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8>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 골방서 기도하며 극복


201802140000_23110923901220_1.jpg
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조직되자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지역 정당들이었다. 단지마다 수천∼수만 명이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의 주민조직 지도자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과정에서 주민조직 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작은 이해관계에 흔들리는 지도자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주민조직을 바라보며 든 생각은 ‘사람’이었다. 교육에 관한 관심이 내 활동의 새 화두로 다가왔다.

1994년 함께 생활하던 야학 교사와 청년들이 취업과 결혼 등으로 집을 떠나면서 나눔의 집에는 나와 아이들만 남게 됐다. 나눔의 집을 위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신혼살림을 차린 청년들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일을 갖고 찾아오는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흘낏 본 후로 문뜩 외로움이 몰려왔다.

모든 관심을 나눔의 집에 쏟으며 주변 사람들과 소원해져 갔다. 한때 깊이 있게 관계를 맺었던 친구들은 서로 다른 삶의 현장을 사느라 함께 나눌 일이 적어졌다. 홀로 선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갈 수 있는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나눔의 집 부엌 한구석에 있는 골방에서 혼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토록 말씀이 살아서 내 가슴에 와닿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외로움은 자연스럽게 나를 하나님께 이끌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다.

“외롭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맥박 소리 같은 것입니다/ 하여 외로움은 사람을 찾아 메워야 할 그리움의 공백이 아니라/ 더 익히고 썩혀/ 당신 앞에 순수하게 서야 할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 무렵 잠자리에 들기 전 일지에 적었던 짧은 글이다. 골방에 혼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생겨났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아침저녁으로 성무일과를 드리며 생활했지만 혼자 침묵 가운데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기도는 배운 적이 없었다.

동료 사제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하고 공부하는 모임을 갖자고 제안했다. 선배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해 매월 1박 2일로 전국의 수도원과 피정센터를 돌며 기도와 공부를 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한 달도 거르지 않고 5년을 모였다. 그동안 배우고 수련한 것을 나눌 방안을 모색하다 1999년 성공회 영성센터를 시작하게 됐다.

영성센터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묵상집을 발행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관상기도를 보급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단체를 확대하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배 사제인 박경조 신부가 모임에 참여했고 2005년 그가 서울교구 주교로 선출되며 교구 전체 성직자에게 기도 피정을 의무화했다. 영성센터는 한국 성공회 전체에 관상기도와 침묵기도가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가 서 있던 사회선교 현장과 영성을 통합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사회적 실천과 영적 수행의 일치를 고민하고 갈망하는 구심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나눔의 집 활동가 몇 사람과 함께 성공회 프란시스칸 수도회의 재속회와 도로시 데이가 시작한 가톨릭 일꾼공동체 모델 등 몇 가지 모델의 특징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나눔의 집에서 시도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