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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불트만의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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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Bultmann의 해석학

 

이장섭

 

차 례

 

 

1. 서론

2. 불트만의 해석학에 대한 이해

3. 신화

1) 신화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

2)본회퍼의 비판

4. 계시이해

5. 비신화화

6. 실존론적 성서해석

7. 신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8.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한가?

9. 결론

 

 

 

 

 

 

Rudolf Bultmann의 해석학

 

1. 서론

불트만의 해석학의 출발점은 사도 바울의 선포와 요한 서신을 중심으로 한 신약성서이다. 그는 현대인에게 신약성서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선포하려는 것을 해석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데, 그러나 그가 해석을 시도할려고 하는 신약성서의 전제조건, 즉 그 신약성서의 삶의 자리를 신화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신화적인 세계상을 가지고 편집된 신약성서를 현대인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는 데,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신화적인 언어인 한, 현대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신화적 세계상은 이미 옛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리스도교 선포는 인간에게 신앙을 요구할 때 옛 신화적 세계상의 승인을 강요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불트만의 이러한 진술처럼 과학적 이성이 지배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원리에 입각한 사고의 범위에서는 신화가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그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은 현대 자연과학적인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이 신약성서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상은 옛 시대의 세계상에 불과하므로 무의미하며 세계상은 결의(決議)같은 것에 의해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적 상황과 함께 그들에게 그때그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대에 따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체계와 인간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과거의 작품을 현대에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현대인들이 이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방법으로 비신화화적 해석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불트만이 이해하고 있는 해석학과 신화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말하고 있는 신화로 옷입고 있는 신약성서를 비신화화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고찰 해 보고자 한다. 특히 그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실존철학을 수용하여 이러한 신화적인 세계상을 가진 신약성서에 대한 해석을 수행하고 있는데,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과의 관계를 시도해 보고, 그의 해석학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불트만의 해석학에 대한 이해

그는 해석학을 "역사일반에 관한 이해의 과학"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해석학을 이해의 기술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와 딜타이(W. Dilthey)의 해석학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하나는 역사적 삶에의 참여가 이해의 -문헌의 이해가 해석자와 해석되는 저자가 공통적으로 인간적인 삶의 운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조건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는 문헌의 해석을 통해서 역사적 삶을 해명한다. 즉 문헌을 통해서 그 속에 나타나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해석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하이데거의 선이해(Vorverst?ndnis)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선이해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이해와 해석-결과적으로는 분명하다-은 항상 일정한 문제 설정과 일정한 방향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이해와 해석의 무전제가 불가능하다는 뜻한다. 이것은 성서 텍스트와 해석자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고리이다. 또한 이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성서텍스트에 직면해서 해석자가 신의 행위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해란 "해석되는 텍스트에 제기되는 질문, 곧 텍스트에서 만나는 요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의 근본적인 고유한 질문은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이다.

성서해석의 문제도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일반문헌의 해석과 같은 조건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특별하게 성서적 해석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에서도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이루어며, 또한 이것은 인간존재의 실존적 분석에 대한 과제로서의 전이해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불트만에 의하면, 실존(Existenz)이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고유한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단순한 사물들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실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인간의 본래적 양식으로서의 실존이란 하나님의 현실성에 의해 규정된 실존, 즉 신앙안에 있는 실존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내포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신의 계시를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해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다. 곧 인간의 현존재의 본래성(Ddie Eigentlichkeit des Daseins)에 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이러한 고유한 질문에 의해 움직이며,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은 동일하다(Die Frage nach Gott und die Frage nach mir selbst sind identisch).

 

3. 신화(Mythos)

 

1) 신화에 대한 불트만의 견해

불트만의 신화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인 신화의 개념과는 매우 다르다. 일반적으로 신화란 신들에 대한 이야기 또는 인간이 이해한 신들에 관한 일상들의 이야기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 대한 표현은 인간의 세계와 특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신은 인간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의 본뜻은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말하는데 있다. 신화의 본래 의도는 비세계적인 것을 세계적으로, 신들을 인간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는 피안의 세력들을 말하는데 있으나, 이 의도는 객관화되는 표현의 성격에 의해 은폐된다.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에 대한 관념들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으로-다시 말해서 실존적으로-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화는 인간이 신을 이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서가 신화론적 세계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신화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나타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해가 검토되어야 하는 전제조건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2) 본회퍼(D. Bonhoeffer)의 비판

이러한 불트만의 견해에 대해 본회퍼는 "그(불트만)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지나치게 진보적'이 아니다. 오히려 덜 진보적인 것이다. 기적이나 승천 같은 '신화적' 개념에 한 할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이 신이라든가 하는 개념에서부터 원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종교적' 제 개념 자체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볼트만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신과 기적을 분리할 수 없지만 두 가지를 다 '비종교적으로(nicht-religi?se)' 해석하고 고지(告知)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된다. 볼트만의 출발점은 근본에 있어서는 역시 자유주의임에 틀림없다(다시 말하면 복음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신학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런데 '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트만이 신화라고 말할 때, 이미 그는 신화 속에 계시는 신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비종교화에 있어서는 인간의 신에 어떤 사고형식도 거부하고 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사고체계, 즉 종교라는 형식에 갇혀있는 작업가설인 형이상학적인 신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신은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인 종교에 있어서 인간의 삶의 틈을 채우는 기계적인 신(deus ex machina)이다.

그리고 본회퍼에 의하면 신화론은 성서의 사실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나로서는 신화적 제 개념을 포함해서 전 내용이 그대로 존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신약성서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가 신화적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신앙의 조건으로서(바울에 있어서의 할례 참조) 종교를 전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불트만의 신화론에 대한 해석이 자유주의 신학이 찾을려고 하는 보편적인 진리에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본회퍼는 비판한다.

 

4. 계시(Offenbarung)이해

신약성서 속에 나타난 계시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는 당시의 변증법적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견해와 일치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면서 계시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될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계시의 사건은 인간의 생명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며, 따라서 세상 생명안에서는 확인할 수도 없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인간의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 계시는 인간을 위한 신의 나타남(Erschlißung)임에 틀림없다. 계시의 전제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본래성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 계시안에 나타난 것을 가까이 하는 것도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와 제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편에서 나타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계시는 하나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데, 이 사건이란 인간이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를 새로운 상태로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계시는 지식의 가능성(즉 새로운 상태의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며, 물음에 대한 대답의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오직 걸어오는 말(Anrede)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계시가 나타나는 곳은 설교하고 믿어지는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계시는 과거에서부터 전통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것은 새로 의식되고, 계속 새로 얻어지고, 새로운 결심으로 계속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황이 항상 변화되고 유동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순간 본재적인 자아가 아니며, 자기가 원하는대로 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이러한 계시에 자기를 내 던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계시를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어렴풋이 계시에 향하고 있는 자기를 안다는 것이며, 우리의 본래성과 동시에 우리의 제한성을 아울러 안다는 뜻이다. 계시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는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실존적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유효성은 인간이 실존하는 데서만이 나타날 수 있고, 파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5. 비신화화(Entmythologisirung)

불트만은 신약성서를 둘러싸고 있는 신화를 해석하는 방법으로서 비신화화(Entmythologisirung)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신화를 제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비신화화의 방법에 대해 "신화적인 표현 배후에 있는 깊은 의미를 다시 밝혀 드러내기 위해 시도하는 신약성서의 해석방법을 나는 비신화화-확실히 이것은 불충분한 단어이다-라 부른다. 이 방법의 목적은 신화적인 진술을 제거하는 것(Entfernen)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것(Auslegung)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의미방법(Deutungsmethode)이다. 이 방법의 가치는 우리가 신화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설명할 때, 가장 훌륭하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방법이다.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심층적인 의미를 밝혀내고 이해하는 방법이며, 그 의미를 명백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불트만은 이 신화가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의미하고 있다. 즉 신화를 수단으로 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려고 한다. 그래서 비신화화는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의미를 명백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러한 비신화화적 해석과 실존론적인 해석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화의 의미를 인간학적으로 인간실존에 관한 것으로 폭로하는 일종의 해석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신화는 실존론적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비신화화 작업은 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이다. 이것이 현대인에게만 가능한 이유는 고대인처럼 초자연적인 힘에 항상 종속되어 있는 고대인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결단하는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6. 실존론적 성서해석(Existentiale Interpretation)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불트만은 비신화화 한다는 것은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신화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신화란 인간의 실존안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사고를 떠나 존재할 수 없기 떄문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화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의 뜻을 전하는 형식(Form)이며, 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특히 실존철학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제기하는 물음이란 인간 실존의 이해를 위해서는 오늘날 어떤 철학이 가장 적절한 사상들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실존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철학 학파에서 인간 실존이 연구의 직접적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만이 인간의 실존을 연구하는 데 적절한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실존 개념과 선이해(Vorverst?ndniss)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실존철학은 실존으로서의 인간 존재와 실존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는(vorhanden) 모든 다른 것들의 존재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실존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려 한다. 그가 비신화화의 방법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트만은 단지 인간들만이 실존을 소유할 수 있으며, 인간들만이 역사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모든 지금(Jetzt)은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 실존을 실현한다. 그래서 "너는 실존해야 한다(Du mußt existieren!)"라는 결단을 말한다. 이러한 결단, 인간이 되려는 각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에서 존재하려는 것을 긍정하는 인격이 없이는 아무도 성서의 말씀을 자기의 인격적 실존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결단은 어떠한 철학적 지식도 요구하지 않는 반면에 학문적 성서해석은 인간 실존의 성서적 이해를 밝히기 위한 실존적 개념들을 요구한다. 인간 실존 이해는 곧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며, 성서는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걸어오는 말씀이 되며, 나에게 현실적 실존(Wirkliche Existenz)을 제공한다.

 

7. 신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주관 객관의 일치-

불트만은 그의 해석학에 있어서 하이데거처럼 주관과 객관의 일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를 내포하고 있는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주관과 객관이 성립한다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범한 잘못을 되풀이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신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으로부터(von Gott)말하는 것을 신에 관해(?ber Gott)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순간에 그의 대상, 즉 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 타자인 신으로부터 말하는 것은 인간의 실제적 상황이 신으로부터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고 자기의 실존으로부터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죄인의 실정임을 내가 알았을 때에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신에 의해 규정된 실존으로서의 자기의 실존으로부터 말해야 했으며, 죄된 실존으로서만 즉 그가 신을 볼 수 없고 완전 타자로서 신이 실존과 대립해 서 있는 그런 실존으로서만 실존으로부터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신으로부터 신을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실존으로부터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순서를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신으로부터 말한다는 것이 가능할 때 그것은 동시에 우리로 부터의 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신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언제 그럴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을 때라는 것뿐이다. 여기서 생각되고 있는 "...할 수밖에 없음"은 자유로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만이 우리의 실존적 존재에서 솟아나며 그런 것에서만 오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며 전인(全人)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는 순종이다. 순종은 자유로운 행위로 "...할 수밖에 없음"에 자신을 내맡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해석에 있어서의 주객의 일치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은 그 계시에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서 가능하다. 그러나 성서를 하나의 텍스트로 전제하고 해석하고자 할 때는 선이해의 문제가 도출된다.

 

8.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한가?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는, "전제 없는"이 '주석의 결과들을 전제하지 않음'을 뜻한다면, "그렇다"고 대답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전제 없는 주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 즉 교의학이나 교리를 전제로 한 해석을 그는 지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약 교의학적 선입견에 의해 해석이 이루어진다면, 이 때의 주석은 모두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 오히려 주석자의 의도가 내포된 텍스트의 의미를 드러내게 될 뿐이다.

그러나 반면에 텍스트의 탐구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제는 역사적 방법이다. 주석은 실로 역사적 문헌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 과학이며, 역사학적 방법은 개체 사건이 원인, 결과의 순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결된 작용연관체라는 의미에서 역사가 통일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전제는 삶의 관계에 의한, 사물들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해를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석에 항상 전제되어 있는 한에서 전제 없는 주석은 없다. 그래서 불트만은 이러한 이해를 전이해(Vorverst?ndnis)라고 부른다. 이 전이해는 결코 종결된 것이 아니라 미결된 것이어서 텍스트와의 실존적 해후에 그리고 실존적 결단에 이를 수 있도록 하며, 텍스트와의 실존적 해후는 부정으로도 긍정으로도, 고백하는 신앙으로도, 결정적인 불신앙으로도 이끌어 갈 수가 있다. 왜냐하면 텍스트에서 주석가는 어떤 요구에 부딪치고, 여기에서 그가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자기이해가 그에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텍스트 이해는 결코 확정된 것이 아니고 개방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의미는 그때그때 미래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석자는 역사적으로 실존하고 성서의 말을 자기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 말해진 것으로 경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옛말을 항상 새로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항상 새롭게 인간은 누구며, 신은 누군지를 주석자에게 보여 줄 것이고, 또 주석가는 그 말을 항상 새로운 개념성으로 말해야만 할 것이다.

 

9. 결론

불트만의 해석학은 신약성서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그는 성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면에서는 신화로 둘러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신화를 비신화화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또 다른 면에서는 성서를 하나의 역사적인 텍스트로 전제하고, 이러한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이해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의 일치를 시도하기 위해 실존을 실현하는 인간에 그 중심을 두고, 이 중심에서 발생되는 주객의 분열을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할 수없음"의 실존하는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을 거부할려는 시도는 충분하나, 아직도 성서를 인간 실존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본회퍼의 비판에 대한 해명이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그의 신화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본다면, 어쩌면 그가 말하고 있는 신화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측면에서 신을 이해한 결과로 볼 수 있지 않는가? 즉 포에르바하(L. Feuerbach)의 명제, '신은 인간의 투영에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신화에 대한 그의 이해는 또한 그가 말하고 있는 계시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를 이해할수 있는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의 실존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이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까지는 변증법적 신학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나, 그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한 실존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실존의 이해가 계시를 파악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은 매우 모호하다. 그리고 성서의 세계상을 아무리 비신화화 할지라도, 현대인의 자연과학적 사고의 구조에 부합하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성서는 본래부터 자연과학적 사고구조를 전제로하지 않고 형성되었으며, 이곳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자연과학적 사고와 그 세계상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어오는 말로써, 즉 '인간의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요구'라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사고가 필요하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은 그의 요구에 응답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김영한 교수가 지적한 대로 성령의 내적 조명을 완전히 도외시한 성서해석이 타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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