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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1> “하나님께 먼저 묻고…” 고민하는 나를 다독인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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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했고 나는 오랫동안 미뤄놨던 책을 다시 잡았다. 목회를 한다면 중도에 포기한 신학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할지, 인문학 공부부터 할지 생각이 복잡했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묻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올해 시험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예비고사를 봤다. 기대치 않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녀와 서울 광나루의 장신대를 찾았다. 숨을 죽이고 본관 앞 게시판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기에 그날 느낀 기쁨과 부담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본관 로비 건너편 기도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합격 발표 후 경기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국어교사로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뒤 7개월간 어려운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수입이 없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회와 성당 사이에서 엄청나게 방황했다. 난 계속 성당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내가 목회자가 될 사람이기에 내 쪽으로 건너오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고는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가 제일 맘이 평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은 새문안교회 성도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난 서울 광장동의 신학교 기숙사로, 그녀는 동두천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장신대 입학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는 부쩍 늘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면 수도원을 찾아 다녔고 용산의 행려자 숙소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에서 헐벗은 이들과 한뎃잠을 자기도 했다. 불규칙한 삶은 오래가질 못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또다시 입원했다.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결심했다. 그녀와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로.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 우리는 결혼날짜를 1982년 9월 4일로 잡아버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호적을 파가라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 살 연상의 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일단 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녀가 개신교에 큰 유익을 주는 목회자 부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신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아시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두 사람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고했다. 죽음 같은 고통과 수없이 싸우며, 때론 피 흘리는 산제사를 고독하게 올려 드리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넘쳤다. 그러나 그 감격은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나게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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