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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소년 시절

  • 이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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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소년 시절                        

눅2:40-52


  저는 열두 살 때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며칠 지내면서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고 집에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러갔습니다. 그런데 버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간혹 어른들이 걸어서 다니던 것을 생각하고 걸어서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몇 시간이나 걸어가 버렸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겨울비가 내리는데, 가도 가도 낯선 마을들뿐이었습니다. 마침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한 아저씨가 되돌아가는 버스를 세워주셔서 출발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차를 타고서 겨우 밤늦게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셨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길을 잃어버렸다가 미아가 될 뻔했는데, 예수님의 경우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유월절을 지키고 돌아가던 마리아와 요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소년이셨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계셔야 할 아버지의 집 성전에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누가만의 자료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에 관한 희귀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 그리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관한 유일한 자료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에는 왜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요? 사실 우리가 구원 받는 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 고당하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모든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많은 증인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출생 때의 일, 그리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에 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의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훨씬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열두 살 때의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갓난아기로 탄생하셨으며, 우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성장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자라가신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1절)


  누가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부모와 잠시 헤어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년 예수의 부모였던 마리아와 요셉이 아들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유대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16:16-17)


  유대인들은 아들이 열세 살이 되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며 의무를 다하는 책임 있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열세 살 되는 아들을 ‘언약의 아들’, 또는 ‘율법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열세 살 이상 되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미리 교육을 시키는 차원에서, 아들이 열세 살이 되기 한 두 해 전부터 성전에 올라갈 때 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갈 때 열두 살 된 아들 예수를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이 유월절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41-42절)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같은 명절에는 이렇게 가족들이 함께,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144km 정도였으므로, 하루에 40km씩 간다고 해도 3-4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기를 지키고 돌아오기까지는 일주일 이상 걸렸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가족들끼리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녀들과 함께 예배하기를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물론 우리 자녀들은 각 주일학교에서 예배드리며 말씀을 배웁니다. 그러나 가족이 다함께 예배하는 것도 매우 귀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가족들과 함께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후 예배나 심야기도회 시간에는 되도록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길 바랍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


  마리아와 요셉은 유월절을 지키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남아계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집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아들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날에야 아들 예수가 자기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43-45절)


  어떻게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하룻길을 갔을까요? 대개 이런 여행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먼저 출발을 했고, 남자들은 뒤에 따라갔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아이들과 여자들이 뒤처지기 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은 열두 살이셨습니다. 부모들은 아들 예수가 당연히 자기들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늘 모범적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남자들과 함께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여자들과 함께 앞에 가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여행이 끝나고 가족들을 확인하는 중에 예수님이 자기들 중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에 계신 소년 예수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그들은 아들 예수를 찾기 위해 다시 하룻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아들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리아와 요셉은 다음 날, 그러니까 사흘 만에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선생들과 성경을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6-47절)


  그런데 예수님은 왜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홀로 성전에 남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소년 시절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성전에 남은 예수님은 열두 살 된 소년이었지만, 당대의 석학들과 성경을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너무나도 커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성전에 계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와 요셉은 사람들과 어울리느라고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가는 이 대조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때로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도 합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삽니까?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며,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부모인 자신들을 따라오지 않고 여태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책망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은 이 순간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심하게 아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년 예수는 놀랍게도 당대의 석학들과 성경을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들은 소년 예수의 지혜와 통찰력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리아는 가볍게 책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 속상한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머니의 책망에 소년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49절) 마리아는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누가는 ‘네 아버지와 내가’라는 마리아의 말과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과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 대답은 소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부모가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50절)


  이것은 예수님에게 또 하나의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통해 여러 차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은 예수께서 당하신 또 하나의 고난이었습니다.


    순종


  답답하고 슬프셨을 테지만, 소년 예수는 성전을 떠나 부모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셔서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상)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사람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부모와 선생과 지도자의 권위가 무너지고 약화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반항하기도 하는데, 특히 부모가 잘못 했다고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가 깨닫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전과 모범이 됩니까?


  믿음이 성숙된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잘 순종합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잘 순종합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부모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는 지도자들에게 잘 순종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온전한 성장


  누가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성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셨고, 다른 사람들처럼 성장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온전하게 성장해 가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지적으로(지혜), 육체적으로(키), 영적으로(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심), 사회적으로(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심) 온전히 성장해 가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성숙해 가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길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상)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성장해 가시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모습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성장해 가길 바랍니다. 어렸을 적에는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자라서도 그렇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도록 말씀으로 잘 양육하지 못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성도의 온전한 모습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하셨으나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이와 비슷한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기록했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4:43)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22:37)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24:7)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기를 갈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해야 합니다. 아직도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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