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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예배 365-5월 22일]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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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내 맘이 낙심되며’ 300장(통 40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욥기 6장 1∼7절


몸과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욥은 탄원했습니다. 그에게는 계속 닥쳐오는 환난을 버텨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간구와 마음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그것이 적시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3장에서 했던 말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런 것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12절) 그의 몸은 돌덩이도 쇳덩어리도 아닙니다. 찌르면 찔리는 살이고, 베면 베이는 피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자기 목숨은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끊어지다’는 말(9절)은 베를 짜고 난 뒤 베틀에 남아있는 조각 베를 끊어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히스기야왕도 병들어 죽을 지경일 때 이런 비유를 쓴 적이 있습니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사 38:12)

이런 탄원 속에서 욥의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드러납니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하소연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욥의 판단은 다릅니다. 비록 목숨이 자기에게 붙어 있는 것이라도, 생명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생명을 자기 맘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그 시련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곧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사실 삶의 가치가 사람마다 다르듯이 죽음의 가치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욥은 닥쳐오는 시련을 자기 힘으로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어서 죽음을 원하면서도 하나님 뜻에 어긋나게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0절) 욥은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영적인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명예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지켜주는 울타리, 곧 신앙입니다.

세상살이의 시련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동정을 받더라도,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죽음을 초월하는 인생을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기도 : 흙먼지로 저희를 창조하시며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라,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희를 창조하신 그 거룩한 뜻을 받들어 어떤 경우에도 헛되이 살지 않고, 헛되이 죽지 않게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현진 목사(서울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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