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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다머 영향사 해석학

첨부 1


과 목: 현 대 신 학

교 수: 윤 동 철 님

 

제 목 : 가다머 影響史 解釋學

 

 

 

 

 

 

 

 

번: 987209

성 명: 박상기

 

 

 

聖潔大學校 神學大學院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1-1 해석학이란?

1-2 훗설,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

1-3 가다머의 해석학의 출발점

 

Ⅱ. 가다머 영향사 해석학

2-1 진리와 방법

2-2 근대미학 비판

2-3 예술품의 존재론

2-4 이해의 역사성

2-5 영향사의 의식화

2-6 해석학적 존재론

1) 해석학적 경험의 대상의 언어성

2) 해석학적 경험의 수행 적용의 언어성

1.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인 언어

2-7 가다머의 신학적 함축성

Ⅲ.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

 

Ⅳ. 가다머의 영향사 해석학의 입장

 

Ⅴ. 참고문헌

Ⅰ. 들어가는 말

1-1 해석학이란?

해석학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헤르메네웨인:v. hermeneuein〉에서 유래하며 표현한다라는 뜻을 가진다. 명사형태는〈헤르메니아:n. hermeneia〉로서 해석의 뜻을 지닌다. 동사형태와 명사형태의 위에서 말한 두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 신화가운데서 하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석” 해주는 역할을 담당한〈헤르메스〉라는 신적 존재의 이름에서 유래 됐다. 위에서 살핀 대로 해석학의 어원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해석학”이란 이해, 전달, 표현, 번역, 해석 등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으며 드러나지 아니한 감추인 뜻이 드러나는 과정과 관계되어 있어서 그 모든 뜻을 총괄하는 “해석하는 일”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석과 이해를 다리 놓는 매개물이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는 소리를 동반하는 구어 글자로 표현되는 문어, 그리고 상징이 있다. 그러므로 해석학이란 문자로 표현되어 있는 텍스트를 자르게 해석하여 그 작품에 말하려는 의미를 이해하려는 방법과 이론이다

1-2 Husserl, Heidegger와 Gandmer의 해석학

훗설과 하이데거의 결정적인 영향하에서 가다머는 이해, 해석, 번역, 통역등 해석학적 현상의 총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함을 자신의 과제로 삼으면서 해석학을 전개해 나간다. 훗설의 지향성이 하이데거에 의하여 수정, 보완된 후 그의 해석학의 분석 주제로 수용된 것이 바로 그의 탐구 주제인 해석학적 현상이며 “나는 근본적인 하이데거가 이미 초기 Freiburg 시절에 개척한 근본노선을 계속해서 추적하였을 뿐이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 더 나아가 훗설의 발생적 현상학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점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슐라이에르마하에서 Dilthey를 거쳐 훗설과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해석학적 문제의 전개라고 말하듯이 그가-하이데거로 이어지는 해석학적 문제의 전개라고 말하듯이 그가-하이데거뿐 아니라-훗설 역시-무엇보다 생활세계, 지평, 역사,등 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훗설의 발생적 현상학 때문에-그의 해석학의 선구자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는 방법적 의식 일반에 대해 거리를 취하긴 하지만 해석학적 현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훗설이 제시한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의 해석학이 일종의 현상학 즉 해석학적 현상에 대한 기술적 현상학임을 의미한다.

해석학적 현상의 총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함이라는 그의 해석학의 과제는 두 가지를 함축하는데 그것은 첫째, 사건으로서의 해석학적 현상의 발생적 구조를 밝히면서 이해가 발생하기 위한 조건을 해명하고 둘째, 해석학적 현상속에 들어있는 진리요구가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지를 해명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실은 이해 현상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그것의 정당성이 드러날 수 있다 고 밝히고 있듯이 그가 타당성의 문제에 대한 해명은 발생의 문제에 대한 해명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1-3 Gandamer의 해석학의 출발점

가다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론을 토대로 해석학적 현상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석학적 순환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이해 및 해석은 어떤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그가 하이데거의 선이해, 개념에 기초해 발전시킨 선판단에 관한 이론, 둘째, 그 어떤 해석 대상, 즉 사태는 무수히 많은 의미와 연관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관점이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그가 훗설과 하이데거로부터 물려받아 나름대로 발전시킨 의미론, 해석학적 경험에 대한 분석에 토대를 두고있는바, 유한한 인간의식에 대한 역사의 힘 때문에 특정의 역사적 상황에 속한 유한한 인간의 의식은 한 순간에 이 많은 관점에 대한 절대적 인식에 관한 이론이다.

 

Ⅱ. 가다머 영향사 해석학

2-1. 진리와 방법: 존재론적 해석학에 의한 정신과학적 해석학의 정초

현대의 해석학 이론이 발전함에 있어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사건은 1960년에 하이델베르그의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Hans Gerg Gandamer)가 저술한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출판이다. 한 권으로 된 이 책이 오늘날에도 철학적 논쟁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으며 여전히 철학 밖의 많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으며 또한 가다머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적인 전망에서 그리고 언어존재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철학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근대의 미학과 역사이해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제시한다. 가다머는 훗설에 의해 제시된 현상학의 적극적인 결실 있는 결론,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을 그의 영향사 해석학으로 전개 시켰다. 그의 영향사 해석학(Hermeneeutik der Wirkungeschichte)은 하이데거에 의해서 존재론적으로 착안된 이해론 을 다시 체계적으로 끝까지 사고한 사상으로 이해사건의 새로운 존재론이다. 그의 저서의 제목은 역설적인 의도를 내포한다. 방법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 반대로 진리는 방법적인 사고를 멀리한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정신과학적 해석학에 대한 방법론적인 정초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정신과학의 경우 진리는 결코‘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신 과학에 특유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그는 이해에 대한 존재론적인 기초를 닦은 하이데거에서부터 출발하는 새 해석학 의 기반 위에 서 있다. 해석학은 분명히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이론이다. 그러나 해석학은 계속되는 과제로서 인간의 행위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포괄한다. 이 두 규정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말을 한다는 것은 행위의 특별한 방식이며 말은 말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에 대한 이 두 견해는 보다 광범위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말과 행위 그리고 인간 창작물에 대한 이해는 그 의미를 지향하고 이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의미개념이 밝혀지기 이전에 말과 행위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인간 창작물의 의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해석학의 대상으로 확정되어야만 한다.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는 철학적 진리를 복권시키고자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진리 경험의 다양한 방식을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의 영향사적 구조에 대해서 말한다. 전자가 진리의 소여적 측면이라면 후자는 진리의 전승적 측면이다. 가다머는 철학적 반성의 권리요구를 기술(Tecnik)이 아니라 실천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한다. 가다머에 있어서 적용은 추후적인 유용한 응용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는 것 즉 있는 것에 대한 철학적 반성 속에서 이해의 구조계기로서 수행된다. 따라서「진리와 방법」은 정신과학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존재론적 해석학에 의해 정신과학적 해석학의 정초를 목적으로 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사고도 그 자신의 고전연구 외에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과의 결정적인 만남은 가다머에 에서 특히 1919년에서 1927년에 걸친 고전철학자들에 관한 강의 특히 풀라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준비되었다. 풀라톤의 변증법과 대화기술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있어서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다. 가다머의 변증법적 사고는 후기 하이데거에 의해 설명된 存在의 구조와 전기 하이데거에 의해 제시된 이해의 先구조에 기반한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세 부분의 논구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부분은 예술의 경험에 있어서 진리질문의 드러냄이다 여기서 가다머의 근대 미학주의 주관주의를 비판하면서 ”美차원의 초월성을 드러내고 예술품의 존재론을 定礎하고 그 해석학적 의미를 천명한다. 둘째 부분은 진리질문의 정신과학에서의 이해로의 확장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낭만주의 해석학 랑케와 드로이 젠 의 歷史主義, 딜타이 해석학의 歷史主義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훗설, 백작 요르크의 生의 개념에 의해서 인식론적 질문의 극복, 특히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에 의해서 해석학이 존재론적으로 정초됨을 기술한다. 가다머는 이해의 역사성의 원리인 영향사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질문과 대답의 논리인 플라톤의 변증법을 거울삼아 영향사 의식을 분석함으로써 해석학적 경험인 구조를 밝힌다. 셋째 부분은 “언어를 실마리로 한 해석학의 존재론인 전향”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언어를 해석학적 규정이며, 해석학적 수행의 규정이다. 언어는 이성 자체의 언어이며 언어의 보편성은 이성의 보편설과 더불어 발맞추어 나아간다. 이해와 해석은 언어적인 전승에 정위된다.

 

2-2. 근대미학 비판:미의식의 추상화

가다머는 진리에 관한 논구를 예술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에서 시작한다. 그는 美的(아름답다의 경험)인 것을 非美的(색깔,모양,크기)인 연관과 구분하고 고립시키는 근대 미학에 있어서의 미의식의 추상화를 비판한다. 가다머는 美체험에 구조에 있어서 형식-내용의 二分法을 거부한다. 예술작품의 미적 체험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내용도 형식도 아니라 이 둘이 합쳐져서 시행되는 사실 즉 자기의 고유한 역동력을 지닌 세계이다. 이러한 구분보다는 미적 미 구분의 원리를 주장한다. 그런데 가다머는 예술을 인식론적 과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분석한다.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는 近代美學의 주관적 사고방식은 미학을 순수형식내지, 체험의 표현에 기초시키려 했다. 따라서 이러한 주관주의는 예술품이 지니고 있는 우연적 요소와 치장적 요소를 간과하며, 그것의 고유한 작품의 세계를 도외시한다. 가다머는 이 두요소를 복권시키고자 한다. 예술작품의 만남의 체험이란 바깥의 형식의 감각적인 즐거움 속에서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 관점에서 예술품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품과의 만남으로써 나의 세계와 지평이 확장된다. 여기서 예술품은 단지 감상적 지각이 아니라 지식이 된다. 예술품과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는 낯선 우주에 들어가 우리자신이나 비미적인 요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품에의 열쇠는 가다머에 의하면 예술의식이 아니라 예술체험이다. 순수미적인 것이 남을 때까지 예술체험을 내용물에서 추상화시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예술의 존재는 미적 의식의 대상이 아니다.왜냐하면 미적 태도는 의식이 자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존재과정의 부분이며, 놀이로서 놀이에 본질적으로 귀속한다.

 

2-3. 예술품의 존재론: 예술품의 의식적 초월성

예술작품의 존재발식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놀이라는 현상에는 수많은 중요한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다머가 여기에서 미적 쾌락주의에 바탕을 둔 놀이의 미학이론을 재정립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같은 이론들을 놀이를 인간 주체의 활동으로 본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자신의 세속적 삶을 벗어나 예술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 세속을 떠난 인간 주체에서 쾌락을 준 일종의 유희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형태를 이용하는 재료를 조작함으로써 감각적 쾌락을 얻어내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간주된다. 가다머는 이러한 이론들에게서 모든 것을 인간의 주관성과 관련짓고자 하는 근대의 일반적인 오류를 발견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는 인간 주체를 강조하고 즐겁게 하는 태도나 활동을 뜻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 주체의 자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놀이의 실제를 규정하는 것은 노는 자의 생각이 아니라 놀이 자체이다. 놀이의 존재방식은 놀면서 행위하는 주관의 놀이 진행하지 않고 어떤 것이 놀고 있다고 하는 매개적 의미에 있다. 모든 놀이는 놀이 그 자체이다. 가다머는 놀이의 주관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근대미학의 주관주의에 대한 반대명제를 주장한다. 놀이는 노는 자에게는 그를 능가하는 현실로서 관람자에게는 설명으로서 나타난다. 놀이의 이유는 단지 노는 자에게 놀이 경험을 주고 놀이의 정신을 부여하는데 있지 않고 놀이 속에 의도된 능가하는 현실, 즉 형식으로 변형된 실재를 매개하는 데 있다. 놀이 속에 의도된 이 능가하는 현실 속에서 놀이의 구조와 정신이 소통되어 진다. 가다머는 이 놀이개념의 존재론적 분석을 예술품의 존재론적 설명의 실마리로서 사용된다. 예술품은 저자의 의견이나 창조적 행위에서 원리적으로 벗어나 있다. 예술품은 주관주의 미학이 시도하는 것처럼 독자의 주관성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갖는 태도에서 벗어나 해석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의 진정한 이해는 그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는 양식은 변증법적 구조이다. 작품은 단지 과거적인 것으로서 주관적인 회상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작품은 해석에 있어서 현재의 빛 속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이해는 창조적 사건으로 생각한다.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변증법적으로 매개된다. 여기에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는 순환구조를 통한 해석학적 변증법의 수행으로 존재론적 해결을 보여준다.

 

2-4 이해의 역사성: 해석학적 원리

1) 이해의 현상학

 

이해라는 말의 영역과 그 연관성을 면밀히 밝힌다는 것은 그와 연관 되어 있는 모든 술어를 의미내용 및 그와 동등한 활동범위로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도표로써 이해해 보고자 한다. 전(前) 이해

 

(V ⅲ) 설명-해석

이해 (V ⅱ) 해석학적 대상

(Vⅰ) 자료

의미연관성

 

지 상 호 지

 

이 모 주관 의미

전조

평 론 델 주관성 평

理解의現象學

A)이해 1(Vⅰ)

이는 해석학적 대상의 유형과 단순히 특별하게 만나는 방식을 말한다. 단순한 그리고 소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엔 물론이고 전문영역 등에서 해석학적 유형을 가지고 있는 소여과정의 일반내지 특수한 만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해 한다. 예를 든다면 나는 너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정적인 것은 소여성의 유형이 언제나 한 의미 등에서 특기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서 여기서는 의미이해 혹은 해석학적 이해에 관한 언급된다.

B)이해 2(Vⅱ)

이는 특수해석을 의미한다. 물론 설명과 해설도 포함된다. 이해한다란 말레 해당하는 이해력은 무엇보다도 해석학 내지 해석학적 정위된 철학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중요한 전소여성 특히 텍스트를 이러 이러하게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하는 해석은 미리 주어져 있는 의미수량적 소여성을 상대적으로 모순없는 한 의미연관성에로 귀착시키고자 한다.

C)이해 3(Vⅲ)

이는 전이해를 의미한다. 전이해라는 의미에서는 -유사한 개념들을 수두룩하다. 그러한 개념들에 관해서는 더 논급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해석학적 철학(하이데거, 볼트만, 가다머) 이 그러한 개념구상을 전개하고 있다. 즉 존재론적 명제로서 이들의 주장은 모든 존재란 어떤 것으로서 어떤 것에 관한 이해에 의해서 이미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해의 지평선 에 해당하는 전이해란 물론 해석학적 현실성영역의 구성을 위한 존재론적 기반일 것이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존재론에 의해 드러난 사람의 사실성과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지니는 이해의 선 구조를 받아들이고 현존재가 가지는 이해의 역사성의 빛 속에서 이러한 개념들을 더욱더 철저히 사고한다. 이해는 텍스트에 대한 선 개념에서 시작한다. 이 先기획은 이해과정에서 부단히 수정되어 진다. 그러므로 이해는 선입견을 의식하도록 추구해야하며 고유한 선 이해을 규제해야 된다. 선입견은 의식적인 인식행위보다 해석학에 대해서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 전통은 우리의 속에서 사고하는 사고의 지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만 되돌아가 과거의 용어 속에서만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 텍스트가 우리에 대해 갖는 그 의미는 부분적으로는 현재에 미치는 전통 속에서의 우리 위치에 의해서 형성되어진다. 그러므로 해석학적 훈련된 의식은 텍스트이해의 유용한 선입견과 유용치 않은 선입견을 구분해야만 한다고 가다머는 말한다. 여기서 가다머는 시간간격의 개념이 지니는 해석학적 의미를 해명한다. 시간 간격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갖는다. 소극적 측면은 오류의 원천을 걸러내는 기능이다. 적극적 측면은 새로운 이해의 원천을 드러내는 기능이다. 시간간격은 일방적인 성격에 치우친 선입견을 소멸하도록 할 뿐 아니라, 바른 이해를 가져다주는 선입견을 그 자체로서 드러나도록 한다. 당대를 지배하는 선입견으로부터 이해와 해석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이상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거의 업적을 현재의 척도에 의해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적 인식의 목적은 오로지 개인적인 생각이나 가치에서 벗어나 과거의 사상과 가치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가짐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통합의 해석학적 과제에 있어서 이해 역사성의 구조는 적용의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 준다. 적용은 오래 동안 역사적 해석학과 문화적 해석학에 과정의 통합하는 구성 부분으로 텍스트이해의 전 경험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한다. 적용이란 텍스트의 의미를 현재와 관계시키면서 해석하는 기능이다. 가다머에 있어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그러므로 항상 이미 텍스트를 적용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모든 순간에 있어서 즉 모든 특수한 상황에 있어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가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은 낭만주의 환상-텍스트는 저자와의 공명에 입각해서 해석된다 을 거부한다. 텍스트 이해는 저자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텍스트의 사실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법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은 무화적 해석에 도움되는 모델을 제시한다고 본다. 이 두 해석학은 해석방법을 적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텍스트의 사실에 정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해석은 자기의 사고를 관찰하려고 하기 보다는 텍스트의 요구를 경청한다. 이 두 해석학에 있어서 해석자는 텍스트를 지배하려고 의도하지 않고 법의 의지 내지 신의 뜻을 경청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해석자가 실존주의자처럼 자기 전체를 질문으로 세우고 텍스트 이해를 이 전제 위에 세워진 방법에 맞추도록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해석자는 그의 선 이해를 텍스트 자체의 사실의 빛 앞에서 검토한다. 그러므로 가다머는 텍스트의 지배하는 요구에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 법해석학과 신학적은 참 모범이다 고 말한다. 법의지의 해석, 신의 약속에 대해 해석이라는 것은 명백히 지배형식이 아니라 봉사형식 이다 이 봉사형식에 있어서 해석은 적용을 포함하고 있다. 적용은 주어진 텍스트가 우리를 향해 갖는 일반적인 것 자체의 현실적 이해이다. 이해는 영향의 방식으로 증시되며 그러한 영향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가다머는 영향사 의식을 분석한다.

2-5 영향사 의식의 분석: 해석학적 경험의 구조.

가다머는 전통과 시간간격의 영향을 영향사(Wirkungsgeschichte)로서 기술한다. 영향사는 이해 자체의 과정에 대한 역사의 실제적인 작용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영향사의 작용을 벗어날 수 없다. 가다머는 영향사 의식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나-너-관계의 유형론을 제시한다. 첫째 유형은 타지를 場 안의 객관적으로 다룬다. 여기서는 他人格은 어떤 者의 경험장 내에서 어떤 특수한 것 객관이 된다. 이 유형은 타자를 귀납적 사고의 목적론적 해석의 관점에서 객관으로 취급한다. 여기서 타자는 자연과학 방법에 도달된 객관성이 되어 버린다. 이 유형이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관계에 적용되면 이러한 이해방식은 방법주의와 객관주의에 빠져 버린다. 이 유형적 사고는 전통과 유리되고, 전통에 대한 모든 영향에서 분리된다. 이것이 영향사적 의식의 기반이 될 수 없다. 전승과 끊임없이 우리의 역사적 삶과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결단코 우리 이해와 단절될 수 없다. 둘째 유형은 타자를 반성적 투영으로 다룬다. 여기서는 타자가 인격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러한 인격적 관계는 나 관계성의 방식으로서 나와 반성적으로 규정된 너의 관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자기 관계성은 나-너-관계의 변증법이 가져다 주는 변증법적 가상에서 유래한다. 나-너-관계는 직접적 관계가 아니고 반성적 관계이다. 여기서 관계의 상대자는 자기의 관점에서 타자의 권한을 인정해서 타자가 자기의 이해하는 것보다 그를 더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타자는 실재적 오히려 직접성을 상실하고 나의 반성적 투영 안에 갇히게 된다. 이러한 유형적 사고는 선험철학과 실존주의에서 지배적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식은 타자를 반성적 투영의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구체적인 특수성 속에서 이해한다. 역사적 의식은 전통과의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과거를 타자성 속에서 인정한다. 과거의 타자성은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성의 탈락이 아니라 역사적인 유일성이다. 셋째 유형은 타자를 말하는 전승으로 다룬다. 여기서는 타자는 나에게 진정으로 말하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인정되어진다.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진정한 나-너-관계가 여기서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 방식은 지배하기보다는 경청하려고 하고 타자에 의해서 수정되고자 하는 개방적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가다머가 설명하려고 하는 영향사의식이다. 가다머에 있어서 이러한 영향사적 의식이란 영향사라는 개념에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영향사란 역사주의라는 전통개념에 대한 해석학적 반성에서 유래한다. 뿐만아니라 영향사 의식은 전승을 향한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가다머는 이 영향사의식을 지평융합의 직유로써 설명한다. 전승은 해석자에 대해 마주 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의미지평을 규정한다. 이 지평은 닫혀 있거나 페쇄되어 있지 않고 해석자가 움직이는데 따라 움직인다. 지평은 우리가 그 속으로 움직이며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어떤 것이며 움직이는 개인에 따라 변화한다. 전통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지평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 해석학적 상황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현재지평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 해석학적 상황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현재지평을 규정하는 선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진정한 이해는 과거지평과 현재지평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지평융합이 일어날 때 수행된다. 영향사의식은 텍스트를 단지 과거에 있는 상대자로 파악한다. 영향사 의식은 해석자의 현재지평과 자기이해를 진리의 절정으로 간주하지 않고 텍스트 안에서 진리(사실)가 요구하는 바(텍스트 사실)에 대해 열려 있다. 해석학적 경험은 나-너의 인격적 관계속에서 대화 또는 변증법의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가다머는 해석학적은 개방성의 논리적 구조에 관해 잘문한다. 모든 경험에는 질문의 구조가 전제되어 있다. 질문행위 없는 어떤 경험도 없다. 질문의 설정은 질문적 것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드러난 존재를 전개시키는 로고스는 그러한 한에 있어서 이미 항상 대답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질문과 대답의 변증법 구조를 말한다. 질문이 설정되는 한에 있어서 질문은 항상 바른 것과 그른 것 양자를 포괄한다. 질문의 기술로서의 변증법은 질문할 수 있는 자가 그의 질문 다시 말하면 개방에서 방향을 확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만 증명된다. 따라서 변증법은 실제대화를 이끄는 기술이요 사고의 기술이다. 이 대화법은 질문과 대답의 필연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대화법은 질문과 대답의 구조를 통해서 공통된 관점에서 도달한다. 여기서 언어는 질문과 대답, 줌과 가짐, 차이와 일치를 통해서 의미소통을 산출한다. 해석학적 과제는 이러한 대화법을 통해서 텍스트와 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와의 대화는 낯설은 매체에의 전이가 아니라 반대로 근원적 의미 소동의 재생을 의미한다.

 

2-6 해석학적 존재론:해석학적 경험의 모체와 세계경험의 언어

해석학적 경험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대화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대화는 대화를 수행하고 있는 대화상대자 각각의 의지에 따라 이렇게 진행될 수도 있고 저렇게 진행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화가 한 사람의 물음에 대한 다른 사람의 대답으로 이루어 지는 한 대화의 진행방향은 대화 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대화 그 자체에 빠져 있으며, 대화 그 자체의 방향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가다머는 대화란 그 자신의 고유한 정신을 가진다. 고 표현한다. 해석학적 경험에 있어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해석학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바로 언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는 해석학적 경험의 매체이다.

1) 해석학적 경험의 대상의 언어성

해석학적 경험의 대상은 전승이다. 전승이란 과거적 세계를 담지하고 있는 현존물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적에서는 전승의 본질이 언어성을 통해 특징지어 진다 는 사실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즉 전승은 그것이 신화 전설 풍습 관습 등에게 생명성을 부여하는 직접적인 말로 전달되어진 것의 형식으로 있든지 아니면 읽어서 이해 하려는 모든 독자들에게 똑같은 기호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문자적 전승의 형식으로 있든지 간에 단순하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아니라 위탁되어 맡겨진 것이다. 우리는 전승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을 우리의 말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해석이다.

2) 해석학적 경험의 수행작용의 언어성

모든 이해는 언어적인 과정으로 수행된다. 역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진실로 과거의 개념 속에 들어가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개념과 자기고유한 사고 사이의 매개를 내포한다. 언어는 단지 대상만이 아니라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모든 이해를 포괄하는 언어는 사고 즉 해석의 과정 속에 깊이 침투해서 우리로 하여금 언어가 내용적으로 전승하는 것에서 눈을 돌려서 언어를 형식으로만 생각할 수 없도록 해석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언어는 이해 자체처럼 포괄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가다머는 언어 의 본질을 서구정신사를 통해서 조명한다. 가다머는 언어본질에 대한 기호 이론을 거부한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참여하는 살아 있는 로고스이다. 가다머는 말의 형상은 사유반성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의 산물이며 따라서 인간정신이나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상황과 존재의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체험을 기술하기 위해서 이미 상황에 속하는 말들을 사용한다. 그것은 임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체험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1. 해석학적 존재론의 지평인 언어

가다머는 언어를 세계경험으로 규정한다. 가다머는 훔불트의 언어관-언어는 세계관이다-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훔불트 언어관의 출발점은 언어란 인간정신의 산물이라는 주관주의이다. 그는 언어형성의 인간적인 원사건(언어 공동체)이 각기 세계관을 반영하는 내적 형식에 관해 논구했다. 가다머는 해석학적 경험에 있어서 언어의 중심을 말한다. 해석학적 현상에 있어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근거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의 유한성이며 언어성은 영향사 의식의 지평이 된다. 그러므로 언어에의 참여 내지 귀속성은 해석학적 경험의 실재근거이다. 언어에의 참여 내지 귀속성이란 구체적으로 언어를 통해서 듣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귀속한 세계의미의 깊은 차원에 도달한다 이 깊은 차원이란 전승이 현재 사는 자들에게 도달하는 언어존재론적 차원이다. 해석학자는 이론가가 아니라 체험가이다. 이 해석학적 경험은 언어성에 기초되고 전승된 텍스트의 의미와 대화론적인 만남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여기사 가다머는 언어의 사변적 구조에 관해 말한다. 이 사변적 구조는 해석학적 존재론의 가능 근거이다. 여기서 사변적 구조란 언어의 유한성이 사실 자체를 표현하는 무한한 과정을 말한다. 가다머는 언어의 목적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중심을 문제삼는다. 가다머는 존재자 전체와 관련하여 언어가 인간의 유한한 역사적 본성을 그 자신과 매개시키고 또 세계와 매개시킨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중심이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언어란 인간의 세계경험의 근거가 아니라 매체이다. 즉 가다머에게 있어서 언어란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절대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유한성의 흔적이다. 이러한 언어의 유한성과 인간의 역사적 경험의 유한성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에 바로 언어의 중심이 있다. .

가다머는 해석학적 현상은 보편성을 갖는다. 해석학적 존재는 언어요 이 언어는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역사적 의식에 있어서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는 보편적 매체이다.이러한 언어의 보편적 사변적 구조는 단지 미학적 경험이나 역사적 경험에만 해당하지 않고 모든 세계 경험의식에 적용된다.

 

2-7 가다머 해석학의 신학적 함축성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이해에 관한 존재론과 후자의 현대 인간주의와 기계 기술학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해석학을 존재론적이고 대화론적이고, 사변적이고, 언어정위적으로 전개시켰다. 가다머는 이미 이해의 사건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질문과 대답의 대화론으로 전개되는 변증법적 해석학으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해의 본질은 조작이나 규제에 있지 않고 참여와 개방에 있으며 지식이 아니라 경험에 있으며 방법론이 아니라 대화론에 있다. 이해는 더 이상 인간의 인식행위가 아니라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이 존재론적 사건은 지평의 긴장과 융화을 내포하는 주관과 텍스트와의 역동적인 상호관계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다머의 해석함이 지니는 신학적 함축성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가다머가 강조하는 텍스트의 사실은 성서 해석학 및 신학적 해석학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성서 해석학은 가다머의 해석학이 그 목표로 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서의 사실” 곧 성서의 내용인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텍스트 사실 이란 신학적으로는 오직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개혁주의적 성서해석학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성서해석의 원리는 현금에는 쥬리히의 에벨링 튜방겐의 신약학자 수툴마허에 의해 받아지고 있다. 수툴마허는 케제만의 제자이긴 하지만 케리그마신학, 경건주의와 성서적으로 정위된 루터교 신학에 깊은 동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는 가다머가 주장하는 텍스트 우위성을 받아들이면서 ‘성서 텍스트와의 합의 해석학“을 전개하고 있다. 가디머의 명제는 성서 해석학에 있어서 역사적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해석학(실존론적 해석)을 극복하는 길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영향사의 원리 는 성서 해석학에 있어서 소박한 역사적 객관주의와 비판주의가 지니는 객관주의적 일면성을 극복하는 길을 시사하고 있다. 현대의 역사적 성서비판이 지니는 결정적 취약점은 객관화시키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고자 함으로써 성서가 해석자에게 부여하는 영향사적인 측면-전통적 권위-를 도외시 하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해서 가다머의 영향사 원리인 지평의 융합과 지평의 긴장은 텍스트가 해석자의 의식에 영향사적으로 부여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전통과 관계없는 텍스트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성서해석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성서해석의 전통과 역사와 밀접한 관계속에서 수행되어진다. 해석자는 이 성서 해석의 전통 속에 있다.

셋째, 가다머의 해석학이 신학적 해석학에 주는 한계점은 성서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단순히 가다머의 영향사적 의식으로 천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사고는 전통과 권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므로 성서 텍스트 자체가 교회사를 통해서 지녀온 계시적 특성을 수납할 수 있는 여지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헌을 오직 전승사 속에서만 보고 이 전승사 속에서 구속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보지는 않는다. 가다머 해석학을 성서 해석학 및 신학적 해석학에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하나의 근본적인 신학적 태도의 변경이 요청된다. 그것은 신앙의 관점에서 전승사와 대화하는 태도이다. 이 신앙의 관점에서 전승사 및 텍스트를 볼 때 해석자는 더 넓은 해석학적 상황과 지평 속에 들어가게 된다. 전승사 및 성서 텍스트는 삼위일체 신의 역사섭리와 구속행위 아래 있기 때문이다.

 

Ⅲ.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논쟁

1973년 폴 리꾀르는 “해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판”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7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수르캄프 출판사에서 출판된 이론 논쟁서「해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논의 초점이 되는 가다머의 영향사 해석학과 하버마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사이에 서로 대립으로 평행선을 긋고 있는 해석학 논쟁에 대해서 리꾀르는 그의 논문에서 가다머 해석학의 착상인 참여의 계기와 하버마스 이데올로기 비판의 착상인 비판적 계기를 해석학적 과정의 변증법적 계기로서 연결시키는 제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같은 해 리꾀르는 그의 논문 윤리와 문화-하버마스와 가다머의 대화을 발표하면서 양자의 착상을 윤리와 가치의 맥락에서 토론하고 있다. 해석학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논쟁은 1960년 출판된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대해서 1967년 하버마스가 그의 저서「사회과학의 논리학에 관하여」에서 가다머는「修辭學,解釋學,이데올로기 비판」의 입론, 곧 선판단, 권위와 전통의 복권과 영향사 의식이론을 비판함으로써 발단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성의 힘을 강조하면서 권위와 인식은 병합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가다머는 전통자체가 선판단의 타당성의 유일한 근거라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에 내제되어 있는 독단적인 폭력을 깨뜨리는 ‘반성의 힘’ 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버마스는 비난한다. 하지만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대립은 相剋의 논리이다. 가다머는 하이데거(1890-1976)의 논의를 발전시켜, 해석을 방법론에서 철학적 해석학 존재론적 해석학을 정립시킨다. 데리다는 해석학적 他者 이해를 반대한다. 데리다와 가다머에게는 언어 또한 서로다른 해석이 내려진다. 전승의 존재방식인 언어는 가다머 주장처럼 객관적이지 않고 지배와 사회적 힘의 매체 로서 조직된 폭력관계의 합병화에 봉사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문제의 보편성을 세가지 次元에서 제시한다.

첫째, 해석학의 보편성은 일반 학문이 요구하는 보편성과 동일하다. 해석학은 학문적 탐구와 동일한 영역을 갖기를 요구한다. 보편성에 대한 요구는 학문지식의 가능성의 조건에 제기되는 비판과 동일한 근거 위에서 제기된다. 이 보편성은 學問이 구축한 기계기술의 객관적 세계를 우리의 경외를 요구하는 우리 존재의 근본 질서에 다시 연결시키는 해석학의 과제에서 나온다.

둘째, 해석학은 아주 구체적인 영역으로부터만 보편성에의 요구를 제기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영역으로부터 보편적인 영역으로의 비영역화 과정에는 체험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소외경험-미적 역사적 또는 언어적 의식 속에서 소외 경험이 발견된다. 방법론적 소격화에 대한 투쟁은 해석학을 비판의 비판으로 변형시킨다. 메타비판인 비판의 비판은 미적, 역사적, 언어적, 관계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합의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셋째, 해석학의 비영역화를 허용하는 보편적인 요소는 언어이다. 해석학적 원현상이란 모든 진술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언어란 단어의 체제가 아니라 일상언어와 우리 존재를 만드는 탁월한 언어를 말한다. 1970년 가다머의 생신을 축하하는 논문집「해석학과 변증학」에서 하버마스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하버마스는 일상언어적 상호소통 구조에 대한 이해에는 가다머가 제시하는 해석학적 반성이 그 기능을 발휘하나 참여자들이 의사소통 훼방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상호소통에는 해석학적 반성이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제시하는 對話 속에서 도달하는 담지적인 合意에는 동의하나 가다머가 이 담지적인 합의를 언어전승을 통해서 선행적으로 신뢰될 수 있는 합의로 규정하는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승적으로 내려온 신뢰된 합의는 사이비 상호 소통의 결과 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적 비판에 대한 언어 전승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하는 가다머의 영향사적 사고는 해석학적 경험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는 이미 이해에 대한 先판단 구조에 대한 가다머의 통찰은 사실적으로 이룬 합의와 참된 합의 사이의 一致를 만들지 못하고 언어의 존재론화와 전승 연관의 실체화 로 나아가 버렸다고 비판한다.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서 통찰과 맹목화 사이를 구별하고 체계적으로 왜곡된 상호소통의 가능성 조건에 메타해석학적 지식을 수용하여 이상적인 언어상황을 이성적인 담론을 위한 규제적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Ⅳ. 가다머의 영향사 해석학의 입장

그러나 가다머의 영향사적 의식에 의하면 하버마스가 제창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은 영향사적 의식으로 전승 속에 귀속하고 있으므로 메타비판적 의식이 거기서 출발할 수 없는 零點(zero point)이란 없기 때문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歷史는 나와 나의 반성에 선행하고 있으며 내가 나속에 귀속하기 전에 나는 歷史的 傳承에 귀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입견, 권위와 전통의 복권이란 인간 주체성과 내면성의 지배, 곧 反省의 기준에 저항하면서 반성의 계기에 대한 역사적 차원의 우위를 선언하고 있다. 선입견은 권위에 대한 선입견에 뿌리박혀 있다. 계몽주의 이래로 권위와 맹목적 복종 사이의 혼동이 일어났다. 가다머에 의하면 권위란 하버마스가 비판하는 것처럼 명령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他者가 더 좋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수납하는 숙고와 이성 자체의 행위에 근거한다. 가다머의 영향사 의식을 네 가지 관념에서 규정하고 있다.

첫째, 영향사는 역사적 간격의 조건 아래서 일어난다. 그것은 먼 것의 가까움이다. 따라서 간격이 과거와의 우리의 충돌을 끝내고 자연과학의 객관성에 비교될 만한 상황을 창조한다고 보는 것은 환생에 불과하다. 영향사 개념에 있어서는 과거의 타자성의 역설이 회복되고 있다. 영향사는 역사적 간격으로부터의 영향이다.

둘째, 영향사 개념은 유한성의 존재론에 귀속한다. 역사적 존재는 결코 자기지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가다머는 헤겔보다는 하이데거를 따르고 있다. 영향사 의식에 의하면 총체성을 단한 번만에 일별할 수 있도록 하는 개관은 없다. 歷史的 준재란 헤겔체계속에서는 지식 개념보다는 오히려 實體 개념에 상응할 수 있다.

셋째, 역사적 이해는 수축하거나 확장하는 지평을 지니고 있다. 마치 풍경이 가까이 멀리, 넓히 전재되는 것처럼 역사적 이해도 그러하다. 역사적 이해에는 우리를 절대로 제약하는 상황은 없다. 객관적인 소격화는 역사적 기획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소격화는 관점의 긴장과 현재에 대한 참된 언어를 전승하는 전통의 요구를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지평이란 단지 나의 지평을 잊고 타자의 관점을 차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동화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절대적 개관으로 취급될 때 어떤 것에 관한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는 텍스트의 권리를 박탈한다. 지평이란 오히려 우리가 그 속으로 들어가며 우리와 더불어 전진하는 어떤 것이다.

넷째, 지평융합이란 他者와 나 자신의 관점과 긴장의 변증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지평융합 개념은 변증법적 개념으로 타자의 객관화는 나 자신을 잊음으로써 想定된다고 주장하는 객관주의와 보편 역사가 유일한 지평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절대적 지식 사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 존재는 패쇄된 지평 속에서도 유일한 지평 내에서도 있지 않다. 가다머는 그러나 니체처럼 변천하는 다양한 지평들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라이브니츠의 단자론에서처럼 모든 관점을 포괄하는 유일한 지평의 이념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일한 지평은 이념일 뿐 결단코 스스로를 파악하는 자기 지식에 이르지는 않는다. 선입견은 현재의 지평으로서 과거 텍스트와 독자의 견해 타자와 나 사이의 긴장 속에서만 변증법적으로 매개하면서 작용하고 역사성을 구성한다. 영향사 의식 개념은 철학적 반성자체가 인간이 살고 만드는 역사적 제약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존재의 과거의 역사에의 연결과 귀속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해방적 취급에 선행하고 그것을 전개한다. 그러므로 가다머의 영향사 의식개념은 하버마스의 해방적 인식의 개념, 곧 무제한하고 지배받지 않는 상호소통의 이념을 구조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Ⅴ. 참고문헌

1. http//KG21.net.~/ kachi.com

2. http//KG21.net~/ yahoo.com

3. http//KG21.net~/ hanmir.com

4. 백승균,「해석학과 현대철학」(서울:철학과현실사,1996)

5. 이구슬,「해석학과 비판적 사회 과학」(서울:서광사,1996)

6. 최윤식외2,「하이데거에서 가다머로」(서울:조명문화사,1989)

7. 한스 인어이헨저.문성화역,「철학적 해석학」(서울:문예출판사,1998)

8. 리차드E.팔머저.이한우역,「해석학이란 무엇인가」(서울:문예출판사,1995)

9. 김영한,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서울:박영사,1992)

10.뤼디거부브너저.김우철역,「현대독일철학」(서울:문예출판사,1989)

11.알뷘 디이머 저.백승균역, 「철학적해석학」(서울:경문사,1982)

 

 

“ 인터넷 사이트에서 발췌한 내용의 글입니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를 만난 사람들, 금년 2월11일 철학자 가다머는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미국의 철학자 리차드 로티는 30년 처음으로 프신스턴에서 가다머를 만났다. 본지는 오늘 출간되는 레클람 문고“한스-게오르크 가다머를 만난 사람들”에서 로티의 회상을 발췌하여 싣는다“

 

내가 처음 가다머를 만나 것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프린스톤과 워싱턴을 오가며 미국 카톨릭대에서 외래강사로 강의를 맡고 있었다. 강좌의 주제는 월프리드 셀라스의 철학이었다. 셀라스는 미국 분석철학의 대표주자 중 한사람이지만 난삽한 글쓰기로 인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분석철학에서 경험주의 추방하려면 셀라스의 작업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복잡한 셀리스의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려 하였다. 내가 바란 것은 토마스주의 뿐아니라 경험주의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그 대신 셀라스의 자연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깊이 공감을 받았지만 과연 내 강의가 아주 명쾌하고 또 흥미있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청강생의 수는 점차 줄어 갔는데, 유독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는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점잖게 생긴 신사였는데,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은퇴한 경영인으로 자유시간을 뜻있게 보내려고 철학을 재미로 공부하려는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이 바로“진리와 방법”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학기에 가다머카톨릭대의 외래교수였고 미국철학계의 동향을 보려고 다른 사람의 강의를 참관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이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정년퇴임했고, 정기적으로 미국의 대학들에 출강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세계적인 철학자 중 한사람이 무명의 젊은 외래강사의 강의를 청강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누구 앞에서 강의를 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가다머와 더 알게 된 뒤에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천성적으로 선량한 성격과 몸에 밴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접하면 저절로 초조함도 사라지고 그의 세계적 명성도 잊게 된다. 시간이 흘러 가다머는 플린스턴대와 그다음엔 버지니아대에 강의 초빙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빼곡히 들어 찬 강의실에서 청종들을 매료기켰고 강의 후에 학생들과 동석하여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는 친절을 보였다. 가다머는 포도주를 좋아했다. 당시 내가 준비했던 포도주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거푸 술잔을 비웠다. 학생들도 덩달아서 술잔을 비워 나갔다. 10시반에 나는 포도주 상점이 문을 닫디전에 한 박스를 더 사두려고 급히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밤 두시 마지막 학생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다머는 신나서 얘기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향연의 끝과 비교하는 건 좀 진부한 감이 있지만, 하지만 거의 그의 지경이었다. 지난 학기에 나는 스텐포드대에서 세미나 하나를 개설했다. 주제는 가다머의 저작과 그의 철학적 동지인 도날드 데이비슨의 작업을 비교하는 것이었다.(데이빗슨은 셀라스의 이론 만큼 독창적이고 또 영햑력이 큰 사상을 전개한 유일한 미국 철학자이다) 나는 가다머의 역사주의를 데이빗슨에 의해 대표되는 것과 동일한 철학적 흐름의한 변증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비재현주의적(nichtrepraesentational)철학의 흐름이다. 이 철학은 주관-객관 모델(특히 주관을 통한 객관의 정확한 모사로서의‘탐구’라는 생각)을 제거함으로써 탐구를 ‘대화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내 해석에 따르면 가다머는 ‘방법’(이것은 어원적으로 이미 주-객 모델을 전제하고 있다) 데이빗슨도 마찬가지로 방법에 대한 철학자 반대자 중 한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사상가는 동일한 철학적 논적에 대항하는 공동으로 맞서고 있는 사람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학새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런 종합적인 파악에 따른다면 분석철학 내에서의 경험주의의 종언과 셀라스와 데이빗슨이 옹호한 비재현주의적 언어해석은 하이데거의 소위“형이상학”비판과 맥이 상통한다. 두 사람의 시도는 결국 인간의 언어와 대화의 과정에 독립해서 있는 어떤 것(역자:‘객관적인’진리)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비판하려는 철학적 흐름에 속에 있다. 이런 시도에 대한 가다머의 인간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대화 이외의 더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이런 종합적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다음에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할 때에는 여기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역주:여전히 가다머가 정정하는 뜻?)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취하리라, 과거의 모든 만남에서 언제나 새롭게 얻었던 인상은 가다머는 자신의 정신적 지평과 동료의 정신적 지평을 융합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철학자 라는 사실이다/ 가다머의 현재 한국인 나이로는 10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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