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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홍렬 <2> 고생만 한 어머니 암 투병에 기도가 터져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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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했다. 신문 부수를 늘리기 위해 억지로 확장 신문을 넣다가 따귀를 맞는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할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영세민에게 주는 밀가루 배급을 받아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 우리가 거지야?”라며 철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야 이놈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늘 단칸방을 전전하며 다섯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살았다. 어머니는 경제적 책임을 지지 않는 남편 대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가난과 사투를 벌이셨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밤새 재봉틀, 인두와 싸워가며 한복 바느질로 삼남매를 공부시켰다.

중학교 시절, 자다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 보니 어머니가 한복을 만들다 졸고 계셨다. 나는 살며시 “엄마, 그냥 주무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한복 내일까지 해주기로 약속했단다. 어서 자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신용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던 것 같다.

어머니는 특히 교육을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종종 “돈이 없으면 학교를 못 가는 거지”라고 말하실 때가 있었다. 평소 온유하시던 어머니도 이 말을 들으면 “낳기만 한다고 부모가 아니라 키우고 교육을 시켜야 제대로 된 부모가 되는 거예요”라고 발끈하셨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슬픈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다. 늦잠이라곤 모르시던 어머니가 이상하게 늦게까지 자고 계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자 한쪽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아버지는 느낌이 안 좋으셨는지 쓰레기통을 재빨리 뒤지셨다. 약봉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고 나와 동생도 울면서 뒤를 따랐다. 응급실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정도 갖고는 죽지도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이날 돈을 빌린 사람을 만나 빚 독촉에 시달렸고, 쌀독에 쌀은 다 떨어졌고, 시계를 팔아 돈을 마련해 온다던 아버지는 그냥 방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만 지쳐버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자궁암 때문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군 복무 시절이었다. 휴가를 나와 누나와 친분이 있던 치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던 중 “어머니한테 앞으로 더 잘해야 해. 앞으로 5년 견디시려나”라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의 병을 알게 됐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누나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 또한 모르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가 잘못되실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군 생활을 해야 했다.

1978년 8월 전역했다. 그날만을 기다렸다. 이제 어머니 옆에 서서 위안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도 기뻐하셨다. 제대하는 날 어머니 병세는 호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날 어머니는 하혈을 하셨다. 잦은 하혈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는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때 나는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음식이나 공책과 학용품을 나눠줘서 친구들 따라 놀이터처럼 갔던 교회였지만 이 순간에는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어머니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자식들을 위해 지금껏 고생만 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정리=구자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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