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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해방 50년 한국 교회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 이만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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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50년, 한국교회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만열

 

 

1. 머릿말

 

해방 후 50년간의 한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분단과 대결, 화해와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문제를 큰 축으로 하고 인권과 자유, 정의와 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와 자립경제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대외적으로는 민족의 자주, 대내적으로는 근대사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해방 후의 한국의 교회사도 민족구원의 실현과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이라는 기독교 본래의 사명을 토대로 하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화해와 통일, 민주화와 자주)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영적 도덕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해방 후 한국의 기독교사를 언급하려고 할 때, 남한만의 역사에 국한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대체로 ①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진통기(1945-53), ②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시련기(1953-61), ③군부통치하의 경제건설기(1961-79), ④군부독재에 대한 투쟁기(1979-93), ⑤ 문민퉁치기(1993- )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한국은 첫째 민족적으로는 분단 고착화에 언어와 제반 이념, 정치 경제의 체제, 민족문화에 이르기까지 남북의 이질화현상이 심화되었고, 둘째 인구와 경제면에서는 성장이 급격하여 남북의 격차를 점차 늘여나가고 있으며, 셋째 급속한 산업화 정보화에 따라 가치관을 비롯한 사회환경이 급변하고 생태계 등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넷째 문화면에서는 전통문화의 재발굴과 계승 발전의 노력이 꾸준히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세계문화와의 부단한 접촉으로 다원화의 현상을 점차 띠어가고 있다.

 

해방 후 한국의 교회사도 우리의 민족사가 보여준 진통기를 경험하며 갈등 분열의 상처를 싸매기도 하고 말씀으로 양육받고 전도와 선교의 열심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였다. 오랜 동안의 군부통치 속에서 세속권력과 대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인권을 실현, 수호하는 예언작적인 사명을 감당하였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세계 선교사상 전례없는 성장을 이룩한 것이 또한 해방 후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신학과 신앙, 선교와 훈련, 조직과 의식, 교육과 봉사 등 자체의 성장 성숙에 힘쓰는 한편 한국 사회에 대한 봉사와 개혁에도 헌신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분석, 종합, 정리하느냐 하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과제이다. 해방 50년, 민족적인 '희년'을 맞아 해방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간의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그 역사를 토대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모색해 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2. 해방과 한국 교회

 

1945년 한민족에게 주어진 해방은 곧 한국교회의 해방을 의미했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가장 혹심한 탄압을 받았던 한국교회가 민족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민족 해방이 식민지하의 반민족적인 잔재를 청산하는 일과 연결되어야 했듯이 한국 교회의 신앙자유 회복은 일제하의 반기독교적 죄악을 청산하는 것과 직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단호히 청산해야 할 자리에서 지나치게 타협하였다. 민족분단이 겹치게 되자,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의 반민족행위 청산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반기독교 운동과 함께 진행시켰고, 남은 반공을 핑게로 일제하의 반민족 행위를 청산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는 곧 기독교 안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쳐 일제하의 비기독적 요소를 단절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해방 후 민족정기와 기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민족사와 민족 교회를 건설해야 할 한국사회에 험난한 시련과 비극을 안겨 주었다.

 

일제는 강점 초기에 한국 그리스도인이 민족모순을 타파하려는 저항운동에 관련되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척했다. 일제가 한국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점하는 시기에, 극동에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취한 이래 거기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일제를 지목, 후원해 왔던 미국과 영국은 한반도를 종교적으로 분할, 강점하는 실체를 들어내고 있었다. 즉 영국게와 미국계의 교파들이 일제의 한반도 강점시기(1910)를 전후하여 '선교지역분할'이라는 명분으로 한 반도를 종교적으로 분할하였다. 한국에 대한 강대국의 이같은 종교적 공조체제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한에서는 유지될 수 있었다. 일제로서도 일제의 강점 전부터 들어온 구미계의 기독교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역분할 정책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같은 밀월에도 불구하고 강점 초기부터 강력 개명한 조직으로 부상하고 있던 한국교회에 대해 일제는 회유정책과 함께 심한 간섭과 탄압을 가하였고,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부터 그들의 천황제와 맞서는 기독교 세력을 '반체제'라는 시각에서 압제하였다.

 

일제 말기 한국 기독교의 수난은, 통계에 문제점이 있지만, 400여 교회가 폐쇄되고 순교 50여명을 배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가 맞는 해방은 단순한 한 민족구성원이 맞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기독교회는 민족과 신앙에 대한 이중적인 강압 속에서 초국가적이고 초종교적인 태양신과 투쟁하였으며, 그러기에 기독교회가 겪은 수난 또한, 이중적인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때문에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기독교회에는 '민족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동시에 약속하는 것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의미했던 '해방'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것은 한층 냉철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고,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해방이 갖다 준 신앙의 자유는 곧 해방 전의 교파교회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켰다. 해방 직후에 모인 남부대회에서 감리교의 환원이 처음 거론되었고 이어서 일제말 강제로 묶였던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부터 장로교 등의 교파들도 환원 분열되었다. 이것은 뒷날 귀국했던 선교사들이 돌아오고 저질의 선교사들이 선교자금을 가지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요리하면서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단초를 열어주었다. 신앙의 자유가 자신들의 파쟁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선한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데는 사용되지 않았다. '일제'라는 물리적인 힘이 빠져 나갔을 적에 한국교회는 과거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외국 선교부가 짜놓은 구도로 환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교파적인 분열이었고, 교단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해방 50년의 기간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한국교회 분열의 가능성은 이러한 자유 속에서 이미 이때에 노정되고 있었다. 이 분열이 민족적인 여러 파쟁에 앞서서 이뤄졌다는 의미에서 한국 교회에 대해 민족분열의 책임의식 같은 것을 추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가 해방 후, 한국교회 안의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방치하는 자유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50년을 경과한 이 시점에서도 두고 두고 안타까워하는 점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진 '신사참배'와 태양신에 대한 굴복을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 한국교회가 하나님와 민족 앞에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해방 후 친일잔재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할 때 교회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사회와 교회의 차별성이 없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해방 후 한국사회의 친일파 제거를 비롯한 일제잔재 청산을 강하게 부르짖을 수 있는 예언자적 기회를 민족사에서 영영 상실하고 말았다.

 

철저한 회개가 없었던 한국교회, 그럼으로 해방 공간에서 더 이상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할 수 없었던 한국교회, 그들은 다른 친일파들이 보신을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기생하였던 바로 그 이데올로기적 피난처에 편승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기독교가 반공의 보루로서 이데올로기적 분단에 한 주역을 맡았고 그 뒤 이승만 정권과 유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연원이 일제의 태양신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 철저한 회개란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상대화하는 것으로, 일제의 태양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념과 권력까지도 그 절대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 우상으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없었음으로 그 뒤 한국 기독교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거기에 연관된 '북진통일론'으로부터, 또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적인 '물신주의'로부터 자신을 단절, 해방하지 못하고 따라서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에도 미흡했던 것이다.

 

불철저한 회개는 세속적인 것과의 단절 대신 타협을 지속토록 한다. 4 19와 5 16 후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단절되자 한국교회는 또 다른 세력과의 관계를 모색하여 결국 '물신'(재력)과의 끈끈한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 따지고 보면, 한국 교회의 물량주의화의 현상은 한국 교회가 철저한 회개 위에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회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임에는 틀림 없으나 물질을 상대화하는 영적인 힘을 불어넣지 아니하고 또 물질적 풍요와 함께 필연적으로 재래될 부패성을 예언자적으로 경고하지 않음으로 한국교회는, 절대권력 앞에 무릅꿇었듯이, 다시 물질에 오염되고 무릅꿇는(세속화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깨끗한 교회를 이룩함으로 해방된 조국을 '새 하늘과 새 땅'(하나님의 나라)으로 만들려던 고난받은 성도들의 신앙적 이상은 해방 공간에서 이룩될 수 없었다. 한국 기독교가 괄목할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나 가치를 상대화하지 못하고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절'과 '부정'이라는 철저한 청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3.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숙

 

해방 후 한국교회가 보인 놀라운 사실의 하나는 그 외형적인 성장이다. 해방 직후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수자는, 1934년에 36만이었다는 통계와 1942년에 장로교만의 세례교인이 11만이었다는 통계에 근거하여, 약 4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던 것이 교회성장의 불길에 휩싸여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 정확한 통계에는 의문이 없지 않지만, 거의 1,200만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주장은 '선교 100주년'이던 1985년에 이미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정확한 수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한국 교회의 이러한 성장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먼저 이 성장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베푸심에 주목하고자 한다. 해방 직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제 태양신에 굴복한 무너진 제단과 남북으로 분단된 국토 뿐이었고, 그 뒤 민족상잔의 전쟁을 통해 남겨진 것은 고아와 과부, 폐허화된 도시와 철망적인 정신상태 뿐이었다.그런 속에서도 믿음의 후손들이 많이 성장한 것은 인간의 상상과 능력을 초월한 결과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긍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다.

 

해방 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무너진 교회를 새롭게 수축하기 위한 노력은, 출옥성도들을 위시한 일제의 태양신에 무릅꿇지 아니한 많은 성도들의 회개 기도와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 실패 때문에 우리는 6 25의 민족상잔의 비극이 우리의 철저한 회개없음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우리 민족에게 닥친 그러한 비극은,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혹은 어떤 이유로 야기된 것이든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채찍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역설적인 표현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변 중 부산의 일우에서 이 민족과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회개운동에 나선 교회 지도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6 25를 겪으면서 한국기독교는, 북은 기독교회의 볼모지로 화하게 되었고 남은 십자가 종탑이 가는 곳마다 즐비하게 되는 상황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된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것과 남북교회의 존재가 이같이 극단적으로 양극화되는 것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아직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분단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같은 분단과 대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갖는다.

 

우리의 민족분단은 마치 과거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자기의 택한 백성을 둘로 나누고 갈등과 시련을 주었던 것과도 대비된다.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대는 분단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결국 북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남은 주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 각각 멸망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재자임을 믿는 우리는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의 뜻을 보여주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남 북 이스라엘이 분단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지 못하고 분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남 북분단은 결국 민족멸망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당시에 예언자가 그렇게도 많았건만, 정의와 공평, 해방과 자유의 희년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던 하나님의 뜻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가능하였다. 1960년대는 우리 사회가 1950년대의 암울성을 딛고 민족적인 각성을 가능케 한 4 19와 이어서 발발한 5 16의 군부통치와 함께 막을 열었다. 한국사회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밑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고,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는 거기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삼박자 축복론'이 기존의 복음의 강조점을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즉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을 상대로 교회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욕구를 영적 메세지로 보장해 주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기독교 복음의 효능을 물질적 풍요와 치병의 기적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코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대학에서는 복음으로 민족과 세계를 개혁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선교단체들이 솟아나 젊은이들을 영적으로 무장시켰다. 성경공부운동은 새로운 형태로 신흥 아파트와 대학 캠퍼스로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다각적으로 개발되었다. 6 25의 폐허의 와중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부흥사 초청의 부흥운동이 꾸준히 지속되었고 이를 이어 초교파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이 세계초유의 대형집회를 이끌어내는 등 복음화운동은 눈에 띄게 개종의 양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군복음화운동과 언론 문서 복음화운동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추진된 이러한 다각적이고도 열심있는 복음운동의 결과였다. 주목되는 것은 한국교회 성장의 시기가 소위 군부통치기간과 겹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의 이같은 성장은 1980년대, '선교 100주년'을 맞으면서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라는 수치를 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성장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것이라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양적인 성장은 질적인 성숙과 과연 일치하고 있는가.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이다. '성장'과 '성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그것은 이 땅에 기독교인과 교회, 기독교 기관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답지도 않고 예수를 닮아가지도 않으며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답게 사랑과 정의, 화평과 감사가 있는 교제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증가하는 만큼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에 기독교문화가 정착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고민이 있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우선 한국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학화의 작업을 게을리했다거나 100여년의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의 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지만, 이에 앞서 성장이론에 비춰볼 때 다음의 지적도 경청해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은 급격한 사회변화와 거기에 대응하려는 종교적인 반응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전도의 한 방법으로 중산층에 대한 고려로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안정이 거론되었고, 그것들은 불가피하게 물질만능주의와 생의 편안함과 향락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다. 물질과 열락에 대한 추구가 종교적 축복과 동일시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신앙이 물질적 욕구와 질병 치유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대체된다면, 그런 상황에서 교회의 성장이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의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한국 기독교가 갖는 이원적인 신앙행태가 성장과 성숙을 일치시키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고, 세속적인 삶과 기독교적인 삶이 유리되며,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따로 분리시키는 한국 기독교의 신앙행태로써는 세상의 가치관을 기독교적으로 개혁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기에서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나가서는 철저하게 세상의 가치를 따른는 '세상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에 들어오면 교인이 되는, 그런 이중적이고 외식적인 삶만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해방 50년동안, 한국 기독교가 성장과 성숙을 일치시키지 못한 자기 성찰을 역사의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다는 반성임과 동시에 성장을 성숙으로 열매맺어 우리 사회에 갚음하지 못했다는 대(對)사회적 자괴(自愧)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해방 50년의 한국교회 성장의 역사는 한국 민족과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를, 그것이 선교적인 접근이던 기독교윤리적인 접근이던 혹은 또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이던, 기독교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데에 미흡했고 따라서 그 성장이 '유례없는' 것이었다고 상찬되고 있는 이면에는 그것이 갖는 엄청난 잠재력을 민족과 함께 공유하지 못했거나 고난받는 민중을 위해 공여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4. 한국 교회의 신학화 작업과 문화의 문제

 

한국 교회가 100여년의 역사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걸맞는 성숙을 이룩하지 못한 이면에는 자신의 문제를 신학화하는 데에 게을렀다는 것과 아직 자신의 기독교 문화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한계를 아울러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해방 50년의 한국 교회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의 관점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신학은, 다른 많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며, 그 문제의식을 성경과 기독교적 관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정리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조직화한 학적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상황을 점검하면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제'란 인간의 심성과 사회 속에 내재해서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우도 있지만, 시 공적으로 특수한 상황과 구조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욱 많다. 특히 근대사회 성립과 더불어 중세의 보편적인 구도가 깨지면서부터는, 학문연구의 결과가 보편적으로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발견은 오히려 개별적인 데서 발견하려는 성향을 띄어 왔다

 

한국 교회가 자기의 문제를 신학화하는 데에 소홀한 일반적인 이유는,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보수적 성향 때문이라는 것은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경험을 1930년대 한국 기독교의 신학계가 진보적인 경향의 외부적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데에서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성립 초기부터 주로 정통적인 신학을 주된 파이프 라인으로 하면서 선교사를 통해서만 세계의 신학사조에 접할 수 있었던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가져다 주는 것 이외의 어떠한 신학도 자기체질화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신학 뿐만 아니고 거기에 바탕한 신앙과 윤리면도 그랬다. 그 스스로 한국의 수구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것을 실험하면서도 선교사들은, 마치 조선 후기에 노론 집권파들이 주자의 해석 이외에는 어떠한 해석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처리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해석해준 복음 이외에는 어떠한 복음도 접촉해서는 안된다고 불안해 했다. 그들은 또 자기들만이 개혁할 수 있고 개혁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기독교는 복음의 개혁성에 근거하여 그 때까지 개혁되어 왔고 앞으로도 개혁되어야 함을 가르치지 않았다. 더구나 신학에 '새 것'이 실험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의도하지 않았고 그들이 지배하는 한국 기독교계에 권장될 수도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의 상황과 문제의식을 신학화하겠다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시도는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하였다.

 

해방 후 한국 신학계의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신학화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부터 계속된 토착화신학 논쟁이 그랬고, 1970년대 이후 정열을 기울여 왔던 민중신학화의 작업, 1980년대에 뚜렷이 부각되기 시작한 통일신학화의 몸부림이 그런 것들이다. 더 보탠다면, 이것은 신학화의 작업 그 자체라기보다는 민중신학 등의 신학화를 추동시킨 중요한 동인이라고 하겠지만, 남미의 해방신학이 두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 서로 관련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래 한국에 강한 호소력을 가지며 닥아오고 있었다. 이런 신학화의 작업 혹은 신학계의 변화는, 대부분 진보적인 신학 그룹에 의해 창도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는 동안에 일어난 한민족의 전통과의 만남에서 야기된 문제와 정치 경제적인 소외현상 및 분단현상에서 재래된 민족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신학적인 과제로 수렴하여 '신학화'하느냐는 고민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여튼 우리는 1950년대에 제기되었던 토착화신학을 비롯하여 그 뒤의 민중신학과 통일신학 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기되면서 한국 신학계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 중에 민종신학은 특히 한국이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민중을 새롭게 역사의 주인공으로 떠올리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민중신학은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신학접근 방법론 체계상의 혁신성을 가지고 민족 민중 등 종래 신학적인 문제로 될 수 없었던 사회과학적 주제를 신학함의 과제로 등장시켜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그 대부분이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고 신학적인 방법이나 체계를 바꿀 수 없었던 한국의 신학적인 지형에서는, 그 공감대를 확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민중신학의 의의를 논하는 것도 그 내용이 한국교회에 파급시킨 사상적 신학적인 적합성 적응성의 정도에서 찾는다기보다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위치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신학이 한국 사회 및 한국인 자신의 문제를 신학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국 기독교계에 처음으로 열어주었다는, 다시 말하면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상황과 문제, 고민과 의식을 스스로의 땀과 고통을 통해 신학으로 형상화시켰다고 최초로 내세울 수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서 더욱 보완, 정리해야 하겠지만, 한국 기독교계는 '민중신학'이라는 신학화의 작업을 통해 비로소 세계 앞에 '한국의 신학'을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중신학이 한국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더욱 알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민중신학보다는 뒤에 일어난 통일신학은, 해방 50년이 갖는 민족 최대의 비극적 억압적 구조를 신학화하려는 것이었다. 민중신학과 함께 한국 기독교계가 남긴 또하나의 기념비는 1988년 2월 29일에 한국 기독교교회혐의회가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선언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다. 이 선언은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문제에 관하여 정부가 아닌 민간기구로서 최초로 통일문제에 관해 그 원칙과 방법, 과정 등을 밝힌 것이다. 이 선언이 정부 차원의 다른 선언들과 차별성을 갖는 것은 분단민족의 현실을 두고 <죄책고백>부터 먼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이 선언은 기독교적인 정체성과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선언이 포괄하고 있는 예언자적인 내용은 그 뒤 남북의 정권이 대부분 수용하였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분단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적인 고민에 통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의를 들어내 주었던 것이다.

 

신학화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한국 기독교계에는, 우리의 사회과학적 문제를 신학의 과제로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또 신학화의 과제를 열린 모습으로 수용하는 경우에도, 지금까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형성된 해외의 신학을 마구잡이로 수입하거나, 수입한 신학에 색칠을 하거나 옷을 갈아 입히는 정도로 분장하여 한국 교회에 소개하는 비자주적 모습도 없지 않다. 이들은 언필칭 입으로는 '한국적 신학'을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외국의 신학에 기생하고 있으며, 자기의 문제에 고민하면서 자기의 상황을 신학화하려는 노력에 오히려 방해적 요인으로 작용해 왔음에 유의할 것이다. 특히 이들 중 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분들이 많다는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신학화의 작업이란, 외국의 새로운 학문방법만 습득하면 우리의 상황과 문제의식을 거기에 짜맞추어 가능할 것이라는 안이한 발상에서는 이룩될 수 없다. 우리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신학화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개성적인 은총에 대한 확신이 전제되어야 하며 아울러 자신의 상황 속에서 형성되어진 자기 전통에 대한 기독교적인 신뢰가 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민중신학 등이 70년대와 80년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천착, 실험되고 있을 때에, 거기에 대응하면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던 보수계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신학의 빈곤성을 자인하고 신학화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토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또한 하나의 역설이다. 남을 비판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이덴디티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말이다. 70-80년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옥문을 드나들어야 했을 때, 복음의 사회개혁성과 강력성을 확신하고 있던 보수 복음주의 계열의 학자들과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체제순응적이고 무기력한 신학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까지도 '보수주의'라는 말을 즐겨 썼던 한국 보수신앙계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즐겨 쓰게 된 것은 종래까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몸부림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복음주의' 계열의 청년 학생들은 '행동하는 신앙'을 절규하였고, 그와 함께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발표된 '로잔 언약'에 접맥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복음주의 지성들이 모여 선포한 이 선언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그 미래성과 함께 천명되었고 복음의 개인구원 강조와 함께 사회개혁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그 때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관심갖지 못했던 '복음주의권'의 청년 학생들은 '로잔 언약'이 주는 복음의 재해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사회와 민족에 대한 새로운 신앙적인 결단에 임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복음주의권의 학생들이 사회문제와 민족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거감시운동과 경제정의운동 및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이러한 신학상의 변화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 복음주의권의 청년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는 데에 공헌한 것은 80년대말부터 준비되어 90년대 초에 나타나게 된《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와 그것을 준비하면서 결속된 일련의 '신앙과학문의 동지'들이다. 신학의 변화는 이렇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세를 바꾸고, 신앙생활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해방 후 50년간 한국교회는 한 마디로 자기의 문제를 신학화하고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건설하는 데에 소홀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100여년이 경과하였고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고 세계 사람들이 회자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치열한 신학화의 작업을 통해 한국 기독교 안의 문제는 물론 우리 시대의 사회문제와 나아가서는 민족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해결에 한국 교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느냐는 질문에도 그렇고 한국의 개성적인 기독교문화가 설립되었느냐의 질문에도 시원한 대답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바로 이 점들을 묻고 반성하고 스스로를 비판,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해방 50년의 한국 교회가 엄청난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세계적 신학자 한 사람을 제대로 내어 놓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문제를 신학화하는 데에 소홀했던 한국의 기독교계는 우리 민족 속에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정착, 정립시키는 데에도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계의 규모로 보아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는 일반적으로 물질문화 규범문화 정신문화 등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문화의 성격을 분석하면 기독교적인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서양의 물질문화는 기독교의 전래시기에 소개되고 수용되었다. 한국에서 서양의 문명 기기들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기독교의 공헌이 크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문화 자체를 기독교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규범문화와 관련, 기독교는 기독교적 윤리와 도덕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문화에는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들이 또한 없지 않다. 한 주간의 요일의 개념이라든지 안식의 개념, 법제 가운데서도 기독교적인 이념의 세례를 받아 이루어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문화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 문화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은 역시 정신문화라고 본다. 기독교는 독특한 사상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면에서도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미친 영향이 크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 문화란 한국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건설한 문화다. 한국에서 기독교문화가 어떤 실정인지 편의상 표현문화와 가치문화의 차원에서 간단히 보자. 종교는 그 성격상 그 이념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종교특유의 예술인 표현문화를 남겼다. 우리가 경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불교가 남긴 에술이요 표현문화다. 거기에서 신라인들의 신앙적인 에술성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인도와 중국의 불교인들이 남긴 것과 다른 예술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것이 한국의 불교문화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한국 기독교인이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한국적인 개성을 살리면서도 보편적인 예술적 가치를 지닌 표현문화를 남겼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학은 물론이고, 음악 미술 등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독교적 정신을 담은 예술(표현문화)을 갖지 못하였다.

 

표현문화로서의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말함에 우리는 한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개성을 중요시한다. 이 점과 관련, 한국 기독교계에서 사용하는 찬송가를 보자. 한국의 찬송가는 아직도 서양 음악의 아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서양 기독교 문화를 모방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수용의 단계였던 19세기 말에 선교사들이 걱정했던 바로 그 현상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 수입해서 만드는 찬송가를 보면서, 한국인이 자신들이 가사를 짓고 자신들의 음률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개성적인 멜러디와 음악정신을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아름답게 승화시켜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어 갈 때, 그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의 음악문화가 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표현문화로서의 한국기독교문화는 더욱 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표현문화와는 달리 한국 기독교의 가치문화는 더욱 보편화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가치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데, 한국 기독교의 경우 한국의 기존의 가치와 혼효되어 어느 것이 기독교적인 것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되어 있다. 노동관은 유교적인 것을 탈피치 못하였고 사생관 인간관 직업관 등도 기존의 동양적인 가치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한국 기독교의 이원론적 이분법적 신앙행태는 한국의 독특한 이중구조의 사회 문화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가 갖고 있는 '축복관'은 한국의 전통적인 것과 너무 유착되어 있어서 기독교적인 것과는 무관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회의 축복관을 두고 "십자가를 걸어놓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비판은, 심하다고 생각되지만, 외면만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가치문화는 더욱 기독교 본래의 보편적인 성격을 회복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5. 하나됨을 위한 노력; 보수와 진보의 만남

 

해방 후 한국교회가 분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로교단 내의 분열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 일제 하에서 이미 제기된 신학상의 갈등은 해방 후에 그 분열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신학'과 '정통신학'이라는 신학상의 갈등은 급기야 세계기독교계와의 연대를 두고 한국교계 내의 갈등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6.25의 민족상잔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민족의 상처를 싸매면서 사랑과 일치를 불어넣어야 할 교회는 그 때 더욱 갈등하고 싸웠다. 아무리 '진리'라는 명분이 강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싸움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계는 아직은 한말 일제하에 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정통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보수에 안주하면서 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변화에 무관심한 보수는, 검증을 거친 가치를 수호하는 보수(保守)라기보다는, 자신의 배타성을 고집하는 수구(守舊)에 불과하다. 신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스로 외부의 신학계의 움직임에 귀를 열어놓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나름대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신학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보수가 아니라 수구에 불과하다. 자기를 객관화 상대화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할 수 있고 새 것에 대해 유연성을 가질 때, 그것이야말로 생명력있는 보수라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1930년대 외부에서 새로운 자극이 들어왔을 때에 한국 교회는 창조적인 대응보다는 무조건적인 배타성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마치 19세기 중엽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양의 문물이 새로운 충격으로 밀물처럼 들이닥칠 때에 주체적인 자기개혁의 경험을 갖지 못한 조선이 취했던 것처럼, 수구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불가능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여러 가능한 방법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하나'에 불과하였다.

 

해방 후의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근본주의적인 보수세력이었다고 지적된다. 그들은 신학과 신앙의 정통과 보수를 주장하고 철저히 지켰다.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은 초기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의 근본들'이었다. 거기에서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그것은 '신신학'이요, '이단'이었다. 한국 교회는 그 보수의 틀 속에 안주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최선의 삶을 누리는 것으로 되었다. 거기에는 '예수 천당'은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함의 실천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내세'의 복락은 있었는데 '금생'의 십자가는 강조되지 않았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더더구나 강조될 수 없었다. 현실과 상황을 떠난 신앙과 신학은 이렇게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안주 속에 있던 한국 기독교계에 새로운 신학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은 6.25를 전후한 시기부터였고, 1960년대 4.19와 5.16의 변화를 겪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새로운 신학의 바람은 한마디로 "외국의 신학을 '수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의 신학을 새로 시작하려 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8888888888다시 대조해 볼 것

 

한마디로 마구잡이식의 수입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우리의 정서에고 맞지 않았고 우리의 문제의식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를 두고 "한국의 신학을 새로 시작하려 했다"는 변명은 적절하지 않다.

 

888888888여기까지 ?줄

 

여하튼 1950년대 말부터 '보수'와 '진보'의 성격이 어느 정도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 기院교계는 그 뒤 군사정권 기간에 그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교묘히 기독교계의 그러한 분열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의 문제와 사회정의 문제 그리고 인권문제 등에 대하여 '진보'와 '보수'는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했다. 특히 '사회참여' 문제에서 그들의 의견은 크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소위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보수계는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와 정치활동에 소극적이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내재를 주장하는 '진보'측은 사회참여와 정치활동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같은 주로 고백하는 기院교계에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양자의 생각과 실천은 달리 나타나고 있었다. '진보'계열이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정의, 인권문제 등에 적극적이어서 대체로 군사정권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거기에 비해 '보수'계열은 '진보'계열과는 입장을 달리했다. 그 대신 '보수'계열은 교회의 성장과 해외선교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전개를 그동안 대립과 갈등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해 왔으나 우리는 그것을 한국 교회의 역할분담이라는 시각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 '진보'계열의 민주화, 인권화, 정의화를 위한 투쟁들 또한 한국 교회의 성장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계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한 대립을 노출한 곳은 사회참여의 이론적인 배경이라 할 '정교분리' 문제라 할 것이다.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해석되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부'와 '교회'의 분리를 의미한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하는 해석 때문에 그동안 많은 오해가 있었다. 어떤 사건에서도 정치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교분리'라는 말을 정치를 주로 담당하는 '정부'와 종교적인 임무를 목표한 '교회'의 구분이라 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보수'계열은 '정교분리'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종교에서 다룰 수 있는 인권이나 정의의 문제 등을 '정치'에 관련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외면하거나 기피하였다.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정치적인 불의와 불법을 묵인하면서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용납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정교분리'라는 말은 한국교회에서 자의적으로 혹은 편의적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정부에 반대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정교분리'라는 명분으로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교회(교인)들이 정부에 박수를 쳐야 할 때에는 '정교분리'라는 말을 내세우지 않았던 데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다. '정교분리'라는 말은 이렇게 자의적으로 사용됨으로 한국 기독교계의 '비겁자'들의 은신처의 구실을 톡톡히 수행했던 '이데올로기성' 짙은 용어가 되고 말았다. 정권이나 정부에 반대하는 것만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권력이나 정권에 박수를 치는 것이나 특히 불의한 권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도, 반대하는 것 못지 않게,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다.

 

유신정권을 거치고 1980년대에 저 불의한 정권이 들어설 때쯤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기독교계에는 그때까지 분명 '보수'의 영역에 속해 있던 젊은이들이 민족의 현실과 '보수'교회의 안일을 다 같이 괴로와하면서 복음의 강력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표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쯤이면, 그동안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진보'계열도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기독교적인 아이덴티티보다는 상황을 강조하고 기독교적인 이념보다는 운동적인 논리를 더 추구하려는 경향은 운동의 기독교적인 열정을 쇠잔하게 만들고 운동에서 지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여기에다 과거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던 기독교운동이 일반 사회운동에 그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우치를 재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주의계의 '보수'는 '진보'의 운동 이념과 그 열정은 물론 그 이론과 방법을 필요로 하였고, 지친 '진보'는 기독교적인 아이덴티티의 수혈이 필요하게 되었다. 거기서 양측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의 만남은 이러한 상황과 필요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기독교가 자신의 문제를 신학화하지 못하고 외국 신학을 무분별하게 수입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또 들여온 신학 신앙을 자기체질화하려는 검증과정도 없이 자기의 것으로 된 것인양 고집하다가 1980년대의 한국 사회의 엄청난 변화 앞에 충격을 받으면서 변화의 숨통을 틔우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와 거리가 먼 문제들을 다루던 수입 신학으로 한계에 부닥치게 된 양측은 민족 민주(인권 정의)화의 문제를 두고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양측의 만남은 인권 정의의 문제와 민족(통일)문제를 공유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복음주의권에서 사회의 부정과 인권유린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선거감시에 행동으로 나서게 되었다. 1988년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과 문익환 목사 등의 방북운동으로 자극된 '보수주의권'의 반발은 오히려 자신들의 통일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9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민주화(인권 정의)의 문제와 민족통일문제는 한국 기독교계의 공통된 관심사로 되었다. 통일문제를 두고 종래의 '진보' '보수'를 망라하여 새로운 협력체로서 <남북나눔운동>이 출발하게 되었고 사회정의 특히 졍제정의 문제를 두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출발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보수' '진보' 세력이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이룩한 만남의 구체적인 결과였다.

 

맺는 말

 

이제 해방 50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미래의 가능성을 간단히 언급하면서 말을 맺겠다. 한국교회는 지난 50년간 분열과 파쟁의 그늘진 과거를 갖고 있을 뿐아니라 자기의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자신의 기독교문화와 기독교윤리, 신학 신앙고백 등을 창출하는 데에도 미흡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외적 성장과 선교의 확장,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 운동에 대한 공헌, 소외받은 자를 도운 것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50년의 역사에서 보이는 반성과 성과를 기반으로, 그 변증법적 진행과정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 간에 나타난 한계와 부정적인 요소는 극복하고 긍정적인 요소는 배양하여, 2천년대의 새로운 한국교회를 맞이할 시점에 서 있다. 주목할 점은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신학과 신앙, 기독교 운동에서 대립과 갈등을 빚던 소위 진보와 보수가 서로 만나 제휴하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은 일치와 화해를 제일의 과제로 추구되어야 할 한국교회에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 사이의 대화와 이해를 통해 이루어 왔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 가능성이다.

 

한편 2천년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기독교계에서 각종 연구소와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기관 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것도 또한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동안 교회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해서 수행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들 외곽단체가 연구하고 짐을 져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改稿할 때 추가?보완할 내용: 토착화의 몸부림과 우리의 것에 대한 추구-민중신학의 진정한 의의는 그 사상적인 적합성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교회의 신학화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50년대 이후의 신학과 민족과의 관련은? 문민정부하의 교회의 성장둔화/ 교회의 물량주의화/ 새로운 방향모색의 딜렘마?]

 

6. 맺는 말; 한국교회의 민족사적 세계사적 위치-민족통일의 도덕적 기반 구축/ 세계선교의 사명/ 빈곤 분단국의 경험의 공유-절망을 희망으로 전회시키는 역사를 선교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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