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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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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사순절 첫째 주일, 2018년 2월18일

 

18.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우리는 일상에서 양심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저 사람은 양심도 없어. 양심적으로 살아라. 양심이 밥 먹여주나. 저 인간은 양심에 털 났어.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가장 간단한 사전적 의미로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장애인 자리에 주차하거나 뻔뻔하게 거짓말 하면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몰립니다. 차량 통행이 아주 뜸한 심야에도 교통신호를 정확하게 지키면 양심이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한 인간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로 받아들여집니다. 한자로도 양심은 좋을 량(良)자에 마음 심(心)자를 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옛날 사람들이 양심적이었을까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이 양심적일까요? 대한민국사람들이 더 양심적일까요, 아니면 북한사람들이 더 양심적일까요, 일본사람일까요, 미국사람일까요? 기독교인들이 더 양심적일까요, 불교도인들이 더 양심적일까요, 이슬람교도들이 더 양심적일까요?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 중에서 누가 더 양심적일까요? 많이 배운 사람들과 학식이 부족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양심적일까요? 우리는 지금 양심에 따라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양심과 전혀 상관없이 다른 기준으로 살고 있을까요?


양심에 대해서 성경도 종종 말합니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몇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롬 2:15절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고전 8:7절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다음은 고후 1: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 4:2절입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세례와 양심


오늘 설교 본문인 벧전 3:21절도 양심을 언급합니다. 다른 어떤 구절보다도 이 구절에서 양심의 의미가 훨씬 더 도드라집니다. 세례를 가리켜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했습니다. 세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본문은 신약 성경에 여기가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의 종교 의식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와 달리 본문에서 세례를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개념 규정한 이유는 당시에 세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벧전 3:21절 전체를 읽어볼 테니까 한번 들어보십시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본문은 세례를 두 가지로 규정했습니다. 하나는 부정의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긍정의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부정의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세례에 대한 오해를 가리킵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은 육체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가장 강렬한 욕망은 먹는 것과 성적인 것입니다. 사회적인 욕망도 강렬하긴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 심리를 연구하면서 ‘리비도’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인간이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성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심지어 아버지를 정적으로 여기는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심리 분석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고, 그렇게 얻은 권력을 이용해서 반사회적인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시키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에 종종 부도덕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부도덕한 현상은 성경 시대에도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며, 앞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신약성경 시대 사람들 중에서 세례를 받으면 이런 욕망이 해결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금욕주의 신앙입니다. 그 뿌리는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중에서 유대교의 에세네파에 속한 쿰란 공동체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쿰란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와 묵상과 성경읽기와 노동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엄격한 수도원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도 이런 경향이 이어졌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런 종파에 속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광야에서 절식하고 기도하면서 청렴결백한 생활을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들의 제자들이 기독교 안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세례가 기독교의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자리한 것도 그들의 영향력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고, 당연히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21절에서 세례를 통해서 육체적인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금욕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욕망은 잠시 움츠러들 뿐이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과 사회적 욕망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류 역사는 끝장나고 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순식간에 삶이 변화되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실망도 더 커질 뿐입니다. 신앙이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게 기계적이고 주술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순간적으로 완성되거나 불가역적으로 실행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히려 과정이고 투쟁이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붓글씨 실력이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편지를 쓰면서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 ‘나그네’(1:1, 17, 2:11)라고 규정했습니다. 1:17절은 이렇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서의 실존은 부단한 도전에 부딪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의 신앙이 어느 순간에 저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무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그네로서의 실존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양심- ‘함께 알다’


‘양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는 ‘함께’라는 전치사와 ‘안다’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라틴어 conscientia도 같은 뜻입니다. 루터는 쉬네이데시스를 독일어 ‘게비쎈’(Gewissen)으로 번역했습니다. 게비쎈도 역시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게 바로 양심의 의미입니다. 알려면 이성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이성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아기에게는 양심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정신박약자들에게도 양심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함께’ 아는 것이 양심입니다. 독단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양심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따라서 양심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철학자들도 양심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헤겔은 양심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아는 것, 2) 타자와 ‘함께’ 아는 것, 3) 절대자와 ‘함께’ 아는 것.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양심은 선천적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선한 양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파격적인 발언입니다. 양심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자신의 양심을 무조건 믿을 수도 없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악한 양심에 물들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의 삶에서 어떤 게 바른 양심인지 불간하기 힘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양심적 군거부자들에 대한 재판이 종종 사회 문제가 됩니다. 자신들의 (종교)양심에 따라서 군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그 양심은 옳은 걸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을 재판하는 판사들의 양심은 옳은 걸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며느리들은 시댁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힘들고 불편해도 시댁에 가서 명절을 보내면 양심적인 사람이고, 다 포기하면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은 양심에 따라서 행동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갑니다. 가난한 대학생인 라스콜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고 돈을 강탈했습니다. 그 노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해충과 같으므로 그를 죽이는 것이 전혀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창녀 소냐를 만나면서 그의 양심이 흔들렸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춘 라스콜니코프에게 소냐는 광장에 나가 흙에 입을 맞추고 ‘나는 살인자입니다.’ 하고 외치면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구해주실 거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도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됩니다. 어렸을 때는 양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렇지 못하다는 걸 깨달을 때도 많습니다. 어렸을 때 ‘저 아이는 소문이 좋지 않으니 어울리지 마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그 친구와 어울리면 부모 앞에서 뭔가 양심이 찔리지만 크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양심의 원천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양심 문제를 아주 엄정하게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 교사들은 양심을 계몽과 연관시켜서 생각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말고 약한 사람을 돕도록 가르칩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좋은 사람이 되라고 교육시키고 계몽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합니다. 이와 달리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선한 양심도 하나님의 선물로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한 양심 문제를 21절에서 예수의 부활과 구원과 세례와 연결해서 언급하고, 바로 이어진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천사와 권세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간구하는 대상인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향해서 영혼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고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먹고 사는 것만 해도 큰 짐을 진 거와 같아서 선한 양심 같은 거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는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아도 ‘나는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과 대충 타협하면서 살면 그만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의 로마 체제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인지에 대해서 줄기차게 고민하고 투쟁하고 인내했습니다. 그런 역사를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좀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운명을 보면 이게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 주류 세력과 적당하게 타협을 했다면 십자가 죽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지켜내기 위해서 무조건 세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에게서만 주어지는 선한 양심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간구하면 결국 선한 양심을 당장 소유하게 될까요?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언제나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저는 양심을 가리키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가 ‘함께 아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했습니다. 양심대로 살기가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함께 아는 것이 어렵습니다. 작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는 설날에 처갓집에서 식사 기도를 했습니다. 동서도 목사이기에 번갈아가면서 기도합니다. 나이 많으신 장인과 장모를 위해서 기도할 때 호칭을 ‘노종’이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 집사람에게 핀잔을 들었습니다. 어른들을 왜 낮추어서 호칭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어른들을 낮춘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낮으니까 그렇게 호칭한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도할 때 저는 사람에 대한 존칭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적인 양심으로 노종이라고 했고, 집사람은 가정 윤리의 양심으로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높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함께 알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설날 연휴에 친지들을 만나서 종교나 정치적인 부분에서 대화가 단절되는 경험을 했을 겁니다.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죽을 때까지 모든 부분에서 일치되는 ‘함께 알기’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가족 사이에도 어려운 일이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양심이 무뎌진 시대라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양심이 더 옳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연봉을 받는 노동자와 연봉을 제공해야 할 기업가의 양심이 충돌합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어떤 것이 선한 양심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구체적인 상황은 여러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니까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간구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이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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