, 바울은 정의로운 투사형 인간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입각해서, 그 옳음에 위배되는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정의의 칼’을 들이대는 인간형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젊은 시절 그가 철두철미한 유대교인이었을 때, 유대교의 정신에 위배되는 기독교도들에 대해서 ‘심판의 칼’을 휘둘러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후 다메섹 언덕에서 예수의 인격을 만나는 신비체험을 통해서 바울이 180도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 또아리를 틀고 있는 기질적 원형질, 즉 ‘정의로운 투사형 인간’으로서의 기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강고한 기질 덕분에 그가 복음을 들고 산을 넘어서 이방세계로 나갈 수 있는 용감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로마 7:19~25)】


  성경의 이 기록을 통해서 느끼는 바는, 바울 선생이 예수의 인격을 만난 이후에도 여전히 투사형 인간으로서 고뇌에 휩싸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선한 영을 따르고자 하는 한 구도자가 그의 내면 가운데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악한 본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딱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서양적 인간형, 동양적 인간형>

  그러나 이런 바울 선생 식의 고뇌는 서양적 인간형이 갖는 고뇌 일뿐, 동양적 인간형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뇌라는 점을 밝히고자 합니다. 투사(鬪士)형 인간, 권력(勸力)형 인간, 전도(傳道)형 인간 등에서 발견되는 고뇌일 뿐 화합(和合)형 인간, 평민(平民)적 인간, 수도(修道)형 인간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뇌인 것입니다.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의 격렬한 투쟁은 바울 선생에게는 절실하고 다급한 해결과제였으나, 동양적 인간 - 화합형이며 평민적이며 수도형 인간에게는 그리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스승, 예수>

  바울 선생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단히 적절한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서양적 인간형이었던 데 비해 예수께서 그 내면 가운데 품고 있는 성정(性情)은 다분히 동양적 기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내면 가운데서 선과 악이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악(惡)이란 물리치고, 밀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에게 악은, 사랑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었고, 기도해야할 불쌍한 존재였고, 선(善)과 동일한 분량으로서 보살핌을 받아야할 대상이었습니다. 예수에게 악은, 선과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善)의 없음상태(不在)이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불쌍한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악과의 투쟁에 지쳐 있던 바울에게 예수의 메시지는 충분히 구원의 음성이 되고도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극악한 어둠을 몰아내고 싶으십니까? 불의와 불법, 부패와 타락, 불의와 분노로 일그러진 이 세상을 치유하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우리가 빛이 되면 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어둠으로서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빛이 없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이 되어서 작은 촛불이나마 밝힌다면, 어둠은 자연스레 물러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우리가 빛을 품는다면”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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