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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저스트 워(Just War)와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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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워(Just War)와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

- 이태형 부장 (국민일보 미션라이프부)


저스트 워(Just War)인가,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인가.





‘전쟁’(War)이란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천안함 조사 결과 발표 이후 단호한 대응, 응징, 보복, 전쟁이라는 단어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외신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북한은 전면전 운운하고 있다. 한국내의 정서도 ‘정말 불가피하다면 한판 치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분위기다. 전쟁, 정말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철저한 응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록 북한과 전쟁까지 치닫더라도 그 전쟁은 ‘정당한 전쟁(Just War)’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정당한 전쟁, 즉 ‘저스트 워 이론(Just War Theory)’는 지난 시절동안 종교계에서도 수없이 제기됐었다. 1095년 11월27일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이슬람교도들과 싸워 성지를 되찾자며 ‘정당한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십자군 원정은 정당한 전쟁이란 명목으로 진행됐다. 그 명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십자군 원정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은 한쪽만의 시각임은 물론이다. 한쪽의 정의가 다른 쪽의 부정의로 직결된다. 가장 최근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저스트 워’라고 불러 논란을 일으켰다.

정당한 전쟁을 연구한 학자들은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가 요구된다고 밝힌다. 먼저 그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전쟁은 정당할지라도 마지막 방편이다. 모든 비폭력적인 방법이 소진 된 뒤에 취할 수단이다. 따라서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여지가 있는데도 전쟁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저스트 워’가 될 수 없다.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전쟁을 부추기는 것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정당한 전쟁은 올바른 목적을 갖고 수행되어야 한다. 오직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평화가 항구히 보장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전쟁이 정치적·외교적·주변 역학적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천안함과 관련해서 우리가 전쟁(전면전이건, 소규모 충돌이건)을 치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더 많은 희생을 막는 수단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합당한 이유 때문에 정당한 전쟁을 치르더라도 쌍방간의 희생자는 최소화해야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3000여년 된 탈리오의 법칙은 등가보복을 제시한 것이다. 이 탈리오의 법칙을 무제한적인 복수 원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복수를 하더라도 등가적으로 하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제한적인 보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라는 뜻이다. 보복의 수단을 제한함으로써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물론 평화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사실 성경내에는 정당한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성경구절이 적지 않다. “주님은 용사”라는 출애굽기 15장 3절로부터 누가복음14장31절과 같이 예수께서 합법적인 전쟁을 옹호하신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 신명기 1장41절과 같이 하나님이 전쟁을 하도록 명령한 구절들도 있다. 잠언에도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놓고 하여라”(20:18)라고 나와 있다. 전쟁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 해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스트 워’에 대항하는 이론이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이다. ‘저스트 피스메이킹’이란 책을 쓴 풀러신학교의 글렌 스타센 교수는 “모든 고려를 떠나, 어떤 이유에서도 전쟁은 불가하며 오직 평화를 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스타센 교수를 여러 번 만났다. 미국 패서디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가 보았다. 너무나 멋진 크리스천 교수였다. 기독교 윤리학자로 그는 자동차 공해를 줄이기 위해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분이다. 이라크 전쟁때에는 풀러신학교내 학생들과 함께 반전 기도회를 가졌었다. 그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주도적 개혁을 위한 솔선수범(Transforming Initiative)을 하라고 강조한다. 이는 악을 대할 때 보복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솔선수범해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의 말씀과 같이 성경의 주 메시지는 평화요 사랑이다. 성경에 전쟁을 옹호하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평화와 사랑을 강조한 구절의 수와 비할 바 아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며,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 뺨까지 내 주라고 하셨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까지 경고하셨다.

앞으로 ‘저스트 워’와 ‘저스트 피스메이킹’은 한동안 한국 교회나 사회의 주요한 논점이 될 것이다. 천안함 사건과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사태는 가상이 아니라 실제다. 우리는 지금 실제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당신은 신자의 양심에 따라 정당한 전쟁을 옹호하는가? 아니면 비탄과 분노, 적개심을 누르고 ‘오직 평화를 만드는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인가.

“이 세상에는 좋은 전쟁이란, 나쁜 평화란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이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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