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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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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사순절 셋째 주일, 2018년 3월4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도 많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과해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잘못한 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자들을 큰 능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고분고분 십자가에 처형당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그 대답을 이미 알고 있기는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대답이 그것입니다. 이런 대답이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십자가 처형은 구원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어 보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거 아닌가, 하고 절망을 토로하신 적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집단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시선을 바울은 고전 1:22,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표적 신앙과 지혜 신앙


위 구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신앙적 특징이 표적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옳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적에 매달렸습니다. 표적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리킵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광야생활에서의 먹을거리였던 만나와 메추라기가 이런 표적들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도 초자연적인 기적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표적이었습니다. 마 16:1-4절을 따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다에 수장되었다가 구출된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 신앙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서, 그리고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표적 신앙입니다. 벤처 기업을 일구어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사실은 표적 신앙입니다. 21세기 현대인은 모두 이런 표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소위 ‘대박’이 나기를 바랄 겁니다. 표적 신앙의 밑바닥에는 성공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적 신앙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운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기에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함께 헬라인을 거론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반면에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philosophy)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모두 헬라 사람들입니다. 지혜는 단순히 지식이 많다는 뜻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날의 학문과 과학이 발전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지혜를 얻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지혜가 특별히 많은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와 바울이 활동하던 시절에 지혜로운 사람들의 눈에 예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회당에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지 말고 안식일이 다음날 고치면 당시 유대교 권력자들과 큰 충돌이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옳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십자가 운명을 피하지 않은 것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불문하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을 거칠게 반대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거리낌의 대상이나 미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완전한 반전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번에 걸쳐서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먼저 18절과 24절입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의 이 진술은 정말 옳을까요? 신앙생활의 어려움에 떨어진 신자들에게 종교적 덕담을 전한 것일까요? 18절에 나오는 ‘십자가의 도’라는 표현에서 도는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가리킵니다. 2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23절에서 표현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두 구절 모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말을 당시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비웃었을 겁니다.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을 종종 오해합니다. 두 가지로 오해합니다. 하나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을 받아 편안히 잘살게 된다는 오해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고통 받으나 죽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당 가면 행복하게 영원히 살 거라는 오해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무능력의 표본인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인가요? 그런 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우선 표적과 지혜의 삶이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뚫어봐야 합니다. 표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공신화입니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그걸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뉴스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처럼, 이명박 전임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 출신으로 돈이 넘치도록 많은 사람인데도 대통령 직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분 한 사람만 지목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공신화에 매달리면 죽을 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재산 증식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겁니다.


돈만이 아니라 세련되어 보이는 지혜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에 대학교부터 초등학교까지 선생님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순식간에 지혜를 상품처럼 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로서 더 깊은 학문의 세계를 파고든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요즘 천안함 사건이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과학자들이 소신 있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4대강 문제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정부에 밉보이면 연구비를 받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겁니다. 물론 표적과 지혜를 선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표적과 지혜는 생명을 얻는데 무능력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영혼이 해방을 얻지 못합니다. 물리학에서도 알면 알수록 모른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표적과 지혜가 상대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되 절대적이지 못하기에 그것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건 바울의 표현으로 ‘미련함’(20절)입니다.


이걸 제 문제로 받아들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에게 표적과 지혜는 목회 잘해서 교회를 놀랍도록 성장시키는 겁니다. 한국교회에는 세속사회와 마찬가지로 성공신화가 무용담처럼 회자됩니다. 나름으로 신학을 좀더 많이 공부한 목사들에게는 신학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이 바로 표적과 지혜입니다. 여기에 매달리는 한 목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아무리 큰 표적과 지혜를 이룬다고 해도 그것으로 영적인 만족인, 즉 생명 충만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면벌부를 판매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솔라 피데’와 ‘솔라 그라티아’를 외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의로움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절대 고독의 자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표적 신앙과 지혜 신앙으로부터 배제된 사건입니다. 절대 고독의 자리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박수와 격려와 위로가 없는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만족감과 삶의 재미가 단절된 자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운명에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매달립니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몸서리를 치면서 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자리로부터 멀어질수록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영지주의적 가현설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림자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구약의 욥처럼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으로 인생이 곤두박질 친 겁니다. 이 사건이 무슨 근거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바울의 이 말에 동의가 됩니까? 바울은 지금 열광적인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여기까지가 설교자로서 최선의 설명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성령께 위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라고 한다면 여기서 설교를 마쳤을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운명은 표적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라.’고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설교자로서 책임감이 더 많아진 탓인지, 아니면 용감해진 탓인지 다음 단계를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와 다릅니다. 사람의 능력과 사람의 지혜로만 본다면 불행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장에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과 지혜를 추구하는 세상 논리에서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에서는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만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의 조건 자체가 선하다거나 가난한 사람이 무조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아니라 한 눈을 팔 것이 없는 삶의 조건에서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혼란을 벗어나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친구가 많아야 행복하고, 취미가 많아야 인생이 재미있을 거라는 착각입니다. 이시영 시인의 시 ‘순간들’을 읽겠습니다. ‘천상의 어딘가에서/ 참새 한 마리 묵직이 내려와 앉는다/ 나와 온 우주가 함께 팽팽해진다/ 사람들 바쁘게 걷는다.’ 참새 한 마리를 통해서 우주와의 공명을 팽팽하게 느끼는 사람과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 것이며, 누가 더 삶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일까요?

 

못 박힌 그리스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못 박힌 분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 자리에 이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혁명적입니다.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운명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으로, 한 밤중에 깊은 산길을 가야할 어린이가 있습니다. 무덤도 옆에 있습니다. 산짐승 소리도 들립니다. 다행히 그 산길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아이는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막상 절망적인 운명에 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에 사로잡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운명을 벗어나려고 온갖 수고를 다합니다. 그건 인간이기에 어쩔 없긴 합니다만, 정신을 차리고 삶의 실체를 돌아봤으면 합니다. 그곳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으면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일화입니다. 가스실로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죽지 않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가스실 밖에 있던 한 젊은이가 랍비에게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관하는 하나님이 가능하냐, 하고 말입니다.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저기 가스실 안에 계신다네.’


아직 오지도 않은 불행한 운명을 미리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따뜻하고 위로가 되고 재미있는 설교를 듣고 싶을 겁니다. 표적과 지혜가 과도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십자가의 운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불행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설령 운이 좋아서 무탈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 순간이 닥친 후에야 ‘아, 이게 뭐지?’ 하고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운명을 반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야 할 그 운명 앞에서는 표적 신앙도 무의미하고, 지혜 신앙도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죽음을 무기삼아 여러분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 오늘 설교를 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표적과 지혜를 넘어섭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표적과 지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도 되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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