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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9> 수녀원 떠난 그녀… 백방으로 수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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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일기를 쓰며 그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계속 써내려가다 1980년 11월 어느 날 수녀원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그녀가 교사직을 그만 뒀고 수녀원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 황당했고 쓸쓸했고 허무했다. 서둘러 계성여중으로 달려갔고 아무리 주변을 서성여도 그녀는 정말 보이질 않았다. 전국의 성바오로 수녀회 분원마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그녀가 있는 곳을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었다. 얼마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수녀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고 그녀가 수원 ‘말씀의 집’에서 피정 중인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그곳의 원장 수녀에게 김연수 수녀와의 만남을 눈물로 간청했다. 한 달간 ‘침묵 피정’ 중이라 누구와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 달을 기다린 끝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최 전도사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수도원에서 종신토록 살기로 허원한 사람입니다.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다시 수원 말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큰언니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언니를 통해 김 수녀가 충남 홍성 광천의 작은 성당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어 물어 광천성당을 찾아갔다. 5분 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한 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먼 길 찾아 왔지만 전도사님이 원하는 말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태연한 척 말하고는 정확히 5분 후에 일어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다행이다. 곧 다시 와서 내 마음을 쏟아놓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었다. 일주일 후 아는 형에게 양복을 빌려 입고 친구에게 여비를 빌려 광천성당을 찾았을 때 그녀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났고, 그 후로는 아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또 다시 자리를 옮겨 논산에 있는 쌘뽈여고 수녀원에 있었다. 그곳까지 다시 찾아갔지만 수원과 광천에서 만났던 것처럼 다시는 만나게 할 수 없다며 전화 받는 사람마다 냉정하게 끊었다.

학교 근처 제과점 주인 아주머니가 학교 정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내 모습에 감동했다며 수녀원에 전화를 넣어 주어 가까스로 김 수녀와 통화할 수 있었다. “지금 좀 나오세요.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네 시간이 없으시다고요. 저도 바쁘답니다. 다시 연락주시겠다고요”라는 등 나의 말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거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말만 했다. 옆에 다른 수녀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모진 맘을 먹고 한마디를 던진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 이러시면 난 이제 섬으로, 가사도로 갑니다. 다시는 내 목소리를 못 듣게 될 거예요. 끝내 사랑과 진실을 마다하고 교회법으로 통제해 온 당신은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길로 논산역으로 가서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말 삶을 끝낼 심산이었다. 기차는 통곡하는 나를 태우고 무심히 들판을 달렸다. 힘겹고 고단한 삶을 짊어진 이들이 가득한 완행열차 안에서 나는 가까스로 숨을 내몰며 땅끝을 향해 갔다. 목 멘 소리로 김 수녀의 이름 연수씨 연수씨를 부르면서.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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