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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다머의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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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해석학

노상윤

 

Ⅰ. 여는 글

 

해석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종교적 텍스트를 해석하는 범위에서 현대에는 그 관심이 언어학, 철학, 미학, 윤리학 등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확대되는 전망 속에서 해석학에 대한 정의도 다양한 면을 가지게 되었다. 슐라이엘마허에 의해 ‘텍스트의 이해의 기술’로 정의된 이후, 해석학은 ‘정신과학을 위한 방법론’(딜타이), ‘인간 이해의 객관성의 추구형식’(베티), ‘전이해 구조로서의 실존파악’(하이데거), ‘역사의식(전층)에의 참여’(가다머), ‘케리그마의 비신화화’(불트만), ‘이데올로기 비판’(하버마스), ‘구조적 분석을 통한 텍스트의 탈상황화 및 재상황화’(리꾀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학적 논쟁은 한편 언어학에서 철학적 인식론으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그리고 다시 언어학으로의 복귀 등 순환적 성격을 나타낸다. 주체와 객체간의 분리가 문제가 되었는가 하면 다시 이 둘을 어떻게 종합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심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 먼저 이해하고 가다머의 주장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을 가한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중심으로 해석학의 논쟁을 다루려고 한다.

먼저 밝히는 바는 본인이 이 두 사람의 저작을 직접 접하지 못했다는 것이고-일부 번역된 논문만 각주와 참고문헌을 통해서 소개할 것임- 주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소개한 다른 저자들의 작품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인의 이해가 어쩌면 그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연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성경)를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고민을 하고, 그리고 지금까지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 것에 대한 자세를 반성하며, 한편으로 미래 지향적인 성경 해석에로의 도전이 되었으면 한다.

 

Ⅱ.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그 목적이 방법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데 있다. 그리고 그의 해석학 이론은 정확한 주석학적인 기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투명하게 해명해 주는 인간 형상의 존재론적 구조와 그 토대를 해명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가다머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지평융합”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1. 인간의 세계 경험과정으로서 해석학적 과정

 

가다머에 있어서 해석학적인 현상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고 진리의 문제이다. 그의 저자 「진리와 방법」에서 그는 해석학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해석학의 문제는 해석학의 역사적 기원에서 볼 때, 방법이라는 개념이 현대과학에 부여하는 그런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텍스트의 이해와 번역은 단순한 과학의 관심만이 아니라, 분명히 총체적 인간의 세계경험의 일부인 것이다.”

해석학은 인간과 세계와 존재가 해명되는 과정 곧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이다. 이러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밝힌 것처럼 어떤 방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이론에 스며 들어와 있는 방법론주의(methodologism)와 인간 주체성의 신화(the myth of human subjectivity)를 극복해야 한다고 김경재 교수는 말하고 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서는 미술, 음악, 그림, 조각 등 예술 작품과 연극공연을 경험하는 것, 문학작품 세계를 추체험하는 것, 역사적 문화전통의 정신적 삶의 내용을 교육과정을 통해 내면화하는 것, 법률 조항 및 종교적 경전을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경험하는 것, 윤리적 실천을 통해 현실을 변혁하는 것 등이, 모두 인간의 독특한 해석학적 이해의 사건이며, 이해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이해란 선험적으로 독립적 실체인 자율적 자기의식이 방법론적으로 기술을 발휘해서 객관적으로 자기와 대결해고 있는 대상물을 포착, 조정, 요리하는 자기의식의 주체적/능동적 정신활동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를 환경으로서 갖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인간의 해석학적 반응과 해석학적 경험의 방식이 세계를 구성한다.

 

2.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과 이해의 조건으로서의 선입견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기초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현존 이해, 언어의 존재론, 근대적 주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깊은 이해 등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하이데거, 가다머 계통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말할 때, 세계란 무엇인가? 세계는 주관이나 객관을 앞서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의미가 그 안에서 이해되고 생성되는 삶의 그물망이다. 세계란 물고기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바닷물이나, 참새가 그 안에서 날고 있는 공기와 같아서 매우 포괄적인 생활세계의 의미연관구조의 총체적 맥락이다. 세계란 이해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삶의 존재구조이다. 이해는 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가능하다. 세계란 모든 이해에 있어 근본적이다.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근대철학의 주체주의를 거절하고 인간을 철저히 시간성, 역사성, 과정성, 관계성에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인간의 역사성과 “세계-내-존재성”을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한 것이다. 자기 검증 과정을 거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자명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성의 초점은 깨진 거울인 것이다. 개인의 자의식이란 닫혀진 역사적 삶의 원주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바로 그 점이 왜 개인의 선이해가 인간의 자각적 판단을 훨씬 앞서서, 인간 존재의 역사적 실재성을 구성하는가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인간 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파악을 하기 때문에 선판단(prejudice)을 인간 존재의 “역사적 실재성”의 의미로 본다. 그리고 이것이 이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선입견” 또는 “선판단”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용법이 계몽주의에서 따온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선입견, 즉 선판단은 전통을 통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종종 그가 어떤 가치나 태도, 또는 관례를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함을 통해서 영향을 미친다. 가다머는 모든 전통과 권위를 단지 그것이 전통이나 권위라는 이유로 의심하는 계몽주의적 견해를 거부한다. 전통과 역사적 지식의 뚜렷한 대립은 거부되어져야 한다고 가다머는 결론을 짓는다. 그는 그러한 점을 “고전들” 즉 “고전적인” 문학 작품이나 문화가 수행하는 역할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전통은 해석학에 있어서 선입견에 비해 결코 더 부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이해는 우리의 주관적인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거와 현재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전통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서 여겨야 한다. 이것이 해석학 이론에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시간적 가격이란 많은 사상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해석학에 있어서 극복되어야 할 장애나 난관인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유용한 선입견과 그렇지 않은 선입견을 해석자가 구분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 있어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진공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성과 전통을 통해서 구성된 “이해의 선구조”를 이미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 "이해의 선구조“에 대해 김경재 교수는 주관-객관의 이분론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있는 생활세계와 가치세계의 의미연관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영향사 의식과 지평융합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 자체의 존재방식이다.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가 해석학적 과정이며, 해석학적 이해의 연속동작이라고 할 때, 인간은 언제나 삶과 실재를 조망하는 어떤 지평 안에 있다. “지평”이라는 은유적 어휘에 대해 가다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유한한 현재적인 것은 그것은 한계를 지닌다.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전망 가능성을 한정짓는 일정한 관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상황개념의 본질적 부문 속에는 지평의 개념이 있다. 지평이란 특정한 관점으로부터 보이는 일체의 것들을 포함하는 시계범위(視界範圍)이다. 이것을 우리들의 생각하는 마음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지평의 협소함, 지평의 가능한 확장, 새로운 지평의 열림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지평이란 인간의 시각적 조망능력과 그 한계를 동시에 함축하는 시각기능과 관련된 은유이다. 그러므로 지평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진리체험과 진리인식의 한정된 범위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전망범위의 확장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나타내는 매우 탄력적 은유이다.

"지평이란 주위에 가까이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평은 가까이 있는 사물들로부터 얼굴을 돌려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넒은 전체성 안에서, 그리고 보다 진실한 조화균형 속에서 보기 위한 것이다.“

가다머의 이해란 곧 “지평 융합”이라고 한다. 가다머는 지평과 지평융합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실재로 현재의 지평은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항상 우리들의 선이해 또는 선판단을 검증해야 한다. 이런 검증의 중요 부분은 과거와의 만남이며 또한 우리가 거기로부터 연유한 전통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지평은 과거가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현재의 소외된 지평이 있을 수 없듯이 역사적 지평 또한 그렇다. 이해란 우리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지평들의 융합이다. …전통 안에서, 이러한 융합의 과정은 항상 계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옛것과 새것이 서로를 완전하게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살아 있는 가치를 조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함께 자라는 것이다.

 

이제 가다머는 이러한 지평이 폐쇄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석자 자신이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오히려 지평은 우리가 (그 속으로) 움직임에 따라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지평은 변화하고 있는 인간에 있어서는 (계속) 변화하다. 따라서 전통의 형태로 존재하는 과거의 지평은 … 항상 변한다.” 해석학적 상황은 우리가 지니고 있으며 “특정한 현재의 지평”을 이루는 선입견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참 이해는 과거와 현재, 또는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지평의 융합이 일어날 때 생긴다.

가다머는 또 적용이 텍스트의 이해라고 하는 전체적인 경험에 있어서 절대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해란 인간이 그것을 통하여 자기 앞에 수동적이 객체로서 놓여 있는 물질을 자세히 탐구하는 이론적 활동이 아니다. 실제로 법률적 해석학에 있어서나 신학적 해석학에 있어서나 해석자는 텍스트를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법률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가다머는 지적한다. 아마도 주요한 차이점 하나는 판사의 판결은 실제로 법률을 보충해 주는데 반해 “구원의 복음은 설교에서 선포됨으로써 새로운 어떤 내용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다머는 인정을 한다.

가다머는 하나의 물음은 주어진 주체를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지평 안에서 정립시킨다고 보았다. 더욱이, 새로운 통찰이 “떠오른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감의 과정 안에서인 것이다. 그러한 통찰은 단순히 어떤 개인의 의식적 반성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탐구의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변증법이란 “공통적인 의미 산출로서의 개념 구성의 기술이다.…질문과 대답의 과정은 …해석학의 과제인…그러한 의미전달을 수행한다. 즉, 어떤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그 텍스트에 어떠한 질문을 던지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볼트만이 강조한 원리를 가다머는 찬성한다. “사고하는 인간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 자신의 물음이 텍스트의 원저자의 물음과는 필연적으로 결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은 독창적인 단순한 재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이해는 실제적인 역사적 문제이며 그 자체로 정말로 독창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해의 과정 가운데서는 항상 지평의 융합이 발생하는데, 모든 지평들은 역사적 지평들로서 낙인찍혀 있고, 새로운 지평의 형성과정 속에서도 항상 “영향사적 의식”(the effective-historical consciousness)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다머는 말한다.

 

참된 역사적 객체란 온전한 객관적 객체가 아니고, 역사의 실재와 역사적 이해의 실재간의 관계성의 통일이다. 올바른 해석학은 이해 그 자체 과정 속에 작동하면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역사의 효능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나는 그것을 “유효한 역사”라고 언급할 것이다. 이해란 본질적으로 유효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관계인 것이다.

 

가다머에게서 영향사적 의식이란 인간이 어떤 예술작품, 종교적 경전, 문학 작품 등 정신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이미 이해자의 이해행위 안에, 그가 그것을 의식하든지 아니하든 지간에 역사적 영향이 작용하고 있는 이해지평을 갖는다는 뜻이다. 작품의 역사성을 깊이 통찰함과 동시에 작품 이해자의 역사성이 그 작품의 이해과정 속에 구성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란, 사실 과거 역사적 지평과 현재 역사적 지평과의 만남이요 두 역사적 지평의 융합과정인 것이다.

 

4. 존재의 언어성

 

말과 언어가 사물을 싸는 포장지 같은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인간이 고안해 내고 약속에 의해 확정한 기호체계가 아니라, 반대로 사물이, 말과 언어 안에서 비로소 존재로서 드러나고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하이데거-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밝히는 언어성의 본질에 관한 설명은 일반 상식적인 생각, 곧 언어란 인간 집단이 사회생활을 효능적으로 해 가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인간 정신의 산물로서 의사소통의 도구이며, 일종의 약속된 기호체계일 뿐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매우 충격적이다. 언어란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포괄적이 현상이며 언어 안에서 이해와 사유가 가능하고 발생한다.

 

언어란 그 안에서 이해 자체가 실현되는 보편적 매개체이다. 이해가 현실화되는 양태는 해석이다…모든 이해는 일종의 해석이며, 모든 해석은 언어의 매개를 통해 발생하며, 언어의 매개성은 대상을 말로서 나타나게 하고 동시에 해석자의 자신에게 말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적 현상은 언어와 사유의 사이에 존재하는 일반적 관계의 특별경우라는 것이 분명하고 언어와 사유의 긴밀한 관계성은 은밀한 형태로 사유 속에 언어가 이미 포함된다는 형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성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매개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존재 및 이해와 마찬가지로 언어도 빛이나 공기와 같은 매체이지 망치나 펜과 같은 도구가 아니다. 말을 상징적 형식 즉, 기호기능이나 도구로서만 파악하면 말의 근원적 힘은 사라진다. 언어는 자아의 주관적 주체성이 만들어 내는 도구가 아니라 거꾸로 언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주체적 자아상을 갖게 한다.

언어룰 형성한다는 것은 자의식의 반성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의 본성이며 존재와 상황 그 자체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의 매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전승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말하여진 것 곳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언어는 텍스트에 대한 모든 이해와 해석자를 포함하는데, 이 언어는 사유과정과 해석의 완성 속에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우리에게 내용적으로 전해주는 것을 무시하고 언어를 형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언어의 무의식성은 언어의 확실한 존재방식이다.

이와 같이 가다머의 언어성을 정리해 보면 언어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리적인 것이고 말하는 힘으로 특징 지워진다. 해석학적 경험인 언어는 기호로서의 언어성을 극복하고 포괄하는 이해방식이다. 결국 과거지평의 사실성을 파악하는 객관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의 사상자체 내로 들어와서 모든 이해를 가지고 있는 융합된 무의식의 존재방식이다. 이것을 세계-내-존재로서의 언어하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언어가 역사적 경험과 만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경험은 존재개시성으로서 즉, 세계-내-존재로서 언어로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된 모든 것을 토대로 해서, 이제 가다머는 자신이 보편적 해석학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일반적 관계와 관련이 있는 보편적 해석학에 우리는 이르게 되었다. …우리의 해석학적 탐구가 존재론적 방향전환을 함으로써 우리는 형이상학적 이념에로 나아가고 있다. …” “방법론”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언어전통이 역사적으로 유한한 질문자와 그의 언어로 그에게 말하게 되는 질문과 대답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진리는 나타난다. 그 안에서 “언어가 말을 하는” 일종의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에벨링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석학이란 새롭게 말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문제가 아니라 새롭게 말하게 됨의 문제인 것이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해석학은 “물 자체가 언어화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가다머는 해석자가 텍스트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과 해석자 자신의 전제 또는 선입견이 지닌 중요성을 확증하고 있다. 전제 없는 해석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에서 루돌프 불트만과 같이 한다.

 

Ⅲ.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 논쟁’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이 있다. 하버마스는 비판적 해석학 이론의 대표자로서 해석학 이론이나 해석학적 철학이 근거하고 있는 관념론적 전제를 비판하였다. 사유와 행동, 다시 말하여 노동과 지배의 맥락을 이루는 언어 외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도전한 것이다. 게다가 해석학적 철학은,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전통을, 그것이 해석학적 철학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마련해 준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물어 볼 필요 없는 명약관화한 기체적 합의를 형성해 주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보편성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오늘날의 해석학적인 접근방법이 지닌 결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해석학적 사유를 사회과학 방법론에 도입한다.

1967년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의 논리에 대하여(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라는 책자를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가다머의 견해에 대해여 처음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해석학 논쟁이 시작되었다.

우선 하버마스는 일체의 방법론적 고찰을 꺼려하는 가다머의 입장을 지적한다. 이는 결국 그가 해석학적 경험과 방법적 경험 사이에서 유발시킨 추상적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는 사고 성향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해석학을 부식시키는 실증주의자들을 부지불식간에 옹호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접근의 근저에 “우리의 의지와 행위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실을 탐구하려는” 철학적 해석학의 하이데거적인 자기구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전통은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으로서 모든 방법적 활동의 토대를 마련해 주지만 동시에 결코 완전히 대상화 될 수 없다. 이제 가다머가 전통의 수용으로 여기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 따른 권위의 재천명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이성이란 개념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하버마스의 견해에 의하면, 가다머는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언어를 선험적인 절대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그의 “상대적 관념론”은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이 사회적 노동의 일정한 차원, 즉 경제 발전과 기존의 지배양식에 관련하여 해석되는 경우에, 해석학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형태로 사회과학에 도입된다.

 

그러한 준거틀은 전통을 어떤 포괄적인 실체인 양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준거틀을 통해서 전통을 그 자체로서 파악할 수 있고 사회적 생활으 전체성의 다른 계기들과 관련시켜서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해와 행위의 선험적 규칙들이 변모하게 되는 전통 밖의 경험적인 조건을 지적할 수 있다.

 

사회진화 이론의 토대 위에서 특히 계급사회가 출현하는 견지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왜곡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의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자세히 밝히려고 사용한 과거와 현재의 변증법을 기술학 위하여 가다머가 언급한 ‘대화’는 반드시 ‘개방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 가다머는 해석학적 과정에 일종의 존재론적인 토대를 부여함으로써, 몇몇의 참여자 혹은 모든 참여자들의 ‘지평’을 철저히 한정해 버릴 수도 있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요인을 경시하게 되었다.

전통은, 노동과 지배의 체제를 포함하는 하나의 맥락으로서, 우리가 자신이 욕구를 정의하며 이를 충족시키려고 상호 작용하는 데에 필요로 하는 매개 변수를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를 제한하기도 한다. 사회-역사적 과정은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심지어 등뒤에서까지도 작용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행위와 그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동기를 체계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의미-해석적인 탐구영역을 넘어서는 사회현상에 대한 접근방법이 필요함을 볼 수 있다.

해석학적 해석의 분야에서 딜타이와 가다머가 공유하고 있는 전제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에 관여하는 것이다.

가다머의 자기의 답변에서(1971) 논쟁의 표적으로 등장한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만약 ‘해석학적 문제’가 모든 의미 있는 활동을 포괄한다면, 그 문제의 밖에서 또는 그 문제에 반대해서 그 문제를 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르키메데스의 기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상 체계를 혼란시키려는 시도도 이를 지지해주는 기반을 필요하며, 또한 그와 더불어 일시에 모두 해명될 수 없는 많은 전제들과 전개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방법적으로 형성된 해석학적 과학의 절차보다는 하나의 실존 범주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이해’에 대한 개념을 기초로 하여 철학적 해석학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즉 이해와 의사소통은 “궁극적인 형식에서 보면 대화의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공존의 양식이다. 그리고 ”어떠한 경험이라도 공동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현대과학의 전문화나…물질적인 노동…심지어는 지배와 통치의 정치 기구까지 실천이성의 보편적인 매개 밖에서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가다머는 마지막으로 해석학적 문제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데올로기 비판의 위치를 평가하기에 앞서, 이성과 권위?반성과 전통의 추상적이 대립을 거부해 버린다.

 

하버마스는 사회세계에 대한 과학주의적 접근방법이 지니고 있는 객관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해석학을 사회과학 방법론에 도입한다.

해석학적 접근 방법은 원칙적으로 말을 이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병리적인 장애는 제외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경우는 ‘정상적인’, 즉 “병리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 말속에서 되풀이되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 양식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참여자들이 자기의 의사소통과정의 장애 요소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비 의사소통(pseudo-communication)의 경우를 말한다. 오직 외부의 어떤 사람만이 그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우리가 메타해석학에 따른 의사소통적 합의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구조의 모델을 구축했다. 일종의 ‘심층 해석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장면적 이해’에 의하여 개인적인 비밀로 감추어진 의사소통의 형식을 해독할 수 있다. 원초적인 갈등상황 혹은 어린 시절의 ‘장면’을 재구성함으로써, 환자는 의미론적으로 공허하게 지속되어오던 자기 생활사의 영역들을 다시 상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장면적 이해는 언어의 체계적인 왜곡으로 이끌었던 최초의 조건을 지적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설명적 이해이다. 해석학적 이해는 단지 합리적으로 잘 움직이는 의사소통에 관여하며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용법을 인정하게 한다. 그렇지만 심층 해석학은 해석자가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말의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의 유형이 언어 자체의 유기적인 조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의 모델에 의거하여 개인의 왜곡된 자기 이해를 비판하는 틀을 해명할 수 있었다. 가다머는 이 모델의 유용성을 개인의 차원에서는 인정하지만 이를 사회영역으로 전이하는 작업의 정당성은 문제시한다. 그는 거듭 하버마스의 계획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서 자신의 ‘답변’에서 정신분석학적인 검토를 통하여 얻어지는 반성과정의 조건들은 서로 투쟁하는 계급 사이에서 획득되는 조건들과 분명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즉 여기에서 지배계급은 해방적 실천을 환자가 자기 스스로 부과한 구속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벗어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계급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파악한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즉 해방적 실천의 모델은 계급사이의 적대적 관계보다는 오히려 공산당과 대중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같은 유형의 이론들은 반성과정을 이끌고 의사소통의 장애를 제거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 또한 “이 이론들은 관련 대중과의 의사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잦지 않아도(혹은 획득하지 않아도) 그리고 자기의 반성 과정을 통해 어떤 사람의 해석을 확증하지 않아도, 설명적인 가설들을 연역 해내기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을 의사소통능력이론의 한 부분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는 가다머와 프로이트를 넘어서려 한다. 즉 이에 따라서 그는 정신분석학적인, 궁극적으로는 행위 이론적인 의사소통능력의 조건들-이 조건들은 그 자체로 해석학적 반성에 의해 개선될 수 있으나 설명될 수 없다-을 밝혀냄으로써, 해석학의 보편성에 관한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동시에 하버마스는 메타심리학을 메타해석학의 한 부분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프로이트의 과학주의적인 자기이해를 자기의 메타심리학과 구별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버마스의 메타이론적인 고찰들에 실질적으로 관계된 것은 개인의 왜곡된 자기 이해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의 모델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의 모델은 일반적인 인성 발전과 개인의 생활사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는 이론적인 틀에 의거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인하여 사회 집단은 자기네의 공통 관심을 인식하고 추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 체계의 효용성은 사회-정치적으로 연관된 목적과 지향점을 규명 해보려 하는 의사소통 과정을 방해하는 의사소통의 장애물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한 장애물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해 그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이론의 틀 안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그러한 틀을 보편적 실용론과 관련시켜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고 또한 엄밀하게 형성된 사적 유물론의 기본 가정들과 결합한다면 문화 전통에 대한 체계적인 파악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한 사회진화이론을 도덕체계, 우주론 그리고 에에 대응하는 문화적 관습의 출현 논리에 관한 검증 가능한 가정으로 유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시도된 이론적인 작업에 대해서 갖는 기대는, 이 작업이 일상언어의 영역에서, “모든 사실적인 말-그것이 아무리 왜곡된 것이라 할 지라도-의 필연적인 규제작용으로서 합리적인 말의 원리를 일상언어의 논리로부터 도출”해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와 논쟁을 통해서 하버마스는 참된 합의와 그릇된 합의를 구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원리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원리는 ‘담화’를 기술함으로서 정립될 수 있다 .

담화는 의사소통 행위에서 ‘당연히 인정받는’ 규범과 의견을 문제시한다는 점으로 인하여 상호작용과는 구별된다. 이처럼 소박하게 수용된 규범의 타당성 여부도 담화를 통한 합의 결과에 따라서 확증할 수 있다. 성공적인 상호 작용이 전제로 하는 바는, 행위자들이 규범을 의도적으로 다루며 그 규범의 정당성들이 행위자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기반이 되는 규범들이 언제든지 담화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 점이 또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Ⅳ.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에 대한 참고자료

 

여기서는 번역된 해석학에 대한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논문이 실린 최봉기 교수가 편저한 「해석학과 실천」에 대한 서평과 관심있는 원우들에게 참고자료가 되도록 소개하려 한다.

먼저 이 책에서는 가다머의 논문 2편, 그리고 하버마스의 논문 2편이 소개되어 있고, 지금까지 논의해온 주제와도 연관이 있다. 가다머의 논문은 “역사의식에 관한 문제”(1979), “실천 철학으로서의 해석학”(1987) 이렇게 2편이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논문은 “가다머 「진리와 방법」에 관한 논평”(1977),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1986) 2편이 소개되어있다. 여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본인이 참고한 자료들이 주로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저작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작을 가지고 이미 논평한 작품들을 참고했기에 미흡한 점이 많이 있을 것이기에 해석학에 대한 그들의 번역된 논문을 관심있는 원우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잠깐 서평을 하자면 가다머의 “역사의식에 관한 문제”는 이전의 해석학이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을 지적하고 역사의식이야말로 인간실존의 기본적 성격을 공유하는 것으로 해석학은 바로 이같은 역사의식 곧 역사적 자기 이해의 방법이라고 한다. 해석적 행위는 과거 전통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의미하며 해석자와 반성적 사고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간의 순환적 성격을 과정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를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다머는 “이해는 항상 해석자가 그 안에서 살고, 그의 선입관을 형성시키는 결정적인 전통에 의하여 차례로 그 안에서 살고, 그의 선입관을 형성시키는 결정적인 전통에 의하여 차례로 예상되는 예비적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고 부연해서 설명한다. 이 논문에서 가다머가 또 하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식에 관한 객관적 또는 과학적 탐구를 부인하는 것이다. 역사적 지식은 과학적 논리에 제한받지 않으며 차라리 이해란 모든 존재의 초월적 결정에서 가능한 것으로 역사적 자기이해로서의 해석학의 존재론적 성격을 하이데거와 더불어 주장한다. 객관적 지식을 위한 인식론적 성격을 부인하고 존재론적이며 “실천적 지식을 도덕의 실제로, ‘교육’ 혹은 ‘문화’의 ‘소속감’을 윤리의시과 의무와 목적에 관한 구체적 지식에로 통합함이 바로 우리에게 역사의식의 존재론적 함축을 분석하는 모델이 된다. ”실천철학으로서의 해석학“에서 가다머는 해석학의 이론적, 실천적 의미변화를 다루고 있다. 이때에 해석학은 ‘삶의 실재이해’에 관한 학으로 설명되며 그것은 언제나 경험적 구조를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는 ‘이해는 어떤 다른 모험과도 같이 하나의 모험이자 위험’이라고 말하다. 해석학은 ‘지평의 만남’으로서 자아이해를 얻고 철학으로서는 하나의 실천철학에 속한다고 한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힘입어 비트겐스타인과 사회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자들의 개념을 보다 효과적으로 비판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다머의 해석학이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 등 이데올로기 비판에 관해서는 미흡하다고 비판한다. 하버마스의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 관한 논평"은 해석학 문제를 언어 극복의 문제가 아닌 언어가 매개하고 있는 것에서 찾고자 했으며 따라서 언어가 일상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분리와 연합 속에서의 취약성을 인정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일상생활과 언어 사이에 있는 편견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매개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다루지 않고서는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직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에서 하버마스는 위에서 지적한 순수 해석학(가다머의 예를 들어서)의 취약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의사소통의 왜곡성은 언어적 단계, 행동적 단계, 언어와 행동 사이의 불일치 단계 이렇게 삼단계를 걸쳐 일어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할 수 있고 상호 주관적으로 확립된 언어 놀이에 차여하는 자아와 사적인 또는 일차적인 언어적 상징에 의해 대표되는 ‘내적 타영역’(프로이드) 사이에 있는 자아 속에는 하나의 의사소통 방해가 있다”고 말한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자아-본능적 충동-초자아(낯선 자아)의 상호 내적 관계에서 방위기제 역할을 통하여 생겨난다. 특히 본능적 충동과 초자아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인격구조의 비공식적 의사소통 영역에서 이같은 방위기제는 언어를 곡해하게끔 만든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심리분석 방법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시켜 의사소통의 곡해성을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다루고 결국 해석학을 이데올로기 미판 문제에 연결시키나 어떤이들은 그의 심리분석적 기초를 또 하나의 비판적 소재로 삼기도 한다.

 

Ⅴ. 닫는 글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 논쟁을 마치면서 현대 해석학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고 복음주의적이 입장에서 어떻게 적용을 할지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을까 한다. 텍스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인 여러 주장들에 대해 한편으로 수용이 되지만, 많은 부분 치우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인간이 만들어낸 학문이 완전할 수야 없겠지만, 본인이 복음주의 신학계열에서 신학을 하는 입장에 복음주의적인 어떤 해석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작업이 아님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것을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도 주지하는 봐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인간의 이해”로 복음주의적인 해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전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가 등대를 만난 것과 같은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한 더 이상의 토론이나, 논의는 없었다. 아마 아직은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철학적인 해석의 연구가 인간 실존의 이해에 치우쳐 있었다면, 그래서 그것이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흐르는 경향성을 띠었다고 본다.

“이제는 종교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말이 지금의 해석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모토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성경에 근거한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해석학의 도전은 복음주의 신학도들이 나아가야 할 나름의 방향을 설정해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연구가 실현되기는 희망한다.

아울러 나는 하버마스의 가다머의 철학적인 해석학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바이다. 비록 이데올로기적인 치우침으로 인해서 해석학의 본질을 왜곡한 경향이 있지만, 실재로 가다머가 보지 못했던 해석학적인 사회현상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도전은 논쟁을 보는 우리들에게 해석학의 새로운 면을 보게 하며, 어찌되었든 해석학을 발전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라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의 해석학적 논쟁이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에 대해 복음주의 또한 열려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종교성을 강조한 어떤 해석학적인 접근이 발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건 어쩌면 생각은 있지만 복음주의계열이 가지고 있는 닫혀진 안목 때문에 아직까지 발표가 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이 분야가 관심 밖의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건데,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해석학의 영향력은 신학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전한 해석학적 논의들이 앞으로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 있기를 소망하고, 본인 또한 지나치게 상황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나, 주관적으로 했었던 성경의 해석을 반성하며, 세속적인 기준이 아니라 성경적인 복음을 기초한 성경해석이 되도록 하여야겠다. 이 소논문을 마치면서 해석학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많은 도전과 나의 이해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신학 강의를 통해서 받은 인상은 앞으로 신학을 계속하게 될 입장에서 현대를 바로 인식하고 어떻게 21세기를 준비 할 지를 미약하나마 도전 받은 시간이였음을 밝히고 수고하신 교수님께 감사한다,

 

 

 

 

 

Ⅵ. 참 고 문 헌

 

〈국내서적〉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충남:한국신학연구소,1994.

윤평준,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서울:주식회사교보문고,1990.

이정복, 「현대철학과 신학」서울:종로서적,1987.

최봉기 편저, 「해석학과 실천」대전:침례대학출판부,1989.

최윤식, 김원율, 문헌일, 「하이데거에서 가다머로」서울:조명문화사,1992.

 

〈국외서적〉

速川治郞,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리」, 윤석환역, 서울:문예출판사,1989.

Josef Bleicher, 『현대해석학』, 권순홍 역, 서울:도서출판한마당,1990.

Josef Bleicher, 「해석학적 상상력」, 이한우역, 서울:문예출판사,1989.

리차드 커니,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임헌규, 곽영아, 임찬순역, 서울:도서출판한울, 1992.

안토니 C. 씨쓸튼, 「두지평」, 권성수역, 서울:총신대학출판부,1995.

위르갠 하버마스, 「의사소통의 사회 이론」, 장은주 역, 서울:도서출판관악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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