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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1> 음악이 좋아 교사 그만두고 극동방송으로 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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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갔다. 음반이 귀하던 시절, 들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뒤 첫 직장이던 동인천중·고등학교 음악교사직은 무척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교사를 그만두고 극동방송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음악 때문이었다. 월급이 반 토막 났지만 당시 방송국엔 로저와그너합창단과 같은 세계적인 합창단의 LP 명반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종일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아내 이명원 권사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조마조마하며 물어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세요”라며 큰 힘을 줬다. 극동방송에 취직한 뒤 합창 지휘자의 길도 활짝 열렸다. 결국 당시 이직은 주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기회였던 셈이다.

지휘자로서의 삶의 시작과 끝은 ‘교회음악’이었다. 60년 가까이 가곡과 전통음악, 찬양곡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지휘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한 음악은 교회음악이다. 처음 노래를 부른 곳도, 지휘를 시작한 곳도 교회였다. 지휘와 합창을 좋아하던 고등학생 윤학원이 연세대 음대에 진학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57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인천 율목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를 시작했다. 작은 교회였지만 찬양대는 메시아 전곡을 부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부터 교회에선 합창이 넘쳐났다. 한국 합창음악의 뿌리는 교회음악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락교회 시온 찬양대가 있었다. 나는 1971년부터 2008년까지 이 찬양대를 지휘했다. 해외 출장을 제외하고 지방출장을 갔다가도 주일엔 어김없이 지휘봉을 잡았다. 찬양대를 지휘하는 일은 하나님과 한 약속이며 나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유일한 것이었다.

나와 시온 찬양대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첫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난 1971년 1월 1일 영락교회 신년예배에서 시온 찬양대원들 앞에 처음 섰다. 그 전에 같은 교회 대학생들이 모인 호산나 찬양대를 지휘했지만 시온 찬양대의 무게감은 엄청났다. 대부분의 대원이 당시 33세였던 나보다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그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성악가도 여럿 있었다. 전임 지휘자 박재훈 목사는 화가 나면 지휘봉을 꺾어 버릴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했다. 새파랗게 젊은 내가 그걸 흉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찬양대의 시스템을 갖추고 새로운 곡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기로 다짐했다.

나의 시도는 적중했다. 워낙 훌륭한 찬양대였기 때문에 모든 음악적 시도가 100% 결실로 맺어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온 찬양대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찬양대로 성장했다. 이런 찬양대에서 38년 동안 지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감사다. 2008년 12월 13일 저녁 7시 영락교회 베다니홀에서 나의 인생을 바쳤던 시온 찬양대 지휘자에서 은퇴하는 마지막 음악회를 가졌다. 늘 그래왔듯이 지휘봉을 잡고 기도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까지 절 이끌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약력=△1938년 황해도 출생 △연세대 음대 △로얼주립대학교 대학원 △웨스트민스터콰이어대학교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상임지휘자 △대우합창단 상임지휘자 △인천시립합창단 지휘자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음악감독 △중앙대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음대 학장 △영락교회 호산나·시온찬양대 지휘자 △자양교회 시온찬양대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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