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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

욥기 42:6, 사도행전 20:28, 마태복음 6:24                   

15. 1. 18, 여신도주일


* 오늘은 여신도주일, 여신도회에서 보내온 설교문(최은경 목사)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총회주제이기도 한데 쉽지 않은 주제지요.

올해는 장로교 100회 총회가 열립니다. 또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시점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면서 교계에서는 개신교의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여러 가지 의미있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과 여신도회에서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주제를 정하고 교회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타락한 중세교회를 비판하며 새롭게 출발한 개신교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 교회는 오늘날 어떠한 모습일까요?


한국 교회는 불행하게도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타종교에 비교하여 다소 억울한 측면도 있습니다. 왜 언론은 훌륭한 여러 교회는 쳐다보지도 않고, 특정 교회와 부정적 사태만 부각하는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해나 부당함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많은 교회와 여러 성직자가 제 길을 가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여신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해 왔는데 교회를 향한 세상의 평가는 냉정하기만 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헌신했던 우리의 수고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비판에 가슴이 미어지고 아픕니다. 억울하고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신도회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여신도들이 한국 교회의 모습을 직시하고, 어떻게 우리 교회를 다시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단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교회 밖으로부터의 ‘이리’들의 공격(행 20:29)과 교회 안에서의 ‘지도자들의 문제’(행 20:30)를 동시에 지적하면서, 이러한 때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또한 양떼들을 잘 보살피라고 권면합니다(행 20:28). 오늘날 한국 교회는 바울의 지적과 같이, 교회 안과 밖에서 동시에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한동안 급격한 성장과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개신교는 과거에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나 도덕적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사회적 이미지도 추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세월호 진상규명 단식에 동참하거나,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거나, 탈핵 운동을 벌이거나, 평화운동을 위해 남북 개신교인들이 공동으로 예배를 드리는 등의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활동을 하여도 과거와 달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고, 진보적인 지성사회나 언론 역시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나 불교의 작은 움직임은 크게 보도하여도, 개신교의 실천은 무시하고 폄하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개신교에서 장로교의 분열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경이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두어 개의 경우를 빼면 그 분열에서 무슨 신학적, 교리적 타당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교권과 금권 지향적 분열이라는 말입니다. 분열은 교단의 증가에 그치지 않고, 신학교의 난립과 무자격 목사를 양산하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이것 역시 한국 사회 지성계가 개신교를 폄하하게 만드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신자와 돈을 마구 빨아들인 초대형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좌우하고 교회의 이미지를 좌우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지탄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숫자가 최우선적인 가치가 된다면 그 숫자는 맘몬입니다. 재물의 신, 물신(物神)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세확장 즉 지역 교회들을 배려하지 않는 몇몇 초대형교회들의 기형적 성장을 바라보며 마치 커다란 기업을 연상케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성도들은 서로 도움을 받으며 연결되어 자라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엡 4:15-16) 그러므로 성도라면 반드시 주님의 몸인 교회와 연결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봉사하며 그 몸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엡 4:11-12) 그러나 이러한 봉사와 책임을 외면한 채 교회를 쇼핑하듯이 드나드는 교인들이 초대형교회로 몰리면서 일부 교회는 더 이상 ‘서로 연결된 지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교인들끼리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고 급기야는 선거운동을 해야만 장로를 뽑을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면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한편으로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삭빠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우직하게 한결같이 교회를 섬기는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봉사와 실천이 없는 성도는 이미 성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바보같이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계셨기에 아직도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그 규모의 크고 작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봉사와 사랑으로 채워져 가는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곳이기에,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채워가는 곳이기에 우리 교회는 자랑스러운 교회요 행복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위기 앞에서, 내가 속한 우리 교회만 괜찮으면 문제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개신교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는데 한 교회만 여전히 괜찮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단이나 다른 교회만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우리 ‘여신도회’가, 나아가 ‘우리 교단’이 교회를 덮친 거대한 타락과 오염의 물결을 거두어 달라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욥 42:6)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참회해야 할까요? 욥의 참회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욥의 회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주장이 옳았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회개합니다. 욥은 왜 참회해야만 했을까요? 그러기에 욥의 참회는 욥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하는 윤리적인 참회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인 참회인 것입니다.


욥의 경건한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기의 말미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그릇된 논리라고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욥의 말이 옳다고 하십니다.(욥 42:7) 그러나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 친구들은 확신에 차서 끈질기게 욥을 압박합니다. 욥은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욥은 억울합니다. 정말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사는데, 신앙을 따르고 의를 지킨 사람은 먼지 구덩이에 버려져 있습니다.


욥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느냐고, 하나님의 ‘의’는 어찌된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내가 땅의 터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기 시작해서 38장, 39장, 40장, 41장에 걸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의 섭리를 주관하실 때 욥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욥의 질문에 대한 즉답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욥은 무릎을 꿇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욥기 42:2~3, 새번역)


그러고서 욥이, 이번 여신도회가 표어로 정한 성구를 말합니다.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않아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작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자신이 알기에는 너무나 크고 신비롭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고백합니다.


이 욥의 고백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회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나의 판단,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옳다면, 우리는 참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옳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안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의 그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 된다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의 영역을 조금도 남겨 놓지 않는 불경을 저지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욥의 참회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 이것이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배후에는 이 ‘옳음’의 확신이 있습니다. 절대로 옳기 때문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법당국에 고소하고 법정에서 소송하는 일이 남발합니다. 내가 전적으로 옳은 것, 그것이 바로 바리새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주장을 철칙으로 만들었습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극단적인 형식주의입니다.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 ‘내 주장을 거두어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과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회의 시작입니다. 내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이제 누구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가장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면 토를 달지 말고 그대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의 말을 들어봅시다. 남편의 말일 수도 있고 아내의 말일 수도 있고 때론 부모의 말일 수도 있고 자식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여신도회장의 말일 수도 있고 여신도회원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욥의 참회는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는 참회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억울하고 분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우리 여신도들은 그동안 교회를 세워 가는데 누구보다 열심을 내어 봉사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교회의 잘못을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나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도 욥처럼 우리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회복시키심을 믿으며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어미 된 심정으로 재를 뒤집어쓰고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한국교회를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로 이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위해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여신도회 주일에 드리는 이 회개의 예배를 받으시고, 또 앞으로 1년 한국 교회를 대신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 모든 여신도회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국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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