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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6> 매국노 이완용 집터에 세운 옥인교회의 담임목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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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봄 중국 선양(瀋陽)에서 피난 온 신학생 중에 이무호라는 이름의 전도사가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와 비슷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전도사였다. 그가 어느 날 학생회 총무였던 나에게 서울 효자동에 교회를 세울 테니 후원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교회 세울 땅은 구했냐고 되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역적 이완용의 집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한동안 쳐다봤다. “옥인동 15번지인데 효자동 대로변 넓은 뜰만 점령하기로 했지요.”

학생회 지도교수인 김양선 목사에게도 데려가 소개했더니 김 목사도 놀랐다. 학생회 전도부에서는 이 전도사에게 ‘효자동교회 개척전도사’로서 약간의 전도비 지급을 결의했다. 이것이 6·25전쟁 이후 옥인교회가 이완용 집터에 들어서게 된 동기다. 이 전도사는 그 터 위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시작해 1952년 165㎡(약 50평) 가까운 예배당을 지었다. 이후 김학철이란 신학생이 이 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교회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경기노회는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해 김양선 목사에게 분쟁 수습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던 54년 어느 날 김 목사는 기독공보 편집국장이었던 내게 찾아와 “이 교회 원조는 조 목사야!”라고 했다. 교회 분쟁에 나서달라는 요청과 함께 나를 옥인교회 담임목사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내 의견은 듣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옥인교회 담임으로 봉사했다. 내분은 간단히 수습됐다. 내가 부임한 첫 주일, 당시 임시 당회장이 강단 위에서 끌어내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내가 강단에 오르자 조용해졌다. 나는 이렇게 일제와 공산당, 미군과 인민공화국이 엉켜 자리를 잡고 있던 매국노의 집터에 세워진 교회를 섬기게 됐다.

이완용 저택은 전형적인 조선 정승의 99칸짜리 기와집이었다. 이완용은 그 한 모퉁이에 2층짜리 양옥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이 양옥은 해방 후 유명했던 조선 공산당의 제2인자 이강국의 첩이었던 김수임이 살던 곳이었다. 그녀는 미 점령군 사령부 특별수사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페루 대령과도 동거했다. 공산당 간첩이었던 김수임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돼 체포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옥인교회는 이완용의 집터를 김수임과 함께 나눠 쓰고 있던 셈이다.

나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당시 NAE)에서 총무 일을 맡고 있었다. 총무 업무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오는 미국 교회 지도자들을 영접하는 일이었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총무였던 웰윈 라이트 박사, WEF 2대 총무였던 프레드 페리스 등 거물급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방한했고 그들을 위한 일정을 담당했다.

그때 자주 찾던 곳이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안국동 집이었다. 종로구 국회의원 시절 윤 전 대통령은 부인 공덕귀 여사와 함께 옥인교회에 나오곤 했다. 공 여사는 결혼 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교수로 있었기에 아내도 크게 반겼다.

윤 전 대통령은 내 아버지와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한번은 안동교회 유경재 목사가 나를 초청해 부흥회를 했는데 윤 전 대통령은 매 시간 제일 앞자리에서 설교를 들었다. 그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를 모셨다”며 “어지러운 정치에 나서지 않고 목사가 되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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