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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4> 588 포주들 핍박… 교회 비운 새 십자가가 쓰레기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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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 안에 있는 철도청 소유의 건물을 빌려 인쇄업을 하던 신길순 형제를 찾아갔다. 다일공동체 교회 창립을 위한 준비 기도회를 그의 인쇄소에서 갖고 싶다고 말했다. 자칫 부담을 줄까 봐 행려자들을 돌볼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1989년 7월 4일, 첫 준비 기도회를 드렸다. 인쇄소에 붙어있는 간이 사무실이었지만 공간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했다. 아내는 내게 “6개월 안에 그만두겠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잘해보라”고 했다.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일’ 공동체 교회가 은혜롭게 창립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인쇄소 창고를 예배당이자 나눔의 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66㎡(20평)가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정성을 들여 꾸몄다.

89년 9월 10일, 마침내 창립예배를 드렸다. 은사이신 당시 장신대 정장복 교수와 한신대 예영수 대학원장 등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가난한 교회의 창립예배치고는 풍성하고 화려했다. 순서가 모두 끝난 뒤 정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좋았네만 당장 다음 주부터는 무척 쓸쓸히 지내시겠구먼. 이미 각오한바 아닌가. 고비를 잘 넘기리라 믿네.”

정말 그다음 주부터 교회에는 나와 아내를 포함해 다섯 명의 성도밖에 없었다. 세 명의 성도마저 각자 사정에 따라 1년도 안 돼 다 떠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청량리 588 뒷골목의 작고 쓸쓸한 예배당.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느냐”고 주께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을 다잡고 거리로 나섰다.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들고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자들, 경동시장 구석구석에 누워있는 노숙인 형제들과 무의탁 노인들에게 라면을 끓여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물 인심은 좋아서 가게와 음식점마다 물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예배당으로 모셔 와서 라면을 끓여 드리기도 하고 그들이 있는 장소로 가서 드리기도 했다. 술에 찌들어 주정하는 이들은 교회로 모시고 오기 힘들었다.

짝을 지은 행려자들이 예배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즐겁게 라면을 끓였지만 기쁨은 길게 가질 못했다. 교회 옆 인쇄소와 목재소 등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화를 냈다. 거지들을 동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내게 호통을 쳤다.

배척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밖에서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심한 화상을 입은 허벅지를 내놓은 채 다리를 끌며 오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누웠다가 그만 다리를 모닥불 잿더미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아프다며 병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할 수 없이 역전 파출소로 뛰어가 도움을 청했다. 죽어도 경찰차는 안 타겠다는 그를 설득해 시립병원 행려자 병동에 데려다줬다. 파김치가 돼 교회로 돌아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모든 집기가 밖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벽 중앙에 걸어놓은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 소각장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예배당이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량리 뒷골목을 빗자루로 쓸었다. 청량리 588 포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예수쟁이 놈이 재수 없게”라며 소금을 뿌리거나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부터 올 것이 오는구나’ 싶어 담담해졌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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