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태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영생

  • 허태수 목사
  • 88
  • 0

마태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영생

마25:31-46

 

마7:15-27***“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롬2:1-1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약2:14-26***“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본문을 구원에 적용하는 것을 ‘급진적 행위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해방지향적인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들이 일반적인 차원의 도덕적 선행, 즉 길거리 가다가 걸인에게 1000원짜리 던져주는 그런 선행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이란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적 차원의 행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비유가 전달하는 신학적 메시지 안에는 사회윤리적인 함의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인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모든 사람을 심판할 것인데, 그 심판의 기준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각 개인들이 자비와 사랑의 태도를 보여주었는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말에 메시아 앞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준 행동에 기초하여 의인으로 인정받거나 악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구원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믿었던 신학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신조나 의례, 예수나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이해나 고백보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과 선행으로 드러난 사회적 연대의 실천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 및 영생의 최종적인 기준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인자의 최후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단순히 경고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가를 알리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청중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구별할 것 없이 모두 자신들에게 내려진 판결을 두고 충격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았습니까?”(37b, 38b, 39절), 그리고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지 않았습니까?”(44b)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그들을 구별하는 것은 누구에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보여졌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왼쪽에 서게 된, 즉 양으로 분류되어 복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 반대로 두 번째 그룹이 오른쪽에 서게 된, 즉 염소로 분류되어 저주받은 사람으로 판정받게 된 이유는 메시아가 행한 두 개의 답변에서 잘 드러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그리고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가장 놀라운 대목은 예수의 현존이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의 형제자매였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었다는 것, 즉 예수는 그들과 자신을 철저하게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식적인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도 몰랐던 사이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당신을 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보았던 바로 그때였다고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이렇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들을 최대한 잘 돌봐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복음서에 기록될 당시의 맥락에서, 이 본문이 증언하는 그 이웃 사랑의 행위가 갖는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무게를 헤아리지 않고, 우리 시대로 곧바로 가져와서 문자적으로 적용할 경우, 이 본문은 값싼 행위구원론의 전거로 소비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예수에게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현대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쉽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 중에 큰 부담 없이 한 선행이나 봉사만으로도 최후의 심판 앞에서 그리스도를 섬긴 공을 인정받아 최종적인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쉬운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본문이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서 쉽게 소비되는 경우를 무수히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이 본문이 말하는 실천이 이토록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현재의 시점에선 전혀 다르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값싼 행위구원론의 전거로 이 본문이 소비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할까요?

 

이 비유가 무엇을 위해 기록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요청됩니다. 이를 위해선 40절의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형제자매들’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서에서 ‘형제자매’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의 단어는 ‘아델폰’으로서 ‘형제’를 의미하는 남성 단수 명사 ‘아델포스’의 복수형태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형제’라는 단어가 문맥상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혈연적 관계를 지시하지 않을 때, 그것은 전적으로 동일한 신앙공동체에 속한 동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에서 교우들끼리 서로를 ‘형제자매’로 지칭하는 것).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거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방인들을 ‘형제’라고 지칭하는 그런 예는 성서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복수 형태로 쓰일 때는 명백히 남성과 여성을 포괄적으로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인자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그 형제자매들은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비유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기서 나타난 ‘형제자매들’을 마태복음과 연관된 ‘마태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혹시 마태공동체라는 단어가 생소하신가요? 현대 복음서 연구는 각각의 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의 배후에는 그 복음서의 전승을 연행하며 전달하고, 또한 문서화하여 기록하고 다시 전수했던 각각의 공동체들이 존재한다는 학문적 가설 위에서 발전해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가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성서 내적인 증거와 교회사적인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책 배후에 마태공동체라고 하는 미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마태공동체를 이해하는 것, 즉 이 비유를 자신들의 복음서 안에 담아냄으로써 자신들의 독자적인 신학을 드러내고 있는 마태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원래의 역사적-사회적 문맥 속에서 올바르게 파악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을까요? 마태공동체의 자의식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위치를 여전히 유대교 안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유대교 바깥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선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엇갈린 해석들이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했든지 간에, 복음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그들의 사회적 현실만큼은 그들이 유대교 내에서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집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태복음 도처에서 확인되듯이,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의 다른 집단들로부터 비방, 회당에서의 채찍질, 산헤드린이나 지방 법정에 고발당함, 박해와 추방, 죽임 당함 등의 처절한 폭력을 경험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됩니다. 마태공동체가 유대교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개의 본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의 예수는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하는데 이는 그들이 ‘모욕’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욕하다’라는 용어는 개인들 간의 직접적인 ‘비방’을 의미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하다’라는 어구는 공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방식의 사회적 비난을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부정적인 경험은 마태공동체가 다수의 유대교 집단들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당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방과 비난이 ‘박해’라는 단어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던 마태공동체의 신앙적 일탈이 그러한 모욕과 비방의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태공동체가 당한 박해와 비방, 모욕이 공식적인 유대교 회당 지도부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광범위한 유대교 집단들로부터 마태공동체가 일종의 ‘왕따’, 즉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를 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겠습니다. 사회적 배제라는 현대 사회과학의 개념이 뜻하는 바가 “다차원적인 불이익으로서 어떤 사회의 주류적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포함하며, 이것이 상당기간 지속되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마태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10장 17-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회당이나 법정에 끌려 나가 채찍질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10장 22절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고, 23절에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하며, 급기야는 23장 34절에서 예수 자신이 보낸 예언자들 중 일부가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고 가는 동네마다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물론 이 모든 언급들은 마태공동체가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들의 동족들로부터 당한 박해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랐던 이들이 겪은 사회적 배제와 집단적 폭력에 대한 기억은 로마 지배 체제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반란과 그에 대한 로마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일어난 유대-로마 전쟁(서기 66-70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마태복음은 그 전쟁으로 인한 폭력의 경험과 이후의 여파를 처절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전쟁 당시의 경험을 마치 종말에 닥쳐 올 환난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마태공동체와 같이 예수를 추종하던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환난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며, 그들이 따랐던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 즉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엔 공동체 내부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여 서로를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공동체는 단순히 물질적 궁핍으로 인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약자 계층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이 속해 있던 사회로부터 폭력적으로 배제당하면서 빈곤과 위험에 처한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종교적?사회적 소수자 집단(예를 들면, 오늘날 성소수자 혹은 동성애자나 외국인 노동자.이주 외국인,북한 탈주민)에 속한 어떤 누군가(‘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를 도와준다는 것이 과연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일지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공동체라고 하는 집단이, 우리가 별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평범한 사회적 약자계층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의도적으로건 비의도적으로건 하나로 뜻을 모아 함께 배제하고 박해했던 그런 저주받은 이들에게 감히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행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소수자 집단을 향해 연대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들에게 부과했던 어떤 권위적이고 일반적인 판단을 정면으로 거슬렀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불우이웃돕기나 약자들에 대한 자선활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매우 민감한 사회적 논란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상한 사회적 연대의 행동을 의미할 것입니다. 유대교 일반과는 다른 신앙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온갖 종류의 사회적 배제와 폭력, 그리고 억압과 박해를 자초한 그런 집단을 향하여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요즘 말로 하자면, ‘외부세력’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자신들을 향해 연대의 행동을 보여준 그 특별한 이들에게 마태공동체는 종말에 도래할 메시아 예수의 권위에 의지하여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메시아의 최후 심판에서 주어지게 될 최종적인 구원이란, 바로 그렇게 마태공동체 자신들과 같은 이들을 향해 위험을 무릅쓴 연대를 실천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음을 마태공동체는 세상에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과정에 일상적으로 동참했던, 혹은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무관심 속에 외면했던 당시의 마태공동체 주변에,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행동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유대교의 권위, 더 나아가 유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에 순순히 복종했습니다. 아울러 마태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사회적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마태공동체 자신들에게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는, 책임 전가의 논리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유대교 주류가 배척했던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던 유대교의 이단자들이었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나라의 축복을 개방했던 동족의 배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는, 즉 당시 사회가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있었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충분히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마태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외쳤던 고통의 비명소리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결정과 이스라엘 사회의 전체적인 합의가 더 권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와 마태공동체의 고통의 목소리 사이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주변의 많은 이방인들은 전자의 목소리에 복종하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 사회의 권위적인 목소리보다 마태공동체의 고통의 목소리에 더 복종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단 한 사람도 없었을 수도 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마태공동체의 고통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를 거슬러서, 고통의 목소리에 그 자체에 응답했던, 즉 사회적 권위가 아니라 고통의 권위에 복종했던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최후의 심판의 순간에 영생을 허락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과 마태공동체가 증언하는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고통을 겪고 있는 바로 그런 이들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했을 때,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은 사회적 권위의 목소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종의 결단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최후의 심판이란 그렇게 두 개의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목소리에 응답했는가, 어떤 목소리의 권위에 복종했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영생이란 그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기존의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관과 규칙 등에 정면으로 맞서서,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있는 어떤 이들에게 용기 있게 다가갈 때, 고통당하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그들의 고통의 음성에 제대로 귀 기울이고, 그들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그들이 벌이고 있는 운동과 실제적으로 연대했을 때 비로소 주어질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 정도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구원이란 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무겁고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에 복종할 것이냐고. 사회의 명령과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비명소리에 복종할 것인가. 누구의 얼굴을 볼 것이냐고. 국가의 얼굴, 자본의 얼굴을 볼 것인가, 아니면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얼굴을 볼 것인가. 그 목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보고도 그들을 외면할 것이냐고. 지금 그 목소리와 얼굴 속에서 예수를 보고도 그렇게 외면할 것이냐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미래도 결정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마태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영생"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