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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7> 장로회신학교 재건 위해 남산에 천막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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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기둥’ 신앙동지회 동인지 주간이 된 것은 신학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신학 입문자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입장이 있었다. 51명의 학생을 무기정학과 퇴학 처분을 해 놓고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던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귀중함은 알아도 교회의 소중함은 모르는 듯싶었다. 보수 세력에 대한 공격과 정통신학에 대한 거부가 강의와 글에서 무섭게 나타났다.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오만함이 싫었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들의 대변자로서 글을 쓰기로 했다. 나를 그렇게도 아끼던 송창근 목사에게는 미안했다.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재건은 친일 잔재 세력의 방해로 어렵게 됐다.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거기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항거했던 출옥 성직자들과 봉천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박사가 있었다. 부산 신사(神社)가 있던 용두산 밑 광복동 산1번지 적산가옥을 교사로 쓰던 이 학교의 이름은 고려신학교였다. 말이 학교이지 신학생 합숙소 같았다. 그래도 나는 신학교를 뛰쳐나온 지 몇 달 만에 또다시 신학생이 된 것이 기뻤다.

부산의 바람은 서울과는 또 다른 회오리바람이었다. 독선과 신앙적 교만이 법통이라는 미명 아래 분장돼 있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온기 없는 신학교 교실(밤에는 침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는 것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아니라 오만하고 독선적인 출옥 성도를 자처하는 차디찬 얼굴들이었다.

이름을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해방된 민족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낼 재목들이 아니었다. 이들 선교사는 태평양전쟁 종식으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로 바뀐 것으로 착각했다.

우리 신앙동지회 소속 신학생들은 또다시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나는 남산 신궁터를 타고 앉은 김양선 목사의 말이 생각났다.

“남산이 광복 조국 민족교회의 본산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의 꿈이야.” 그 말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쳤다.

나는 1948년 4월 18일 서울 남산 신궁터에 천막을 쳤다. 미군이 쓰다 내버린 천막을 기워 만들었다. 남학생들의 임시 기숙사였다. 우리는 교회를 찾아다니며 구걸했다. 교회들은 정치싸움에 말려들까 봐 인색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돈이 마련돼 적산가옥을 구입했다. 교장으로 모실 박형룡 박사의 숙소와 여학생 기숙사였다. 신학교 교사는 성도교회 황은균 목사가 교회 건물을 사용토록 허락했다. 사무실도 책상도, 의자도 칠판도 없었고 돗자리를 깐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교장과 7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는 ‘장로회신학교’였다. 48년 6월 3일 개교식을 개최했다.

벅찬 꿈도 잠시, 우리 집안에 또 하나의 비극이 터졌다. 난데없이 아버지가 당시 한국민주당(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살해교사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장덕수는 종로경찰서 순경 박광옥이 쏜 카빈총 두 발을 맞고 사망했다. 부친은 당시 운현궁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부장이었다. 아버지는 미군정 재판을 받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교수형이었다. 남쪽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세력을 거세하는 일이 이 사건의 음모 뒤에 숨은 목적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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