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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홍렬 <4> “교회는 사랑 하나만으로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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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아버지를 원망했던 때가 많다.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움이 커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린 시절이었던 1960년대,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른들이 “아니, 쟨 저러고 다니면 춥지 않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홍렬이 쟤는 추위를 안 타요. 어릴 때 내가 자라 피를 먹였거든요. 자, 라, 피.”라고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귀하게 태어난 아들이라 귀한 자라 피를 먹였고 무슨 근거에선지 그것 때문에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때 나는 몹시 추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 때문인지 겨울이 찾아와도 추위를 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를 낳고 뭔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과 함께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군대 시절에는 왜 그랬는지 어머니께만 편지를 썼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도 편지 한 통 보내드리려무나. 은근히 서운하신 모양이야”라고 귀띔해주셨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드렸다. 아마 미소 지으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셨을 것이다. 나 역시 자식의 편지를 받으면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후 수십 년 만에 아버지께 다시 편지를 쓸 기회가 생겼다.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를 주제로 방송하면서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먼저 다가서지 못한 안타까움, 어머니께만 속 얘기를 했던 미안함, 아버지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만 가졌던 것에 대한 반성을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면서 참 많이 울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다음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좋은 곳으로 모시게 도와준 교회를, 보살펴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어디에 모실지,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막막하던 우리 가족을 도와준 곳은 용산남부교회였다. 이 교회는 단지 교회의 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식구들을 전적으로 도와줬다. 기독교 상조회를 통해 염을 해줬고 예수님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쳐줘서 장례식장에서 밤을 샐 수 있도록 도와줬다. 성도들이 준비해준 꽃으로 어머니 관 위에 십자가를 만들어 꾸밀 수 있었다. 일산 기독교공원 묘지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용산남부교회 도움 덕택이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 15일 멀쩡하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일하시던 공장에서 세수를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것이었다. 그러고는 일주일 만에 어머니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용산남부교회는 이때도 남은 우리 가족을 도와줬다. 덕분에 아버지를 어머니 뒤편에 모실 수 있었다.

내가 교회에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은 이때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깊이 보살펴주셨기 때문이다. 교회와 교인들을 통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나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됐다.

이어령 선생은 “교회는 사랑 하나만으로 다닐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신앙은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착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랑을 많이 베푸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리=구자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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