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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말테 <7> 결혼 약속 지키려 한국 보내 줄 선교회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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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여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매일 독일 장벽이 무너지고 열리는 장면이 방송됐다. 한반도가 곧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흘렀다. 난 곧 한국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독일로 돌아간 뒤 결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한국으로 파송해 줄 선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1991년 베를린 선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과 결혼했음에도 비자를 받지 못했다. 기장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독재타도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베를린 선교회는 1980년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당시에는 한국에 가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신대학교에서 나를 독문학과 객원교수로 초빙하는 메일이 왔다. 다시 비자를 신청했다. 두 달 후 비자가 나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1992년 5월부터 베를린 선교회에서 일하며 한국으로 파송받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과정은 특별히 없었다.

다만 우리는 영국 버밍엄에서 영어 훈련을 받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가 되기 위해 선거운동 중이었던 콘라드 라이저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손자도 만났는데 그가 무서운 말을 했다. “중국에선 생명의 가치가 낮다(Life is cheap in China).” 한국도 그런지 궁금했다.

1992년 8월 중순 한국에 도착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다. 연세대 앞에는 학생들이 거의 매일 데모하다시피 했다. 시내는 최루탄가스 냄새로 가득 찼다. 아내와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걱정 없이 정치 이야기를 했지만 친구들은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사람들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희망으로 가득 찬 느낌이 났다. “미래가 밝다”는 말이 유행했다. 난 군사정권 말기만 경험한 셈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만난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했던 활동을 이야기해줬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것 같아 아쉬웠다.

나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테라스하우스에서 사는 꿈을 꿨다. 실제로는 서울 상도동 처가 근처에 106㎡(약 32평형) 신축 빌라 하나를 구했다. 좁았지만 많은 손님을 초청했다.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집 뒤에 사자봉이 있었다. 새벽마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기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나중에 새벽기도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먼저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연세대 어학당에 다녔다. 거기에서 일본 대만인을 비롯해 여러 한국 교포와 함께 배웠다. 서양인은 거의 없었다. 가르치는 속도가 매우 빨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1993년 봄학기부터 독일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다른 어학원으로 옮겼다. 이제는 닷새가 아니나 사흘만 수업을 들으면 됐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는 서양인이 배우기에 참 어렵다. 머리가 많이 빠졌고 남은 머리도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이 고생 덕분에 내가 지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정리=이현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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