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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뉴스룸에서-김찬희] 신뢰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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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내총생산(GDP) 통계로는 나타낼 수 없는 ‘행복 GDP’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해 왔다. GDP에 담기지 않는 일과 삶의 균형, 삶의 만족도, 환경, 공동체의식 등을 측정해 ‘삶의 질’을 보여주자는 의도다. 그 결과물이 2011년부터 매년 내놓는 ‘BLI(Better Life Index)’다.

지난달 15일 발표된 올해 BLI에서 한국은 38개국 가운데 29위로 바닥권에 이름을 올렸다. BLI는 24개 세부 지표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공동체’(지원 관계망의 질·Quality of support network)라는 게 있는데, 한국은 꼴찌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한국인의 75.9%만 ‘있다’고 답했다. ‘식구’나 아주 친밀한 친구를 빼고 나면 세상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걸어본 적이 없으니, 나 혹은 우리 몫을 챙기려면 상대방을 눌러야만 하는 경쟁사회이다 보니 ‘신뢰의 경험’을 쌓아본 적이 없다.

뿌리 깊은 불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관계가 노(勞)와 사(使)다. 노는 사를, 사는 노를 믿지 않는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이 연장선 위에서 노사관계를 상생·협력으로 바꿔보겠다는 목적을 내건 노동이사제(근로자이사제)도 불신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노동이사제는 1951년 독일 탄광·철강기업을 시작으로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룩셈부르크 등 19개 나라에 도입됐다. 노동자 대표 혹은 노조 추천 인사가 이사회 멤버로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제도다. 독일은 1976년 종업원 500명 이상이 근무하는 사업장이면 공공기관이나 민간 기업을 가리지 않고 노동이사를 두도록 했다. 문재인정부는 노동이사제 도입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정부는 공공기관과 금융권에 우선적으로 노동이사를 도입하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노와 사,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적은 없다. 장단점을 따지고 제도의 틀을 갖춰보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재계는 노동이사제 도입에 따른 부작용으로 주주이익 침해, 의사결정 지연을 말한다.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이사회에서 노동이사의 반대로 정리해고나 생산설비 이전 등에 차질이 빚어지면 기업 부실을 초래하고 주주이익을 침해한다는 지적이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불가능해져 새로운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일도 어려워진다고 한다.

반박도 만만찮다. 시민단체와 노동계는 노동이사제 도입으로 투명한 경영·지배구조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경영과 지배구조가 투명해지면 기업 가치가 오르고 장기적으로 기업 성장에 도움이 된다. 사실 지금과 같은 사외이사 제도로는 제대로 된 경영 감시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외이사들은 이사회에 참석해 경영진이 원하는 쪽으로 표를 던지는 ‘거수기(擧手機)’일 뿐이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해외 사례를 봐도 성공과 실패,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관건은 노·사·정 협력, 그리고 우리 현실에 맞는 ‘한국형 노동이사제’ 만들기에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 대표가 사내이사로 참여하는 대신 노조 추천을 받은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노동이사로 참석한다면 어떨까. 공공기관과 금융지주회사에만 제한적으로 도입하는 건 어떨까. 공공기관은 국민이 주인이다. 금융은 공적 기능도 갖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잊을 만하면 ‘낙하산 인사’ ‘관치금융’ 바람에 휩쓸리기도 한다. 또한 이해 당사자는 물론 일반 국민까지 참여해 노동이사제를 어느 수준으로, 어디까지 도입할지를 결정하는 건 어떨까.

“도입을 하든 말든, 그 과정에서 신뢰의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노사관계는 물론 우리 사회에 신뢰라는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겁니다.” 지난달 20일 KB금융지주 임시 주주총회에서 노조 추천 사외이사 선임 안건이 부결된 뒤 만난 고위 관료 A씨는 또박또박 힘을 줘 말했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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