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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불트만의 신학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 김창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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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1884-1976)의 신학: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김 창 락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Ⅱ. 생애와 저술

Ⅲ. 신학 사상

Ⅳ. 평 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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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불트만은 20세기의 기독교 신학의 한 거봉을 이루어 놓았다. 장애물 경기자가 장애물을 우회해서 달려갈 수 없듯이 20세기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세기에도 무릇 성실한 자세로 신학을 하려는 사람은 불트만의 신학을 단순히 외면하고 비껴 지나갈 수 없다. 그는 가부간에 불트만이 제기한 물음과 해답을 일단 깊이 천착하고 넘어가야 한다. 불트만은 그의 학문적 원칙에 철저한 신학자였다. 그는 진지하게 20세기의 현대인에게 성서의 메시지가 이해되도록 해명하는 것을 그의 성서 주석의 과제로 삼았다. 이른바 그의 '비신화론'은 그의 이 과제 수행에 필요불가결한 방편이었다. 그는 20세기 신학자로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유산과 가장 성실하게 대결한 학자였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서와 같이 성서 연구 방법론으로서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서와는 달리 역사실증주의적 객관적 역사에 몰입하지 아니했다. 또한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는 달리 초월을 역사내적인 사물로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20세기의 변증법 신학자들과 더불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주의 신학자들과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미치는 의미를 추구했다. 하나님과 인간은 불트만의 신학을 형성하는 양축이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만 신학의 대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트만의 신학은 곧 인간학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신학의 주요한 한 축으로서의 인간은 자연적인 구체적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현존의 순수한 존재 양태로서의 인간 실존을 가리킬 따름이다. 여기에서 불트만의 신학은 필연적으로 실존주의 신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불트만은 신존주의 신학자로서 성서 해석의 궁극적 목표를 실존 해명, 즉 인간의 본래적 자기 이해를 획득하는 데 두었다.

 

불트만은 20세기에 가장 많은 격렬한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으며 아직도 그 논쟁은 종식되지 아니했다. 특히 그의 비신화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년 간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찬반 논쟁의 과녁이 되었다. 1953년 이래로 후기 불트만 학파에서 제기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연구를 둘러 싸고 10여년 간 전개된 논쟁에서도 불트만은 중심부에 서 있었다. 찬반간의 수많은 토의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이 제기한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인 채로 남아있다. 그만큼 그 문제는 진지하고 지난한 것이다. 누구도 이 문제를 섣불리 대답할 수도 없으며 태연히 외면할 수도 없다. 불트만의 신학은 태산같이 방대하다. 누구든지 그의 신학적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마치 광대한 밀림 속에서 헤쳐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신학이 일으키는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의 신학을 간과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그의 신학을 단칼에 처리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마치 소인들이 갈리버의 콧잔등에 기어오르며 미끄러지고 하면서 이러니 저리니 비평하는 어리석은 짓거리에 비길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거대한 밀림을 성공적으로 횡단하기 위해서 출발 전에 지도 공부를 철저히 해야 할 필요가 있듯이 불트만의 신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의 대체적인 윤곽에 대한 안내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글은 우선 불트만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길잡이로서 그의 신학적 업적을 그의 전체 삶의 구도에 넣어서 조망해 보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그것을 좀 더 올바로 이해하는 데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II. 생애와 저술

 

불트만은 1884년 8월 20일에 북부 독일의 비펠슈테데(Wiefelstede)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 당시에 이 곳은 올덴부르그(Oldenburg) 공국(公國)에 속해 있었다. 그의 부친 아르투르 불트만(Arthur Bultmann)은 루터교회 목사였으며 그의 조부는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의 외조부도 목사였다. 불트만이 자라난 가정의 정신적 분위기는 한편으로는 그의 조부로부터 물려 받은 경건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불트만의 학창 시절에 자유주의 신학에 경도되었으나 온건한 노선을 유지한 그의 부친의 루터교적 신앙이 지배했다. 불트만은 1903년에 올덴부르그에서 인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처음으로 신학 수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튜빙엔(Tubingen) 대학에 진학하여 세 학기를 마치고 다음에 베르린(Berlin) 대학에서, 마지막으로 마부르그(Marburg) 대학에서 각각 두 학기씩을 마쳤다. 대학 시절에 그에게 특별히 영향을 끼친 신학의 스승은 튜빙엔 대학에서는 교회사학자 뮐러(K. Muller), 베르린 대학에서는 구약학자 궁켈(H. Gunkel)과 교의 사학자 하르낙(A. Harnack), 마부르그 대학에서는 신약학자인 율리허(A. Julicher)와 바이스(J. Weiss) 그리고 조직신학자인 헤르만(W. Herrmann)이었다. 졸업 후에 울덴부르그 고등학교에서 일년간(1906-1907) 교사로 봉직했다.

 

일찍이 불트만에게 신약학자의 길을 걷도록 격려한 교수는 바이스였다. 바이스는 불트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을 지정하여 주었던 것이다. 1907년 가을에서부터 불트만은 마부르크 대학에서 학위 공부를 시작하여 1910년에 [바울의 설교 양식과 견유학파 및 스토아학파의 논쟁 화법](Der Stil der paulinischen Predigt und die kynisch-stoische Diatrib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Lic. theol.)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율리허 교수의 제안과 지도를 따라 교수 자격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1912년에 [테오도르 폰 몹쉐스티아의 석의학(釋義學)](Die Exegese des Theodor von Mopsuestia)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1912년부터 1916년까지 마부르그에서 신약학 분야의 강사로 있었다. 바이스가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초빙되어 가고 그 후임으로 하이트뮐러(W. Heitmuller)가 마부르그에 왔을 때에 불트만은 하이트뮐러와 깊은 교분을 가졌으며 그로부터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입었다. 이 시기에 그는 또한 실천신학 교수이며《기독교 세계》(Die Christliche Welt)라는 주간잡지의 편집인인 라데(M. Rade)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이 잡지의 열열한 독자였으며 이 잡지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동우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임의 연례 회의에도 꼭 참석했으며 라데의 집에서 매월 모이는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기독교 세계>와 그 회원들의 모임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과 직후에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자유로운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었다. 불트만은 여기서 개신교 신학의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었다.

 

1916년 가을에 불트만은 부레슬라우(Breslau) 대학에 조교수로 초빙되어 가서 1920년까지 활동했다. 1921년에 발간된 그의 [공관복음서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Evangelien)는 이곳 부레슬라우에서 집필한 것이었다. 그는 1920년 가을에 부세(W. Bousset) 교수의 후임으로 기센(Giesen) 대학에 정교수로 초빙되어 갔으며 1921년 가을에는 하이트뮐러 교수의 후임자가 되어 마부르그 대학에 돌아왔다. 그는 1930년에 라이프찌히(Leipzig) 대학에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1951년에 은퇴 교수가 되기까지 계속해서 마부르그에 남아 있었다.

 

마부르그 시절에 불트만이 인간적 교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학문적 토의를 함께 한 동료 교수들 가운데는 신약학자 조덴(H. von Soden)과 구약학자 횔셔(G. Hulscher), 바움가르트너(W. Baumgartner)가 있었으며 조직 신학자 오토(R. Otto)와는 학문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마부르그에서는 신학자와 철학자 사이에 대화가 활발하였다. 특히 1922년에서 28년에 이르는 기간에 불트만이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와 더불어 나눈 학문적 교류는 그의 실존주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는 기존의 자유주의 신학과 바야흐로 새로 등장한 변증법 신학 사이에서 불트만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였다. 이와 관련된 주요 논문으로는 1924년에 발표한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 신학 운동"(Die liberale Theologie und die jungste theologische Bewegung), 1925년의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Welchen Sin hat es, von Gott zu reden?), 1928년의 "신약학에 미치는 변증법 신학의 의의"(Die Bedeutung der dialektischen Theologie fu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바르트(K. Barth)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론에 대한 불트만의 동조점과 차이점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제2판에 대한 여러 번에 걸친 서평(ChrW 36, 320-323. 330-334. 358-361. 369-375에 실렸음)과 1926년에 발표한 "칼 바르트:죽은 자들의 부활"(Karl Barth: Die Auferstehung der Toten)에 잘 나타나 있다. 1926년에 출판된 [예수](Jesus)라는 단행본에서 불트만은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를 탐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다루었다.

 

불트만은 루터의 두 왕국설과 자신의 실존주의 신학의 노선에 입각하여 일생 동안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서 교회를 정치의 시녀로 변질시키려 했을 때에는 이에 단호히 맞서서 이른바 "바르멘 선언"에 서명하고 이어서 고백교회 운동에 가담한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서면서 불트만은 학문적으로 최고의 완숙기에 다다른다. [요한복음 주석](Das Evangelium des Johannes)과 [계시와 구원 사건](Offenbarung und Heilsgeschehen)이 1941년에,《신약성서 신학, 제1차 분배본》(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1. Lieferung)과 [고대 종교들 가운데서 발생한 원시기독교](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가 각각 1948년과 1949년에 출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서 50년대 초반에 걸쳐서 세계적 범위에서 벌어진 성서 해석상의 뜨거운 쟁점은 이른바 비신화화 논쟁이었다. 그런데 이 비신화화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계시와 구원 사건]에 실린 "신약성서와 신화론"(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이라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1941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이 문제는 학계의 관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가 전후에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51년에 [신약성서 신학, 제2차 분배본]이 나오고 1953년에 [신약성서 신학, 제3차 분배본]이 나옴으로써 불트만의 최대의 신학적 업적인 [신약성서 신학]이 완간되었다. 1950년에 발표된 "해석학의 문제"(Das Problem der Hermeneutik)는 성서 해석학의 이론을 명쾌하게 제시한 탁월한 논문이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불트만은 영미의 여러 대학에 강사로 초빙된다. 1951년에 미국 예일 대학에 가서 강연을 했으며 그 자료가 1958년에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론](Jesus Christ and Mythology)이라는 소책자로 발간되었다. 1955년에는 에딘버러 대학의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의 강사로 초빙되었으며 그 자료가 1957년에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80세 고령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저술은 급격히 줄었다. 주목할 것은 1960년에 소책자로 발행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원시교회의 그리스도 선포의 관계](Das Verhaltnis der urchristlichen Christusbotschaft zum historischen Jesus)라는 글이다. 1953년을 기점으로 하여 불트만 학파 내에서 역사적 예수 문제에 대한 불트만의 노선에 반대하여 역사적 예수를 새로이 연구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위의 글은 불트만이 그의 제자들이 일으키는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1967년에는 불트만의 마지막 저술로서 [세 요한 서신 주석서](Die drei Johannesbriefe)가 출판되었다. 60년대에 나온 주요 논문으로는 1961년의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에 있어서의 역사 이해"(Das Verstandnis der Geschichte in Griechentum und Christentum), 1963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제거되었는가?"(Ist der Glaube an Gott erledigt?)와 "하나님 사상과 현대 인간"(Der Gottesgedanke und der moderne Mensch), 1964년의 "하나님의 의"(dikaiosyne theou)와 "묵시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모태인가?"(Ist die Apokalyptik die Mutter der christlichen Theologie?) 등을 들 수 있다.

 

III. 신학 사상

 

1. 목표와 방법론적 원칙

 

불트만은 일생 동안 그의 신학적 입장과 방법론을 일관되게 고수한 학자였다. 그의 사상에는 발전과 심화는 있으나 극적인 단절이나 방향 전환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주석가로서 성서의 말씀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목표는 역사 신학과 조직 신학의 통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성서 해석과 신앙 이해에 대한 조직신학적 서술을 통일하는 것이다. 그는 성서 문서의 생성과 그 언어적 문학적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역사비평적 방법을 사용했으며 성서 말씀의 궁극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실존철학의 현존 분석에서 채용한 개념 법주들을 이용했다. 역사비평적 방법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 운동"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관심에 우선권을 두는 것이다.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의 위대한 공적이 있다. 이 공적은 단지 역사상을 해명하는 일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비판을 하도록 교육시키는 일에, 즉 자유와 진실성을 획득하도록 교육시키는 일에 기여한 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의 출신이다. 만일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서 근본적 진실성에 대한 진지성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신학자가 될 수 없었거나 신학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Glauben u. Verstehen, I, 2쪽).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의 과오를 직시했다. 그것은 역사비판적 방법을 수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업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적인 것을 인간적 경험과 세상적 역사의 지평 안에 배열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세계내적인 소여(所與)로 환원시켰다. 이것은 자유주의신학의 역사범신론적 사관의 결과물이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관과 내재적 신관에 대한 비판의 맹아가 자유주의 신학 자체 안에서 이미 움터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특히 그의 스승 바이스(J. Weiss)와 헤르만(W. Herrmann)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계승했다. 1917년에 발표한 "신약성서의 종교에 대한 종말론의 의의"(Die Bedeutung der Eschatologie fur die Religion des Neuen Testaments)라는 논문은 그가 변증법적 신학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 세계를 극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922년에 바르트(K. Barth)의 [로마서 주석] 제2판의 발간을 계기로 하여 불트만이 변증법 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28년에 이 운동과 결별한 것도 불트만에게서 어떤 입장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학의 철저한 일관성 때문이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문제와 관련하여 1953년에 생긴 이른바 후기 불트만 학파와의 논쟁에서도 불트만은 자기의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했다.

 

역사적-비판적 방법과 실존론적 해석은 불트만의 성서 해석이라는 열차가 그 위에서 움직이는 두 궤도요 또한 그 성서 해석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차례로 반드시 통과해야 두 역사(驛舍)이다. 이 두 요소 외에 그의 성서 해석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적인 어떤 요소나 역사내적인 어떤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에 대한 전적인 거부와 심판으로 임하는 종말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인데 불트만은 이것을 그의 가문의 루터교파적 종교적 분위기에서 이어 받았다. 불트만의 성서 해석이 자유주의의 성서 해석처럼 역사라는 폐쇄된 궤도를 무한대로 달리는 지적(知的) 유희(遊戱) 여행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 여행의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제시해 주기 때문이며 근본주의적-교리적 성서 해석처럼 구름 위의 관념적 세계를 거니는 심령적(心靈的) 몽유(夢遊) 여행이 되지 않는 것은 역사비판과 현존 분석이라는 두 궤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2. 양식비평적 연구

 

[공관복음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1921)는 슈미트(K.L. Schmidt)의 [예수 역사의 틀](Der Rahmen der Geschichte Jesu, 1919)과 디벨리우스(M. Dibelius)의 [복음서의 양식사](Die Formgeschichte des Evangeliums, 1919)와 함께 복음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라고 하는 새로운 연구 방법의 결실로 생긴 것이다. 불트만은 이 저서에서 공관복음 안에 수록되어 있는 전승 자료들을 각각 그 문학 양식에 따라서 분류하고 이 개개 자료들이 전해져 내려 온 구전(口傳) 과정의 역사를 소급적으로 추적하여 그것들이 각각 생성되고 가꾸어진 원래의 '삶의 자리'(Sitz-im- Leben)를 규명함으로써 그 전승 자료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 했다. 전승 자료의 구전 단계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종래의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을 부정하거나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멈춘 곳에서 한 단계 뛰어 넘어 그 자료들의 구전 전승에 대한 역사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전승사 연구는 자료비평 작업의 계승이다. 자료비평에 있어서 엄격하게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이 적용되는 것과 같이 전승사 연구에도 꼭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두 연구 방법은 연구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 동일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양식사 연구는 예수의 역사에 관한 전승 자료들은 예수의 역사 자체에 보다도 그 자료들이 유래된 삶의 자리에 더 종속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역사보다도 '케리그마'(Kerygma)의 우위성(優位性)을 입증했다. 양식사 연구는 역사 실증주의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과 역사 회의론의 허무로부터 벗어날 탈출구를 제공했다.

 

3. 종교사학적 연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종교사학파의 연구 방법은 다름 아니라 역사비판적 방법의 연장(延長)이다. 종교사학적 연구가 성서의 종교적 사상을 그것이 발생한 주변 세계의 문화 및 종교들과 관련시켜서 그것의 성립을 규명하는 것이라면 양식비평은 성서의 전승 자료들을 초대 교회 공동체의 종교적-제의적 삶의 현실과 관련시켜서 그 속에 숨겨 있는 본래의 의미를 밝혀 내는 것이다. "에픽테투스의 윤리적 교시에 나타난 종교적 동기와 신약 성서"(Das religiose Moment in der ethischen Unterweisung des Epiktet und das Neue Testament, 1912)는 불트만의 초기의 종교사학적 연구 논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변증법 신학이 태동한 직후와 그 이후에까지도 "요한복음 서론의 종교사학적 배경"(Der religionsgeschichtliche Hintergrund des Prologs zum Johannes-Evangelium, 1923), "바울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문제"(Das Problem der Ethik bei Paulus, 1924), "새로이 발견된 만대아 및 마니캐아 자료들이 요한복음의 이해에 미치는 의미"(Die Bedeutung der neuerschlossenen mandaischen und manichaischen Quellen fur das Verstandnis des Johannesevangeliums, 1925), "원시기독교와 종교사"(Urchristentum und Religionsgescichte, 1932), "요한 문서와 영지"(Johanneische Schriften und Gnosis, 1940) 등등의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더욱이 그의 주저의 하나인 [요한복음 주석](1941)에서도 많은 지면을 요한복음의 종교사학적 배경을 규명하는 데 할애했다. [고대 종교들의 맥락에서 형성된 원시기독교](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1949)는 원시기독교가 후기 유대교의 품속에서 태어나서 동방 종교들이 유입된 헬레니즘의 정신 속에서 자라났음을 규명하면서 원시기독교의 특성은 그것이 생겨나고 자라난 종교적-문화적 주변 세계와의 비교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한다.

 

4. 변증법적 신학

 

1920년에 고가르텐(F. Gogarten)이 "시간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 변증법 신학 운동이 시작된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은 이 세계의 원인-결과의 연쇄 과정에서 파악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심리학적 분석이나 역사학적 탐구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고가르텐은 주장했다. 역사학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의 눈에 식별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은 우상일 따름이다. 인간의 행사가 그치고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는 때에만 참된 종교가 발생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주장에 즉각적으로 호응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신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제2판(1922)은 변증법 신학의 결정적 기념비이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증언하는 것이 성서의 사신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과 역사에 무제한적 신뢰를 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성을 세계내적인 것으로 해소시키고 말았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복음'이니 '하나님의 나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적?윤리적 가치로 환원되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중심주의를 철저히 거부하고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의 복권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불트만은 여러 번에 걸친 서평을 통하여 바르트의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조하면서도 바르트의 성서 해석 방법에 대하여 비판을 유보하지 아니했다. 불트만은 변증법 신학 운동의 초창기에는 참여하다가 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변증법 신학과 결별했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 출발점에서부터 성서 해석 방법론에 관하여 두 사람 사이에 드러난 차이로 말미암아 도달한 필연적 결과였다. 불트만은 계시와 믿음의 의미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불트만은 바르트가 역사적 비판과 언어적 비판을 소흘히 하기 때문에 결국에 그릇된 초자연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바르트는 불트만이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주의에로 회귀하려 한다고 응수했다.

 

변증법 신학에 대한 불트만의 관계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불트만의 관계를 밝힐 때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트만이 변증법 신학 운동에 가담한 것은 그의 신학 여정에 있어서 돌발적인 변화도 아니며 자유주의 신학의 모든 유산으로부터 철저한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에서 계승해야 할 요소가 무엇이며 극복해야 할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 최근의 신학 운동"(1924)이라는 논문에서 이 사실을 잘 밝히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공적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상을 해명한 것과 교리적 독단에 사로잡힌 기독자들에게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고취시킨 데 있다고 불트만은 보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결정적인 과오는 역사 탐구가 신앙의 본래적 대상인 하나님께로 인도하리라고 착각한 데 있다고 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세계내적인 한 사건으로 환원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비판적 방법은 변증법 신학에서도 계승되고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1928년 "신약학에 미치는 '변증법 신학'의 의미"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변증법 신학은 역사적-비판적 방법을 대치하는 새로운 방법론이 아니라고 규정하면서 결과적으로 변증법 신학의 동지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5. 역사적 예수 연구

 

이른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불트만의 입장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관건이 된다. 18세기 후반에서 시작하여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슈바이츠(A. Schweitzer)가 1906년에 [예수의 생애 연구사](초판의 이름은 Von Reimarus zu Wrede였으나 1913년의 제2판부터 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으로 바꿈)를 발표함으로써 파산 선고를 당했다. 그 때부터 1953년에 후기 불트만 학파에 의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제기되기까지 근 반세기 기간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무연구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 이러한 입장을 강력하게 옹호한 대변자는 불트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를 대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반대했다: 첫째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은 케리그마에 제시된 그리스도이지 역사적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 입장을 평생 동안 일관되게 고수했다. 1926년에 불트만은 [예수](Jesus)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 저서는 예수의 말씀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의 진정성을 판정하는 데는 그의 [공관복음 전승사](1922)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그 말씀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히는 데는 실존철학의 실존 분석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 저서는 그 제명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예수의 생애나 인격에 대하여 기술하지 아니 하고 역사적 예수의 말씀을 오로지 참된 실존 이해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였을 따름이다.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신앙의 대상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이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게서 신앙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려는 태도이며 그것은 비신앙적이라고 공박한다. 이에 대하여 후기 불트만 학파는 역사적 예수의 삶 속에서 케리그마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무역사적인 현대판 가현설에 빠지거나 '그리스도'-이념(Christus-Idee)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고 항의한다.

 

6. 비신화화 작업

 

불트만이 제기한 신약성서의 비신화론적 해석은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신화는 그의 정의에 의하면 신적인 활동을 인간적 행위에 유비하여 서술하는 표상 방식이다. 신약성서의 신화적 표상들은 그 당시의 세계상의 산물로서 현대의 과학적 사고에 모순된다.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신약성서의 신화적 표상 형식들을 객관적 구원 사실의 서열로 끌어올려서 신앙의 대상 또는 믿게 하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지성의 희생(sacrificium intellectus)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오류라고 했다. 그는 신약성서의 신화적 발언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신화적 해석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할 것이 아니라 신화적 표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실존론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신화의 이러한 실존론적 해석은 신약성서 자체 안에 이미, 특히 요한복음서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불트만은 주장한다.

 

 

7. 실존주의 신학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 계시, 케리그마에 대한 해석의 목표를 궁극적으로 실존 해명에 둔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실존주의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 인간의 실존을 신학의 주제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학적 관련에 있어서만 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이 된다. 1940년대에 들어 와서 그는 요한과 바울의 글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그 연구의 결실은 [요한복음 주석](1941)을 거쳐서 [신약성서 신학](1948-53)에서 종합적인 완결된 형태로 나타났다. 신약성서의 핵심은 '케리그마'(Kerygma)이다.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사건, 특히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의 행위로 증언하는 선포의 말씀이다. 케리그마는 듣는 자에게 건네는 말(Anrede)이며 믿음에로의 부름(Ruf zum Glauben)이다. 믿음은 케리그마에 대한 응답이다. 케리그마는 믿는 자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케리그마는 믿는 자에게 미래를 향하여 실존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은 인간을 참된 자기 이해에로 인도한다. 신약성서 신학의 과제는 케리그마를 그때 그때 어떻게 이해할는지를 추구하는 것과 거기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어떠한 이해가 생겨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문서들 가운데서 오늘날의 인간에게도 인간 존재의 가능성으로 개시(開示)될 수 있는 하나의 독특한 실존 이해가 어떤 정도로 드러나는지를 묻는다. 그는 하나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케리그마를 통하여 가능해지며 바울과 요한에게서 더 직접적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보기 때문에 바울 신학과 요한 신학을 신약성서 신학의 중심적 내용으로 다룬다. 이와 달리 예수의 선포와 활동은 신약성서 신학 자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신약성서 신학의 전제들에 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의 신약 신학에서는 예수의 역사는 그 내용이 증발되어 버릴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은 시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Geschichtlichkeit)에만 관심하기 때문에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은 결국 가장 무역사적(無歷史的) 성서 해석에 빠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IV. 평 가

 

불트만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신약성서 학자이다. 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20여년 동안 독일 내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범위에서, 그리고 개신교 신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초교파적 차원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불트만은 20세기 기독교 신학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성서학 분야뿐만 아니라 조직신학, 해석학, 역사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미쳤다. 그는 진실한 학자인 동시에 겸손한 신앙인이었다. 학문과 신앙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두 개의 수레바퀴였다. 그는 주석가로서 성서의 메시지를 현대의 지성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는 일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비신화론이나 실존론적 성서 해석은 이러한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이 비록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학의 광장에서 그의 중요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가 제기한 문제는 현대인에게 절박한 것이며 그가 제시한 해결 방법은 진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실존주의 신학이라는 기본 틀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며 지성주의적이다. 그의 신학에는 실존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만 문제될 따름이지 실제적 인간의 삶의 과정으로서의 역사, 또는 억압, 해방, 혁명, 민중 따위의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불트만이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 문제는 현대의 부르조아 지성인들의 지적 고민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신학은 제3세계 신학자들에게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 엄청난 과업은 불트만의 신학이 그들에게 신학함의 디딤돌이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I. Kant) 이후의 철학자가 칸트의 비판철학을 통하지 않고서 철학을 할 수 없듯이 불트만 이후의 신학자가 불트만의 신학을 통과하거나 넘어서지 않고 신학을 한다면 그의 신학은 이론적 허점에 노출될 것이다. 모르면서 배격하는 것과 알고 난 후에 버리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불트만의 신학을 과감히 버릴 수 있기 위하여 먼저 그것을 똑바로 알아야 할 중대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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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불트만의 저서와 논문 목록은 Exegetica, 483-507, Th R 39/1975, 91-93에 수록되어 있음.)

 

불트만의 주요 저서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Gottingen 1921.

Jesus, Tubingen 1926.

Glauben und Verstehen, Bd. I, Tubingen 1933; Bd. II, 1953; Bd. III, 1960; Bd. IV, 1965.

Das Evangelien des Johannes, Gottingen 1941.

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Zurich 1949.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Tubingen 1953.

History and Eschatology, Edinburgh 1957.

 

불트만에 관한 주요 연구 문헌

 

Bartsch, H. W.(Hrg.), Kerygma und Mythos, I-VI, Hamburg 1948-1963.

Kegley, C. W.(Edit.), The Theology of Rudolf Bultmann, New York: Harper & Row, 1966.

Macquarie, J., An Existential Theology, London 1952.

, The Scope of Demythologizing, London 1960.

Ott, H., Geschichte und Heilsgeschichte in der Theologie Rudolf Bultmanns, Tubingen 1955.

Marle, R., Bultmann et l'Interpretation du Nouveau Testament, Paderbornae 1967.

Schmithals, W., Die Theologie Rudolf Bultmanns, Tubingen 1966.

Schnubbe, O., Der Existenzbegriff in der Theologie Rudolf Bultmanns, Gottingen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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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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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2009.06.29. 20:07

요즘 올리시는 것들 아주 재미있습니다~ ㅎㅎ 마냥 웃을 수 있는지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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