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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윤학원 <10> 대우합창단 단원들과 갈등… 해체의 아픔 겪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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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합창단은 1983년 10월 창단한 국내 유일의 프로 합창단이었다. 난 그곳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합창단엔 최고의 성악가들이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우도 최고였다.

문제는 합창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개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브라토(목소리가 떨리게 하는 기교)가 심했다. 비브라토는 합창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모니를 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악가들에게 비브라토를 없애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합창을 위해선 말해야 했다. 연일 충돌이 벌어졌다.

난 온화한 지휘자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다. 좋은 말만으로는 합창이 되지 않는다. 연습하는 데 있어서 절대 물러서는 법도 없다. 단원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갈등과 봉합이 반복되면서 대우합창단은 자리를 잡아갔다. 선명회합창단을 통해 ‘움직이는 합창’의 힘을 깨달았다.

대우합창단에도 적용했다. 1983년 12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평론가들은 가혹했다. “선명회합창단의 성인 버전이다”는 식의 비난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다. 좌석은 늘 매진됐고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대단한 인기였다. 1986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아시아 칸타트’, 19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1회 세계합창심포지엄을 통해 세계적인 합창단으로 우뚝 섰다. 모두가 ‘다이우’를 연호했다. 창단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창단은 늘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장단 회의 때마다 불만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졌다. 연습의 강도는 점차 세졌다. 늘 불만이 있던 단원들과의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다. 1988년은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해였다. 큰 연주회를 앞두고 한 여성 단원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여성들의 경우 포니테일 스타일로 통일하는 게 관례였는데 이를 깬 것이었다. 항명이었다.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단원의 남편도 대우합창단에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윤학원 반대파’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집으로 투서가 날아들었고 예술의전당엔 나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별다른 혐의는 없었다. 가혹하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김우중 회장이 단원을 만나 불만을 듣기도 했다. 큰 문제점을 찾지 못한 회장은 단원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윤학원 지휘자를 따르면 봉급을 100% 인상할 것이고 그를 거부하면 합창단은 해체하겠습니다.” 급기야 날 반대하던 단원들이 내가 장로 장립 받던 1988년 11월, 영락교회에 나타났다. 그날은 임영수 목사님의 위임식도 있던 날이었다. 나 때문에 교회 잔치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결국 합창단은 해체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10여년이 지나 대우합창단 멤버들이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날 반대했던 단원들도 내게 사과했고 나도 단원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한 걸 반성했다. 물론 지금도 웃고 즐겁고 편하기만 해서는 좋은 음악이 안 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지휘자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말이 나오나보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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