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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김이곤 교수의 13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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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의 김이곤 목사 설교

 

- 차 례 -

 

1. 보냄 받은 자의 신앙 (창세기 45:1-8)

2.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3.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전도서 11:1-2)

4. 운명과 자유 (시편 56:1-4; 로마서 8:31-39)

5. 어머님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 (룻기 1장 15~18절, 고후 1장 10~11절)

6. 니느웨로 열린 길 (요나서 3장 10절~4장 3절, 갈 5장 13~15절, 마 5장 43~48절 )

7. 이런 고난을 겪고서야 (시편 119편 71~72절, 롬 8장 18~19절, 눅 24장 25~27절)

8.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창세기 4:1-7; 마가복음 6:6-8)

9. 걸어다니는 나무 (판관기 9:8-9; 마가복음 8:22-26 )

10.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누가복음 24:25-27)

1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호세아 13:12-14, 고린도전서 15:54-55)

12. "약속의 땅의 거류민" (히브리서 11:8-16)

13.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마태복음 7장 21절-23절)

 

 

 

 

1. 보냄 받은 자의 신앙 (창세기 45:1-8)

김 이 곤 (한신대 신학대학원장)

 

성서본문 :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 하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창 45:1-8)

 

도입 :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매우 주목할만한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모든 종교들은 예외 없이 모두들 그들이 믿는 신(神)을 가시화(可視化)하여 그 가시화(可視化)된 신(神)을 섬기고 경배하며 신앙하는 데 반하여, 유독 신.구약 성서의 종교만은 신(神)의 가시화(可視化) 내지는 형상화(形象化)를 철저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려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나의 모든 「선함」을 네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면서, <나는 야훼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다>라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 곁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뒤」는 볼 수 있으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출 33:19-23).

 

이 말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주제인 "보냄받은 자의 신앙"이라는 주제의 그 깊은 뜻과 또 이 신앙을 증언하고 있는 "요셉"이라는 신앙인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이러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하여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한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고 싶다"는 말을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을 모세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시면서 오직 그의 이름만을 선포하시면서, <나는 "야훼"인데, 은혜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시고 그의 <뒤>(우리말 번역은 "등"이라고 했는데, "등"과 "뒤"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같은 말일 뿐이다)는 볼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 "선하심", "얼굴", "등" 등의 말들은, 물론, 모두 "은유적 표현들"(metaphors)이므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들로만 설명된 이 말씀의 참 의미는 이러하다. 즉 "영광"(카보드) 또는 "선하심"(토우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본질(essential nature)은 "얼굴"(파님)과 "등"(앗홀)의 결합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고 그의 "등"만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고 등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逆)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등"으로는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도 또한 어디까지나 은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이 말하는 바의 그 의미는, 이미 출애굽기 주석가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혀진 바다. 그 의미는 이렇다 : 야훼 하나님은 그의 역사적 행위들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그의 행위들을 통하여 그의 속성들은 인지할 수 있으나, 그의 본체는 인간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지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얼굴"(현현의 본체 : 파님)이라는 은유(metaphor)는 하나님의 본질(선[善]과 영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결코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인간이 가시화(可視化), 형상화(形象化)해서도 결코 안되는 것인 반면에, "등"(앗홀)은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앞을 신속히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등뒤로 남겨놓는 것으로서, 인간이 신앙의 눈을 통하여서는 능히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또 설명할 수도 있는 것, 아니, 분명히 보고 느끼고 설명하며 증언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중요성은, 이 하나님의 "등"(앗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의 본체는 볼 수 없도록 빠른 속도로 우리 앞을 지나가시면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성서주석가들은 거의 한 목소리로 설명하기를, 우리네 인간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그의 뒷 자취를 남겨 놓으시면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들"(magnalia Dei : 마그날리아?데이, the mighty acts of God)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본문, 저 유명한 출애굽기 33:19의 말씀의 문맥에서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들(屬性 : attribute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렇다.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그 신학적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기독교 진리의 근본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보려고는 결코!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의 등 뒤로 남겨 놓으시는 그의 속성, 즉 그의 본질을 알려 주는 그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 이른 바, 그가 우리의 가시적 역사 속에 계시(啓示)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들"(the mighty acts of God)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또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들을 우리의 성서 출애굽기 33:19는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행위>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 본체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역사 속에 남겨 놓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들을 ― 그의 "등"을 ―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이 세속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그의 구원역사 행위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송아지 상으로 가시화 하듯이, 그렇게, 그 어떠한 것으로든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물질화하는 사람은 그 누구이든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 인간사들 속에 계시(啓示)되는 "하나님의 등" ― 비록 신속하게 지나쳐 간다고는 하여도 ― 그 "등"을 보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어떠한 길로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증언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여서 결코 모호하지 않다.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모름직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하나님을 얼굴로"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적 시각으로 고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우리의 신앙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 세속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은 반드시 포착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역사 사건들은 결단코 우리가 놓치지 말고 반드시 포착해야 할 하나님의 등>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속 역사 속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등"을 보아야 하고 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등>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심 이야기 : 요셉의 신앙="보냄받은 자"로서의 신앙

 

요셉은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늘 꿈을 꾸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고 밀밭과 보리밭 이랑 사이에서 곡식단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다. 심지어는 죄수들이 좌절의 탄식 속에서 생을 저주하는 감옥 속에서도!! 그는 꿈을 꾸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실의와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드리워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인생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등>을 늘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인에게도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아니, 참 신앙인일 수록 시련은 더 크게 마련이다. 바로 이점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점이다. 즉 참 신앙인에게는 시련이 많으나 그 모든 시련이 모두 다 하나님의 사건이요 또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한 다양한 형식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기이하게 여기고 또 놀랍게 여기는 것 하나는 요셉은 그 많은 시련들 속에서도 언제나 <침묵으로!!> 그 모든 시련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형들에 의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미움을 받고 또 노예로 애굽에 팔려가는, 이른 바, 인신매매의 고통 속에서라고 할 지라도 요셉은 입을 열어 그의 형들을 비난하거나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지를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성희롱 범죄자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전혀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하지를 않고 <침묵>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는 한 동료 죄수의 길(吉)한 꿈을 해석해 주면서 출옥을 하면 자기의 도움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그 동료 죄수가 막상 출옥을 하여 옛 관직을 회복한 후에는 까마득히 요셉의 은혜를 잊고 있었을 그 때도 또한 요셉은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는 일없이 <침묵으로> 그가 당하는 수난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침묵"은 결코 자포자기의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그 모든 생의 굴곡이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진행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의 신정론적(神正論的) 믿음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즉 그는 그의 고난의 생을 통해서 오히려 그의 앞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던 것이다. 그 모두는 모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으로만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인내로서, 그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기만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이 아주 분명하게 천명되고 설명된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45장 1절-8절의 말씀이다.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애굽의 전(全) 국고를 맡은 막강한 권력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고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은 오히려 먹을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온 늙고 힘없는 가난한 유목민으로서 그리고 총리대신의 은잔을 훔친 죄인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죽을 목숨이 되어서 요셉의 처벌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오직 이것 뿐이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보복의 칼"을 드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세운다는 미명아래, 동생을 인신매매에 붙여서 애굽에 노예로 판 그 범죄를 열명이나 되는 형들 중에서 과연 누가 주도하였고 또 누가 협력하였는지를, 이를테면, 주범이 누구이고 또 공범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불의를 척결한다는 예언자적 용기로 형들을 형틀에 매어다는 비정(非情)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반응은 이러한 일반적 기대를 역행(逆行)한다. 즉 요셉은 우선 혈육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은 대립의 긴장관계를 깨뜨리고 화해의 새 관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열어 놓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본문은 요셉의 울음 소리가 애굽 사람들에게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설명한다(창 45:2). 이러한 요셉의 행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정한 거리를 둘 정도로 히브리 사람들을 천대시하여 왔기 때문이다(창 43:32).

 

말하자면, 요셉은 당시의 세계 총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사회적/정치적 권위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혈육의 정을 거침없이 토로한 셈이다. 즉 "저는 요셉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아직도 살아계시옵니까?"라고 요셉은 말한다. 이것은 일종 사회적 지위나 사회적 관습보다 혈육간의 애정관계가 더 중요하고 더 앞서는 것으로 보는 그의 휴머니즘의 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스라엘 지혜문학권이 말하는 소위 합리주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요셉은 또한 합리주의를 무시한 감성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이야기의 초점이 있다. 요셉은 이 요셉이야기의 대 서사시를 다음의 신앙적 진술을 말함으로서 그 절정으로 이끈다 :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너무 자책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말하자면, 형님들이 근심하지 말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다. 즉 요셉은 그의 형들로 하여금 눈을 들어 더 큰 안목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보게 한다. 이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행위>만이 형님들과 나 사이의 결코 풀 수 없는 매듭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피를 나눈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이 사악한 세상의 일들까지도 감히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그는 감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역사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여기처럼 이렇게 분명하고도 극적으로 잘 설명된 곳을 성서 다른 곳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5이 증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역사의 "한" 기원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본문은, 그 무엇보다도, 모든 세상사들은 전적으로 "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사에는 그것이 그 어떠한 성격의 것이든, "한"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 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마태 10:29).

 

이렇게 하여,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이 둘 또는 셋 혹은 그 이상의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는 주장, 역사의 다원주의, 특히 역사의 이원론적 주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를테면, 흔히들 생각하는 바, 이 세상의 선?악의 질서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라는 두 신(神)으로부터 기원(起源)되었다는 그런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와 같은 것이 여기서는 철저히 철폐되고 있다.

 

말하자면, 선한 일은 선신(善神)으로부터 오고 악한 일은 악신(惡神)으로부터 온다. 행복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불행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건강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질병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부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가난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평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전쟁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빛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따위의 이원론적 사고가 여기서는 전면 철폐되고 있는 것이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는, 이른바, 역사의 두 기원에 관한 믿음이 여기서는 전면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창 45:5, 8)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기는 비극이란 결단코 형님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선도 악도,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하나님이 만드신 일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이라는 것이다(사 45:7). 주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욥 1:21).

 

매우 파격적인 이러한 증언은, 그러나,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증언하고 있는 말씀일까? 그것은,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달렸으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될 대로 되어라"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두자는 뜻의 말일까?

 

그러나, 성서의 근본 입장은 아주 분명하다. 즉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로부터 신앙인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도를 물으라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결코 그 손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요지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우리는 두 번째의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할 때, 그 때의 이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요 신학적 물음이다. 성서는,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대답을 갖고 있다.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요셉을 그의 형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창 45:5 하반)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 우리네 신앙인은 ― 언제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2.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한" 뜻

 

문제의 핵심은 여기 있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신 오직 한 분 뿐이신 그 창조주이시라면, 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들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장 5절 하반절은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 for the emergence of new life)라는 말로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여기에 근본적인 대답이 있다. 즉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사건들) 속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God's will to preserve life / to revive)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성서적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신앙인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부조리하게 보일지라도, 이 세속 세상사들 속에는 그것이 어떠한 모양을 띠고 있든 간에 거기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그 악행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 의지>가 들어 있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자포자기 형식의 부당한 숙명론적 사고로부터 온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과 죽음과 같은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생명구원 / 보존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속성(屬性)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강연의 서론인 <도입부>에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님의 얼굴은 인간이 볼 수 없으므로 결코 그것을 보려고는 하지 말되,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啓示)하여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 이 세계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스러운 것일찌라도 거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구원 / 생명보존의 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시내산의 모세를 향하여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다"(출 33:19)라고 말씀하시므로서, 단지 그렇게만 말씀하시므로서, 자신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생을 노예로 파는 형들의 그 악한 일 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가 들어 있었다는 그런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롬 12:21). 이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기독교신앙은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마치 십자가의 진리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듯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계시를 보지도 읽지도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즉 모든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 그의 자비의지와 그의 긍휼의지란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거리낌" 또는 하나의 "미련한 것"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요나 이야기는 그것을 증언한 대표적 성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의 선지자 "요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는 그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용서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니느웨"는 회개를 한다고 해도 어쨋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요나"의 하나님을 향한 저항은 참으로 집요하였다. 그래서, "요나"는 만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를 하신다면 차라리 자기는 "자살"로서 항거를 하겠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욘 4:3, 8).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상(!!), 본질상!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도(!) 회개할 때는 뜻을 돌이키시며 재앙을 내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욘 4:2), 이것이 요나서 교훈의 핵심이었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 가지의 뜻은 <생명구원의 의지>라는 것이었다. 인간 역사는 악이 난무하는 세계다. 정말 살 맛 안나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역사를 악하다 하여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은 더 더욱 아니시다.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끈질긴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즉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한 3:17)라고 증언하였다. 아마도,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속성은 인간생명의 구원이고 인간에 대한 심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이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그러한 극한적인 악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노라고 증언한 것이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좌절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렇다! 진실로 그렇다!! 인간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 생명을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려는 의지이다. 이것을 믿는 신앙이 바로 다름아닌 성서적 의미의 하나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는 자는 항상 승리감을 갖고 산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구원의지를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믿는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If God is for us, who is against us?)라고 말할 수 있었다(롬 8:31)[죽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구원활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활동의 도구로서 자신을 이용/사용하신다"는 확신도 갖는다는 것이 오늘 읽은 우리 본문(창 45:1-8)의 결론이다. 요셉의 말, "하나님은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형님들 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라는 요셉의 말은, 바로, 요셉의 그러한 소명 신앙을 증언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3.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

 

인생은 누구나 "보냄을 받은 자"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셨고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할 뿐이라고 하셨다(요한 8:42 ; 20:21). 자기 의지로 세상에 온 자는 아무도 없다. 가인이 하와와 동침하여 하와가 가인을 낳자 하와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다고 창세기 4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인과 같은 살인자도 다 뜻이 있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셔서 비로소 세상에 온 자들이다. 오고 싶다는 나의 의지 때문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모두!! <보냄을 받은 자>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이 가질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세상에 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나는 우연히 세상에 오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무지한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다"는 성서적 신앙을 확고히 갖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가리켜서 "애굽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고 증언하였다. 말하자면, 형들이 자신을 애굽으로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전적으로 <보내신 자(sender)와 보냄을 받은 자(One who is sent)>의 관계로 설정한다면, 만일 이 설정이 옳다면(!), 우리가 보냄을 받은 데에는 보내신 자의 목적이 들어 있다는 판단은 논의의 여지 없이 옳다고 하겠다.

 

요셉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형님들 앞서 보내신 그 목적을 증언하기를, <큰 구원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남겨두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창 45:7)

 

라고 증언하였다. 이 증언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 3:17의 증언과 정확히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를 세상에, 그리고 또 요셉을 에굽에 <보내신 자>의 그 보내시는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고 동일하며 유일하다(!). 즉 그것은 "세상의 구원"이다(요한 3:17). 세상의 심판이 아니다. 세상의 멸망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비가 필요한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일을 하는 것(출 33:19)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God's back=God's attribute)이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적(詩的) 은유(隱喩 : metaphor)로서 가장 설득력있게 증언한 자는 시편 121편 시인으로 보인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올까? 나의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야훼로부터 온다. 야훼 하나님은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결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세상에 보내신 분의 "뒷 모습"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등"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자의 기본 태도는,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자의 그 기본 태도는 전적으로 그것은 "보내신 자"를 모방하는 것(Imitatio Dei)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앙적 응답이다 :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요한 8:42)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 즉 나를 "보내신 분"이신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보냄을 받은 자"인 나도 일한다는 것이다. 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요셉의 경우와 예수님의 경우 사이에 이와 같은 유형론적 연결이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러한 유형론적 연결이 있다는 것이 성서의 결론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이 내린 결론도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준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

 

이 말씀에 대한 1세기 랍비들의 고전적 해석(Talmud Babli, shabbath 133b)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 아버지께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듯이 "너희들도" 그를 닮아 자비롭고 긍휼이 많아라.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은, 이와 같이, "보내신 이를 본받는 것"이다.

 

Imitatio Dei! Imitatio Christi! 하나님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본받아!

 

2.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 121:1-8)

 

"싸운드?오브?뮤직"이라는 매우 고전적인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극 중에서 가장 긴장감을 자극시켰던 장면은, 배런?폰?트랲(Baron von Trapp)이라고 이름하는 한 오스트리아 해군장교가 세계 제2차 대전 초 히틀러 제국으로부터 군입대 소집통지서를 받자 자신의 조국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도망치는 장면이었습니다. 특히, 폰?트랲이 그의 새 아내인 마리아(Maria)와 자녀들과 함께 아내가 결혼전에 몸 담고 있었던 수녀원으로 몸을 숨겼을 때였습니다. 독일 헌병들이 그 곳으로 몰려와서 그들의 은신처를 샅샅이 수색할 때, 즉,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매우 절망적인 그 순간에 마리아가 애절하게 읊은 기도문의 한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 절 말씀이었습니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라는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이 마리아의 머리 속에는 수녀원 뒤를 막고 서 있는 산들이나, 아니면, 독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국경선들이 맞물리는 알프스 산맥의 그 높고 낮은 푸른 언덕들 위에서 가족들과 손에 손을 잡고 흥에 취하여 요들 송을 부르며 자유의 품에 안겨 한껏 춤을 추는 자신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자리잡고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눈을 들어 산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것인가

 

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에 찬 부르짖음에 뒤이어, 폰?트랲씨는 기적처럼 수녀원 뒷문으로 빠져 나와 그의 가족을 이끌고 국경선을 넘어서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어느 푸른 언덕 위에 도달합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그가 그토록 마음 속에 그렸었던 그 언덕들, 그 푸른 산등성이를 타고 치마를 나풀대며 내리 달리고 아이들도 춤을 추며 자유의 노래를 목청껏 소리내어 부를 때, 저 알프스 산맥의 온 산야는 아름다운 "싸운드?오브?뮤직"의 선율로 삽시간에 가득 매워지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마치 산들을 쳐다보며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는 한 젊은 여인의 애절한 기도가 마침내 산들을 감동시키고 그리고 그 산들이 감히 팔을 벌려 고운 노래의 여인, 마리아와 그의 가족을 품에 안아주어 나치 독일의 마수로부터 건져내어 주게 되었노라고 하는 매우 이색적인 종교 드라마 쯤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싸운드?오브?뮤직은 매우 감동적이기는 하여도 또 이 작품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한 논픽션이라고는 하여도,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폰?트랩의 새 아내,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마리아의 그 <산(山)을 향한 기도>와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저 산(山)들의 구원 응답>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인간 삶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문학적 응용은 과연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이 이 설교가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우리의 성서본문인 시편 121편 시인은 싸운드?오브?뮤직이 대답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대답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매우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시편 121편 시인은 이렇게 묻고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1절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절 :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야훼에게서로다.

 

이 말을 하는 시편 시인의 참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물었으나, 그러나, 나의 도움은 산으로부터는 오지 "아니하고" Not from the hills! 오직, 천지를 지으신 야훼로부터 왔도다. But from Yahweh who made heaven and earth! 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또 다시 이보다 좀 더 쉽게 푼다면 그것은 또한 이러한 말이 될 것입니다.

 

내가 산(山)을 향하여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물었으나, 산들은 대답하기를, "산은 산일 뿐이다"라고 하고, 물들은 대답하기를, "물은 물일 뿐이다"라고 하였을 뿐,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분, 산과 물을 지으신 창조주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을 알았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산(山)이 우리의 도움을 주는 자, 물이 우리의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점에 있어서는 매우 단호하고 확고하였습니다. 즉 성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 그 산으로부터 그 무슨 구원이라는 것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난 후 곧, 이어서 <나의 구원은 오직 산을 지으시고 물을 만드신, 천지를 지으신 분,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라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성서 이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 성서는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와 같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즉 아기 예수를 담고 있는 "구유"만이 성서요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기 예수가 없는 "구유"는 단지 그냥 "구유"일 따름이며 그러므로 이 아기 예수가 "없는" 구유를 감히 성서라,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다면 그것은 구유를 아기 예수로 생각하고 섬기는 "우상숭배"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가 담겨 있지 않은 "구유"는 전혀 구원의 능력이 없는 단순한 하나의 나무토막이며 지푸라기일 뿐입니다. 성서도 이와 같습니다. "성서"도 또한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향하여 증언되지 아니한다면, 성서의 그 문자는, 그리고 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그 문학은 그저 단순한 문자 자체, 또는 단순한 인간문학 자체 이상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즉 <살아있는 구원의 말씀이 되도록 해석되어야 합니다!> 문자 그 자체 또는 문학 그 자체가 구원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성서를 한낱 마술서 또는 주술서로만 보는 모독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아름다운 금장색으로 치장하여 시렁 위에 잘 모셔 놓는다고 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요 또 성서의 내용을 무조건 많이 암기하고 있다고 해서도 또 그 내용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의 세계 교회들이 앞다투어 성경공부반을 많이 만들어 프로그램화 하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과 직접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세계 교회들의 풍조를 감히 <교회의 위기>라고 부릅니다.

 

나는 감히 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선포되었던 저 구라파와 미국 사회의 교회들이 이제는 그 힘을 잃어서 점점 쇄잔하고 또 교회 건물들은 점차 단지 기독교문화의 옛 유적지로 전락하여 화석화되고 있는 그 근본이유란 오늘의 서구교회가 성서와 만나되, 올바른 해석학적 노력을 통하여 만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는 일"은 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하나의 불행스러운 현상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생명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산(山)을 쳐다보고 그 산(山)으로부터 그 무슨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을 기대하여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 산(山)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도움과 나의 구원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산은 산일 뿐, 산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물은 물일 뿐, 물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늘은 하늘일 뿐, 하늘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땅은 땅일 뿐, 비록 그 땅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여도 "땅"을 하나님이라고 신앙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산도 지으시고 물도 만드시고 그리고 하늘도 땅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 자신을 지으신 그 하나님 야훼로부터만 구원이 온다는 것을 믿고 그 분만을 신앙하여야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문자, 성서라는 책, 성서의 문학 그 자체가 곧 마술적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성서의 문자들에 대한 바른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성서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으로 해석된 그 해석된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시인은 단호히 말합니다. <나의 도움은, 나의 구원은> 산으로부터 오지 않고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고 증언합니다.

 

결정적 포인트는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입니다. 시인이 믿고 있는 하나님, 우리 기독교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관념적인 신(神), 문자속에 갇혀 있는 신(神), 인간종교가 만들어 놓은 신(神)은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산(山)은 물론이고 이 온 세계, 이 온 우주, 그리고 우리네 이 모든 인간을 모두 직접 조형하시고 조성하시고 잉태하시고 출산하시고 키우시고 양육하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이른바,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를 손수 빚어 만드셔서 세상에 내어 보내주신 그 어버이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미의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즉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를 지으신 이가 되시며, 또 우리 모두의 어버이가 되시는 그 분 하나님 만이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시라는 것은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태도를 통하여 볼 때,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즉 창조주 하나님은, 본질상, 그의 창조물을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우리의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어버이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 낳은 자식을 끝까지 "지켜 보호하고 양육"하는 그 보호 본능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본질상 그의 피조물을 지키고 보호하며 양육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 3절에서 8절 끝까지 모두 여섯 절에 불과한 이 시 속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열쇠가 되는 말은 "지키신다"는 말이라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는 결단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야훼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야훼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도 너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야훼께서 너를 지키셔서 모든 재앙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도 지키시리로다.

야훼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주무시기는 커녕 결코 한 순간도 졸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늘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 걸음을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낮의 해도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게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어머니 하나님은 모든 환난으로부터 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창조주 야훼께서는 우리의 모든 출입을 영원토록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산으로부터 오지 않고 창조주 야훼로부터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성서는 산으로부터 구원이 온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온다는 것, 아니,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만인의 어머니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산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치권력을 보고 너는 나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칼과 창과 활, 그리고 탁월한 마병과 군사력을 의지하여 그를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이실 뿐이라고 말합니다.

 

1968년 2월 지금부터 30년전 혹한의 겨울이던 어느 날, 나이 만 28세의 젊은 청년 김이곤은 싸운드?오브?뮤직의 저 마리아처럼 남쪽 창을 열어 놓고 남녘 하늘을 가로막고 서 있는 저 산들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 "내가 산(山)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굳게 어금니를 물고 있는 나의 양 볼에는 각혈한 선지 빛깔의 핏덩어리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양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은 연방 솟구쳐 나오는 핏덩이들로 쉴 사이가 없었습니다. 이 사경을 헤매는 고통은 밤 늦도록 계속 되었고 나는 지쳐서 어머니 품에 온 상체를 모두 내 맡겨 놓은 채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울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울음 소리는 기도 소리였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내 귀에 흐느끼는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의 그 작은 품은 겨울인데도 어찌 그렇게도 따뜻하게 느껴질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 밤을 그렇게 피를 쏟아내며 온 이부자리를 피로 물들이기까지 하였지만, 그러나, 어머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신 채, 아들의 생명을 끝까지 그냥 그렇게만, 그렇게만, 그렇게만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나의 도움이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되시는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시인의 그 신앙의 깊이를 비로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따스한 보살핌과 지키심이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게 느껴올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참 도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구약성서가 이끌어 들인 최상, 최대의 은유는, 그러므로, <어머니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잉태하시고 출산하신 천지 만물의 한 분 어머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즉,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친 어머니, 우리의 친 어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지음받은 우리들이 감히 그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죄로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감히!!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할찌라도 자식인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기마 하면, 우리가 감히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인의 이러한 은유법은 정말 놀라운 구약신학을 도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야-훼"라고 불렀습니다. 이 "야-훼"라는 이름은 "그가 존재하게 한다" 즉 "그가 창조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훼"라는 말은 "창조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권위있는 언어학자들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또는 "나는 나다" 또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오히려 "나는 있게 하는 자다" "나는 존재할 것은 존재하게 하는 자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라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첫번째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은유는 야훼 하나님을 출 6:3에서는 "엘?사따이"라고 하였다는 점입니다. "엘?사따이"라는 말의 뜻은 일반적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번역하여 왔습니다만 그 언어의 원의미는 "젖가슴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관한 은유적 뜻 풀이를 구약성서는 젖가슴의 기능을 통하여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신앙세계는 "젖가슴"의 기능을 전능의 기능으로 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야훼의 전능하심의 본질이 모성본질이라고 이해하는 구약신학적 인식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성적 창조주 하나님 야훼를 구약성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은유적 언어로 그 대표적 기본속성을 설명하고 또 표현하였다는 점입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언어는 "라훔"이라는 언어이고 이 "라훔"의 어원은 "레헴"인데, 이 "레헴"은 자궁, 즉 산모의 자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기본 속성은 "자궁"이고 그 어머니의 "자궁"은 본질상 긍휼이라고 그들은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피조된 존재인 우리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을 구약성서는 야훼 하나님의 "긍휼" 본질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자궁과 젖가슴의 그 희생적 사랑을 구약성서는 "긍휼" / "불쌍히 여김"에서부터 찾았던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되 모성본능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분이, 그 전능자가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출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 야훼이시라는 그런 말입니다. 즉 자식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자신을 못 박으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 어머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네 자식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우편에서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으로서 결코 졸지도 아니하고 결코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의 도움은, 즉 절대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도움은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의 모성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그 모성애, 즉 그의 긍휼로부터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하시는 분은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으로부터 나의 도움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고 있더라도 그 산이 우리의 도움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모습을 우리에게서부터 가리는 그 어떤 언덕이나 산은 우리의 주변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교회마저도 우리의 눈을 가려서 참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감히 자신을 뒤 돌아다 본다면, 즉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우리의 신앙양심에 의하여 자기 비판해 본다면, 만일 그러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쌓인 자랑스러운 우리의 연륜이 연륜이 오히려 나의 참 도움이신 야훼 하나님을 가리는 바로 그 산이나 그 언덕이 아닌지를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산으로부터가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야훼로부터 옵니다.

 

 

 

 

 

3.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전도서 11:1-2)

 

 

어떻게 하면 우리 한신 신학교가 신학교로서의 그 본분을 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학교 교수로서 그리고 목회자 양성기관의 선생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학생으로서의 그리고 목사 후보생으로서의 우리의 본분과 사명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자기를 돌이켜 보고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진이나 초상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확인합니다. 내가 행한 일을 통해서 또는 내가 써 놓은 작품을 보고서 나 자신을 확인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남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얼굴만은 아닙니다. 성격이나 능력이나 사상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르게 형성하여 가는 길은 결단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본질상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라야 비로소 나를 알고 또 남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진리를 말하는 성현들은 다들, 네 자신을 먼저 알라라고 충고를 하셨고 그리고는 자신을 알되, 남과의 관계 안에서 즉 남을 통해서 자신을 알라라고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7:12)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와 "너"는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곧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너무나 보편 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르침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되고 가장 기초되는 삶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 랍비 힐렐이 "네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라. 이것이 율법의 전(全) 내용이며 이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주석일 뿐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던 것은 이 계율이 모든 다른 계율을 모두 주석으로 돌릴 만큼 가장 근본되는 인생 계율이 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동일한 관점은 예수님께서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을 읽으실 때, 즉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야훼니라"라고 하는 구약 말씀을 읽으실 때도, 이 게명을 가리켜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도 하셨고(마 22:39-40),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계명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고(롬 13:8), 사도 요한은 이 계명만 지키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요 13:35).

 

이러한 성서적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오늘 설교의 서두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대답은 매우 자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한신 신학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신학이었습니다. 칼?바르트를 말하고 에밀 부르너를 말하며 폴?틸리히를 말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폰?라트를 말하고 루돌프?불트만을 말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극심한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 현장으로부터 들려 오는 많은 소리들은, "신학교가 교회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신의 신학이 기장 교회의 신학을 책임지고 있지 못하다." "한신 출신의 목사 후보생들은 교회선교의 열정이 부족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며 교회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명감이 약하다."라는 부정적인 평가의 소리들이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하게 만든 것일까요?

 

우리는 단지, "우리는 신학을 잘 가르치고 있는데 제자들이 현장에 나가서 잘못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책임을 제자들에게 떠 넘기기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는 뛰어난 신학도로서 또한 훌륭한 신학을 갖추고 현장으로 나갔지만, 교회의 현장이 너무 무식하여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서 교회 선교가 미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라고만 우리는 말하는 것입니까? 현장 교회가 우리를 모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교회 현장을 모르는 것입니까?

 

여기서 나는 필연적으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 이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바로 율법이요 선지자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다 주석일 뿐이다>라는 가장 초보되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마 7:1)

 

자기 눈속의 들보는 감추어 두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시비하여서는 공동체는 결단코 발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니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빼라!(마 7:3-4)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념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감히, 능청스럽게도 우리는 "자기 얼굴은 자기가 볼 수 없다"라고 핑계하면서 남의 얼굴만 가지고 시비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내어 주지는 않고 남의 것만 내것으로 가지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큰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용적이고 남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하기를 지나치게 인색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이고 밖이고 간에 인간 사회는 자기를 먼저 남에게 내어주어야 남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내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 파당만 사랑하면 공동체는 와해되고 발전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철저히 공동체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대접해야만 비로소 유지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 했다면, 그리고 섬기려고 하지는 않고 지배하려고만 하였다면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너를 미워한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라고 말하는 곳에서는 결코 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철칙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신의 비판신학은 결코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남의 인격을 헐뜯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을 장려하는 신학은 물론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서는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남을 세워서 나를 세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삶의 철칙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육신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서 누구든 십자가의 사랑을 감히 어용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적그리스도일 뿐인 것입니다.

 

구약 최대의 지혜교사인 전도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1)

 

표준새변역의 번역, "돈이 있으면 [해상]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라는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므로 본문의 의미를 금전 투자로만 좁히는 약점이 있어서 오히려 개역성서에서 처럼 원문 그대로를 문자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은 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운명을 흐르는 물 위에 내어 던지는 "자기 내어줌"의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내어 던져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사랑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칭찬하고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남도 나를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Take and Give가 아니라 Give and Take라는 것입니다.

 

먼저 심어야 하고 나중에 거두는 것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해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어야 부활의 새 창조가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한신공동체의 발전의 향뱡은 분명합니다. 교회공동체 발전의 향뱡도 분명합니다. 먼저 자기를 내어 주십시오. 그러면 많은 이윤이 붙어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인간 세상이 비록 흐르는 물처럼 신의가 없다고 하여도 그래도 자신을 내어 던져 보십시오. 그러면 자기를 더 많은 이윤과 함께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기쁨! 실로, 그것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기쁨! 그것도 또한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기쁨의 진가는 그 어느 누구도 결코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자기반성은 무엇입니까? 신학하는 자들로서의 우리의 자기반성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이냐 행위냐? 그리스도냐 율법이냐? 할례냐 무할례냐? 라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말씀하실 때.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라고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만, 공동체라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는 일 없는 비판주의만으로는 결코 설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우리가 몰랐다면 분명 이것을 몰랐던 것임이 확실합니다.

 

대학의 비판주의는 "자기 비판"을 선행하는 비판주의입니다. 우선은 자기를 먼저 흐르는 물 위에 던져 버린 다음에 그 다음에 자기를 얻으려 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은 "사랑의 동기"가 있는!! 비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자멸할 것입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그래야 비로소 그것을 도로 찾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 과감히 자신을 내어 던진 후, 여러 날 후에, 더욱 새로워진 자기를 도로 찾는 그것이 기독교적 지혜요, 기독교적 삶의 방식입니다. 그 반대는!! 적(敵) 그리스도적 삶입니다. 적어도, 신학을 한다는 우리 신학도들만은 그래야 합니다.

 

신학교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배우는 자도 그래야 하지만 가르치는 자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학문과 경건, 이 둘은 결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엄격히 둘로 분리시키는 자는 타 학문분야에는 혹 어울릴른지 몰라도 신학의 세계에서는 신학하는 일을 방해하는 최대의 "스칸달론"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좋은데, 좋은 크리스챤은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자기 모순입니다.

 

우리 한신에 대한 모든 비판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훼와 그리스도를 가르치면서도 야훼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또 그것을 용감히 가르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 "내" 식물을 물 위에 던져야 합니다.

먼저, 나를 나의 이웃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위로와 격려를 주어야 합니다.

그 다음, 그것도, "여러 날 후"에!! 당장이 아니라!! "여러 날 뒤"에!!

나를 도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적 삶이며

크리스찬적 삶이며, 목회자적 삶입니다.

우리를 우선 먼저 흐르는 물 위에 던집시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그것을 도로 찾읍시다.

 

 

 

4. 운명과 자유 (시편 56:1-4; 로마서 8:31-39)

 

올해 첫 월요일에 있었던 KBS'TV의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점이 뭐길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는 대로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대학입시 본고사를 시행하고 있는 날이었는데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긴장감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점, 사주, 궁합, 역학 등에 관한 이 말 잔치는 그 어느 TV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돋보이는 프로그램 같았습니다. 거기 출연한 분들의 증언들은 주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실제 겪은 바의 이야기를 마치 "신앙간증"을 하듯이 확신을 가지고 간증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발언대에 나온 어느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처녀 시절에, 궁합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양가 집안에서 모두 반대하는 혼사를 과연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망설이든 중에, 어느 점술가의 "지금 사귀는 남자와 결혼하면 6년 이내에 그 남자가 죽는다"는 아주 나쁜 점괘의 말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오기도 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6년밖에 못산다는 그 남자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 차라리 이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나 하나 낳아서 만일 6년이 되어 남편이 죽으면 그 자식을 희망 삼아 재혼 않고 혼자서 한 평생을 살면 그것이 내 팔자에 어울리겠지 생각하고는 무리한 결혼을 오히려 급히 강행을 하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놓고 보니, 점괘가 용하게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 이 남편 성질이 너무 고약하여 부부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용한 점술가가 6년밖에 못산다고 했으니까 6년만 참으면 되겠지 하고는 기왕 6년만 살고 죽을 사람이니 웬만한 것은 내가 참자고 생각하면서 꾹 참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년이면 죽어야할 남편이 6년이 다 되었는데도 전혀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싱싱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어서, 살아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대견하고 감지덕지하여 이 부인은 그저 늘 감사한 마음으로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사이에 남편도 마음 잡아 열심히 일도 하고 또 돈도 잘 벌어오고 하여 결혼한지 3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점"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노라고 그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매우 확신에 차서, 아주 차분하고도 강력하게 열변을 토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가 체험한 바,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TV 카메라 앞에 담대히 서서 점치는 일, 그것은 공연한 짓이고 또 미신에 불과한 일일뿐이라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이 곧 뒤이어 나왔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다른 한 부인이 역시 같은 자리에 서서 TV 시청자들을 향하여 매우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의 체험담을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젊어서 결혼한 후 약 15여년 동안 열심히 살아 보겠다고 남편과 힘을 모아서,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사양 않고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시작했다하면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실패를 하고 또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인의 남편은 마침내 실의에 빠져서 늘어나는 것은 술뿐, 그저 술만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남편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어서 경찰서에 잡혀와 있는데 부인이 속히 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재앙이 겹친다고 생각한 이 부인은 황급히 달려나갔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길거리 노상에 앉아서 사주를 보는 노인네의 사주 보는 상을 엎질러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쁜 경황 중에서도 그것이 너무 미안해서 흐트러진 책들을 빨리 주어 상위에 올려놓아 주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라고 거듭거듭 사과를 하였는데, 갑자기 그 사주를 보는 할아버지가 자기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손등에 푸른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아주머니 손이 열두 가지도 넘는 재주를 가진 손이여, 장차 큰 일 하겠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엉겁결에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하면 성공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할아버지 말씀이, "머리 만지는 일이나 옷 만드는 일을 하면 성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그 당시에는, 남편 일로 너무 경황중이라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또 복채도 못낸체 그냥 경찰서로 달려만 갔었는데, 모든 일이 다 정리된 다음,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 점치는 노인장 말씀대로 용기를 내어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해 가지고 여자 머리 만져주는 미용사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도 만만치 않아 기막히게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그러나,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일을 했더니, 마침내 그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미용사가 되었고 또 자른 머리털로 온갖 실내장식품을 만드는 유명한 국제 산업 디자이너가 되었노라고 하면서 전시회 장면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아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부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점"은 미신이 아니라 매우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나의 과학과도 같은 것이라고, 강변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점치던 노인을 혹 만날 수 없을까해서 또 만나면, 그 때 복채 못드렸던 것을 마음껏 보상해 드리고 싶어서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거리를 살피지만 그 분은 끝내 못 만났노라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점술의 초능력은 분명히 믿을 수 있는 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그 부인은 강하게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점술은 그 무슨 신접한 자의 초능력일까요? 아니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잠재 능력으로서, 점술은 일종의 "과학"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서 도처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점술은 허황된 미신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인류 역사는 그 처음과 끝이 이미 조물주에 의해서 처음부터 무슨 사주단자처럼 판에 짜듯 미리 만들어 놓은 어떤 숙명적인 것일까요? 기독교 교회가 줄곧 말해 온 소위 "예정론"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운명의 틀 속에 엄격하게 들어 있는 그런 것일까요? 첨단 과학에서도 숙명적인 것, 운명적인 것, "숙명"이라는 말과 "운명"이라는 말이 서로 다른 말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대한극장에서 상연되었던, "시간 기계" 즉 "타임 머신"이라는 영화는, 다분히, 인간 역사를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제 2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 호킹 박사도 최근에 와서는 자신의 옛 이론을 수정하여, 인간이 과거로도, 미래로도 왕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물리학에는 전혀 문외한이라서,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물리학적 개념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말씀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자에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무슨 "과학신학"이라는 것의 한 이론을 소개하는 것조차도 전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핵심 또는 주요 관심일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설교라는 문맥 안에서라 할지라도 이렇게 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것의 물리학적 본질은 무엇인가? 또는 도대체 "영원"이라는 것이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늙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리고 다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이라는 것은 과연 물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것인가? 그리고 우주란 무엇인가? 무중력의 저 망망대해의 우주는 과연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수퍼노바의 신비는 무엇인가? UFO의 잦은 출현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인가? 우주는 과연 얼마나 넓은 것인가? "속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2000년, 2000년 하는데 왜 2000년대라는 시기가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예언가나 점술가들이나 휴거론자들의 종말 예언과 그토록 자주 연관되고 있는 것일까? 그 "때"와 그 "시"는 과연 아들 예수도 모르는 것이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특수장치로 숨겨둔 비밀인가? 컴퓨터나 바?코드는 어떤 묵시적 또는 악마적 징조일까? 요한 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묵시문학적 숫자인 888은 무엇인가? "운명"은 과연 창세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인가? 관상이나 수상은 정말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우리는 신앙의 문맥 안에서도 한번쯤은 던져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1800년대 사람들이 아니고 190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특정한 시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뜻밖에도 이렇게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살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일들은 실로 그 모두가 "운명"이라는 고리에 모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 어떤 운명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불가해한 종교적 신비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차원의 물리적 운동에 불과한 것일까? 인생이라는 것도 "우주"라는 신비한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는 이른바 태양계라는 궤도 안에 있는 지구라는 돛단배를 타고 조물주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매우 외롭고 고독한 나그네에 불과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성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서는 분명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단지 거기에 그저 있게 된 것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초에는 하나님만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로소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있으라"하니까 있게 되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그 운명을 걸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서적 맥락에서 볼 때 "참"이며,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것도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밖>이란 것은 단지 "이를 갈고 슬피 울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숙명적인 것이고 운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한마리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성서는 증언하였습니다. 성서의 맥락에서 보면, 이것은 요지부동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지부동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입니다. 설혹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있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장중으로부터는 그 어느 것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자신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이며, 인간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예외 없이 숙명론적 운명론에 매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요, 꼭두각시요, 인형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사실, 언뜻 들으면, 우리의 신앙의 심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매우 좋은 은혜스러운 말로도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을 100세에 얻은 외아들까지도 하나님을 위해서 번제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그런 반도덕적 만용행위에서부터, 즉 비윤리적 살인행위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성을 찾는 어리석음만큼이나 어리석은 잘못된 교조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녕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숙명론자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 결정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어떤 고대 바빌론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어떤 초능력의 신접자, 무녀, 박수, 점술가, 역술가, 사주쟁이, 예언가, 초인, 半神半人의 영웅 등을 통하여서 매우 드물게 겨우 그 비밀이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인간세계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신의 숙명론적 섭리와 계획과 신비 속에 우리의 역사는 철저히 종속되어 붙박혀 있다는 그런 말입니까? 우리의 운명은 이미 오랜 전부터 다 정해져 있었다는 말입니까? 미래로 날아가는 "타임 머신"을 타고 얼마간 날아가 보면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미리 다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형태로든 "자유"라는 것, 또는 "자율"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창세 전부터 이미 가롯유다는 스승을 팔 사람으로 아예 지정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회개의 기도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또 너도 나를 그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 모든 사랑은 다 거짓이거나 아니면 이 사랑 고백과 사랑 노래는 아주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이 다 써 놓은 하나의 정해진 각본이었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악한 원수들의 무신론적 교만이 하늘같이 높아져서 의인을 압박하기를 마치 떡 먹듯하고 있는데도, "심판은 무슨 심판,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하는 냉소적인 무신론적 오만이 판을 치고 있는데도, 재난과 질병과 죽음이 무질서하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하게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위협하고 있는데도, 이 모두가 다 창세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신의 예정된 각본이었고 우리는 그 신의 대(大) 서사시 드라마의 각본에 적혀 있는 하나의 정해진 배역에 불과하다면 이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또 이 "우리"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 역사는 결코 그러한 숙명론적 예정론의 틀 속에 요지부동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성서의 진정한 대답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중대한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은 분명히 역설적입니다. 그 역설은 풀기 어려운 논리를 교묘히 피해 가는 어떤 임기응변의 역설이거나 궤변은 결코 아닙니다. 성서적 답변은 명료하고도 확실하며 또 이중적입니다.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 시편 56편과 로마서 8장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듯이, 그 대답은 분명 이중적입니다. 첫째 모든 것의 시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태초의 태초부터.... "홀로" 우리의 인간세계를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은 역시 태초부터 시작하여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하여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물음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저 아득한 옛날 그 태초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또한 계속해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 증언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주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태초에도 작용하였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때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또한 역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한마디가 지금까지 우리가 잘 못 생각해 온 모든 우리의 운명론적 사고의 결정적 오류를 다 뒤집어엎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시편 121편 4절이 말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창조가 끝났는데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쉬임없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태초 6일만에 다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아득한 과거, 그 태초에, 한번, 유일회적으로 작용하고 그 때 모든 것이 다 결정되고 그 때 모든 것이 다 완결된 것은 아닌,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전적으로 현재적이며 역동적인 성격의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역사가 비록 하나님이 그의 확고하고 굳은 의지로서 시작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세계 역사이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그 세계 역사는 어디까지나 그의 굽힐 수 없는 굳은 의지로서 아직도 계속하여 미래를 향하여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역사 속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는 해도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은 위험, 칼, 죽음, 삶, 천사, 권력자, 과거, 현재, 미래, 높음, 깊음 등등이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점술가나 박술객이나 예언가나 철학자나 역학자가 말하는 운명론적 역사관과 그리고 성서의 역사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즉 성서가 말하는 역사, 성서가 말하는 시간, 성서가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 성서가 말하는 영원은 무슨 활자화되어 있는 것, 즉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되어 있는 易術的인 것이거나 숙명론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소 어려운 표현이긴 하지만, 영어로 표현해서 이 역사는 결코 정적인 being이 아니라 역동적인 becoming이라는 것입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삶 이 모두가 부동의 being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becoming이라는 것입니다. 즉 숙명론적 운명이 아니라 그 속에 무한한 자유가 포함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운명"은 장차 내게 일어날 일을 결정해주는 어떤 괴이한 힘이 아닙니다. 운명은 내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내 자신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운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유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서 맨 첫머리는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자는 운명에 매이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라는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은혜"는 이른바 태초부터 있었고 뿐만 아니라 또한 현재와 미래에도 작용하는 역동적인 그리고 무한히 자유하신 "하나님의 뜻의 본질" 그 자체였다는 말입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시작시키실 때의 "하나님의 뜻"은 결코 맨 처음에 모든 것을 단번에, 일시에 완결시켜 놓은 어떤 고정된 도식행위나 주역이나 고정된 사주팔자의 그래프는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히 자유로우신 뜻은 전적으로 그가 창조하신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어머님의 다함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분의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분의 그 사랑이 또한 세상을 지금까지 지켜오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라 역동적인 사랑의 자유였던 것입니다. 결코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끝없이 샘솟는 그 사랑이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또 지금도 완성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라는 말입니다. 운명이 아니라 자유라는 말입니다.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등의 어떠한 불의의 재난도 결코 결정론적이고 운명적이고 숙명적인 그런 정적인 것 즉 being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중단 없는 운동, becoming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운동의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서 능히 이겨낼 수 있고 또 이겨내어야 할 것들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만이 그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편 56편의 시인은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하며 또 교만스럽게 나를 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었은즉 나는 그 무엇도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선생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조차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분이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택하신 자들을 누가 감히 소송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죽임을 당합니다. 하루에 열두번도 더 죽습니다. 우리는 도살당한 양과 같이 늘 천대를 받습니다만, 그러나 진실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승리하고 또 승리하고 그리고 또 승리하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과거 일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주나 팔자나 그 밖에 그 어떤 운명론도 숙명론도 주역의 역학원리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에서부터는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태초에 뜻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하나님만이 계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뜻이, 그 말씀이, 그 사랑의 자유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역시 그 뜻이, 그 말씀이, 그 사랑이, 그 자유가, 그 때 그 태초에 한 번에 결정되고 한 번에 결론지으시고, 단 한 번에 끝이 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뜻은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영원히, 끝없이, 변함없이, 결정되고 결론지으시고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Being이 아니라 becoming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안에는 여전히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죽음, 사주, 팔자, 숙명, 운명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 세계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니 누가, 그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그분이 어찌 우리를 사주나 팔자나 숙명이나 운명에 맡겨 두어 버리시겠습니까? 그 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시고 지금도 쉬지 않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그 무엇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이 이토록 지극한데 우리가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지극한 사랑에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운명은 사랑의 자유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은 오직 "자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늘 이기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숙명과 운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로 능히 충분히 극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분명히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핵입니다.

 

5. 어머님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 (룻기 1장 15~18절, 고후 1장 10~11절)

 

경동교회 설교 / 1999년 9월 12일

 

룻기 1장 15~18절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이 겨레가 내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 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고린도 후서 1장 10~11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여러분도 기도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받은 은혜의 선물을 두고,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흔히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구원의 주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공의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며 특히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감히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성서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해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본문의 말씀, 즉 희망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젊은 며느리 류의 그 갸륵한 효심의 한 표현, 즉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표현 속에서 민족과 지역을 뛰어 넘어 있는 하나님 신앙의 중요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습니다. 나오미라고 이름하는 한 가난한 유태인 여인이 베들레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때아닌 흉년이 들어 온 유대땅은 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흉년을 피하려고 남편과 두아들을 권유하여 잠시 고향을 떠나 흉년이 들지 않는 이방의 나라인 모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압땅으로 이민을 오자 말자 이 낯선 땅에서 돌연 남편이 죽게 됩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과부가 된 나오미는 이곳 이방땅의 처녀들인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두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천운으로 하고 세상에 태어난 듯한 이 여인은 곧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조차도 손자도 보지 못한 채 이방 땅에서 잃게 되는 아픔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자란 남자는 다 죽어서 이 가문은 졸지에 대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대책 없이 순식간에 나그네된 이 이방 땅에 내동댕이쳐진 이 연약한 세 여인, 즉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이방인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 이 세과부 여인들이 이 험난하고 각박한 고해 같은 세상을 도대체 수로 헤쳐 나가며 살아 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성서를 읽어 가노라면 실로 눈물겹다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려 깊고 신앙심이 깊은 나오미는 자신도 과부신세이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저 젊은 이방인 며느리들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슬픔을 오히려 자기의 슬픔 이상으로 생각하며 억척스러우리만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결코 비굴하게 비켜 가려고 하는바 없이 감히 저 젊은 과부 며느리들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그들과 더불어 철저히 고난을 함께 나누며 능히 그 고난의 생을 성공적으로 소화하고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해 나오미가 떠나왔던 조국 땅에도 흉년이 물러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살기 좋게 된 자기 조국으로 다시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역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나오미는 저 두 젊은 이방인 며느리를 이끌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문득 이 귀향길에서 저 새파랗게 젊디젊은 두 며느리를 장래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야 늙은 몸, 이제 이 내고향, 내 조국땅으로 돌아가서 짧은 생을 고향 땅에서 몸붙여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조국 땅에 묻혀지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저 두 젊은 며느리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저 며느리들에게는 시어머니의 고향이 오히려 낯설고 물설은 남의 나라이고, 또 남편도 없는 객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 늙은 시어머니만을 따라 나섰다가 시어머니인 나마저도 죽어 없어지면 저 젊은 며느리들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저 젊은 과부며느리들을 불러 놓고는 간곡한 말로 자기가 가는 길을 따라 나서지 말고 저들 며느리들의 조국인 모압땅에 그냥 남아서 또 새 남편을 만나 재가를 하여 새인생을 열어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간곡하게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이 늙고 희망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아까운 청춘을 그렇게 희생할 수야 없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간곡하게 만류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고부간에 주고받는 대화는 동양윤리의 한 극치를 묘사해 주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얼어붙은 산천이 흐르는 시내가 되어 녹아 내리듯 깊고도 깊은 사랑의 교향곡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실로 원수의 나라로 갈라져 있던 유대나라와 모압나라의 국경선은 눈덩이 마냥 녹아서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면이 지극해서 큰며느리인 오르바는 슬픔에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자신의 조국으로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와 같이 있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인생을 먼저 살고 혼자된 과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룻은 끝까지 어머니와 같이 할 것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저 불쌍한 시어머니, 일찍 남편을 잃고 과부된 몸에 두 아들을 객지에서 먹여 살리면서 또 철들지 않은 처녀인 나를 데려다가 딸처럼 삼고 길러주셨던 저 시어머니가 이제 다 늙어 대책 없는 인생황혼을 맞게 되었는데, 저 늙으신 시어머니가 천에의 고아가 되어 저토록 처량하게 고향 땅에 홀로 묻히게 해 드리는 것은 정말 딸된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깥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여식애를 데려다가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며 뿐만 아니라 깊고도 살뜰한 사랑과 위로를 통하여는 성서의 하나님이신 참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일러주어 영적으로 신앙의 눈도 뜨게 해주신 저 분을 이제 홀로 그 노경의 길을 걸어가게 해 드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룻이 알았던 본래의 신은 사실은 모압신이었지만 이제 룻이 그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던 신, 그 참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가 아니라 저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알게 된 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또한 모압의 신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족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구구절절 어머니의 사랑의 생을 통하여 며느리 룻에게 알려진 '어머니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룻 그녀가 자기 민족을 통하여 배운 신은 모압민족의 전통을 통하여 또한 민족의 종교적 전례와 교리를 통하여 배운 신이라면 그가 그의 시어머니를 통하여 배운 신은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의 삶을 통해서 배운 그런 하나님이었다고 하겠습니다.

 

196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만 31년전 2월, 구정이 가까웠던 어느 혹한의 겨울날 저는 더 이상 혼자 걷기 어려울 정도의 중병에 걸렸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력을 다하여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병이 하도 심하여 제가 주일학교 교사 시절에 아직도 나이 어린 제자들도 매일 같이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일과처럼 저희 집에 달려와서 무릎을 조아리고 앉아서는 이렇게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김선생님은 장차 목사가 될 주의 종이오니,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지금 데려가지 마시고 한번 더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소리 모아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그들의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기라도 하듯이 병의 차도는 전혀 없는 체 저승사자와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새벽 한 시쯤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따라 유난히 귀를 모으게 했던 한 음성인 가냘픈 어머니의 기도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통렬한 단장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런 논리도 없이 마구 무질서한 애가 서려있는 탄식이요, 울부짖음이요, 절규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구 정리도 되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냥 내뱉으시면서 "하나님 아부지예, 이곤이 제발 살리주이소. 저게 그래 하도 목사가 되겠다고 그래싸서 신학교로 보냈는데 이제 신학교도 졸업하고 곧 주의 종이 될라고 카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교? 저 자식이 저렇게 죽을 병에 걸리서 저렇게 피를 토하고 있심더. 차라리 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저 이곤이 대신에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고 저 이곤이만은 마 살려주시면 안되겠심미꺼? 저게 사내로 태어났는데 장개도 한번 못가보고 죽어가 되겠심미꺼?" 기도라는게, 기도라는 게 말입니다. 그저 이렇게만 소박하고도 절박하게 문지방을 붙들고 두드리며 아들 살려달라고 때를 쓰는 울부짖음의 호소로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저 놈의 불효한 아들보다는 어머니 당신을 차라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시는 기도, 또 어느 멀쩡한 처녀 하나 신세 망쳐놓으시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다 장성한 아들이 장가도 한번 못가보고 죽는 것이 안쓰러워서 장가라도 한번 가보고 죽게 해달라고 목메어 부르짖는 어머니의 저 단장의 호소. 실로 나는 기독교 교리가 가르쳐온 그 하나님이 바로 저 어머니의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도 무력하게 보이는 예전엔 미쳐 보지 못하였습니다. 실로 감히 나는 저 룻처럼 어머니의 하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며 그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여기서 바르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는 핵심은 어머니의 사랑의 삶을 통하여 계시되고 있는 그 하나님, 민족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고 종교라고 하는 울타리도 넘으며 교리주의라고 하는 담도 넘는 오직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심볼(symbol)인 어머니라고 하는 분, 진통하면서 우리를 낳아 주시고 자신의 온 진액을 다 짜서 우리를 길러주시는 그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과 그의 그 십자가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시고 계시되시는 그 하나님만이,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만이 그 분 그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데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저 사랑의 화신이신 하나님, 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아니 그 자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비로소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실로 룻의 이러한 신앙적 각성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종류의 관념적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 위대한 혁명적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이 설교자 자신도 이 신앙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었었습니다.

 

 

 

 

 

6. 니느웨로 열린 길 (요나서 3장 10절~4장 3절, 갈 5장 13~15절, 마 5장 43~48절 )

 

경동교회 설교 / 1999년 7월 18일

 

요나서 3장 10절~4장 3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선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분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고 먹으면 양쪽 대 멸망하고 말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마태복음 5장 43~48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의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예언자 요나는 유대민족 출신인 예언자로서 그 유대민족이 지닌 이념과 사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이 예언자의 이름을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진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아밋대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이 요나라는 인물이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진리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민족을 대변하는 한 상징적 인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요나는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라는 도시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분명히 여기서는 니느웨라는 이 도시 이름이 문제의 중심에 오고 있습니다. 이 니느웨라는 도시는 특별히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를 걸쳐서 이스라엘을 거듭 거듭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인민을 무차별 약탈하였던 그 잔인한 침략제국인 앗수르의 수도였다는 것과 특히 기원전 721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역사상에서 북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앗수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철천지한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아들 요나가 감히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쪽의 니느웨로 가야 할 것을 정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갔다는 것은 앗수르에 대한 이런 뿌리깊은 악감정과 화해불가능의 반목감정을 문학적 과장법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자의 본질이란 본래 그를 부르신 신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옥불속이라고 해도 뛰어드는 것이 본질인데 그런데도 예언자 요나는 적어도 니느웨 백성에게만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이러한 집요한 요구에 밀려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거기서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마지못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요나의 마음은 고기 뱃속에서 삼일씩이나 지내고도 살아 남은 이른바 예수의 부활의 기적만큼이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니느웨에 대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적 증오심 때문에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속깊은 뜻을 아직도 여전히 거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사흘길을 다녀야하는 니느웨 선교의 길을 단 하루로 줄였으며, 더욱이 그는 이런 하루 동안의 선교 기간에도 하루 종일 니느웨 성읍을 돌아 다녔으면서도 단지 네마디의 말, 즉 히브리어 글자로 세어서 "40일이면 니느웨는 잿더미"라는 말만 던졌을 뿐 더 이상의 호소도 권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태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이토록 뿌리깊어서 만인 평등을 강조하는 야훼주의에 기본 이데올로기도 멸시하고 포기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간심리의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여전히 놀라운 기적을 탄생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토록 포악하고 악명 높은 니느웨 백성이 쏜살처럼 빠르게 스쳐 가는 저 네마디의 말을 빠르고 민첩하게 알아듣고 저 높은 왕으로부터 아래의 평민에 이르기까지 아니 왕으로부터 마굿간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회개하는 거국적 회개를 단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런 예언자가 감히 니느웨의 회개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용서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긍휼의 속성을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하나님을 탄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말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저항의 불평은 분명은 야훼 하나님의 본성, 즉 그의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과 그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긍휼의 속성이 우리의 인간사회에서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고 하는 비평지성들의 비난논리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긍휼속성은 본래 자식에 대하여 어머니가 갖는 무한한 연민의 정을 기반으로 한 모태속성에 뿌리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듯이 회개하는 백성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용서 또한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미워하는 죄는 그 자손 삼사대까지 갚겠다고는 하셨지만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를 수천대까지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걸고넘어진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속성과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 속성 가운데 나타나는 불균형, 심판의 속성은 삼사대까지만 용서의 속성은 수천대까지 이른다고 하는 이 불균형이 도대체가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합리가 앗수르와 유대민족 사이에 있는 반목관계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 이것은 더욱 곤란하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고 요나의 확신이었습니다. 요나의 격정적인 분노도 즉 자살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요나의 반항도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무한히 관용하시는 하나님,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넘기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성애적 마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설령 화를 내시려고 하시다가도 곧 뉘우치고 화를 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런 속성이 도대체 못마땅하고 도대체가 참고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식물 한포기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가 하룻만에 벌레를 통해 그늘을 없애버리신 사건을 요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나는 이런 한 순간의 쾌락의 기쁨을 잃는 것이 니느웨성 전체의 운명보다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하찮은 식물 한포기의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의분에 찬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준비하셨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물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야, 진리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너의 신앙양심과 너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이 일을 스스로 판단하여 보아라. 너는 이 한그루의 박넝쿨이 자라나도록 하는 가운데 아무런 수고도 아니했고 아무런 배양도 하지 않았지 않았느냐,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죽는 이 식물조차도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꼈다면 이 큰 성읍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죄없는 생명이 무려 십이만명이나 살고 있고 육축도 또한 많이 있는데 그 생명들이 다 죽게 되었기에 내가 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끼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느냐? 모성적 사랑의 아픔을 갖고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인간을 사랑해 온 나 야훼의 그 모성적 사랑에서 본다면 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는 자손 삼사대에까지만 내리고 잘한 것에 대해서는 수천대까지 축복을 내리시는 그 하나님의 계산법이 도무지 불합리한 것이라고 보는 그 요나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한그루의 하루살이 박넝쿨의 연민보다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이 십이만이나 살고 있는 저 큰 성읍의 운명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느냐하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요나에 대한, 아니 요나와 같은 그런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깔보고 비난하는 모든 종류의 인류의 지성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적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적인 교조를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지극히 희망이 없는 동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도 우리를 계몽하기 보다는 우리를 오히려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오히려 구속하고 우리를 멸망에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우리 크리스찬 지성을 염려하는데서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요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자기모순을 예리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는 불합리성이 우리 인간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나 교조적인 신념 따위의 이데올로기와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 영원한 고유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박넝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이나 한 줌의 흙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만 우리는 지금 말하고 있고 또 지금 호흡하고 있고, 또 여기서 지금 여기서 생명의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저 원수의 도성 니느웨로 향하여 열리어 있는 진리 그 길로 나아가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길이요, 이 길은 선택받은 자의 길입니다.

 

 

7. 이런 고난을 겪고서야 (시편 119편 71~72절, 롬 8장 18~19절, 눅 24장 25~27절)

 

경동교회 설교 / 1999년 8월 15일

 

시편 119편 71~72절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

 

로마서 8장 18~19절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27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인간이 성서를 향해서 던질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종교적 물음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죽음에 관한 물음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 죽음에서부터는 감히 다시 살아 되돌아 온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다시 사는 길을 말해 왔습니다. 즉 죽음을 이기는 길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기독교는 '부활의 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다시 삶, 이것을 기독교 복음의 구성본질로써 증언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람이 '다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매우 오래 전에 일입니다. 아이엔 쉘톤이라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한 천문학자가 발견했었던 소위 '수퍼노바'라고 불리는 한 별의 죽음에 관한 보도는 우리에게 별도 죽는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고 있다는 태양계도 때가 되면 식어서 죽는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보도에 의하면 저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는 놀라웁게도 약 1억개 정도의 태양들이 한꺼번에 빛을 내는 것 만큼의 거대한 빛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팽창한 후에 그런 다음에 얼음처럼 식어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해서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도 그 수명을 다하여 죽을 때는 섭씨 6000도라고 하는 그 겉표면 온도보다는 20십배는 더 뜨거운 섭씨 20000도 정도의 열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거대한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고통을 겪은 다음, 그 다음 급변한 속도로 얼음처럼 냉각되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한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보도가 제게 매우 신비하게 느껴진 것은 별의 죽음의 문제와 함께 새로운 별의 탄생에 관한 보도였습니다. 별들은 그와 같은 자기 폭발 또는 자기 해체의 고통과 함께 죽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별들은 전혀 아무 것도 잡히는 것이 없는 저 텅빈 공간 안에서도 놀라웁게도 바로 그러한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고통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천문학 분야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인 제게 있어서도 매우 신비하게 느껴진 점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하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죽음은 새로운 에너지 입자를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별이 죽으면서 토해낸 돌연변이적인 것들이 새로운 생명탄생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거대한 별의 죽음은 단지 소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별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새 생명창조의 에너지를 죽을힘을 다하여 방출해 내는 하나의 또다른 새생명 창조 운동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원리는 우리의 일반적 형식논리와는 매우 역행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행인, 저 익명의 두 제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였습니다. 말하자면 부활이면 부활이지, 거기에 그 무슨 부활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게 도대체가 무슨 논리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하여서는 먼저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고난을 겪었어야 했다는 것, 진실로 그것만은 그런 논리만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부둥켜안고 심히 고뇌하며 침울한 얼굴로 엠마오로 향하여 길을 가고 있던 이 두제자에게로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이며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서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어찌 그리도 무딘 것입니까? 그리스도도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야 자기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어찌 그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과 예언자들로부터 에수시대에 이르기까지 성서 전체가 가르치고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는 것, 즉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부활의 영광이 창조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지금까지 제기해온 모든 물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답변은 단지 고난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과 새생명을 창조해내기 위한 하나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구약의 메시지 가운데서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예표하는 그 대표적 메시지를 우리는 제2이사야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에 관한 메시지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의 절정에는 다음과 같은 대표적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나의 종은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은 이러한 신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사야 53장 11절 상반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은 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뿐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도 그 참뜻이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채 가려져 있는 하나의 신비였습니다. 영광과 생명의 창조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그 대가로 치른 다음에라야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명백한 하나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가르침은 여전히 이 말씀 그리스도도 또한 메시야도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또한 이런 고난을 겪고서야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시편 119편 시인은 고백하기를 "고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내가 마냥 그릇 행하였으나 고난을 겪은 지금의 나는 감히 주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키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이러한 신앙적 확신을 경험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서신본문을 통하여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우리의 고난이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는 부득불 허무에 굴복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 분이 우리를 장차 받을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실로 고난은 영광을 창조키 위한 전 단계 일 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인류 구원섭리는 항상 이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참의미는 항상 호통을 통한 대오각성이 없이는 성격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러한 성격의 복음적 증언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감격스런 출애굽의 해방, 그것의 참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는 동안에 겪은 고난의 경험과 그 심령에서의 부르짖음이 없이는 결단코 이룰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 성서의 줄기찬 증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저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축복도 광야의 고난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하였다고 하는 것이 또한 성서의 줄기찬 증언이었습니다.

 

오늘로써 우리는 8.15해방 54주년을 맞습니다만 8.15의 해방사건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새 생명 탄생을 위한 값진 민족적 수난의 한 결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해방의 은총은 결코 십자가 없는 은총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유관순도 있었고 윤봉길도 있었고 안중근도 있었으며 이준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순교자 목사님들도 있었고 정신대로 끌려갔었던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의 한이 어린 울부짖음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해방을 위해 거쳐야할 고난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옛날의 나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여 스스로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밀알도 결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가 우리에게는 하나의 희망입니다. 아니 이 진리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난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희망으로 가는 문일 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도 아니다. 이것은 더욱이 단순한 종교교리도 아닙니다. 단지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낡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철저한 회개의 아픔, 철저한 자기해체의 아픔, 자기를 내어주는 아픔, 이 아픔을 통하여야만 우리는 비로소 부활과 구원의 영광에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이 진리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증언만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복종만이 우리를 능히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창세기 4:1-7; 마가복음 6:6-8)

 

샛길교회 1999년 10월 3일

 

감사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가 제기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아마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까?" 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성서는 인류가 창조된 후 그 최초의 인류가 그 첫 노동의 결실을 거두었을 때 그들이 취하였던 그 첫 번째의 행위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행위"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게 드린 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놀랍게도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이 성서의 기록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가장 모범적인 감사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관한 성서 이야기는 미스테리에 속하는 이야기라고들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행위를 보도하고 있는 창세기 4장 본문으로부터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아 받지 않으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들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가인의 제물은 저주받은 땅(창 3:17)의 소산물이고 또 하나님께서는 유목민을 농경민보다 더 좋게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맏배의 양 새끼 기름을 가인이 드린 밭곡식보다 더 선호하셔서 아벨의 양 새끼 기름의 제물만 반기시고 가인의 곡물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신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본문의 뚜렷한 전거(典據)도 물론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일 그렇게 곡식류 보다는 양고기를 더 좋아하시는 분이시고 그 고기 중에서도 기름끼있는 부분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혹자는 좀더 깊은 신학적 시각으로 이 문제를 살펴봄으로서, "인간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고 안 받으시고는 하나님 자신의 선택이므로, 그 선택의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금세기 최고의 구약학자인 폰 라트(G. von Rad)라는 학자조차도 <하나님의 자유의지>에서 그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하였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묻어두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곳 이외의 여러 성서적 증언들을 살펴 볼 때도 이러한 <대답회피>란 전혀 그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와 예물이 무엇인지를 거듭거듭 분명하게 밝혀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4장이 이 물음에 대해서 다음 세 가지의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제물의 양과 질이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분병하다는 것은 창세기 4장 2절 하반절이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라고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는데서도 나타납니다. 즉 양치는 업이든 농사를 짓는 업이든 그 업 자체에 편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든가 "업보(業報)"라든가 하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업은 생업(生業) 또는 직업(職業)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vocation"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농업은 천한 업이고 목양업은 귀한 업이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을 조상으로 하는 우리 한국의 전통에서는 <농자(農者)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라고 해서 농사의 업을 생업의 기본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런 전통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경우에서도, 비록 거기에는 유목문화를 선호하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이 여러 곳 있기는 하여도, 그러나 결코 구약성서는 농업을 하나님이 싫어하는 업종으로 보는 전통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약성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국호를 정할 때, "야훼 공동체"라는 이름 대신에 가나안 농경문화의 신인 "엘"이라는 이름을 채용하여, 이른바 선민의 국호를 결코 "이스라-야" 또는 "이스라-야훼"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기까지 하였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구약신학적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선호적 입장에 대한 저항감이 국제사회에 팽배해 있다고는 하여도, 고대 이스라엘은 그 신앙 이념에 있어서는 매우 위대한 민족이었다고까지 보는데는 큰 잘못이 없어 보입니다. 비록 한쪽으로는 시오니즘적인 배타적 유대 민족주의의 편견이 여전히 중동사회의 "뜨거운 감자"의 기능을 하고는 있다고 하여도, 적어도 고대 히브리인의 구약종교는 이러한 민족적 배타주의를 선호하기는커녕,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배타주의를 끊임없이 규탄하고, 오히려 탈민족주의적 보편주의 원리를 지향하였다는 것은 구약종교의 위대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가인의 곡물제물과 아벨의 양새끼의 기름으로 드린 제물 사이의 그 제물 자체의 질적, 양적 가치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아득한 고대로부터 히브리인의 성서가 지닌 기본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나타나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기록이 두 감사제물 사이의 <제물의 질적 양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그 근본 이유였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둘째로, 우리의 본문 창세기 4장은 제물 자체의 질적, 양적 가치보다는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인격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4장 4절 하반절에서부터 5절 상반절까지는 단지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을 뿐임을 보게 됩니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리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리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본문의 히브리 원문을 문자대로 따라 읽으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아벨을/ 반기셨으므로/ 그래서 그가 바친 제물도 [반기셨다]

그러나, 가인은/ 반기지/ 않으셨으므로/ 그래서 그가 바친 제물도 [반기지 않으셨다](4+4)

 

아마, 더 이상의 주석적 설명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본문을 또박 또박 읽는 것만으로도 야훼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그 인격(personality)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결정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 그의 예물 또는 그의 제물을 받으실지 아닐지도 결정하셨다는 것이 성서적 증언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러한 문학적 고안은 놀라운 신학적 사유를 기초로 하여 진행되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제물이나 예물 그 자체를 탐내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성서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도 또한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증언의 정당성은 시편 50편 시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더욱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말한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두고 증언한다.

나는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저희를 책망하지는 않는다.

...

 

나는 너희의 집에서부터 수소를 가져오거나

너희의 우리에서부터 숫염소를 가져오거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나의 것이요 수많은 산 짐승이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

 

내가 배 고프다한들 너희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다 나의 것이 아니더냐?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그런게 아니다!]

하나님께 드릴 참 제물[쩌바하-렐로힘]은 너희 자신의 감사의 고백일 뿐이며

지존자에게 드릴 참 서원도 [그 서원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 서원대로 맹세를 지키는 일,

그것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언을 우리는 과연 다른 어디에서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가지고 오기를 바라는 것은 제물이나 예물 그 자체보다는 그 제물과 예물을 통한 우리의 감사의 신앙고백이며 감사하는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는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이 진리를 증언하는데 그 어느 누구보다 더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을 나는 감히 기원전 8세기 말에 유대 땅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미가"라는 예언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의 언어는 너무도 분명하여 특별히 주석과 해석을 장황스럽게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야훼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리고 저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아갈 때에 무엇 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년된 송아지입니까? 아니면, 수천마리의 양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수만 의 강줄기를 채울만한 올리브 기름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속죄를 빌 때 드리는 맏아 들이나 허물 벗기를 위하여 빌 때 드리는 몸의 열매를 바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까?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다!!]

너 인생들아, 무엇이 선인지를 야훼께서는 이미 너희에게 알려 주셨다. 야훼께서 너희에 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너희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오직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 그것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로 나아갈 때에 우리가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결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을 드리는 나의 인격과 나의 신앙고백>,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물질 예물이라는 것을 결코 바치지 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는 감히 셋째로, 이 말씀을 역(逆)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긍정적 명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신학적 뒷받침은 이런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오는 물질, 그것은 본래적으로 볼 때는 본래,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써 왔던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물질만(!) 가지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곧 <빈손>으로 나아오는 것과 다름없다라는 것, 예컨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것을 주인이 올 때까지 묻어만 두었다가 먼 후일 이자도 한푼 붙이지 않고 그 한 달란트만 달랑 내어놓았던 저 게으른 종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서, 이것은 분명 심판 받을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잘못 생각하여 목을 곧게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헌금하는 행위와 같은 그런 가장 구역질나는 신성모독 행위와 같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써 왔던 그 물질을 나의 감사고백은 전혀 덧붙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본래 받았던 그것만을 달랑 들고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께 내어 던지듯 반환하는 것, 물론 오늘날에는 지능지수가 높아져서 하나님의 것을 정확히 반환하는 것조차도 대체로 하지 않고 속이고들 있지만, 그러나, 어쨌든 성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우리의 물질반환 행위, 이른바 그 받은 바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 그 한 달란트만 달랑 들고 와서 주인에게 되돌리는 성격의 그런 파렴치한 물질반환 행위적 감사행위를 성서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악행>이라고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만 가지고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물질을 가진 그 인격을 그 물질과 동시에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의 물질을 가지고 오되 그 물질을 가지고서 공의를 실천하며 그 물질을 가지고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 물질을 가지고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그 결의, 그 신앙고백, 그 회개의 결단을 함께 가지고 나아 오라는 것입니다. 공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물질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나아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심쓰는 듯한 감사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먹이기 위하여 물질을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져온 물질에 의존해서 사시는 분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사예물을 드리는 우리의 감사행위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의 물질 중에서 구별하여 정의의 실천, 사랑의 실천, 믿음의 실천을 우리 안에 구현하려할 때 필요한 물 질을 성별해 가지고 나와서 그러한 삶의 실천을 약속하고 결단의 고백을 하는 행위일 뿐 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오늘의 우리에게 "미가"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감사절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아올까?>라는 물음에 대한 성서의 유일한 대답입니다.

 

 

 

9. 걸어다니는 나무 (판관기 9:8-9; 마가복음 8:22-26 )

 

샛길교회 1996년 10월 27일

 

"걸어다니는 나무", 그러나 다소 우화적인 냄새가 나는 "나무 이야기"가 오늘 이 시간 우리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신?구약 본문 중에서 구약 본문은, "말하는 나무"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그리고 신약 본문은 "걸어다니는 나무"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저 유명한 "요담의 우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왕이 없는 무정부적 혼란기의 어느 시절, 단지 힘의 논리만이 절대적 신으로 추앙 받고 있던 그 어느 시절, "기드온"이라고 이름하는 "므나쎄" 지파의 한 장수가 대권을 장악하고 왕이 되어 40여년을 통치한 다음, 주어진 수를 호화스러운 권좌에 앉아서 다 누린 다음, 마침내 그 수가 다하여 죽었을 때, 그가 남겨놓은 아들들은 무려 7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 왕조의 비극은 주지하시는 대로 이 70명이 넘는 왕자들 사이의 권력 암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세겜 출신의 "아비멜렉"이라는 왕자의 정치적 야심은 비정하다 못해서 처참할만큼 가혹한 형태를 띄었습니다. 마침내, 권력쟁취를 위해서는 형제간의 혈연이나 윤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해도 좋다는 급진적 사고의 이끌림을 받은 "세겜"의 패륜아 아비멜렉은 오직 왕이 되겠다는 일념에만 눈이 가려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데까지 갑니다. 어느 날, 그는 소위 말하는 "정치깡패"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매수한 깡패들을 충동질하여 그는 그의 형제 왕자 70여명을 모두 몰아 잡아 한 바위 위에 메어쳐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아니고 70명이나 되는 형제를 모두 한 바위 위에 몰아 잡아 놓고 떡돌 치듯 쳐서 모두 죽이는 이 전대미문의 비인도적이고 반도덕적인 형제 살육행위가 마침내, 사람이나 동물의 양심은 물론이고 나무들의 양심까지 충격을 주어서 나무들로 하여금 사람이 말해야 할 말을 대신하게 하였다는 것이 성서의 입장이었습니다. 나무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류문인 임옥인씨가 어느 일간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집 정원에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나무를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무심코 그 나무 곁에 서서 혼잣말로 "이 나무를 뽑아서 딴 곳으로 옮겨 심어야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나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부르르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에 나오는 나무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아비멜렉의 이 가공할만한 형제살육 행위를 보고 참다 못한 나무들이 또한 분노에 떨면서 감히 앞을 다투어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노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감람유 기름을 내는 일을 천직으로 부여받았소. 이 무화과 열매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런데, 나 어찌 이 귀한 직분을 내어버리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으스대고만 있겠소?" 포도나무도 또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나는 포도열매로 포도주를 만드는 천직을 부여받았소. 이 포도주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런데, 나 어찌 이 귀한 직분을 내어버리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으스대고만 있겠소?" 그러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이른바, 역사의 가라지와도 같은 가시나무는 전혀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나를 왕으로 모시려는가? 정녕 그러하거든, 와서 내 그늘 아래 숨어라, 그렇지 않았다가는 이 가시덤불이 불을 뿜어내어 레바논의 송백까지 삼켜버릴 것이다."

이 나무들의 이야기는, 실은 70명이나 되는 형제왕자들을 한 바위 위에 몰아놓고 모두 살육한 아비멜렉의 처절한 형제 살육행위를 전해들은 한 왕자, 즉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유일한 한 왕자인 요담이 그의 형제의 이러한 악행을 비판하는 말을 우화로 지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는 "나무가 말을 한다"는 어떤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 <나무들 속에 가리워 있는 사람> 이야기를 전해보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나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나무에 가리워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나무처럼 경직되어 있고 아무리 사람이 식물인간화되어 있는 그런 왕권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사람을 나무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마치 나무로 보인다고 해서 나무들 속에 가리워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거나, 또는 나무들 속에 가리워 있는 사람을 그냥 나무로만 취급하여, 도끼로 나무들을 모두 찍어 넘기듯 그렇게 모든 사람을 한 바위 위에 묶어 놓고 떡치듯 짓이겨 죽여 버리는, 이른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그런 왕권사회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 역설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왕권사회는 실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나무로만 보게 하는 사회였습니다. 권력이나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나무처럼 경직된 하나의 소유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로가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그 사회가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되는 법인데 기드온 사후의 아비멜렉 시대의 사회는 실로 "나무에 가리워 있는 인간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그런 희망 없는 사회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맥베드"도 또한 권력욕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한 잘못으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당하였던 한 권력자의 비극적 생애를 소개해 준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정치권력욕의 환상에 사로잡힌 맥베드는 환영 속에 나타난 한 마녀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마치 최면 걸린 환자처럼 완전히 사로잡히고 맙니다. 환영 속의 그 마녀는 이렇게 외칩니다.

 

맥베드, 멕베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저 버남의 나무들이 단시네인의 언덕까지 쳐들어오지 않는 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이 환영 속의 마녀가 외친 신탁의 소리를 들은 맥베드는 거대한 착각에 사로잡혀, 자신에 차서 그리고 흥분에 들뜬 채 이렇게 외칩니다.

 

그렇다. 나무들이 걸어다니는 일!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누가 감히 저 나무를 소집하여 대지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나무 뿌리들을 뽑아 내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예언이다! 정말로 고맙다! 버남의 나무들이 움직여 사람들처럼 걸어다니지 않는 한 맥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베드는 여기서 매우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직화되어 있는 저 나무들도 양심의 충동을 받는 그 날에는 능히 움직여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감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권력에 짓눌려 나무들처럼 경직되어 있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지 결코 나무는 아니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영락없이 나무도 한 번 그 양심이 깨우쳐지면 더 이상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 되고, 또 사람이 된 그 나무는 능히 걸어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처럼 감히 복수하는 힘있는 군대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맥베드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마침내 단시네인 성안으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달려드는 한 전령이 있게 되는데 그는 맥베드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폐하, 제가 언덕 위에서 파수를 보다가 버남 쪽을 바라본즉 그곳에서 별안간 나무들의 숲이 움직이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전령의 외침은 "버남의 나무들이 단시네인의 언덕까지 쳐들어오지 않는 한 백베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하는 신탁을 전한 환영 속의 마녀가 외쳤던 그 예언을 구체화시켜 주는 그런 외침이었습니다. 과연, 이 전령의 외침은 하나의 "진실"로 드러나게 되는데 단시네인 성문 앞까지 걸어 온 그 나무들은 마침내 자기네의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그 걸어 온 나무들은 맥베드가 왕권을 가로채기 위하여 살해하였었던 선왕 당컨의 아들인 맬컴 왕자와 이 맬컴 왕자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맥베드에게 도전한 반란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러했습니다.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실상은 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맥베드는 단지 "나무가 어떻게 걸어다닐 수 있는가? 결단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잘못된 신념을 아전인수격으로만 이해하고 자기의 정치권력욕을 정당화만 하고 있다가 끝내는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이야기, 즉 요담의 우화와 맥베드의 비극을 통하여 인간들이 그 고유한 인간성을 상실하여 식물인간으로 비인간화되는 그런 권력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하는 시대에 대한 한 날카로운 성서적 시니시즘을 듣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경직된 시대를 향하여 나무로 간주되어 온 비인간화된 사람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보는 인간화의 시대를 열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한 예언자적 소리를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인, 마가복음 8장 22-26절에 나오는 소경이 본 "걸어다니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도 사실은 바로 이러한 문맥 안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베쎄다의 한 소경, 그것은 실로 인간을 나무로 보는 비인간화된 예수 당시의 현실을 대변해 주는 한 종교적, 사회적 심벌로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요 속에 살아왔던 유대인들, 그리고 율법주의의 족쇄를 차고 거짓된 경건을 살아야만 했던 1세기의 유대인들, 그들은 예외 없이 사람을 나무로만 보도록 강요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소경 아닌 소경들로 가득 차 있는 경직된 사회 속에, 감히 메시아적 사명을 가지고 뛰어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안식일이라는 제도의 노예로 경직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앙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인간인격체들을 율법이니, 교조니, 관습이니, 도덕이니, 기업윤리니, 정치권력이니 하는 것으로 칭칭 묶어 마치 식물인간처럼, 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어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는 비인간화의 현실을 깨뜨려 보겠다고 나선 것이 또한 예수운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수운동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이것은 식물인간처럼 경직되어 비인간화된, 소외된 인간들을 완곡하게 묘사한 하나의 성서적 시니시즘입니다. 비인간화된 사람들, 눌림 받고 소외되어 나무나 돌처럼 버려진 사람들, 그래도 사람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겠다는 사람들, 그들은 사람은 사람이라도 사람 같지 않아서 일종 걸어다니는 나무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 이른바, 비인간화된 나무들이 사람으로 보여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는 구원의 희망이 동터온다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 운동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도 실제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그런 치유행위도 되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사람을 걸어다니는 나무로만 보는 영적 암흑의 현실을 깨뜨려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해주는 인간구원운동, 인간해방운동, 예수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성서 본문은 예수께서 이러한 비인간화된 현실을 조금씩 메시아의 시대로 변화시켜 가는 인간해방사의 한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나타낸 한 장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경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좀 보이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 그 소경은 눈을 뜨면서 말하기를,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다니는 것을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다음 단계로 그의 눈에 손을 대셨더니, 비로소, 눈이 맑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그 소경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들이 방금 떠나왔던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이 일련의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궁금한 점이 나타납니다. 그 첫째는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마을 안에서 하시지 않고 마을 밖에서 하시었다는 것이고, 또 그를 고치신 다음에도 고침 받은 자기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눈을 뜨게 하시는 일을 단 한번에 완료하시지 않고 두 번에 걸쳐서 하셨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많은 사람의 눈이 주목하는 마을 안에서 행하지 않고 마을 밖에서 행하시었다는 것은, 많은 주석가들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시키려고 노력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하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을 철저히 나무로 비인간화시키는 겹겹이 쌓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감히 무너뜨리고, 걸어다니는 비인간화된 나무들을 감히 참 인간으로 인간화시키는 그런 엄청난 혁명적 메시아의 인간 해방운동이 마을 한 복판에서 드러나게 전개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런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안식일의 제도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이 명실공히 안식일의 주인이 되도록 하려 하였던 예수가, 오히려 안식일의 제도에 인간을 노예화시키기를 원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였듯이, 식물인간처럼 인간들을 비인간화시켜서 그 인간을 힘있는 자의 상품으로 전략시키는 로마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과감히 깨뜨리고, 거기서부터 상품화된 인간을 건져내려고 하는 혁명적 인간화 운동이, 만일 로마의 악명 높은 팍스 로마나의 이데올로기가 우는 사자처럼 판을 휩쓸고 있는 마을 한 복판에서 전개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돌에 맞아 죽는 비극이나 보복폭력 또는 진압폭력에 희생되는 경험을 하였을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시아 운동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프랑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듯 그렇게 마을 한 복판에서 자기를 시위하며 일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로 비인간화된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을 사람으로 인간화시키는 엄청나고도 철저한 인간변화와 사회변화 활동을 <마을 밖에서> 이룩하시고는 눈이 밝아진 소경 되었던 자를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지 말고 마을을 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지혜였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생각하셨던 인간변화의 혁명, 즉 사람을 나무로만 보던 세계를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아니 걸어다니는 나무로 식물인간화된 인간을 참 인간으로 해방시키는 엄청난 사회변화를 추구해 간 예수 운동이란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정치적 메시아 운동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가 생각했던 것 같은 그런 순수 종교적 메시아 운동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이 지닌 그 핵심은 십자가의 대속적 수난과 죽음을 그 값으로 치르고라도 인간의 식물인간화하는 저 악랄한 비인간화의 사회구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보자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엄청난 메시아 관의 차이, 즉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도구로 삼은 예수의 진정한 메시아 운동과 힘의 논리에 기초한 당시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런 정치적이고도 시오니즘적인 폭력적 성격의 메시아운동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저한 괴리 현상은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메시아성을 은폐케 한 그 근본 이유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뜻 사이의 이 엄청난 차이,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시리만큼, 예수님과 당시의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서로 대립 상충되는 메시아관의 차이 때문에, 즉 엄청난 이념적 차이의 깊은 골 때문에 인간화운동의 발전을 급진적으로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즉, 두 번에 걸친 과정을 통하여 진행시켜 나갔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운동이 지향해 간 목표는 그것이 점진적이든 급진적이든 그것은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통하여 이룩하는 인간화운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을 나무로 보는 비인간화의 현실을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인간화의 현실로 바꾸어 가는 그런 인간화운동이었습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그들이 실상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또한 어디까지나 진정한 사람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들 뒤에 있는 참 인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더 이상 비인간화시키고 인간이 인간을 식물인간으로 경직화시키는 그런 사회는 기필코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오면 율법주의, 교조주의, 권력지상주의, 물질주의, 힘의 이데올로기 등등의 비인간화의 요소들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이 눈을 뜨게 되고 마침내는 저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실상은 나무들이 아니라 모두 인격체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감히 나무들의 노래도 듣게 될 것입니다. 감히 나무들의 사랑 이야기도 듣게 될 것입니다. 걸어다니는 나무들! 종로나 을지로나 강남로나 간에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모두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그 때 우리들의 세계에는 메시아의 시대가 비로소 동터오게 될 것입니다.

 

 

 

10.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누가복음 24:25-27)

 

 

인간이 성서를 향하여 던질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종교적 물음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죽음"에 관한 물음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인가? 사람은 왜 "죽음의 찌르는 가시"를 경험해야만 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 죽음에서부터는 감히 다시 살아 되돌아 온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다시 사는 길"을 우리에게 말해 왔습니다. 즉 "죽음을 이기는 길"을 말해 왔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고, "다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매우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그러니까 1987년 2월 23일 밤에, "아이언 쉘톤"이라고 이름하는 카나다 토론토 대학의 한 천문학자가 발견했었던, 소위, "수퍼노바"라고 불리우는 한 "별"의 죽음에 관한 보도는, 우리에게, "별도 죽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보도에 의하면, 저 "수퍼노바"라는 "별"이 죽을 때는, 놀라웁게도, 약 1억 개 정도의 태양들이 한꺼번에 빛을 내는 것 만큼의 그런 거대한 빛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팽창한 후에!! 그런 다음에, 얼음처럼 식어져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대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도 그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는 섭씨 6000도라는 그 겉 표면온도보다는 20배는 더 뜨거운 섭씨 12만도 정도의 열을 갑자기 발산하면서 거대한 자기 폭발의 고통을 겪은 다음!! 그 다음, 급격한 템포로 얼음처럼 냉각되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천문학자들의 예언이 이 분야의 문외한인 제게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 것은 별의 죽음에 관한 문제와 함께 <새로운 별의 탄생>에 관한 보도였읍니다. 즉 별들은 그와 같은 <자기 폭발>의 고통과 함께 죽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 별들은, 전혀 잡히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저 텅 빈 우주공간 안에서도, 놀라웁게도, 그러한 <자기폭발>의 고통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비한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제게 있어서도 너무나 신비하게 느껴진 점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별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분출한 그 거대한 "자기 폭발"은, 소위, "우주광선"(cosmic rays)이라고 알려진 에네르기 입자들을 거대하게 생산해 내는데, 바로 그 입자들이, 즉 별이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 토해 낸 입자들이 돌연변이적인 새로운 생명탄생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그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별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은, 전적으로, 별이 죽을 때 일으키는 그 "자기폭발"과 그 "자기아픔"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거대한 별의 죽음, 영원한 얼음 덩어리로 냉각되거나 영원한 무저굉의 블랙홀로 줄어들거나 해버리는 저 거대한 별의 죽음은, 놀라웁게도, 단지!! 오직 단지!! 또 다른 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생명창조 에너지를 죽을 힘을 다하여 방출해내는 하나의 또다른 새 생명 창조 운동에 불과한 것이라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정녕 그런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신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천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신비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저 두 행인, 저 익명의 두 제자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였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부활을 창조해 내기 위하여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다는 것, 그게 도대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그러한 고난과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라야만!!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부활의 영광을 창조하기 위하여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그런 고난을 받아야만 했었다는 것, 그것은, 진실로 그것은, 적어도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전능하신 하나님 조차도!! 인간 생명의 구원과 새로운 인간 창조를 위하여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자기 폭발과 자기 해체의 "아픔"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셨다는 그것은, 적어도 그것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또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역사적 사실 앞에 선 예수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최대의 종교적 고민이요 고뇌였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부활에 관한 교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또 부활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야만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섭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적어도 그것만은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이러한 문제를 부등켜 안고 심히 고뇌하며 침울한 얼굴로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걷고 있던 이 두 제자에게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참으로 미련하기도 하구나.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가 말한 그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또한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그와 같은 죽음을 죽어야" 비로소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 사실을 그렇게도 믿기 어려우냐?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과 예언자들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성서전체가 가르치고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것, 즉,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결단코 부활의 영광이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제기해 온 모든 물음에 대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답변은 단지!! 오직 단지,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은 <영광과 새 생명>을 창조해 내기 위한 한 필연적인 전제조건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말로서만 설명되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깨우침은 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도 그 참 뜻이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채 가리워져 있는 하나의 신비였습니다. 영광과 새 생명의 창조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그 대가로 치룬 다음에라야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차도 엠마오 도상의 저 침울한 얼굴의 두 제자에게 그토록 진지하게 설명해 주셨듯이,

 

그리스도도 또한!!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비로소 부활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라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가! 줄기차게 증언해 온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통하는 희생적 고난이 없이는! 자기 변화의 구원과 부활의 영광은 결단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 모세와 예언자의 가르침을 포함한 성서 전체가 증언하는 복음적 증언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약 7년전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11월 1일(1990. 11. 1), 우연히도 제 아내가 가슴에 꽤 큰 혹덩어리가 만져진다고 하여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암"인지 아닌지는 수술을 동반한 조직검사를 해 보아야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기록상의 진단은 breast mass였지만, 그러나, 병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임에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으로 문명오는 분들이 병원 당국에서 얻어들은 사전지식을 근거로 한 위로들은, 대부분, "유방암은 조기 발견하여 치료만 잘하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제 아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예, 암환자 또는 그 보호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병실에서 대기하면서 수술을 기다린 시간은 꼭 일주일이었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은 저나, 제 아내는 "암"이 아닐! 가능성은 없다!!는 매우 비관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히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분명, 제 아내는 죽음에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기초적 제반검사가 다 끝났을 때, 병원의 양해를 얻어서, 수술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한번 더 보고 오겠다는 심정으로 병원 당국에 외출을 신청하여, 이례적으로, 잠시 집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술도중 자기가 어떻게 잘못되는 경우, 남편이 뭐 그렇게 아이들 뒤를 잘 챙겨주랴 해서는, 아이들의 겨울 내의(內衣)들을 새로 사가지고 와서는 방마다 겨울 점검을 다 해 놓은 다음, 마치 유언이라도 하듯이, 울먹이듯, 몇가지 당부들을 남편인 내게 하였습니다. 수술을 받다가 자기가 어떻게 잘못 되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옛날보다 더 잘 대해 달라는 둥, 혹 새 장가를 가더라도 아이는 더 이상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둥, 분위기가 가히 초상집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매우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로 다시 되돌아와서는 비로소 조직검사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의 위협과 불안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제가 감히 아내를 위해서, 그것도 아내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이번 경우처럼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리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해 본 적이 목사이면서도 비록 유감스럽지만 예전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로 저의 심혼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진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후회없이 마음껏 한 번 사랑해 보지 못했던 지난 날이 그렇게도 죄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요사이는 시대가 많이 달라져서 생각들도 많이 달라지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마누라 자랑하는 놈은 바보다" 해서 마누라 자랑은 남자의 금기사항처럼 되어 있었고 또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남자는 거의 예외없이 "공처가"라는 딱지가 붙는 불문율이 있어서 아내에 대한 걱정은 속으로나 하는 것이지 겉으로는 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게 닥친 상황과 같은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그 경우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저는 그저 무작정! 하나님께 매어 달려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또 이유여하를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암이 아니게!!> 해달라고 한사코 떼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세브란스 병원 기도실로 뛰어 올라가서 울면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제가 지금까지 목사로서 잘못한 것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를 제 일생을 통해서 한 번 철저히 점검도 해 보았고 또 아내에게 섭섭하게 한 일들이 무엇 무엇 있는지도 알알히 되새겨보면서, "회개"라고 할까 하는 그런 것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아내를 주셔서 함께 살게 하신 그 이유를 성서적으로나 기독교 신앙적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또 제게 있어서 도대체 "아내"라는 사람의 진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등등을 한 번 깊이 반성해 보았습니다.

한국적 관습으로는 좀 못난 사내 같지만, 어쨓든, 이 기막힌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정말 한 번 되게 혼쭐이 난 후, 그제서야 저는 "아내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신의 명령>이었구나 하는 것, 그것이 곧 율법의 핵심과 연결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일종, "대오각성"이라는 것을 한 번 한 셈입니다.

마침내, 수술결과가 나왔습니다. 병원 당국으로서는 이런 일이 자신들의 경우로서는 두번째 겪는 예외의 case라고 하였습니다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인지, 예상 밖의 통보, "암이 아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수술 후 이틀만에 거뜬하게 기쁨과 감격을 안고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퇴원한 지 며칠 안되어서 저는 어느 여성신학회 모임에서 성서연구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이상에서 말한 것 같은 그런 대오각성하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여성들만이 모인 그 자리에서도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거기서 어느 여성신학자 한 분이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우 격조높은 말로 내어뱉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매우 인상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즉 그분은 매우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모든 남편들은 저렇게 한 번 되게 혼쭐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사랑>이 다름 아닌 바로 <신의 명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인류 구원 섭리는 늘상 이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리의 참 의미는 언제나 고통을 통한 대오각성이 없이는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그것의 참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그 고난의 경험과 그 부르짖음의 경험이 없이는!! 결단코! 바르게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이 성서의 줄기찬 증언입니다. 뿐만은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축복도 또한 광야의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하였다는 것이 또한 성서의 줄기찬 주장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지닌 그 의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즉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가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말씀으로 엠마오 도상의 저 믿음없는 두 제자를 나무라시며 가르치셨듯이,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사건이란 절대적으로 십자가의 희생적 고난과 사랑의 행위 없이는!! 결단코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정녕 기쁜 소식이요, 정녕 즐거운 소식인 것은 그 부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적 고난의 그 위대한 속량적 은총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이, 그 부활이 기쁜 소식이요 즐거운 소식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 스승이라고 할 만한 저 사도바울 선생도 또한 분명히 이 진리를 대오각성하였고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기독교 복음을 세계 속에 심는 최대의 선교자와 최대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의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1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그의 확신을 쓰고 있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고 또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애 내다] 바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의 영광에로 이르게 하신 이 구원의 증언만이 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다른 어떤 복음이 거기에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 이것과 다른 복음이 거기에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믿음을 교란시키려는 사람들로서,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삐뚤어지게 하려고 그러는 것 뿐입니다. 나, 바울을 포함한 우리 자신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 지라도, 만일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을 전한다면 그가 누구이든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갈 1:4, 7-8)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도 부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고난의 대속적 희생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새로워질 수가 없는 것이며 거듭나는 창조를 이룩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소멸시키고 그 죄를 십자가 위에 못박는 근원적 회개와 철저한 자기부정이 없이는 부활의 재창조와 구원의 은총이란 우리에게 결단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옛날의 낡은 자기를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여 스스로 썩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밀알도 결코 열매를 맺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한 종교도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도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거역하며 살아온 이 낡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철저한 회개의 "아픔"을 통하여야만 우리는 비로소 부활과 구원의 영광에 능히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이 진리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증언만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복종만이!! 우리를 능히 부활의 영광에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1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호세아 13:12-14, 고린도전서 15:54-55)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구약 아가서 8장 6절의 말씀입니다. "죽음"은 강한 것입니다. 아니, "죽음"은 가장 강한 것입니다. "죽음"은, 또한, 강하면서도 동시에 잔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의 세력 앞에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이 장소 저 장소 가리는 일 없이 모든 것이 무차별 무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가리켜서 인간의 절대적 운명, 또는 인간의 절대적 숙명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기독교만의 고유한 생각은 아닙니다. 고대 가나안의 종교는 이 "죽음"을 그들이 믿고 있는 신(神)인 바알 神보다 더 강한 것으로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고대 가나안 종교가 남겨준 글을 보면,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신앙하는 神인 그 全能하신 神, "바알" 神과 죽음의 神 "모트"(Mot) 神 사이의 힘 겨루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바알"과 "모트"는 마치 코끼리나 하마처럼 등을 대고 서로 힘껏 밀친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들소들처럼 서로 뿔로 떠받는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독사들 처럼 서로 독침으로 찌르며 문다

"모트"가 강하냐? "바알"이 강하냐?

그들은 준마들처럼 서로 발로 걷어찬다

그러나!. "모트"도 넘어지고 "바알"도 쓰러진다!!

 

 

이 글은 가나안 종교의 경전인 우가릿(Ugarit) 원경 제 6장 49항에 나오는 글입니다. 말하자면, 전능하신 神 "바알" 神도 죽음의 神 "모트"를 이겨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알" 神의 배우자인 女神 아낫(Anat)이 "바알"을 대신하여 복수전을 펼치는 이야기가 그들의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바알"과 "모트"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실제로는, 죽음의 神 "모트"(Mot)가 오히려, 전능의 神 "바알"(Baal)을 이겼던 것으로 추측되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불교는 윤회설(Samsara/Sansara:metempsychosis:transmigration)과 환생설(Re-incarnation)을 믿는다고들 하고 또 희랍사람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不滅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라고들 말합니다만,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줄곧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육신이든 영혼이든 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증언해 왔습니다. 한 시편시인은 이렇게 인생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아, 우리 인생의 모든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은 一息間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年數가 八十[본문은 七十]이요 또 건강하면 九十[본문은 八十]이라 할 지라도, 그 年數의 자랑은 단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나니, 우리는 날아가나이다.} (시편 90:3,9-10)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으로서는, "죽음"을 이겨내고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이미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만은, 우리의 인식은 매우 확실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한 목동과 그리고 예루살렘의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솔로몬" 왕의 집요한 求愛를 받고 있던 한 淸雅한 처녀 "술람미"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 이른 바 왕실의 권위가 손짓한 유혹도 뿌리치고 일구어내었던 저 깊고도 진실한 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던 구약성서의 雅歌書 기록자는 그의 이야기의 결론부를 쓸 때, 돌연, 이러한 말로 그의 사랑이야기[雅歌]를 끝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도 말며 깨우지도 말지니라. 오, 그 사랑하는 자의 팔에 依支하고[행복의 미소 지으며] 초원을 가로질러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너 때문에 네 어머니가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겪었던[辛苦한] 그곳,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었노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나를 印章같이 마음에 품고 圖章같이 가슴에 묻어두어라. 아, "사랑"은 "죽음"같이 强하고 "투기"는 "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氣勢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雅歌 8:4-6).

 

말하자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의 세력"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라이벌(rival) 세력으로서, 감히(!), "사랑"이라는 것이 드디어 우리의 세계 속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은 무슨 뜻을 가진 말이겠습니까?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다고 하였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한 때, 시내 영화관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큰 인기를 모았던 적도 있습니다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 죽음만큼 강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ghost"라는 영화, 즉 한국에서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인기를 모았던 그 영화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리만큼 파격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줄"이 죽음 후의 영혼의 세계에까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때, 그 때,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던 바 "사랑"만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마력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랑의 힘"을 감히 죽음이 지닌 위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는 것일까요? 요사이 한창 MBC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랑한다면"이라는 TV 드라마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랑"은 두 종교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저 절벽같은 반목의 벽도 능히 허물고 끝까지 자기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랑의 힘"을 감히 "죽음의 맞수"로까지 격상시켜서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남녀간의 사랑이, 비록 고매한 휴머니즘의 멋을 지니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사랑"의 그 "에로시티즘"적 성격이 갖고 있는 것, 이른 바, 불같이 일어났다가도 또 곧 식어지는 그런 그 유한하고 한시적인 성격 때문에 그런 사랑이 감히 "죽음"의 세력만큼 그렇게 항구적인(!!)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룰 수 없는 남녀간의 그 에로틱한 사랑 때문에 감히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하는 그러한 유형의 애정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할 찌라도 감히 그것을 두고 우리가 그 "사랑" 조차도 찬양하고 장려하며 기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짧은 소견과 그 경솔함을 꾸짖으며 안타까워 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애정을 가리켜서 감히 "죽음의 맞수" 또는 "죽음의 라이벌"로까지 격상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죽음의 "맞수"가 될 수 있다는 주장, 아니, "사랑"이 오히려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요?

그러나, 여기 감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증언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인간-자연-세계", 이들 사이의 근본적이고도 우주적인 "상관관계"를 그 끝간데까지 탐구하며 추구하여 갔었던 한 예언자, 그를 이름하여 우리가 "호세아"라고 이름하는 한 이스라엘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가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져 있는 그 "사랑의 관계"가 가진 참 의미를 깊이있게 생각하며 끝까지 추구한 다음, 돌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죽음"의 세력을 향하여 정공법으로 도전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한 메시지가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

 

내가 사랑하여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아, 네가 행한 불의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나는 오히려 그것을 나의 비밀동굴 속의 항아리 안에 꼭꼭 봉함해 넣어 두었다. 네가 지은 그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하여도 나는 오히려 나의 비밀창고 속 깊은 곳에 그것을 깊이 저장하여 자물쇠로 잠궈 두었노라.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그 진통의 시간을 지연시키지 못하고 끝내 맞이하고야 말듯이 너도 네 어머니의 자궁문 앞에서 더이상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지체할 수는 없게 할 것이다. 네가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 지라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때문에 나는 너를 끝내는 지옥의 권세에서부터 이끌어내며 사망의 권세로부터 너를 구원하여 내리라. [이것이 너를 창조하고 지어낸 어버이 하나님의 모성적 애정이니라] * "본문에 없으나 문맥상으로는 이렇게 되어야 함" 너, 사망아, 네가 갖고 있다는 그 "재앙의 쏘는 것"이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나와서 내게 덤벼라!!] 너, 지옥아, 네가 갖고 있다는 그 멸망의 "이기는 것"은 도대체 어디 있느냐? [있으면, 나와서 내게 덤벼라!!] 너, 죽음아, 너 사망아, 이제부터는 결코 더 이상 너를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호 13:12-13)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메시지입니다. 감히,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 그 "쏘는 것"의 날카로운 예봉을 능히 꺾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세력의 그 절대적 위력을 상대화시키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크게 소리내어 웃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력을 격파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가 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를 의심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 낯설고 이상한 메시지의 "실"(實)과 "허"(虛)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 "죽음을 이겨내는 길이 있다"는 이 말씀은 - 그저 종교의 세계에서나 하는 소리요, 신앙의 세계에서나 하는 상투적인 소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겨버릴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찾아오는 부활절이 되면, 기독교 교회들은, 이 난해한 부활절 메시지를 설명하는 데 지극한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부활의 초자연적 신비성과 기적성을 강조하면서, 단지 맹목적인 신앙만을 교인들에게 강요해 왔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무조건 그저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어도 믿는 그것이 "참 신앙"이라고 장황스럽게 설득해 왔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학문적 양심을 자랑하는 신학자들의 경우에서도, 그들은 대부분, 부활의 진리를 해명하라는 요구 앞에 서면, 모두들, 매우 난처한 표현을 지으면서 또 그 특유의 제스쳐를 취하면서 얼굴을 돌리고 외면해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호세아는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자 호세아의 메시지가 지닌 그 "실"(實)과 "허"(虛)를 능히 가려내어 확인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⑴ 死亡의 권세를 쳐 이기는 "승리"에 관한 이 기이한 宣布를 과연 "누가" 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것,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⑵ 그러한 선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⑶ 그리고, 그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 절대적인 죽음의 권세를 쳐 부수어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자 호세아의 답변은 이 물음에 대해서 조금도 모호한 것이 없는 매우 확실한 언어로서 대답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언자 호세아에 의하면, "죽음"의 정복에 관한 가장 확실한 약속은, 전적으로, 인간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해산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 진통의 산고를 참고 자궁문을 열어 <자식>이라는 생명을 생산해 내려고 死力을 다하는 "産母와도 같은" 하나님 그분, 즉, 우리의 어버이요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신 그 하나님, 어머니이신 하나님, 그분(Oh, He! cf. S. Mowinckel, ya-hu!), 그분으로부터 선포되었다고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에 넘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낳으신 <어머니>같은 창조주 하나님"(cf. "We are God's offspring", Acts, 17:28,29), 바로 그 분이 약속하시고 바로 그 분이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성적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God as the maternal God), 그 분이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세계, 출산의 영역, 생산의 자리, Creation, Procreation, Production의 자리!! 그곳은, 진실로, "죽음"의 세력이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절대적 세력이 상대화될 수 있는 한 확실한 가능성을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우리의 理性의 눈으로서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의 세력은 본질상 창조의 세력 앞에서는 반드시!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이 성장하는 그 곳에서는 본질상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의 과정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력 아래에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죽음"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확실하게 주시리라는 그런 확신을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여" 가질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물음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 대한 성서의 답변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이요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언자 호세아의 증언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실로 그분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그 분은 우리로부터 죽음의 세력을 기필코야 제거해 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본질상,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자들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치, 자기 배 속에 있는 자식을 사랑하는 산모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가 죽는 것을 결단코 그냥 내어버려 두실 수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창조자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이, 그 분의 그 기본 본성이 "사랑"이며 그리고 그 사랑은 또한 그 무엇보다도 "모성적 사랑"으로 성격지어져 있는 이상, 그 분은 결코 그가 창조하시고 그가 생산하시고 그가 낳으신 것들인 우리네 자식된 자들을 결코 죽음에게 내어 주실 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대답은 이젠 논의의 여지없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의 어버이" 하나님은 성서가 도처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그 분의 그 모성적 본질로 미루어 볼, 즉 "하나님 아버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어머니"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자녀된 우리들을 살리시려는 어버이의 그 지극한 사랑이,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의 형틀 위에 희생의 속죄제물로 내어놓으시기 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그 분의 그 <사랑>의 "깊이"를 통해서 볼 때, 실로, 그 분이야말로 우리를 사망의 밑바닥까지라도 끝까지 찾아가셔서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실 분이시라는데 대해서 우리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서의 사상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접근해 간 우리세대의 대표적인 성서학자인, 미국 하바드대학의 휘오렌자(E. S. Fiorenza) 교수는 가슴에 사무치듯 절규하기를, "오, 하나님! 주님은 결코 <아버지>라고 불리워서는 안됩니다. <어머니>라고 불리워져야 합니다."(Oh God, you are not to be called "Father", but "Mother!")라고 부르짖어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여기서 예언자 호세아가, 그의 예언서 13장 13절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그 민족부활의 대 창조적 사건을 가리켜,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의 사건"이라고 감히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는 그 이유를 이제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해산하는 산모가 그의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그 <모성본능적 사랑>, 그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우리는 감히 "죽음을 정면돌파하여 격파하는 생명창조의 힘"을 기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모성적 사랑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아니, 母性的 "사랑"은 아예 죽음을 부활로 바꿀 수 있는 유일무이의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의 히브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놀라웁게도, 그들이 믿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또는 "야훼"라는 이름을 감히 인류의 첫 어머니인 "하와"라는 이름을 그 語根으로 하여 구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이 모성적 창조본질을 가진 "그가 창조하다"(He creates : He causes to b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신앙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사도바울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푸는 유일한 해법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부터만(!) 찾았던 것입니다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 나는 알았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주시는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어버이이신, 우리의 어머니이신 그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로다"(고전 15:55-56)라고 사도바울은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저 유명한 신앙고백도 또한 그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과연, 우리가 고난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서 더 이상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만일, 전능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다름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만일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리요?(If God is for us, who is against us?) 누가 능히, 그 무엇이 능히 '하나님꼐서 사랑하시는 자'를 죽일 수 있으리요!"(롬 8:31,33)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죽음"을 이기고 또 "부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부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서적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부활"을 안겨주실 수 있으며 새 생명을 창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 죽음보다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12. "약속의 땅의 거류민" (히브리서 11:8-16)

 

장공 김재준 목사 13주기 추모성묘예배 설교

때 : 2000.1.26(목)

곳 : 여주 남한강 공원 묘원

 

 

믿음의 조상(祖上)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約束)으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거류민(居留民)"으로만 살았다라고 우리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천막"에서 함께 살았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신학에 따라 해석한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구약성서에 대한 신약성서 기자의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나타난 공통된 주장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어디까지나 거류민(居留民), 즉 떠돌이 이방인(異邦人)으로서만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아브라함의 소명(召命)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적 해석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관점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해석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召命)과 그러한 결단이 갖는 위대한 신앙적 모습을 해석할 때 일반적으로 그러한 신앙적 결단의 의미를 주로 그의 <순종(順從)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여 왔었습니다.

우리의 본문도 그 서두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복종>하고 땅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떠나갔다는 그 점을 맨 먼저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그 평가는 오히려 그의 "순종 행위" 보다는 그의 "거류민으로서의 삶"에 더 강조점을 두고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가야할 목적지로 나아갈 때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면서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지시할 그 땅을 향하여서만 나아간 대단한 "순종의 믿음"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착(定着)해서 살고 있으면서도 즉, 정착민(定着民)이면서도, 말하자면, 자기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의 기득권에 연련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로, 이 증언을 더욱 보완하는 말이 다음 구절들에서 계속 반복해서 첨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증언이 우리 본문의 중심주제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도록 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예컨데, 아브라함이 실제로는 그의 아들 이삭과 한 장막 안에서 산 적은 있어도 그의 손자 야곱과는 결코 한 장막 안에서 산 적이 없었는데도 우리의 본문은 이삭과 야곱 모두와 함께 한 장막 안에서 살았다고 강조해서 주장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약속의 땅>, 즉 아브라함이 약속받아 얻은 그 아브라함 소유의 이 약속의 땅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것 만이 아니라 그의 대표적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함께 공유(共有)하며 살아야 할 땅이라는 것과, 그리고 아브라함도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기득권을 향유(享有)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조카 롯에게, 땅 분쟁의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리라(창 13:9)

 

라고 말하면서 기득권을 조카에게 기꺼이 양보하였듯이, 여기서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서 누릴 영광에 대한 기득권을 결코 독점하려 하지 않고 그의 아들 이삭은 물론이고 장차 태어날 야곱과 더불어서도(!) 그것을 함께 나누어 공유하는 것을 기뻐하였던 자였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믿음의 위대성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장막"에서 살았다는 것, 즉 "천막"( / )에서 살았다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천막"이라는 것은 본래 이동하는 유목민과 유랑하는 유랑민의 거주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천막"은 기초를 구축하지 않습니다. "천막"은 기득권을 누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원활한 이동, 기동성있는 이동, 그러므로 새로운 곳을 향하여 신속히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된 동작을 전제한 거주지가 천막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 정착하고 살았던 조상이라는 창세기의 주장과는 그 강조점이 매우 다른 주장과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천막생활도 한 것으로는 되어 있습니다만 이삭이나 야곱, 특히 야곱과 비교한다면, 아브라함은 그의 일생의 거의 전부를 헤브론에서 보냈고 그리고 아내 사라와 자기 자신을 묻은 곳도 헤브론이었으며 심지어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는 그 헤브론 지경을 모두 매입하여 법적 지주권(地主權)을 획득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후대의 성서기자인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장막(천막)에서 살았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생애가 결단코 기득권을 주장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생(生)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의 믿음의 일생을 평가한 중심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믿음의 위대성(偉大性)은, 그러므로, 그가 약속으로 받은 땅에서지만 거류민(居留民)으로, 이방인(異邦人)으로, 그리고 나그네( / )로 살았다는 데서 평가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땅에 대한 소유권과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이상(理想)을 이 나그네된 땅에 구현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척자」「개척자적 순례자」「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챤 엘리뜨」「소명(召命)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김재준 목사님의 생애에서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 특히 히브리서 기자가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그린 그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대로 재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장공(長空) 선생님은 결코 짧은 자기 인생 거기에 연련하시거나 자기 기득권에 안주하시거나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줄기 차게 한국 신학의 미래와 한국교회 및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한 삶만을 추구하신 분이셨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순례자의 삶, 즉 약속의 땅에서이지만 줄기 차게 거류민(居留民)으러서의 삶을 고집하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소천(召天)하시기 전날, 한양대학 병원을 문병간 저에게 침상(寢牀)에서 누우신체로, 그러나, 조금도 자세를 흩어뜨리시지 않으신 모습으로 직접 제 손을 잡으시고 "학교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유언(遺言)을 남기시듯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가슴에 와 닿은 느낌은 "아, 우리 장공 선생님은 한신의 미래 만을 가슴에 늘 담고 계신 분이셨구나"하는 느낌과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공(長空) 선생님의 이 염원이 우리 후학들의 가슴 가슴 깊은 곳에 깊이 깊이 각인(刻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기원과 희망이 유가족(遺家族)들의 가슴 속에 큰 격려와 위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13.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마태복음 7장 21절-23절)

 

학년 초 신앙 수련회 폐회예배설교

2000년 3월 10일, 양수리 수양관

 

 

영화의 화면이 지나 가듯이, 많은 것들이 우리 앞을 스쳐갔습니다. 높고 낮은 악기 소리, 사람들의 웃음 소리, 그러나, 물론 거기에는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분주하게 지나 갔습니다. 젊은 남녀들의 웃음 소리, 청년들의 박수 소리들이 그냥 그저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 갔습니다. 모든 것은 그냥 그저 그렇게 지나 갔을 뿐, 어느 하나도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허상(虛像)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냉엄하게 단지 무거운 짐으로만, 내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득불, 나는 우리의 현실 이야기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 할 우리의 이야기"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이야기>입니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은 결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능과 지혜가 발달하면 발달 할수록 더욱 더 심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가면 지나 갈수록 이 세상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예언자 자신도 자신이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모르는데까지 가게 됩니다. 따라서, 참을 추구하는 자들의 "참을 추구하는 노력들"은 그래서 더욱! 힘들어 집니다. 이 것이 바로 우리가 물려받은 이 세상의 세상성(世上性)입니다. 그러므로, 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란 "속이는 시냇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참"을 애타게 추구하여 왔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마침내 하나님마져도 "속이는 시냇물"처럼 되셨느냐(렘 15:18)고 탄식하며 절규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세상은 이념적 대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언자는 의인(義人) <한> 사람을 찾지 못하여 끝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속수무책 지켜 보기만 하여야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참"인지 사탄의 정신이 "참"인지를 판단하는데 조차도 혼란을 느낍니다. 아마도 지난 세기까지의 이 세상은 이러한 이념의 혼란이 우리를 지배하였던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삼국지 논리가 세상사는 최선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삼국지 논리"라는 이 언어는 <힘의 논리>만을 믿고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생(生)의 기본원리"로 삼는 자들의 잘못된 이념을 통칭해서 제가 만든 말입니다만, 이러한 "삼국지 논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간악한 마키아벨리스트인 "조조"와 같은 인물이 최상의 시대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유비"와 같은 철저한 기회주의자가 덕망(德望)있는 군주로 찬양받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세상이 되어 간 것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이러한 세상성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의인(義人)이신 그리스도를 극악모도한 사형수(死刑囚)로 정죄(定罪)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였다."

 

마침내, 이렇게 하여 이념상의 대 혼란이 우리의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깡그리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 혼란의 현상은 이념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현장에까지도 침투하게 되고, 따라서, 이 세상은 어디 한 곳에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사탄의 통치영역이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희망의 마지막 보루(堡壘)들이 모두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죄악(罪惡)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세상은 부정직과 속임수와 잔악성을 그 기본 삶의 원리로 하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그 최선의 이념교재로서 추앙(推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세상을 바르게 배우려는 학생들에게는, 제자들에게는, 평신도들에게는, 그리고 소외(疏外)된 민중(民衆)들에게는 가슴 섬뜩한 최대의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희망의 보루였던 그 율법교사가 바로 그 "사탄"이고 유일한 생(生)의 안내자라고 믿었던 그 종교 지도자가 바로 그 "악마"이며 화해와 용서의 상징이었던 그 제사장이 바로 그 "사탄의 괴수"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희망의 근거들과 보루들이 모두 다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 수련회"는 결코 그 무슨 실천도 뒤따르지 않는 말장난의 잔치만 떠벌리는 것이 되거나 바알주의적 광란을 모방하는 듯한 세속적 축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박 삼일의 이 "학년 초 신앙수련회"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 이러한 맥락 안에서 진지하게 자기성찰(自己省察)을 하는 시간이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우리의 주 예수께서 분명하게 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여, 주여"라는 말은 그 "중언부언성"(重言復言性) 때문에 "진실성이 없는 신앙고백의 허위성(虛僞性)"을 비판할 때 사용하는 대명사적 언어가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신앙고백은, 즉,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하늘과 땅의 주(主)"로 고백하는 것, 그 분을 "역사의 주(主)"로서 고백하는 것, 그 분을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나를 양육하시는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 그것은 실상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확신하는 매우 훌륭한 모범적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군왕이나 군주보다, 루터나 칼빈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나의 유일한 주님"으로서 고백하는 일이 어찌 그렇게 나변(那邊)에 나도는 그런 흔한 일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매우 어렵고도 또한 매우 고귀한 신앙고백임에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함에도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또 옷깃을 여미는 숙연(肅然)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를 향하신 냉혹한 경고의 말씀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문제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른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신부, 제사장, 예언자, 율법교사, 신학자, 신학생이 문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우리 모임과 같은 "신앙 수련회의 모임"에는 가장 안성맞춤이 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확실성은 우리의 본문, 둘째 구절(마태 7:22)이 잘 확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자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악령을 추방하는 일도 감히 하지 않았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이적과 기사도 또한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네 교계나 신학계에서 가장 말하기 두려워하고 금기시(禁忌視)하는 말은 분명 "종교 다원주의"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 최대의 적(敵)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우리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다원주의자나 종교다원주의적 사고(思考)를 하는 사람을 비판의 대상 속에 넣으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오직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서"(!!) 예언도 하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서" 악령도 추방하고 "오직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서"이적 기사도 행한 바로 그 사람을 심각하게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비(非)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런, 거짓 예언자"가 문제의 중심에 오고 있습니다. "양(羊)의 탈을 쓴 이리"가 문제의 중심에 오고 있습니다. "거짓 제사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거짓 목사" "거짓 전도사" "거짓 장로" "거짓 교사" "거짓 신부" "거짓 종교인" "거짓 신학자" "거짓 신학생"이 문제의 핵심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 신앙인"이 바로 다름아닌 가장 위태롭고 가장 파괴력이 강한 우리의 적(敵)이라는 말입니다. 신앙공동체가 가장 경계하여야 할 가장 질(質) 나쁜 적(敵), 이른 바, 우리 내부에 있는 "내부(內部)의 적(敵)"이 바로 "거짓 예언자"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내부의 적"은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으면서 우리의 내장을 다 갉아 먹고 또 더 나아가서는 외부와 내통하여 외부에 있는 더 막강한 세력을 우리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우리의 실체를 전면적으로, 우주적으로, 통전적으로 깡그리 모두 파괴시켜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라고 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언어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언어입니다. 희랍어 원어가 말하는, ( )이라는 말은 "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법 위에 군림하며 초법적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 )라는 말은 주로 사탄이 통치하는 이 세상의 간악한 세상성을 나타내거나 또는 적(敵) 그리스도 또는 벨리알(데살 후 2:3)의 이념과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렇게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악마주의와 삼국지 논리가 바로 다름 아닌 적(敵)그리스도적, 벨리알적, 사탄적 사고(思考)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고(思考)와 이러한 사고(思考)를 하는 자들을 "나에게서 물러가라"라는 추방 명령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파괴하는 최대의 원수가 잠재해 있다는 말, 그리스도인 안에 적(敵)그리스도가 내재해 있다는 말, "주여, 주여"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념을 강한 톤(tone)으로 외치고 그리스도주의를 크게 시위하는 그 곳에 오히려 가장 파괴력이 강한 가장 무서운 적(敵)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질(質) 나쁜 "적(敵)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은 분명 오늘의 우리, 즉 "신앙 수련"을 하였노라고 말하는 우리가 꼭(!) 곱씹어 볼 신앙적 또는 신학적 반성의 주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경고 대로, 우리는 지금 이념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이 든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의 경우는 병인 줄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또 어떤 이들의 경우는 오히려 병을 조장하므로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을 스스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나, 우리의 "회개"가 형식적으로만 되거나 위장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매우 예리한 언어로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여, 주여"라는 신앙고백을 확고히 하고서도, 심지어는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악마를 추방하고, 또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일"과 같은 대단한 초능력적인 일까지도 함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위장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행위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실"과 "거짓" 사이를 구별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 수련의 과제요 종말론적 과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마태 복음 7장 21절 이하가 경고하였던 바로 이러한 적(敵)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심각한 시련과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실로,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예루살렘 멸망보다 더 참혹한 비극이 전개될 조짐이 보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환상 중에 보았듯이, "끓는 가마 솥"이 북에서 아래로 기울어져 있는 형국이 바로 오늘의 형국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의와 악행이 은밀히 내밀하게 종횡무진 자행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한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잔혹한 세속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학교육을 고사(枯死), 초토화(焦土化)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다급한 우리의 문제입니다. 불의가 차고 넘칩니다. 신학교육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잔인하고도 악랄하게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 믿을만한 사람들이, 저 희망을 걸었었던 사람들이 모두들 다 삼국지 논리와 깊이 내밀하게 야합을 하고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모두가 지닌 한없이 비겁함을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우리의 부진실을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서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을 하며 상복(喪服)을 입고 애곡을 하여야 할 때임에도, 그리고 우리 신학교(神學校)의 기본 정신이 통채로 무너져내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웃고 있고, 여전히 "주여, 주여"라고만 중언부언하고 있으며 흥겨운 노래가락에 맞추어 무슨 큰 혼인잔치나 열어 놓은 듯이 춤추며 떠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6세기의 한 탄식시인은 "예레미야 애가"라는 책을 통하여 이렇게 절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 주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고 있는 이 슬픔, 이것이 과연 그대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애가 1:12). "Is it nothing to you, all you who pass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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