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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3> 믿음·인품·열정의 윤치병 목사에 큰 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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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내 삶의 근원을 생각하곤 한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모두 아버지의 생애에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분들은 모두 한국 기독교 사상의 민족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지도자들이면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께서 출옥하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나온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과 신앙문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분이 계신다. 그중 한 분이 조선복음교회 윤치병 목사님이다. 윤 목사님은 내가 열 살도 되기 전 아버지와 더불어 사셨다. 그는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학자풍 목사이면서 평생 양복을 입지 않고 순전한 조선인으로 일생을 사셨다. 윤 목사님 방은 온통 책과 종이로 뒤덮여 있었고 볼품없는 책상 위엔 먹과 벼루, 흰 종이가 항상 놓여 있었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윤 목사님은 책이 손에서 한 번도 떠나는 일이 없었다. 길을 가거나 쉴 때도 책을 펼쳐 들고 읽었다. 그는 교회 건물이나 교인 수, 헌금 액수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그의 인품과 진리에 대한 확신 넘치는 자세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윤 목사님의 사역을 돕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즈음 나는 전북 김제 공립보통학교 4학년에서 광주 숭일학교 4학년으로 전학해 처음으로 기독교학교의 교육을 받게 됐다. 숭일학교 교사 대부분은 장로, 집사였고 맞은편 언덕엔 수피아여고와 이일(李一)학교라는 성경학교가 있었다. 그 옆에는 광주기독병원이, 언덕 위엔 양림교회가 있었다. 양림동 기독교 공동체 안에 살게 된 나는 마치 꿈의 세계로 이사를 온 것 같았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신앙의 도시 광주에서의 삶이 어린 시절 사상 변천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복도 잠시 1935년 2월 11일 아침이었다. 숭일학교 학생들은 전남 학무국 지시에 따라 교정(校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낯선 사람의 구령에 따라 신사(神社) 앞까지 끌려갔다. 바로 그때 선생님들은 자기 학급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 2시간이 지나도록 선생님과 학생 전원은 신사의 가미다나(神壇) 앞으로 다가서지 않았다. 이윽고 선생님들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우리는 강제 해산됐다. 숭일학교는 곧바로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 땅에서 시작된 신사참배 거부의 신호탄이었다.

한편 아버지는 당시 이 나라 민중이 망국노(奴)의 신세를 면하는 길은 독립운동과 민족개량운동, 그리고 기독교 신앙운동을 병행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남 광주에 낙농사업과 방직 단지를 만들었다. 광주목장이란 이름으로 우유와 버터, 치즈를 만들었고 무등양말공장을 세워 농촌여성들이 생산업에 종사토록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너무나 앞선 농업운동을 하셨다. 일제는 이를 가만 보고 있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아버지를 방해해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아버지는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우리 가정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나는 이때부터 겨울이 와도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옷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무명 양복바지에 엉덩이와 무릎은 몇 번이나 천을 붙여가며 기워 입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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