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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7> 두 달간 해외 순회연주… 마지막 공연 뒤 쓰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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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선명회합창단 해외연주회가 열린 곳은 대만이었다. 선명회합창단 지휘를 맡은 뒤 여는 첫 연주회이기도 했다. ‘첫 연주가 해외라니….’ 신경을 너무 써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대만에 도착해서부터 배가 아프고 경련으로 걷는 게 불편할 정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촌놈 콤플렉스’였다.

밤새 잠을 청하지 못하다 기도를 한 뒤에야 겨우 쪽잠을 청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만나 발성연습을 했다. 그러고는 “혹시 내가 쓰러지더라도 놀라지 말고 끝까지 노래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미 해외 연주 경험이 많은 아이들이 오히려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웃는 게 아닌가. 아이들이 선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훌륭한 단원들 덕분인지 연주는 훌륭했다. 그날 이후 두 달 동안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순회연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 멀미를 달고 살았다. 밤엔 불면증에 시달렸다. 멀미약과 수면제로 버티다 마지막 공연이 있던 뉴질랜드에서 앙코르 연주까지 마치고 무대 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호주 다윈에서 열렸던 공연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연주는 기분 좋게 시작됐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비를 맞으면서도 단원들은 음정하나 틀리지 않고 노래했다. 준비한 모든 곡이 끝났다. 그 순간 어린 단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폭우에 관객도 모두 자리를 떠났을 것 같은데, 기특하게도 끝까지 노래했구나.’ 그 순간 등 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500여명의 관객도 비를 맞으며 노래를 들었던 것이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들이 얼굴 가득 흘러내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미약하게 시작했던 선명회합창단 지휘는 무려 34년 동안 계속했다. 많은 합창단을 거쳤지만 선명회합창단만큼 내 인생이 녹아든 곳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을 통해 화합의 길을 엿봤다. 분쟁이 있는 곳에 합창이 특효약이라는 확신도 가지게 됐다.

해외 공연은 선명회합창단의 일상이었다. 그만큼 해외 공연이 잦았다. 단원들은 맹연습을 했다. 하지만 합창단에 연습만큼 중요한 건 새로운 곡을 찾는 일이었다. 곡을 찾고 선정하는 건 지휘자의 몫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악보를 찾기 위해 청계천 중고서점을 뒤지는 게 취미가 됐다. 미국에 연주회를 가면 보통 200∼300개의 악보를 구해왔다. 이 중 실제 연습까지 하는 곡은 3∼4곡 수준이다. 그만큼 곡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어느 나라, 어떤 무대에 서도 ‘어린이들이 수준 높은 노래를 한다’는 평을 듣게 됐다.

선명회합창단은 1978년 영국 BBC가 주최한 ‘세계합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의 합창단이 해외에서 상을 받은 것도 첫 번째 일이었다. 내 나이 마흔, 선명회합창단을 맡은 지 8년만의 쾌거였다. 그즈음 합창과 지휘를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졌다. 선명회합창단에 올 때 준비하고 있던 미국 유학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선명회합창단을 부지휘자에게 맡기고 미국 보스턴의 로웰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 학생은 오직 나뿐이었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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