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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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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마가복음 11장 20-25절)


<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 >

 서울의 A 목사님은 새벽기도 때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새벽에 기도할 때 너무 고요해서 때로는 옆 사람 숨소리도 크게 들릴 정도입니다. 그렇게 몇십 분 기도하면 졸기 딱 좋습니다. 만약 그들의 기도가 깨어 있는 진실한 기도라면 고도의 숙련된 기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 교인들이 그렇게 고도의 숙련된 기도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의 수도사나 동굴의 수도사는 침묵기도를 즐겨했지만 침묵기도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선교연맹(C&MA)의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에는 개인기도, 합심기도, 간구기도, 중보기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침묵기도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깊은 차원의 기도는 침묵기도다. 그러나 침묵기도는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다. 요구도 없고, 생각도 없고, 소리도 없이 성령님과의 깊은 교감을 이루는 참된 침묵기도는 고도의 기도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A 목사님의 교회는 새벽기도가 너무 고요하니까 교인들이 다 졸 것 같고 마치 죽은 교회처럼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초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1998년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바로 근처에 A 목사님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가 개척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새벽기도회에 한번 가봤는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교회와 성도는 기도할 때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다양합니까? 새벽에 뜨겁게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왜 남의 기도를 방해하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런 갈등을 볼 때마다 인간의 연약성을 깨닫습니다. 그 연약성을 조금씩이라도 잘 극복해나가려면 믿음과 더불어 깨달음도 필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떤 사건을 반면교사로 활용하는 지혜가 탁월해야 합니다. 저는 새벽기도와 관련된 성도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면서 제 과거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부터 약 2년 동안 저는 서울의 한 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큰소리로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교회 장의자를 탕탕 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제 옆에서 기도하던 사람 중에는 저에 대해 “뜨겁게 기도하는 신실한 청년이다.”라고 생각하기보다 “왜 기도하는 옆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교우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목회하면서 다시 진지하게 성찰해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어느 날, 새벽 6시 반이 넘어 기도하던 사람이 거의 떠났을 때 한 여성이 교회 피아노를 탕탕 치며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 그러자 결국 부목사가 그 여자를 강제로 교회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나중에 부목사에게 “왜 그 여성분이 피아노를 탕탕 치며 기도했나요?”라고 묻자 “귀신 들려서 그래요.”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부목사님이 영혼을 위한 따뜻한 사랑이 부족한 것 아닌가?”라고 괜히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기억나면서 “당시에 내가 뜨겁게 기도한 것이 남에게는 부담스런 상황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성찰을 뒤늦게나마 한 것입니다. 그처럼 불편한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생기는 생활 속의 작은 깨달음도 진리를 새로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줍니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사람은 조금 더 겸손해지고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사람은 많이 아는 것 같아도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리더도 팔로워의 다양한 상황을 잘 모르기에 리더가 무심코 한 말이 팔로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려가 넘치는 지혜의 은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키가 작은 콤플렉스 때문에 싸움만은 지지 않으려고 몸을 격투기로 강인하게 만들었고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남들은 제가 용기 있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저도 누군가 떼로 찾아와 싸움을 걸어오거나 무기를 들고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또 걸어올 마음까지 없어지도록 한번 싸움을 하면 절반쯤 상대를 죽여 놓고 분노를 과대 포장했습니다. 그 과대 포장된 분노에는 내면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내면의 두려움이 청년 때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일대일의 정정당당한 싸움에서는 거의 지지 않았던 과거가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을 내면에 남겼습니다. 그 인간적인 자신감이 하나님이 없으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기본적인 자신감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은 누구든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현실을 반전시켜 역전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회자로서 성도에게 자신감을 주려고 한 말이 때로는 너무 강한 톤이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사람은 그런 미안한 일을 벌이고도 세세하게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리더가 될수록 말에 신중해야 하고 능력과 영향력은 계속 키우되 자신을 감추면서 바른 가치관을 끊임없이 배워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그런 바른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 불편한 환경이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나 인생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입니다. 본문은 그런 지혜를 도전합니다.

<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 >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시장했습니다(12절). 그때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열매가 있을까 하고 갔는데 가서 보니까 잎사귀 외에 아무 열매도 없었습니다(13절). 그러자 예수님은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했고(14절), 곧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20절).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사람들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서라고 단순히 생각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본문 앞의 13절 후반부에 있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지 않고 잎만 무성했다면 저주받을 수 있지만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그때 열매를 찾아서 없다고 저주하다니 언뜻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란 책에서 본문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비인격적인 말에 상처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생각입니까? 예수님이 비인격적이어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당시 종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 도구로서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뜻이 담긴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의 상징 도구로 삼으신 것은 그 바로 전날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위선을 보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11절). 당시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제사장들은 앞에서는 제사 드리고 뒤에서는 매점을 운영해 제물을 팔며 폭리를 취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당시 위선적인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저주이자 우리에게도 주는 교훈입니다. 즉 그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다음 차례가 우리기 될 것이란 암시입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떠들면 선생님이 강대상을 칩니다. 그때 “선생님이 비인격적으로 왜 죄 없는 강대상을 치나? 선생님 자격이 없다.”라고 따지고 나오면 그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강대상을 친 것은 강대상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떠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래도 계속 떠들면 경고를 조금 더 강하게 하려고 한 명을 뽑아 매를 듭니다. 그때 뽑힌 학생이 크게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징계의 모델로 선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들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 학생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회개와 성찰 기회로 삼으십시오. 이웃집 아이의 매 맞는 소리가 들리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은혜가 8살 때 벌로서 30센티 자로 손바닥을 맞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6살짜리 한나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습니다. 아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데 성숙한 성도에게는 그런 지혜로운 행동이 더욱 있어야 합니다. 그런 지혜가 없으면 그 다음 차례나 다음다음 차례의 징계는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자신에게 경고가 될 수 있기에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발트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생각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불행한 사건을 반면교사로서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삶이 바뀔 때는 그냥 바뀌지 않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사건들을 의미 없이 지나치지 말고 자기 성찰과 회개의 계기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사건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도록 성도의 성찰과 회개를 촉구하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뜻 >

 다음 날 아침, 그곳을 지나갈 때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전날의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21절).” 어떻게 그런 기적적인 일이 있어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했습니다(22절).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1. 큰 믿음을 가지라

 예수님은 크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23절). 눈앞의 장면과 현실만 보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전후좌우와 미래까지 살피며 가장 좋은 길을 만들어 가십니다. 때로 어렵고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것조차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배려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일하십니다. 사람의 일에는 실패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실패 같아도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가끔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망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잘 믿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이 있어서 잠깐 회수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선한 목적을 위해 잠시 형통함을 유보하시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선한 목적이 있어서 자신의 물질을 회수해가시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물질은 회수해가도 믿음은 남겨주소서.” 오랫동안 했던 기도가 응답되지 않거나 일이 이뤄지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그때도 감사하십시오. 그런 큰 믿음을 가진 것이 진짜 복입니다.

 일을 너무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십시오. 실망스런 일 하나로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지 마십시오. 때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되어도 그 길이 축복의 길임을 믿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런 큰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합력된 선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신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을 주시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을 주십니다.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춰 불명하지 말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 감사하십시오.

2. 기도응답을 믿으라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절).”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도의 축복입니까? 그 축복이 너무 놀라워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받는 것은 부끄럽다. 열심히 일하고 받아야 정상이지 않은가?” 겸손한 언행 같지만 자존심이 너무 지나친 언행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존심과 체면입니다. 믿으라고 하면 죄가 너무 많아서 못 믿겠다고 하고 문제가 생겨 기도하라고 하면 문제가 터진 후 기도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라고 안 합니다. 또한 성공적인 삶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 땀 흘려 일하면 성공하는 것이지 그런 것까지 왜 기도하느냐고 합니다. 언뜻 보면 겸손한 말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 말을 겸손하게 보시지 않고 자기를 높이는 말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오라고 하는데 너무 핑계가 많고 기도하라고 하는데 너무 변명이 많습니다. 내면의 삶이 곪아터진 상황에서 자존심과 체면을 너무 내세우면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은 “기도만 하고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일이 목적 있게 되고 효율적으로 되고 게다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마음에 평안도 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일하면 일의 성취 가능성도 훨씬 커집니다.

3. 미움을 극복하라

 기도 응답을 원하면 용서와 이해를 바탕으로 기도하십시오(25절).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해도 마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장벽이 있으면 기도 응답은 멀어집니다. 그 장벽 중의 하나가 바로 미움입니다.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 힘들면 그냥 잊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성도는 충분히 용서하고 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길을 믿기 때문이고 뚜렷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나가 말했습니다. “아빠! 혹시 누가 저를 폭행해서 죽이면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고 개인적으로는 원한을 갚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맡기면 되고 어차피 조만간 천국에서 만날 테니까요.” 제가 화답했습니다. “한나야! 혹시 아빠가 먼저 죽어도 너무 낙심하면 안 돼. 그때도 열심히 살아야 돼.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잘 살고 있는지 지켜볼 것이고 어차피 조만간 천국에서 만날 테니까.”

 한나는 아빠의 마음에 미움이 있으면 말씀묵상이 저해되어 <성경 전체 강해> 완성을 통한 문서선교에 차질이 될까봐 그렇게 미리 말해준 것입니다. 미움 때문에 마음이 혼란해서 밤새 말씀 묵상을 하는 대신 밤새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를 해야 하면 어떻게 깊은 진리가 깨달아지고 하늘의 복이 예비되겠습니까? 미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미움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미움을 극복해서 영혼의 대 자유를 누리고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비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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