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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투성이라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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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라도 살라 

- 임한창 종교국장(국민일보) 


한국에서 하루 평균 33명이 스스로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이는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그 어떤 충격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살의 후유증은 너무도 심각하다. 자살은 그를 사랑한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상처와 충격을 남긴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베르테르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베르테르 효과란, 연예인 등 유명인이 자살했을 경우, 자신을 유명인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연쇄적 자살이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시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결국 그의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다. 이 소설이 유럽을 강타한 18세기 중엽, 베르테르의 자살에 공감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가장 소중한 것

최근 발생한 유명 연예인의 자살도 예외가 아니다. 벌써 그것에 영향을 받아 자살자가 증가하고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세상에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종합병원 암 병동에 가보라. 그곳에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통과 전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혈관을 통해 주입되는 약물 중 아드레마이신이라는 것이 있다. 눈물까지도 빨갛게 나온다고 해서 ‘빨간 약’으로도 불린다. 그 매캐한 화학성분 냄새에 혈관도 숨는다고 한다. 이 주사를 맞고 2주가 지나면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진다. 암 환자들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공포의 ‘빨간 약’을 수십 번씩 참아낸다.

성경에 에스겔이 등장한다. 그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선지자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장차 닥칠 고통을 생각하며 울부짖었다. 그에게는 민족을 깨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앞에 얼핏 죽음을 떠올렸으리라. 하나님은 피투성이 인생을 향해 두 번 연속 이렇게 명령하신다. 

“피투성이라도 살라. 피투성이라도 살라”(에스겔 16장 6절).


감사하는 마음이 묘약이다

삶은 의무다. 힘이 들어도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포기란 없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포기할 권리가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해결의 길이 열린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죄악이다.

우리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교회 종소리를 듣고 예배당에 들어갔다가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간증을 종종 듣는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신앙을 가지면 희망이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죄다. 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복음은 영의 음성을 듣게 한다. 복음은 잠든 영혼을 깨운다. 복음은 감사와 소망을 갖게 한다. 복음은 음산한 죽음의 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희망의 초원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하겠지만, 이 세상에서도 남들보다 굳세게 살아야 한다. 

성경에는 혹독한 시련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욥을 보라. 요셉을 보라. 다윗을 보라. 저들이 당한 억울함과 시련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살을 해도 열 번도 더 할 정도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피투성이 몸으로도 희망을 노래하며 최후에 승리하지 않았는가. 반면에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배신의 대가를 자살로 마감했다. 하나님과 대적한 포악한 사울왕도 자살로 일생을 마쳤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 회개할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영혼들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씀하신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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