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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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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

 

김 권 정(숭실대 박사과정)

 

1. 머리말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는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야 한국에 수용된 외래의 종교와 사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한에는 약 천만여명의 기독교 신자와 북한에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천만여명 이상의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현재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남북한의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적인' 가치관의 하나가 되었고, 해방과 6 25전쟁을 겪으면서 남북한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단절시키는 데 이바지한 사상적인 하나의 원인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해결하고 평화적 통일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려 나가려고 한다면 천만여명의 기독교신자와 천만여명 이상의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사상적?역사적 이해와 화해를 하지 않고서는 그 전망이 불투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양자의 이해와 화해는 7천만 우리 민족의 진로가 결정될 수 있을 수 있는 주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기독교와 사회주의 이해와 화해를 위해 양자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양자 관계가 형성되었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대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양자간 관계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 1920~30년대의 시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3 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국내의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양자의 관계가 성립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이같은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우선 양자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1920~30년대 시기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192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사회운동의 방법론과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모색과정을 통하여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과 그 관계가 변화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1920-3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연구성과의 경향은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기독교계가 사회주의의 침투 과정을 민족적 문제로 인식하고 교리적 갈등보다는 사회주의에 대해 낙관적인 자세를 가지며 그 인식 정도도 매우 소박하였다고 보는 견해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았다. 다음으로 당시 기독교계가 자본가 계급의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였고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전투적' 자세로 인식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끝으로 1920~30년대의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가 대립과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적대적'?'전투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들 연구들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대한 내용들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문제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오늘날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공적'이고 '적대적' 인식이 1920~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함으로써, 이 시기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계가 매우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은 기독교계의 내부적 변동과 역사적 상황에 따른 인식의 변화과정 등을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도출된 것이 아니라 대체로 선험적인 역사적 경험에 의존하여 고찰한 것이었다. 둘째, 사회주의를 인식함에 있어서 '계급적' 입장 또는 '종교적' 입장 등의 어느 한 쪽만이 강조되었으나, 이는 기독교인들 나름의 '내적인' 인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셋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과 그것의 변화가 당시 기독교사회운동의 지향과 방법론의 모색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1920~30년대 국내에서 전개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어떤 인식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었고 이것이 갖는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해 시기별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1920~30년대의 역사적 상황

 

19세기 말엽 조선사회에는 대내적으로 봉건사회의 모순과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대외적으로 서구열강의 압력이 구체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 수용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것은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시대적인 과제로 제기되던 반침략에 맞선 '自主'와 반봉건에 대항하는 '近代化'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교육?의료 등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특별히 이러한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교육분야'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사회의 반봉건 및 사회개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국인들의 의식을 계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때부터 정치 운동과 관련을 갖기 시작했으며, 1905년 이후의 애국계몽운동기 동안에는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구국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이후 일제에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것은 3?1운동이라는 거족적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데 천도교와 함께 중추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모습은 한국민들에게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1920~30년대 기독교계가 일반사회의 매서운 비판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왜 기독교가 이 시기에 와서 비판을 당하게 되었으며, 일반사회의 비판적 인식은 어떠한 배경 위에서 성립되고 있었는가?

첫째, 일제의 기독교 분열정책에 편승한 외국선교사들의 친일화 및 타협화의 경향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기독교에 대해 겉으로는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독교계의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회유와 탄압정책을 실시하는 일제에 편승한 선교사들의 친일화 경향과 그들의 비행(非行) 및 백인우월적 자세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전까지 최소한 종교적 이유로써 '정치적 중립'을 지켜오던 선교사들은 3?1운동 과정 중 일제의 무력적 탄압을 세계여론에 호소한 결과로 인하여 불편해진 일제당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3?1운동 이후 그들의 원활한 '선교사업'을 위하여 일제 당국과의 관계를 우호적 내지 친일적 관계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경향은 3?1운동 당시 행한 무력적 탄압으로 인해 악화된 세계여론을 무마시키고 선교사들을 회유하려고 시도하던 일제의 방침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감리교회 웰치감독이 " [조선인은 독립사상을 포기하였다]고 단언하고 조선은 점차 안정하여 물질적으로 향상하는 중이요 지금은 그전의 평화를 회복하였다"는 발언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친일적 언급은 3 1운동 이후 변화된 선교사들의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2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의 비행 및 추문과 관련된 사건들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기독교 학교와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선교사배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부 외국인 선교사들이 백인우월의식의 행태를 나타내고, 그들 중 일부가 인종차별적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었다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태도는 그들의 친일성에 내면적으로 분노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둘째, 기독교계에는 초월적 신비주의 부흥운동이란 새로운 신앙양태들이 등장하였다. 이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지도자들 중 김익두 목사의 경우 '신유'와 '기적'을 동반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상당수의 일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던 기독교인들로부터도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들은 기독교가 시대의 요구와 일반 대중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가능성을 잠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와는 역행하는 '미신적' 방향으로 나아가며 종교적 가치를 '신자증가'등에 한정시킴으로써 당시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와같은 비판은 1930년대 초반 이용도목사의 부흥집회와 관련되어 다시 등장하기도 하였다.

셋째, 1920~30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순수 종교화'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이에 '민족공동체'의 정치?사회의 문제를 외면하는 '비(非)정치화'의 경향들이 기독교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먼저 3?1운동 이후 변화된 역사적 상황을 들 수 있다. 일제의 변화된 통치정책을 틈타 '무단통치'기에 종교에 제한되어 있던 정치?사회적 욕구들이 솟구쳐 올라와 민족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방법을 찾아나섰고, 이전에 정치적?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던 종교공동체들은 이를 이들에게 넘겨주었으며, 이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의 정치?사회의 역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태도변화를 들 수 있는데, 3?1운동 이후 기독교 공동체 안의 주된 흐름은 대체로 기독교 민족운동을 '거부'하는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교회가 문화운동 사회봉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가 사회니 노동이니, 평화니 국제정세니 하며 세상 일을 논의하는 곳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는 장로교회의 경우 총회 산하의 농촌부의 폐지를 촉구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3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는 등의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종교적 이상만으로는 현실적인 권력구조에 대항할 수 없다는 좌절을 맛보았으며,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종교적인 도그마에 충실하는 것을 최선으로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이런 까닭에 현실적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기독교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비정치적' 지도자가 되어버렸다. 이와 함께 자신들의 자리나 지위를 보호하고 이를 유지하려는 '계급적 속성'을 가진 종교적 지도자들은 정치적 가르침이나 행동보다 권력이나 부를 소유한 평신도들이 요구하는 '영혼의 위로'에 응하게 되었고, 이같은 종교적 행위들을 통하여 현실에 안주하여 갔다.

이처럼 기독교 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1920~30년대에 걸쳐 기독교계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일반언론을 비롯한 한국의 사상계는 교회의 지적소외, 발전된 과학과 새로운 사상의 경시풍조 등을 비판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촉구하였다. 예를 들어, 견지동인(堅志洞人)이란 필명의 한 필자는 " [예루살렘의 조선]을 바라보면서"라는 글에서 기독교계의 내세주의적 신비주의 신앙과 선교사들의 친일화 경향을 지적하여 기독교계가 열악한 사회적 현실은 무관심한 채 탈사회적?몰역사적으로 나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반사회 반기독교적 분위기의 상황 속에서 1920년대 이후 민족운동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지목하여 배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사상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의 변화와 더불어 일본?중국?러시아로부터 국내에 들어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유물론'과 '무신론'에 입각하여 종교를 배척 대상으로 규정한 '반종교의 논리'도 그들의 세계관 및 가치관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반종교 논리를 토대로 하여 기독교를 "제국주의 수족", "자본주의 주구", "羊而狼心의 기독교" 등으로 주장하거나 성탄절을 '반기독교데이'로 정하는가 하면 김익두 목사와 같은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고 비판하면서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반기독교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체였던 신간회가 창립되는 과정에서 퇴조하였다가 192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자들의 좌경화된 인식이 고조되고 신간회 해소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 보다 큰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일반사회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사회주의자들의 격렬한 반기독교운동에 '거개가 교회출신인 이전의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으며,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내적인 동요가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조선기독교에 새로운 변증학이 필요한 때가 오리란 생각은 벌써부터 해 왔었다. 지금 이데올로기의 격류가 홍수처럼, 일본이나 중국, 아니면 서구 쏘비에트에서 직접 밀려들고 있다. 공사립학교의 교과서는 일체 국정화되었고, 그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이다. 여기 더하여 증대되는 빚진 계층 사이에 특별히 공산주의와 볼세비즘이 폭넓게 침투되고 있다. 청년사회주의동맹이라든가 무신론자동맹과 같은 단체에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청년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계로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며, "사상적?종교적 위기"로 파악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신론'과 '유물론'을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하는 사회주의사상에 기독청년들이 물들어가고 급기야는 교회내의 기성세대의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비판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위기'의 극복을 위해 사회주의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었고, 바야흐로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이 형성되어졌다. 이제 기독교에 '새로운 변증학'의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도래(到來)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일반사회의 반기독교적 경향,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전개하였던 반기독교운동, 이에 따른 교회내 청년들의 동요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외부적 충격'만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한말 이래 '순수한' 종교공동체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이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적?경제적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상이나 역사적 상황들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인식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계의 대내외적인 충격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이 되고 있었다.

 

3. 사회주의 인식구조

1920~1930년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비롯한 현실문제를 인식하는 데 다음과 같은 점들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먼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그 신앙을 누릴 수 있는 종교자유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종교자유' 개념을 규정한 역사적 조건들을 크게 보면 기독교가 직면했던 두 세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나는 끊임없이 식민지 지배통치하에 묶어두려고 시도하는 일본제국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무신론?유물론에 기초하여 반종교운동을 전개했던 사회주의세력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종교에 대한 자유개념은 일제의 식민지 정치권력과 사회주의세력과의 관계라고 하는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3?1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의 종교는 '순수하게' 종교 공동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곧 정치집단은 아니지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식민지 권력에 의해 완전히 차단된 채 있던 상황에서 한국인들에게 종교공동체는 거의 유일한 합법적인 조직이었고, 그러한 관계로 종교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가 되면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의 변화와 함께 종교공동체들은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새로운 사회단체와 조직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역할들을 넘겨주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 비해 그 담당역할이 축소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무시될 수 없는 '사회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종교공동체에 포함된 민족주의자와 민족의식을 그것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회유와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식민지 권력의 종교 간섭과 통제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선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큰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권력과의 관계에서 종교자유의 추구가 주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기독교에 대해 전면적으로 종교 및 신앙에 대한 자유를 억압했을 경우 기독교계로부터의 강력한 반발을 당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기독교를 억압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계가 신사참배문제를 둘러싸고 일제의 식민지권력과 직접적인 대결구도로 들어가기 이전까지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큰 문제는 사회주의세력이었다.

사회주의세력은 종교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기본적으로 종교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종교 발생 자체를 '인간의 허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인식론에 입각하였다. 둘째, 사회주의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키자면 대중의 생활 속에 현존하는 일체의 비과학적?미신적 내지 종교적 요소들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차원에서 종교를 배척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셋째,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통해 형성된 정치적이고 사회적 실체인 '종교세력'과의 통일전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통일전선에 배제된 종교세력에 대해서는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기독교를 '자본주의의 수족이며 제국주의의 주구'로 규정했던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응과 극복은 큰 과제이며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내적인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현실적으로는 기독교라는 종교조직을 통해 정치 사회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이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의 유물론 및 무신론 사상과 함께 사회주의자들이 종교를 억압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간의 정신이 동일하거나 유사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회주의 이념이 아무리 기독교적 가치에 유사하더라도 종교자유를 억압하고 이를 무시하는 이론과 태도에 대해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개혁하고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개혁과 개인의 개혁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 사회의 구조나 제도, 형식 등을 개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개혁 이전에 개인이 먼저 개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같은 논리의 연장 선상에서 기독교인들은 당시 전개되고 있던 사회?경제운동에 대해서도 물질화 유물화에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사랑에서 출발한 인본주의?인도주의가 이상적 사회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리를 기독교 정신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사회를 발달시킨 것이 아니며 역사는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맑스적인 견해를 부정하고 사랑을 통해 발전한다는 기독교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같은 개혁적인 관점들은 기독교 사회운동에 있어서 근본적인 지향논리로 작용하여 나갔다. 이는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이 '사회?경제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구조적?사회적으로 개혁하기 이전 또는 동시에 개인도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전제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다. 개혁 관점들은 기독교인들의 현실인식과 맞물리면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대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열악한 농촌 현실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이를 극복할 현실타개책을 찾는 구체적 노력으로 나타났다. 당시 농촌 현실의 어려움은 전체 인구의 80%가 농민이고 전체 교회의 85% 이상이 농촌에 존재하고 있던 기독교계로서 커다란 경제적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1920년대 이후 YMCA나 YWCA, 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등의 교회조직을 통한 농촌운동 및 자율적 경제자립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한국농촌과 농민, 그리고 교회를 살리기 위한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었으며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의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밑바탕에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개혁의 관점이 늘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향들을 갖고 있었고 이를 추구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경제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국가나 사회의 근거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데모크라시란 "평등에 기인한 사회?정치 실권이 민중에 존재한 국가, 국가의 권위를 인민이나 인민이 선거한 대표자가 집하는 정치"로 정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주의의 핵심이 인민에 있으며 인민의 대표가 인민의 의향?이익?욕망을 대표해야 한다고 하여 민주주의에 있어서 '인민'이 주체가 됨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의 기초로 교육을 규정하고 이같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민중의 교육정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민지를 높일 수 있는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한말 이래 1920~3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육운동'에 활동할 수 있었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으며, 1920~30년대 역시 '교육운동'이 기독교 사회운동의 중심축을 이루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기독교인들은 인권?민권의 기초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앙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한 근원에서 나왔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동일한 권리를 지녔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같은 인식 선상에서 직업?인종?계급?신분에 따른 차별을 반대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이를 추구하는 지향들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자본주의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사회적 역기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반기독교적이고 반인간적인 성격이 강하여 노동자?농민을 착취하며 그 속성상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여 현대 산업조직은 그 조직에서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이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방식들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 더욱 눈을 뜨게 만들었고, 이러한 인식은 1920~30년대에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던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인식구조는 기독교계내의 내세지향적인 초월적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식민지적 억압구조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맺고, 기독교적 복음을 근본원리로 하면서 정치사상으로 근대 자유민주주의사상을, 사회경제적으로 '건전한' 자본주의제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인식구조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 그 사상적 근거로 삼고 있었다.

 

4. 사회주의 인식의 내용과 그 변화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변화하고 있었다.

 

1) 제1기(1920~1924년)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유행하게 된 사회주의사상이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식민지 정책 변화와 더불어 지식인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청년?지식인들에게는 '거친 들불'처럼 거세게 번져 갔다. 그리하여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아니하면 시대에 처진 청년같이 생각"하게 될 정도로 청년?지식인들에게 짧은 기간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사회주의사상의 급속한 확산은 기독교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 그동안 교육?의료 등의 사업을 통해 근대적 문화의 선도자로 자처하던 기독교는 그 위치에 심한 동요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목사가 무식하여 현실의 사상과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기독교 대내외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동요의 심각성은 내부에서 더욱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제도나 조직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지녔던 기독청년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이 퍼지면서 기독청년들은 기독교의 교리와 조직을 비난하였고 급기야는 기독교회 내에서 예배 도중에 목사를 비방하거나 기독청년?전도사 등이 사회주의를 지지?주장함으로써 교회에서 쫒겨나는 일 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1923년 3월에 일어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동아일보〉?〈개벽〉?〈신생활〉 등의 언론에 소개되었고 이는 중국혁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반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은 1923년에 개최된 청년당대회에서 민족주의진영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종교는 미신과 허위'라는 반종교 강령을 채택하고 국내에서의 반종교운동을 공식화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구한말 이래 한국 역사의 한복판에 서왔던 기독교로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사회주의에 떠밀려다닐 것이 아니라 금일 기독교회가 사회혁명과 사회진화의 대본영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자체의 정책을 개혁해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몰려오는 사회주의사상이나 운동을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와의 유사성, 연계 등을 모색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주목하고 이에 대한 입장들을 정리한 대표적인 논자는 YMCA의 학생부 간사였던 이대위였다. 그는 당시 사상적 동향의 큰 축을 기독교와 사회주의로 인식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吾人이 憧憬하는 무삼 新世界를 造成코저 함에는 基督敎思想과 社會主義가 相同하다고 思惟한다. 何故요 하면 彼兩者는 現社會程序의 諸般 弊害를 覺할 뿐만 아니라 또 此를 改造하기로 目的하는 者인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천국이 보편적 우애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도 종국에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에 귀착"된다고 규정하고, 양자가 지향하는 정신과 목적이 동일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즉, 불만불평한 세계를 부인하고 신세계를 조성하고자 함에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相同)'함이 있으며, 그 근거로 양자가 현 사회의 제반폐해를 알고 이를 개조하려고 목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경상도 예수는 상당한 '사회주의자'이며, 건실한 사회주의자가 되려면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야 하고 "세계적 혁명을 목적한 레닌 그 사람도 필연 예수의 주의를 표준 삼지 않으면 자기의 숭고하다고 하는 사회주의가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이외다"라고 하여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유사성과 그 연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박제호는 "오늘날의 심각한 동요는 생산의 분배와 이에 대한 극단적인 투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 좀더 깊게 살펴보면 그 동요의 밑바닥에 '인격존엄(人格尊嚴)'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생산의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출발이 되고 있다"고 하여 사회주의가 인간성의 회복이며 인격존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러시아에 대한 인식 속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반종교운동도 러시아의 희랍정교회가 압제자의 편에 서서 민중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과격한 공산주의사상이 러시아에 등장하였던 것은 극단(極端)의 전제(專制)에 대항한 비상수단(非常手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소개하였다.

따라서 이같은 인식의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계의 대표적 언론매체였던 〈기독신보〉의 '社說'에 "…… 眞正한 社會主義는 참말 敎會로 더불어 서로 背馳되는 것이 적고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라. 만일 진정한 사회주의가 있으면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나는 그를 기독인과 同一히 간주하겠다. 저는 그 主義를 確知하고 實行하는 者이다"라는 대담한 주장이 게재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수단이나 건설 방법의 측면이라기 보다 는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으로, 이 시기의 기독교계의 사상적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이었다.

한편 대내외의 자극과 충격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있었는가 하면, 기독교계의 흐름을 배경으로 사회주의사상을 민족해방의 이론으로 소개하고 이를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던 일부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신생활(新生活)〉잡지를 들 수 있겠다.〈신생활〉은 기독교 일부 세력과 초기 사회주의간의 연합적 성격을 띠며 탄생된 것으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재판'을 일으키는 '신생활필화사건'의 모체가 되었던 잡지였다. 이 잡지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인물은 창립자이며 사장이었던 기독교인 박희도이다. 그는 YMCA의 학생부 간사의 신분으로 3?1운동의 33인의 서명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3?1운동과 관련되어 감옥생활을 했던 경험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잡지의 필진으로 적극적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잡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간행자금을 지원하고〈신생활〉을 이끌고 나가는 데 결정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박희도와 함께 필진으로 참여하는 김원벽?강매 등 역시 3?1운동 당시 박희도와 함께 서울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기독교인들이었다. 즉,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초기 사회주의자이였던 김명식?정백?신일용?이성태?신백우 등과 함께 국내에 사회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말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사상의 '전달자(Messenger)'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부류의 '사회집단' 구성원들보다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이러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생각된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인식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인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창근은 무산자들의 산고를 부르짖게 됨은 결국 잘살아 보겠다는 세계인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돈을 얻기 위하여 사회운동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신앙이나 도덕, 일정의 정신문제는 모두 경제상태, 즉 물질상태만 개선되면 되리라고 하여 개인의 힘과 정신의 힘을 너무 무시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한 필자는 맑스주의?쌍지칼늬슴?식네웩의 사상 등의 사상의 학설과 주의가 모두 옳고 좋으나 사람의 천성이 너무 악함으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금일의 사회주의가 빈궁을 해결할 만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가면을 쓴 '종교단체'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반대의 타당성을 인정하기도 하였지만, 맑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과 같은 동맹?결속?폭력을 가리지 않는 점에서 기독교의 주의와는 상응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전체적으로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사회주의 건설의 폭력적 방식에 대한 비판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사회주의의 정신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던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요컨대, 이 시기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크게 사회주의의 폭력적 건설방법에 대해서 비판적인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인식의 큰 흐름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가치균등'하게 비교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한다고 보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의 배경에는 물론 이 시기 기독교인들이 아직까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거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나 판단에 있어서 미숙하였다는 점이 그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사회주의 속에서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 더욱 큰 배경이었다고 생각된다.

 

2) 제2기(1925~1928년)

1925년에 들어서면서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를 배척하고 나섰다. 1925년 4월 사회주의세력의 하나인 화요파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통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을 계획하였다. 바로 이 대회에서 종교에 대한 반종교의 강령이 채택되었고, 그 대상으로 '기독교'가 지목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배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이제부터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조직적인 배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다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10월 25~26일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표면단체'로 성립된 한양청년동맹이 열 예정이었던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를 통해 나타났다. 이 집회들은 한양청년동맹이 1925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열 예정이었던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예정대로 개최된 반면에 한양청년연맹의 집회는 경찰에 의해 강제로 금지당하게 되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제국주의'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제와 기독교가 밀착된 증거라고 공격하였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말부터 1926년 중반까지 전국에 걸쳐 절정을 이루며 발생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반기독교 강연회와 토론회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간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조직에 대해 배척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면서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의 민족협동전선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은 1926년 초반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 논의에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참여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더 이상의 기독교 배척운동이 민족협동전선 논의에 불리하다는 판단아래 반기독교운동을 철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협동전선론이 구체화되는 1926년 중반이 되면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도 퇴조하게 되었다.

1925년과 1926년 중반까지 격렬하게 발생하였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철저하게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를 반박하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보수적 평신도들의 상당수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반기독교운동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기독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를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반대와 파괴를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기독교의 眞髓도 모르고 교회가 조선의 대한 과거의 공헌도 몰라보고 함부로 날뛰는 무리의 말을 들을 가치가 있어야 귀를 기울이지오. …… 輕擧妄動을 自行取之하는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지 않으오"라는 말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무절제한 행동'?'경거망동', 그리고 '몰상식한 행동' 등으로 일축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기독교 반대에 동요하지 말고 이러한 운동 자체에 대해 대응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했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졌던 사람들은 주로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기보다는 교회 밖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서, 이를테면 YMCA?YWCA 등과 같은 사회단체에서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반기독교운동이 "기독교회의 폐해를 제거하고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올바로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하여 기독교계에 일정정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드 러냈다.

예컨대 당시 YMCA의 총무였던 신흥우는 반기독교운동의 실제적 원인으로 기독교계의 민중에 대한 경시를 지적하였는데, 기독교회가 "기독의 주의와 사상으로 인격의 가치를 삼지 않고 다수의 사람이 인격의 가치를 망각하고 재산으로, 혹은 권세로나 혹은 학식으로써 本位를 삼아서 인생관을 삼았고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의 논리상 평등이나 형제주의 수포가 되고 결국은 자본과 세력과 지식에 토대를 한 계급차별주의로 돌아가고 만다"고 경고하여 기독교계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와함께 다른 필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비판하는 기독교는 '가짜기독교'을 비판하는 것으로 금일 기독교도로써 반성할 이유가 충분히 있으며, 반기독교운동의 주원인이 기독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대체로 사회주의자들이 예수의 정신이나 사상 및 기독교리의 근본적인 부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를 신앙으로 믿고 있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회의 폐단때문에 기독교를 반대한다고 인식하고, 기독교의 폐단에 대한 비판은 이후 기독교계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발생한 반기독교운동의 여파는 YMCA에서 농촌사업을 추진하고 장로교?감리교에서 농촌운동을 착수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27년 일제가 "사회주의자들의 일파가 치열하게 반종교의 열기를 일으켜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그에 대한 대책에 부심?연구한 결과 …… 농촌의 교화에 그 힘을 경주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을 정도였다.

기독교계의 조직적 차원에서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대응했던 사례는 잘 보이지 않지만, 기독교계의 움직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먼저 1925년 12월28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조선 기독교계 대표자 협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 협의회는 한국인 30명, 선교사 30명 총 60명이 4개 분과로 나뉘어 있다. 4개 분과 중 제1분과에서는 주로 한국교회 청년들의 사상적 불안과 사회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좌익계열이 신문?잡지?소책자 등을 통해 종교를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있으며 이 공격은 경제적 곤란으로 가중되고 있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좌익계열의 반종교?반기독교적 공격에 맞서 한국교회는 교회 청년들로 하여금 불신자 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할 만한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기독교 서적 및 해설책의 출판?보급해야 한다고 결의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1926년 6월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배형식 목사는 '교회형편조사위원회'의 보고를 통하여, "朝鮮 現社會 風潮가 複雜하여 여러가지 주의를 宣傳하는 중 우리 基督敎會에 대한 社會 觀念이 異常하여 間接 直接間에 非難과 打擊을 受하는 此時에 우리는 그 태도를 敵對視로 간과치 말고 현 思潮를 敎會化로 引導할 방침을 각 교역자들은 硏究하여 明年 年會敎會形便調査委員會에 報告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 대응모습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의 빠른 확산과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교회 차원에서 이를 '적대적' 또는 '전투적'으로 인식하거나 물리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라 사상적 측면에서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연구하여 극복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대응방안의 방향이 '교회화' 또는 '기독교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기독교 자체의 운동논리를 추구하는 경향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 이전의 다분히 '낭만적인 접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독교 사회운동론이 거론되고 새로운 지향점들을 사회주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 내에서 찾는 쪽으로 그 방향을 선회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이전의 사회주의와의 일치점 내지 유사성을 직접적으로 찾기보다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들을 전개하여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기독교 속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맞서 반기독교강연회와 반기독교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독교계 대표적 언론매체였던〈기독신보〉에서는 "어찌하여 목적이 동일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기사를 실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지향논리가 철저한 현실인식에 근거한 것으로 사회주의의 '共産'과는 그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과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과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방향 사이에는 큰 유사점이 있지만, 그 주체와 방법에서는 큰 차이가 난다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즉, 기독교는 인간 사회의 발전과 성장을 가로막거나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지를 망각하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성장 욕구와 발전 의지를 더욱 향상시키기 때문에 생활 측면에서 비기독교인들 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음이 강조되었다. 즉, 이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진정한 사회주의가 있으면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나는 그를 기독인과 同一히 간주하겠다"고 천명하였던〈기독신보〉의 논조가 매우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보지 않겠다는 '강경한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기독계내의 상이한 입장은 이후 기독교계의 사상적 경향과 맞물려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었는데, 여기에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기독교계 지도자나 보수적 평신도들도 보다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고자 했던 논자들이 중심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전자인 기독교계의 지도자들 및 보수적 평신도들보다 후자인 평소 기독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자기반성과 각성을 하게 만들었으며, 식민지 민족현실을 인식케 하는 데 더욱 큰 자극과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경 이후부터 기독교 사상계에도 새로운 사상이 수용되고 있었다. 전자들보다는 후자들이 이러한 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1920년대 중반경부터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사회주의자 하천풍언(賀川豊彦)의《애와 노동》?《기독교사회주의론》 등의 글이 번역되어 〈기독신보〉?〈청년〉?〈진생〉?〈신생〉등의 기독교 언론매체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의 글은 당시의 기독교 사회운동 방법론을 논의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30년대 초반에 한 사회주의자가 농촌운동을 전개하던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하천풍언를 따르는 '기독교사회주의자'"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하천풍언의 사상이 당시 기독교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함께 이 시기에는 강명석(姜明錫)?김강(金剛) 등을 중심으로 [공상적 경제사상], [기독교사상연구]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공산적 기독교'의 지향을 담은 글이 자주 게재되었다. 특별히 강명석의 경우 "상시몬은 민중의 절대적 평등대우는 배척하였으니 그것은 절대적 평등이 불평등한 현 경제사회보다 폐해가 더욱 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여 공상적 사회주의자 상시몽을 통해 사회주의의 '절대평등'의 개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에 부분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머무르지 않고 기존의 종교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신종교(新宗敎)'의 출현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의 조선을 사회적 종교적으로 '전환기의 위기'로 파악한 김강은 러시아의 반종교운동에 대해서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虛僞를 배척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舊社會에는 필연적으로 舊宗敎를 一掃함과 동시에 新社會를 유지할 만한 새로운 信力이 생길 것"이라고 전망하며, 앞으로 "新信力의 合同이 스스로 민중적으로 化할 것이며 민중적 力은 필경 진정한 正義人道의 權化로 변하여 一大의 新宗敎的 출현"이 기대된다고 하였다. '新宗敎의 출현'은 러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時代와 合하는 新信仰'을 찾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 이후 당시 세계 기독교계에 유행하고 있던 '사회복음주의'가 한국기독교계에도 수용되고 있었다. 특별히 1928년 '예루살렘대회'에 조선측 대표로 참여했던 김활란은 이에 대해 "기독교는 개인구원을 위한 복음뿐만 아니라 일반사회를 구원하는 복음으로" 설명하고, 예수의 理想인 천국은 개인만을 가르침이 아니라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의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소개하였다. 여기서 사회복음주의란 기독교의 진리가 사회화?실제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을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에 대한 강조는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기독교 농촌운동에 커다란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기독교 사회운동론이 논의되는 데 있어서 '민중'의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김창제는 '民衆의 宗敎'라는 글을 통해 한국 기독교를 '민중종교'의 역사적 바탕 위에 다시 세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의 고찰을 통해 초대 기독교의 시작이 바로 '민중'을 중심으로 하여 비롯되었다고 파악하고, 기독교의 민중적인 전통을 오늘날 다시 복원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며 현재의 내부적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관점임을 강조하였다. 특별히 이러한 관점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연장선상 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으로, 교회가 '물질주의'와 '유산계급화'한다고 하는 비판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계 내부에서 사회운동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는 동안 기독교계 외부에서는 사회주의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의 협동전선이 모색되었는데,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926년 3월의 협동전선의 논의 속에 천도교인과 더불어 기독교인 박동완과 유억겸이 참여하고 있었다. 더욱이 1927년 '신간회 (新幹會)' 창립 당시의 간부 총 51명 중에 12명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기독교인들의 참가가 다른 어떤 사회단체보다 그 비율이 높았다. 즉, 192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계 내부에서 사회운동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는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활동의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근거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신간회와 같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더욱 추동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같은 점은 당시 연희전문의 경제학 교수의 신분으로 '조선사정연구회' 및 비롯하여 '신간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기독교인 조병옥의 인식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종교기관이 일정한 사회의 도덕적 사회적 여론을 성립하는 데 중추적인 조직 중의 하나"로 전제하고, 교회는 도덕문제?사회문제?민족문제에 중립할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철저히 연구하여 사회의 공론을 인도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여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宗敎家도 革命家가 될 수 있을까? …… 基督의 平和主義가 사회에 적용될 때에 정의와 불의는 절대가치의 기준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니 불공평한 待遇을 받는 정의편은 어떻게 자아나 자민족의 정의를 보호할고 먼저는 이해와 여론으로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겠지마는 불의편에서 이해성과 협동성이 전무한 줄로 알 때에는 武力의 手段으로 당자의 문제를 해결하여도 기독의 교훈표준에도 죄라 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희생으로던지 평화를 주창한다 함은 기독교적 정신이 아니라 한다. 평화를 위한 평화를 기독이 주창함이 아니요 정의를 성립하고저 하는 평화를 선언한 것이다. 그럼으로 기독교인은 비인도와 비정의를 당면할 때는 도덕상으로 혁명심을 가질 것은 물론이다. 정의를 성립하는 수단에 들어가서 다른 방법이 없다할 것 같으면 武力으로써 變革함도 基督眞理에 위반됨이 아니라 한다.

 

위 글에서 보듯이 그는 보편적인 '평화'의 정신과 함께 '정의'의 정신을 더욱 강조하였다. 조병옥은 보편적인 '평화'의 정신이 일제의 억압구조 아래 무참하게 유린당할 때에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정의'를 강조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정치적인 민족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독교적 근거와 논리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비록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무력적 수단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조병옥의 경우에 특별한 조건, 이를테면 이민족의 식민지로 전락된 상태와 같은 절박한 경우에는 무력의 행사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상에서 그는 "예수는 그처럼 不義한 세상을 改良하는 武士이다"라고 하여 우리가 "예수를 신앙하는 本意도 불의와 불평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려 함에 있는 것"으로, 이에 우리가 勇士가 된 예수와 같이 '十字架武士'가 되자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언급의 배경에는 당시 기독교 내부적으로 사회운동의 방향과 그 방법론에 관한 폭녋은 논의의 전개가 있었던 것으로, 이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교회를 꿈꾸는 기독교인들에게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철저하게 기독교 자체 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도출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사회개량가, 혁신가 또는 혁명가의 기분을 지닌 인물로서 유물론자의 사상과 행동을 가졌던 인물로 묘사하거나 예수와 사회주의자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기독교 속에서 사회주의가 발견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정신도 2000년전부터 공산적이었고 이에 따라 사유재산권을 부정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의 근본 주장은 기독교 교리 중에 우주 만물이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조물주인 "神의 供託物"이라고 하는 의도와 공명되는 것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어떤 필자는 "聖書中에 諸般 社會問題가 多數記載되어 있다" 전제하고, 성경 속에서 보이는 사회주의적 경향들을 설명하여 기독교에 사회주의적 근거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글을 쓰던 논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평양 숭실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던 채필근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비판하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모두 약자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점이 유사하나 기독교 신자로서 신봉하는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일면의 정신만을 취하고 그 다수의 수단방법을 거부하는 것이 광의의 사회주의에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주의가 반드시 종교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신자는 의례히 사회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사회운동가들이 현실적 종교를 반대하는 것도 진리가 있겠지마는 종교자체에도 진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밝혀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폭넓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의 특징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영향과 기독교 내부 비판 등의 대내외적 자극에 영향을 받고 식민지 민족현실에 더욱 철저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기독교사회주의'?'사회복음주의'?'민중종교론'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향점들에 대해 활발한 의견들이 주장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사회주의사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기독교 자체 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하고자는 경향들이 크게 특징을 이루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와 사회주의간의 이해가 너무 부족함을 반성하고, 양자간의 이해와 존중의 정신을 추구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3) 제3기(1929 ~1930년대 초)

 

민족협동전선론의 대두에 따라 1926년 중반부터 잠시 중단되었던 반기독교운동은 제6차 코민테른에서 제기된 '계급대 계급' 전술을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자에게 형성되었던 '혁명적 시기론'이 결합되면서 다시 공식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단체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배척운동을 하였다. 특히 이전까지 '통일전선'의 주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천도교'에 대한 대대적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대규모의 종교적 민족동맹(천도교 등)에 속하는 근로대중 가운데서 활발하게 혁명적?계몽적 활동을 행하여, 그들을 민족개량주의의의 지도자로부터 이탈시켜야만 한다. 모든 현존의 혁명적 대중조직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개인적 자격을 기초로 할 單一民族革命黨 건설의 시도를 대신해서, 공동행동위원회를 만들어서 여러 민족혁명조직의 행동을 협동?통일하고,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적 지도하에 혁명적 분자의 사실상의 블럭을 수립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에 있어 소부르조아적 민족주의자의 중도반단성과 동요를 비판하며, 대중의 면전에서 끊임없이 폭로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 역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시기의 종교에 대한 공격은 주로 종교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종교자체를 현실적으로 거부하고자 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는 일정한 물질적 사회적 근거로 하고 그 곳에 환상적으로 산출된 것이지만, 그 물질적?사회적 근거가 제거되더라도 기계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과 같이 건실한 반종교운동투쟁을 통해서 점차 소멸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근 종교집단이 민족개량주의의 정치적 도당으로 전화"되었다는 정치적 이유에서도 배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재개 속에서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데 다음과 같은 점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첫째, 소련의 반종교운동 과정 중에 탄압을 받는 교회의 소식이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그 기능면에서 긍정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반종교운동에서 무차별한 파괴와 살상이 계속되자, 기독교인들은 소련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우려를 넘어서 이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였다. 즉 소련의 종교탄압 상황은 국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도록 자극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국외 지역에서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피해상황이다. 특히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간도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피해를 당하였고 심하면 살상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즉시 국내에 알려졌고, 국내의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공격자의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사회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인식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종교학과 신학을 체계적으로 전공한 신학자들이 종교적 측면에서 사회주의의 무신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반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사회주의를 종교론 측면에서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이는 "신사조에 일반은 무조건으로 호기적 동감을 느끼고 비판할 여가도 없이 부하뇌동한다. 此에 대한 충분한 비판력이 있어야 하며 특별히 무신론에 대한 철저한 반박론을 기독교인들이 수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렬한 위기감 속에서 대두된 것으로, "사회주의의 근본가치를 철학적으로 철저하게 정해(正解)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식별의 의무와 비판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던 상황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이나 일본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박형룡은 이 시기의 활동했던 인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종교론은 '기괴(奇怪)한 예언'으로 파악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 주장을 '죄악(罪惡)'으로 규정하여 한국교회에는 무신론를 대비하는 '변증신학(辨證神學)'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종교학적으로 무신론을 반박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이론적?철학적인 무신론에 근거하여 종교?기독교 배척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에서 연유했던 것으로, 이것은 기독교계가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및 사회주의에 대해 체계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20년대 중반만 해도 사회주의 및 반기독교운동을 부분적으로 그 타당성을 인정하던 논자들의 인식변화에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입증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재개된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이전에 그 부분적 타당성을 긍정하던 기독교인들 마저 부정적인 태도로 변화되었다.

예컨대 흥업구락부계열의 신흥우는 이 시기의 반종교?반기독교운동을 "종교도 도덕도 파괴하라 이것이 오직 살 길이다"라고 대중을 선동하고 있으며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사랑보다는 미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긍정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그가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던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공격과 사회주의에 대해 '대립적'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1920년대 중반 반기독교운동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윤치호 역시 '종교는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결코 마취제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무신론에 입각한 기독교 비판을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1920년대 반종교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그 긍정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보였던 전영택에게도 보인다. 그는 "현재의 급박한 위기와 역경의 비상시라고 해서 신앙을 버리고 무신운동이 세계를 뒤덮는다고 하나님을 버리라고 함에는 결단코 수긍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최석주는 "반종교운동과 우리의 주장"이라는 글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을 역사적인 고찰과 종교론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반종교운동자의 태도가 어리석고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대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비교?분석을 통해 그 차별성을 밝히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주의' 또는 '기독주의'에 입각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에서도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에는 두 가지 원칙되는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와 합하여 폭력이라는 무기로써 싸우기를 가르쳐왔다"라고 전제하고 사회주의의 이념과 기독교인들의 사랑이라는 정신과는 절대적으로 배치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분배의 기준으로 능력과 업적을 그 기준으로 들고 사회주의는 이를 무시한 균등분배를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나태와 욕망을 조장하고 인간을 물질위주의 투쟁으로 몰아가 결국에 무질서한 사회를 가져오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특별히 사회주의자들의 계급혁명?계급투쟁에 관하여 격렬한 반대를 보였다.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계급혁명?계급투쟁을 인식하였다. 먼저, 계급혁명을 감정적?이기적인 계급전쟁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상을 뽐내고 타인을 업신여기는 이기적인 것으로 감정적이고 무절제한 가운데 발생하는 것이며 사회를 개선하기보다는 인류와 사회에 큰 해독을 끼쳐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인식하였다. 둘째, 물질적 외부적 개혁으로서만 계급혁명?계급투쟁을 일으킨다고 인식하였다. 계급혁명은 물질위주의 혁명으로 인간의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개혁부분은 무시하고 환경만 개혁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외부개혁에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셋째, 계급혁명?계급투쟁은 폭력적으로 일체의 사유재산을 빼앗아 일괄적으로 평균분배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이를 교회의 '자기갱신'의 작업 속에 반영하려고 했던 흐름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흐름의 특징은 1920년대 보다 체계적으로 논리정연한 입장으로 기독교와 사회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준성은 사회주의의 여러 종류를 소개하고 공산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의 기원과 유래에 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는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과 비판에 대응하려는 이론적인 노력에서 시작된 것으로 사회주의의 체계적인 고찰을 통해 이를 소개하면서 당시 사회주의가 기독교와는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또한 하경덕은 "사회주의는 너무 개인의 책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본가라 하여 착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벌은 돈을 공리를 위해 쓸 수 있고, 또 중간계급의 등장과 성장은 맑쓰의 자본주의 발달법칙이 과학적 법칙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논리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즉, 사회주의에 대해 심도있게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이를 수용하려고 하던 논자들 역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을 극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1932년 7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채택한 12개조의 '사회신조'(社會信條)에서 결정적으로 잘 드러났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로, 인류를 형제로 신하며, 기독을 통하야 계시된 하나님의 애와 정의와 평화가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 사하는 동시에 일절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진하야 기독교 전도와 교육 급 사회사업을 확장하야 기독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에체 중에 기독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로 받은 수탁물로 알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하여 공헌할 것으로 믿는 자이다."

 

기독교계의 인식의 변화는 위와 같은 사회신조를 채택하여 "일체의 유물교육?유물사상?계급적 투쟁?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지향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데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는 이 시기 기독교계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신조가 발표된 이후 기독교계의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반기독교운동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사회주의에 대한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이 시기가 되면 1920년대 이래 지속된 기독교계 내부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정리되고 있는 것으로, 이는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기독교계에서의 사회주의에 관한 인식이 거의 일단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같은 인식의 변화는 기독교계 자체내의 변화된 역사적 조건들을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가 되면 한국의 기독교 성격이 유산자 중심으로 변화한다거나 미국에서 형성된 보수적 신학이 한국의 기독교계에 영향이 나타났으며, '지식계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계급적 성향'이 기독교계로 하여금 독립운동을 비롯한 정치적?사회적 문제 등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드는데 그 원인이 되었다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던 것으로, 왜 이 시기에 들어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변화되는지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사상 및 사회주의세력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의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는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인식과 현실에 기초한 민족문제 인식을 통해 사회주의를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일제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종교적 외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기독교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것과 결코 분리해서 사고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종교적 신앙과 조직을 자신의 활동의 근거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종교적 신앙의 대상과 존재론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들의 활동의 근거를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신앙적 존재기반을 흔드는 사회주의자들의 철학적이고 무신론적인 기독교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과 비판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종교자유' 및 '신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인식하는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즉,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 및 '신앙의 자유'이라는 관점이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즉 기독교계 내부적인 변화, 이를테면 기독교가 보수화?유산계급화?비정치화 등의 변화와 함께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3?1운동 이후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반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운동의 노선을 사회경제적 운동으로 전환시켰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적 운동은 민족주의세력의 실력양성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민주주의정치와 '건전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가운데 현실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대 계급'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혁명노선과 폭력혁명을 부르짖으며 모든 종교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민족개량주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며, 이에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의한 농촌의 피폐와 몰락이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고 민족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로 공격받는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와 제휴의 가능성보다는 현실적인 사회운동으로서 농촌을 살리는 '농촌운동'에 더욱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고 이에 기독교인들이 이를 강경하고 대립적인 시각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서 이후에 그러한 대립적인 인식이 고착화되거나 결정론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으며, 이는 1930년대 중반 이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반파시즘?반제통일전선의 실현이 제기되고 이어서 러시아에서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은 변화된 국제 사회주의운동노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더불어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전시파쇼체제가 그 절정에 오르자 광범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지향하게 되고 종교적 차이까지도 넘어서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의 차별을 묻지 않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하여 구적(仇敵)인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할 것"이라고 하여 종교단체와의 직접적인 연합도 주장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천도교단의 일부와도 제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 사회주의자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도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다음의 글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감방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꽤 많이 만났는데,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 동안 박해 때문에 형성되어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태도를 상당히 수정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그때까지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것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부정하고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 나는 감방 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내 생각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너는 옛날 공산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 '소련에서 1936년 12월 스탈린 헌법을 제정했는데 그 헌법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공산주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감방 안에서 그들과 싸우거나 적대시하는 일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민족문제'을 둘러싼 '통일전선'의 변화에 따라 '파시즘'에 맞서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제휴를 상정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은 소련의 종교 정책의 변화에서 나오는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의 종교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에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도 상당할 정도로 우호적인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는 외부적으로 보면 1935년 이후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동향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1931년 만주사변이후 군국주의화의 길로 나선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193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마치 1910년대의 '무단정치' 때와 같이 억압적인 탄압구조로 변화되었고,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에게 사상적으로 위험한 세력으로 분류 인식되어 탄압을 받는 입장에서 양자간에 이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국내의 역사적 상황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였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듯이 '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에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의 대 사회주의 인식이 대립적이거나 강경하였다고 해서 그 자체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반사회주의에 입각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맺음말

 

이제까지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대해 그 역사적 상황, 인식의 구조, 인식의 내용과 변화과정 등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를 정리하면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의 성격으로 이 글의 끝을 맺고자 한다.

먼저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계 대내외적인 기독교 비판에 직면하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이 형성되어 있었다. 3?1운동 이후 한국사상계는 기독계가 열악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내세주의적 신앙과 외국선교사들의 친일화 경향, 교회의 지적소외, 발전된 과학과 새로운 사상의 경시풍조등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와같은 일반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회유분열정책이 진행되는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기독교계에 큰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기독교계에 보다 큰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은 일반 사회의 반기독교적 분위기와 사회주의자들의 격렬한 반기독교운동의 과정에 '이전의 교회출신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계내의 내세지향적인 움직임과 이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 그리고 점점 심화되는 식민지적 억압구조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주의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해 있었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는 단순히 '외부적 충격'만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적?경제적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복음을 근본 원리로 하여 정치사상으로 '근대 자유 민주주의 사상'을, 사회경제적으로 '[건전한] 자본주의제도'를,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등을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구조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를 인식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인식구조로 기독교계의 대내외적인 충격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지향의 논리와 관점들은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이 되고 있었다.

셋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세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제1기(1920~1924년) : 이 시기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은 크게 사회주의의 폭력적 건설방법에 대해서 비판적인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인식의 큰 흐름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가치균등'하게 비교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양자가 그 지향하는 목적과 방향에서 일치한다고 보는 적극적인 해석의 자세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의 배경에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고 전달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속에서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찾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2기(1925~1928년) :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의 영향과 기독교 내부 비판 등의 대내외적 자극에 영향을 받으면서 식민지 민족현실에 더욱 철저한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기독교사회주의'?'사회복음주의'?'민중종교론' 등 기독교 사회운동의 지향점들에 대해 활발한 의견들이 주장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이전까지의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접근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이에 대한 찬반의 자세보다는 기독교 자체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찾으려고 모색하는 경향들이 크게 특징을 이루었다.

제3기(1929~1930년대 초) :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의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종교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거부하고자 하는 반종교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종교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일전선차원에서 모든 종교세력을 '반동적 민족개량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고자 하였다. 이에 국내의 모든 종교세력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를 대립적으로 인식하여 사회주의의 문제점과 무신론을 반박하는 등 종교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인식을 기초로 한 민족문제의 인식을 통하여 민족주의세력의 민족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세력에 대해 점차 등을 돌리고 현실적인 개혁운동으로 나아갔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 인식을 통하여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강화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사회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는데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종교적 민족적 측면에서 정치적 사회적 지향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를 인식하였다. 이와함께 사회주의자들이 전개했던 반기독교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있어 전환점의 계기가 되고 있었다. 한편,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태도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사회문제를 등한시하게 하고 보수적 신앙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낸 것이 사실이며, 기독교계의 "비정치화"를 더욱 촉진시켰던 비판적 일면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종교적 신앙적 혼돈 속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시키고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20~19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해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적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교회를 개혁하거나 양자 간의 이해를 구하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시도하였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도 '사상적' 차원에 그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 역시 그들의 무신론적 관점을 포기한 적이 없으면서도 일부를 제외하고 기독교에 대해 지속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갖거나 박해를 가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가 사회개혁의 방법에 있어서 폭력을 사용하거나 종교인의 '신앙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적대적'이거나 '전투적'인 자세와는 사뭇 다른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1920-30년대 기독교인들의 사회주의 인식이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1920~30년대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계의 특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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