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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배재철 <7> 일본 이어 독일 무대 오른 뒤 목에 ‘이상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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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지마 도타로를 만난 건 2003년 9월이다. 그는 갈라콘서트 형식의 ‘일트로바토레’를 기획했다. 의상을 입지 않고 각 장면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는 스탠드 오페라였다. 나는 주인공 만리코를 맡아 세계적인 성악가 피오렌차 코소토 선생님과 노래를 불렀다. 와지마는 그렇게 나를 일본무대에 진출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이런 말을 했다. “재철, 당신의 목소리는 엄마가 해주신 음식 같아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고향의 맛이에요. 당신의 노래를 들으면 단번에 오페라 팬이 돼요. 소리도 좋고 테크닉도 좋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이 느껴져 좋아요.”

와지마는 성악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오페라를 사랑했다. 열 살 때부터 오페라를 들었다는 그는 이탈리아어도 수준급이다. 나와도 이탈리아어로 소통한다.

그에게 음악은 치료제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거나 외로울 때 오페라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한 그가 음악기획사 관련 일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음악에서 발견한 치유와 행복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소리에 더 끌렸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서 노래를 부르는 마음의 자세가 바뀌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 목소리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오페라에 관심 없던 이들이 나를 통해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고, 평안이 없던 이들이 평안을 갖게 된다면, 대형 극장의 오페라 무대뿐 아니라 나를 더 자세히 보여주고 소통할 수 있는 무대에서도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이날의 결심이 있었기에 훗날 목소리를 잃고도 내가 조금 덜 방황하고 덜 아팠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렇게 틈이 없도록 나를 굳건히 다지셨다.

한국과 일본, 유럽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던 나는 2004년 독일 자르브뤼켄으로 건너갔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 전속 가수로 초빙 받은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 극장은 베르디의 작품 ‘돈 카를로’ 준비로 바빴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돈 카를로를 맡은 테너의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고음에 서정적인 목소리가 돋보이는 내가 주역으로 작품을 이끈 것이다.

10주 동안 연습하고 2005년 시즌 오프닝으로 오페라 ‘돈 카를로’ 초연을 성황리에 끝냈다. 모두 나를 향해 “브라보”를 외쳤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의 전속 가수가 된 지 1년 만에 테너로서 절정을 맛봤다. 그렇게 두 번째 공연까지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9월쯤 세 번째 공연을 준비하는데 목이 이상했다. 감기에 걸린 듯 까끌까끌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목소리가 저음으로 바뀌었다. 테너의 음색이 사라진 것이다. 음정을 흥얼거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내가 목을 너무 많이 사용했나’ 싶어 며칠 쉬면 괜찮겠거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어깨까지 아팠다. 담당 의사는 내 목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혹이 있다”며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했다. 큰 공연을 앞둔 상황이라 하루빨리 내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큰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를 받았다. 이튿날 검사결과가 나왔다. “갑상샘암입니다.”

정리=노희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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