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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무교회주의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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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주의(2) - 함석헌의 사상을 중심으로

 

"새 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 가 필요하다.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살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살리려면 일단은 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오늘의 종교를 보면, 한편에서는 벌써 동이 트는 것이 보이나 대부분은 멀었다. 아마 과거에 언제나 그랬던 것같이, 기성 종교는 그대로 화석이 되어, 역사의 지층 속에 남고 말 것이다.

그들은 돌같이 굳어진 신조만을 주장하고 경전의 해석은 기계적으로 되어 생명을 자라나게는 못하는 도리어 얽매는 줄이된다.- 인생과 역사 중에서-

 

Ⅰ. 글머리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무교회주의 운동의 활동 정도가 매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부터 청년기에 잠시 이 운동에 가담했다가 거의 발을 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밑바탕에는 항상 무교회주의, 즉 교회무용론 및 지고(至高)의 선으로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의 신(神) 개념과는 거리가 먼, 그러한 기독교 이해를 계속했던 흔적들이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런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파헤쳐 해석해 보면서 무교 회주의와 기독교 진리 본래의 신학적 문제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의 종교이해 전반에 관해서 분석해 볼 것이다. 그의 신학사상은(만일 어떤 특정 의미에서만 붙일 수 있다면) 씨알 - 신학이라고 필자는 단정하며 이 글을 전개할 것이다.

 

Ⅱ. 함석헌 사상의 발전과정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사상에 관한 이해에 이어 우리가 다루어야 할 또 한 사람의 무교회주의자는 함석헌이다. 그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참여의 신념과 행동하는 지성의 한 표본으로서 한국 사회와 그 역사 안에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몇번의 사상적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신앙은 굳게 지켰기 때문에-물론 말년에는 무교회주의 사상 자체가 거의 무종교주의 내지 유물론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그의 기독교 사상은 언급할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무교회주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사상을 논할 때, 무엇보다도 그의 인물상을 살펴봄으로써, 사상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龍川)의 바닷가 마을 사점에서 한의사였던 함형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으로충만되어 있던 집안 친척 어른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삼촌인 한학자 함일형(咸一亨)을 통해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된 원형의 이념을 체득했다. 함일형은 그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과 사상의 영향 때문에 함석헌은 함일형을 그의 생애에서 맨처 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이라고 불렀다.(주1) 1916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장차 의학 공부를 하려는 포부를 갖고 공부하던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3.1운동이 없었다면 오늘의 함석헌이 아님을 고백하며 말하기를 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 평양고등보통학 교를 졸업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주2)라고 했다. 그러나 3.1운동 때 평양고보에 연락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주3) 바로 이 3.1운동이 그의 생의 지표를 바꾸어 놓았다.(주4) 그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 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 서기가 되고, 군수, 경부가 되고, 의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엘 갈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여 밀기가 우선 싫고, 한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간지 알 수 없 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다시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학교 다니기는 싫었다...그때 부터 나의 일생은 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주5)

이렇게 하여 그는 3학년 때 평양고보를 중퇴하고, 21세 되던 해에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오산고보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학교로서, 함석헌 스스로 고백하기를 오산고보에 그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오산의 3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산학교를 이루는3가지 요소였다.

[그 첫째는 청산명호식의 민중 정신이요,

그 둘째는 자립 자존의 민족 정신이요,

그 셋째는 참과 사랑의 기독 정신이다.](주6)

오산학교에서 그의 사상은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깊이 형성되어 갔다. 그가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한글>, <배달>, <한배>라는 말을 배웠다.(주7) 이 말은 그가 거기에서 민족사적, 민족정기적 차원에서 숭고한 의미를 깨우쳤다는 의미이다. 청년 함석헌에게 남강의 의미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그의 독백이 증언하고 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이었다.'(주8)

아마도 이런 솔직한 독백은 함석헌의 삶의 등불이 이미 오산학교에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통해서 불붙었던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조선에서 등촉"이 타며 밝힌 열과 빛을 더욱 불태워 밝히려 했던 것을 담은 의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강의 죽음을 함석헌이 "외로운 촛불이 꺼져버림" 으로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앞으로의 행위를 말해주는 시사적 의미가 있다.(주9) 그의 삶에서 세번째 영향을 준 사람을 그는 유영모(柳永模)라고 했다.(주10) 함석헌은 유영모로부터 그의 후기 사상인 씨알의 개념을 깨우쳤고, 그 씨알의 열매가 그후 반세기 후에 씨알 농장에서 자라 결실맺었던 것이다. 이른바 씨알의 소리를 통한 씨알=민중이라는 민중주의의 현실적 이념들이었다.

네번째로 그의 삶을 변화시킨 정신적 스승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내촌(內村)이었다.

함석헌은 오산고보 재학 때에 유영모를 통해 내촌에 관해서 약간 알고는 있었으나, 내촌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한 학교에 있는 김교신 형이 우찌무라 모임에 나가는 줄을 알게 됐다. 그래 곧 그의 소개로 선생의문하에 가게 되었다(주11)고 그 동기를 분명히 밝히면서, 그러나 내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통한 문서활동에서 절절이 충성된 종으로서의 임무수행처럼 나타나곤 했다.

다섯번째로 그는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의 비폭력, 무저항 해방운 동, 곧 평화사상을 가장 위대한 정신으로 받아들였으며, 간디가 기독교인이 안된 것이 인도가 인도된 것으로 극찬할 정도로 간디를 숭배하였다.

간디 숭배는 그의 1960년대 이후에 이른바 실천하는 양심으로서 그의 사회참여에서 나타나곤 했다.

여섯번째로 그가 받은 영향은 퀘이커(Quaker)이다. 반전사상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귀한 정신이었고, 그것을 그는 기독교의 다른 사상에서, 즉 장로교나 감리교나 기타 교파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퀘이커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버리고 유교회주의로 기울어지는 듯한 후기의 함석헌주의는 바로 제도적 교파 교회인 퀘이커 교단에 참여하면서였다. 무교회주의를 버리느냐 반전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케이커교회를 버리느냐,가 함석헌에게 던져진 시험이었다.

일곱번째로 그는 장준하를 알게 되면서 한국적 사회상황과 사상계의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를 내면서 잘 우는 장준하만큼 소리치며 가슴의 눈물, 머리의 눈물을 쏟곤했다. 대충 이런 사상들이 함석헌을 만든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석헌에 관한 신학적 분석을 그의 정치사회적 관심이나 활동과 직결시켜 연구하는 것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함석헌의 민중운동 자체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무교회주의 운동가로서의 함석헌만을 논할 것이다.

청년기의 함석헌과 1960년대 이후 사회참여에 뛰어든 함석헌은 별도로 연구할 수 있을 만큼 인간 함석헌 자신은 여러번 변신했고 그때마다 새롭게 탈바꿈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에 관한 전기적 연구를 또 다른 연구의 과제로 남겨놓을 수 밖에 없다.

 

Ⅲ.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내촌감삼의 영향을 깊이 받은 내촌 문하의 조선 유학생 6명이 1927년 7월 1일 부터 창간한 성서조선에 단편적 글들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체로 아주 짧으나 당시로 서는 아주 어려운 함축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때로는 은유적 화법으로 글을 이어가는 작가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필치는 조선 기독교의 부정적 측면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1930년 12월 성서조선(제23호)에 발표한 참 구세주란 그의 글은 2면에 불과한 짧은 논단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명백한 무교회주의 사상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 글에서 함석헌이 말하려는 저의는 예수 그리스 도의 구주성이 현실적, 일시적 구주됨이 아니요, 영원적, 영적 구주됨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정 한예수, 참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나 헌신은 어떤 형태의 형식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날의 제도적 교회는 무용(無用)함을 역설하려는 것이었다. 더욱이 1930년대라면 이용도를 비롯하여 여러 부흥사들이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며 열과 성을 다해 집회를 인도하며 문자 그대로 신앙부흥의 열기가 드높았던 때요, 많은 조선 기독교 신자들이 뜨거운 성령 강림을 체험했던 조선 신앙부흥의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을 때인데, 이 때 그는 과감히 이렇게 외쳤다.

"기독교의 기(旗)를 세워 만인(萬人)을 모으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의(本意)에 합한 것일까. 그리스도는 교회당의 문을 넓이는 것을 보고 칭친할가. 음악연주를 하여서 전도를 하는 것을 과연 영리한 일이라고 할가. 재단법인을 조 직하야 기초를 든든케하려 노력함을 상줄가. 연합회를 조직하고 영육병진(靈肉進)하는 교화운동(敎化運動)을 니 르키려함을 아름답게 볼가. 도대체, 우리가 손목을 잇끌어 교회당에 자리를 채우려함을허락할가."(주22)

교회의 본래 기능에 대한 이러한 강한 회의 속에는 만인구원을 외치며 어느 누구나주께 나오라 어서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고 외치며 만인을 모으려는 기성 교회의 전도와 선교를 부정하는 교회무용(敎會無用)사상이 깊숙이 깔려있다.

교회무용론을 이토록 강하게 주장하면서 함석헌은 교회주의(敎會主義)에 대한 비판을여러 측면에서 시도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주장이다.(주13)

2) 교회라는 일 단체의 도덕적 세력에 의하야 사회구제를 하자는 피상적인 생각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빈다. 여기 현대교회의 바리새적위선이 들어있다.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이다.(주14)

3) 사회적 필연성의 소이로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려 함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이다.(주15)

4) 교회의 주장으로 하면 신앙이란 복종이다. 교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성경을 정해(正解)할 수도 없고 합당한 생활을 할 수도 없다. 교회의 의견으로 하면 신앙은 공포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주16)

5) 영적인 진리에 직접 접하는 사도시대에 있어서 의식(儀式)이라 말할만 한 것은 별로 없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이 있었으나 보다 상징적 의미로 할 뿐이오 의식 그 자체 안에 무슨 효과가 있다는 사상은 없었다. 그런 것이 조직이 점점 복잡하여감을 따라 단순했던 의식에 종종 마법(魔法)적 의미가 붙게되었다. 세례의 물 그것 안에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고 축복 후의 떡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이 된다고 하는 등이다. 지금보면 분명히 미신 이지만.(주17)

6) 무교회주의자로 하여금 개성의 존엄을 새로히 부르짖게 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오 교회라는 물질적 권위 하에 인간을 굴복시키라는 교회주의 다교권에 반대하는 이유로 무교회주의를 개인주의라 하는 것은 교회를 가지고 생명인 사랑에 의한 단체로 알지 않고 권력에 의하 지배관계의 단체인 것처럼 오해하는 인간주의에서 나온 말이다.(주18)

이상의 무교회주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 본질규정은 교회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통해서 더욱 부각되었으며, 함석헌 자신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강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교회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과 동시에 무교회주의에 대한 명료한 입장 표명이다. 함석헌은 교회란 마치 악마적 권위로서 신앙인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금전적인 것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적인 미신적 의례를 신성한 효험과 신의 본체로서 믿도록 강요하고 계속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분석하면서, 이런 이유로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그의 동료였던 김교신(金敎臣)의 무교회주의 사상보다 더 강도 높은 것이며, 더 철저한 교회증오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교회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도를 하고, 신앙향상의 한 방도로서 부흥집회를 갖는 것 자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더욱 위험스러운 사상은 삼위일체론이나 세례,성찬까지도 미신으로 보는 매우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무교회신앙과 조선이란 논단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무교회신앙이란 하나님만을 알자는 신앙이라고 즉 바울이 가르치고 루터가 주장한 그대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신앙 그대로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본래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뿐입니다...하여간 무교회 신자라는 명칭을 듣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이 어찌되었던지 그리스도론이 어찌되었던지 거기 대하야 별로 깊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세례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축도에 의하야 성찬떡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살이 되며 그것을 먹어서야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다는 말은 분명한 미신으로 생각합니다.(주19)

위의 주장들은 대체로 그의 무교회주의론의 요지들이며, 그의 주장의 핵심들이다. 간추려보면, 1) 만인을 교회당에 모으는 것, 즉 교회주의가 그리스도의 본의는 아니다.

2) 무교회주의는 역사적이다.

3) 무교회주의는 교권에 반대한다.

4)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다.

5) 조직적 교회는 비그리스도적이다.

6) 누구나 성경정해를 할 수 있다.

7) 삼위일체론, 세례, 성찬 등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의식은 미신이다.

8) 신앙은 오직 하나뿐이다.

 

Ⅳ.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비반

위에서 간추려 본 함석헌의 이러한 30대 청장년기의 패기 넘친 교회 비판은 어떻게보면 별로 반론할 가치가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고, 신학에 대한 전문 지식도 갖고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촌을 통해서 비뚤어진 기독교 이해를 수용하는 잘못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주 예리한 신학자들 마저도 신학논쟁에 쉽게 빠져들기를 꺼릴 정도로 해석의 다양성과 이해 측면의 차이로 오 는 수용의 가능성에 큰 쟁점이 되곤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그가 감히 필을 휘둘렀던 용기(?), 즉 그가 교회론과 심지어 기독교의 핵심 교회에 속하는 삼위일체론이나, 세례 및 성찬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신앙론에 관해서 왈가왈부 했던 것 그 자체가 매우 용기있는 만용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신학지식의 깊이나 넓이, 혹은 그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전문적 이해지평에 관하여 계속 논증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이해가 옳으냐 그릇된 것이냐에 관하여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것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물질적 권위 집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선남선녀(善男善女)의 주머니를 엿보는' 인간주의도 아니다.

함석헌의 교회 이해는 너무 부정적이며, 마치 유물론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보다도 더욱 맹렬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종교발생론과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음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함석헌 자신은 다음과 같이 주 장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승려들은 그 위에 현란한 법의를 덮으며, 그 앞에 향을 피워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을 하는 줄로 아나 그는 인간주의밖에 안된다. 거기 의하야 그는 일개 예술적 도취욕의 만족을 얻던지, 그렇지 않으면 관료적 자만감을 느끼던지, 또 그렇지 않으면 황홀하는 선남선녀의 주머니를 엿보는 것밖에 없다."(주20)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기독 교회의 성직자들은 예술적 도취욕에 젖은 미학적 신비주의자들이거나, 지배충동에 젖은 권력주의자들이거나 교회를 찾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헌금해야한다는 구실로 기만적으로 재물을 빼앗는 고등수법의 약탈자일 뿐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의 기독교 이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기독교 개혁주의자도 아니고, 혁신적 교회주의자도 아니며, 철저히 교회무용론자요, 성직혐오자였다는 점을 발견할수 있다. 그는 교회가 제도적이라고 하면서 부정하였고,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이 미신적이라고 역설하면서 부정하였다. 또한 성직은 심미적 황홀경, 관료적 자만감 혹은 경제적 수탈 등의 목적 때문에 생겨난 인간주의라고 하면서 부정하였고, 전도는 그리스도의 본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유일하게 오직 무교회주의야말로 이론적이 아니고, 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며 역설하였 다.(주21) 과연 기독교 없는 무교회주의란 가능할까? 그러한 무교회주의가 과연 기독교적일까?

 

Ⅴ. 함석헌의 '교회론'에 대한 분석적 비판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성서조선(제86호, 제87호)에 발표한 그의 논단 무교회를 8가지로 분석하면 서 비판을 시도해 보도록 하자.

1) 교회절대필요론자와 교회무용론자는 다같이 한 성경과 한 역사에 자기네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주22)고 역설함으로써 교회무용론이 마치 성서적으로 증명될 수있는 것으로-성서적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주장했다.

2)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주장이다23 라고 역설하면서 무교회주의의 역사적 근거, 뿌리, 근원을 강조하였으나, 무교회신앙과 조선이란 글에서는 무교회 신자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황야에 떨어진 마적의 아들같은 것입니다(주24)라고 하는 혈통으로 상징된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 주장도 아니고, 오직 뿌리없는 주장임을 암시하는 자기 모순을 갖고 있다.

3) 교회 안에 있는 인간주의,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한다.(주25) 무교회주의는 바로 이러한 교회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면서 교회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무교회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4) 그리스도만으로 서는 것이 참 교회다. 복잡한 조직이 필요치 않다. 조직은 인간주의의 표현이다(주26)라고 갈파하고 있는 함석헌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항상 2명 이상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상부상조하며 공존한다는 사회학의 기초적 이론이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조직 권면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이는 교회, 즉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려 함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주26)는 과감한 교회부정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사도행전 1장 12절~26절까지의 내용 가운데 모이는 교회와 직제의 선출방식(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 대신 바사바의 요셉과 맛디아 두명을 놓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열한 사도에 가입함)을 분명히 알지 못했던 오류에서 온 주장이다.

5) 천국에는 계단을 집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오 단체로 활인하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안내자의 말을 듣고 단거름에 도약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쉬운 계단이 있는 것 같이 단체로 가면 값싼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성전(聖殿)을 변하야 상점을 만드는 교권자의 일이다(주28)라고 교회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있는 함석헌은 여기에서 이미 그 스스로도 모르게 가톨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가고 있는 좌충우돌의 오직 도전만을 내세우고 있다. 면죄부 판매에 대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비판과 95개조의 논박을 연상시키는 함석헌의 소리는 과연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소리며, 무엇을 하자는 주장인가 무교회주의들이 모여서 성서 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두세명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가 되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무교회주의자들은 논리상의 모순에 빠져 있다. 교회가 천국행의 단체 할인을 주장했다는 그의 비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교회주의자들이 천국행의 단체할인자들, 즉 기성교회들에서는 이단으로 정리될 뿐이다. 요즈음은 사이비 기독교 이단종파들(사실 이들은 기독교로 보기 어렵다)이 루터를 격분시킨 면죄부신앙식으로 구원받는 단체할인 혜택과 유사한, 어이없는 주장을 하며 순진하고 소박한 신자들을 우롱하는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정통 기독교의 본래 교리도 아니요, 교회들이 모두 이런 것도 아니다.

6)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는 교회성을 부정하는 점에서 오히려 그가 교회주의는 개인주의다라고 신랄하게 비판 했던 바로 그런 개인주의가 아니겠는가. 그는 분명히 논리상 혹은 이론상으로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그의 글에서 나 타내고 있다. 그가 그렇게 이지적이며, 스스로 기독교,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등을 비롯하여, 톨스토이, 트루 게니에프, 이브센, 괴에테, 실러, 로망 롤랑, 윌리엄 블레이크, 니이체, 베르그송, 그리고 H.G. 웰즈,(주29) 타고오르,(주30) 카알라일,(주31) 라스키, 슈바이쩌,(주32) 그뿐만 아니라 동경사범에서 역사, 도덕, 교육을 전공하 였던 그는 역사에서는 그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주33)(그러나 그가 역사학을 전공했고, 특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점이나, 그의 사상에서 민중사상, 평민주의 등등을 연관시켜 모든 사상의 맥을 찾아보면 그는 공산주의를 비교적 많이 공부한 것이 틀림없다. 그 러나 그가 60년대에 글을 쓰면서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했다고 할 수 없던 한국의 사상적 분위기는 그가 단 몇줄의, 그것도 매우 용기있는 솔직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은 그 표현 이상의 마르크스.레닌사상 학습을 추론케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간디,(주34) 셀리,(주35) 크롬웰, 밀턴, 오코넬,워어즈워어드, 브라우닝, 버나드 쇼오,(주36) 부 커, 워싱톤,(주37) 그 외에도 루터나, 룻소, 페스탈로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류의 지성인들의 사상을 넘겨 받은 이성적, 이지적, 사상적 함석헌이 신비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을 리 없으나, 그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고로 신비 주의의 기초적 증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가운데 신비주의적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글에서 직접 그 사실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그는 예수의 종교는 원격(遠隔)의 종교가 아니요 면접(面接)의 종교이며, 신비의 종교가 아니요 평이의 종교다. 사람을 하나님에 접근시키는 것일수록, 진리를 수식없이간명하게 들여내는 것일수록 진리(주38)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신비주의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감정이며,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가운데는 신앙을 그리스도와의 합일에서 설명하려는 이들도 있는데 함석헌이 교회 제도를 거부하고, 신앙, 성레, 교의, 조직 등과 전승 및 고백 까지도 부정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무교회주의로 역설한다. 한마디로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지주의 적 신비주의 혹은 주지주의적 신비주의 색채가 너무 짙다. 물론 그는 이렇게 불려지는 것을 비판할 것이다. 그가 에수의 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니요라고 못박아 한계를 그은 것으로 보아 그는 신비주의를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자적 표현과 글줄들 사이의 맥락적 해석에서 풍기는 주의는 무교회주의의 일면이 반가톨릭주의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신비주의와 비슷한 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7) 기독교는 개성을 몰각(沒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높이는 일이다(주39) 교회는 개성우에 군림할 것이 아니오 개성 안에 있을 것이오. 개성을 통해서 있을 것이다.(주40) 그는 교회주의를 인간주의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매도했고,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무교회주의는 개인주의처럼 외견상 보여도 실질 적으로 볼 때 틀리다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개성과 개인주의의 주체인 개성을 어떻게 구별하려 하는 것이며, 만일 억지로 구별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개성없는 개인주의나, 개성의 기질적 형성체를 개성주의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보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는 오직 말장난을 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무교회주의가 개 인의이신득구를 주장하려 했다면, 그리고 교회외 구원을 그 본질로 철저히 주장하려 한다면신앙은 개인적이라는 점을 역설하며 신앙의 개인주의를 역설하는 것이 오히려 논리의 일관성도 있지 않은가 개인주의가 잘못되고 나쁜 주의라는 전제가 그에게 개인주의란말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게 한 점인데,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종종 인간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하여 사용할 뿐만 아니라 인본주의가 인간주의인지 구별도 없이 사용하곤 한다.

8)그에 따르면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주의를 배척한다. 거룩한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오 그 지상의 투영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들어있는 교회주의를 미워한다. 교회는 그리 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발생할 것이오 만들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교회 본위로 인간의 노력으로 교회를 만들자는 주의가 들어있는 고로 그것을 미워한다. 그리고 교회주의를 미워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자신을 부정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안에 교회주의에 고정하려는 선천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교회주의는 인간부정 주의다 무교회주의는 부정(否定)주의다. 언제든지 부정이자는 주의다. 무교회 신앙은 영원한 체계를 이루 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거룩한 교회의 지상에의 투영을 인정하며 교회를 인정한 점으로 보면 그의 무교회주의 이론은 모순됨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함석헌의 논리는 성서적 의미에서 자기부정의 의미를 함축하고 역설법을 통해 그의 무교회주의와 그 신앙양태를 그려내려 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려 한다. 하지만 그가 교회주의가 인간의 선천적 경향(apriorische Anlage)이라고 솔직히 인정한 점만을 가지고도 무교회주의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주의를 부정하고 자기자신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교회주의는 진정 그것이 무교회주의이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신의 선천적 경향을 이끌어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선천적 경향이 곧 인간의 본래성(Ursprunglichkeit des Menschen)인한 인간은 항상 긍정적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Ⅵ. 무교회주의에서 종교상대주의로

만일 그의 명제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이해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의 자기자신 부정론(自己自身否定論)은 문자 그 대로 언제든지 부정적이자는 주의에 빠져 고차원에서 표출된 이지적 허무주의 (intellektueller Nihilismus)이거나 현실주의적 염세주의 (realistischer Pessimismus)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부정하기 위한 부정주의로서의 무교회주의는 종국엔 기독교 자체 마저도 부정하게 되며, 결국 모든 종교는 동일한 도덕률이나 세계관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유일주의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및 종교다원주의로 발전되어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하여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한다.

나는 학교(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 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에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주42)

성서조선 사건(1942)으로 서울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경전을 조금 읽었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주43) 피란 중(1950년 6.25 전쟁 때)에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주44) 나는 지금 (1964년)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각이다.(주45) 1936년 4월 성서조선에서 무교회주의는 부정주의라고 선언한 다음,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에 하나라고 진술한 것은 그의 종교관을 솔직히 수면 위에 또 올려 보여준 솔직한 신앙고백이요, 믿음 자체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는 김교신이 철저히 기독교 울타리안에서, 즉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그리고 조선을 성서 우에 설립하려던 철저히 기독교 중심주의인데 반하여(주46), (함석헌)은 종교상대주의적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종교상대주의 이론에서 볼 때 그의 무교회주의는 실상인즉 무종교주의로 명칭이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교회주의가 교회의 의식, 제도를 부정하면서 무교회주의를 표방했던 논리로 볼 때, 모든 종교는 전통, 성직, 의식, 제도 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벗어난 무종교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사상의 진행과정은 교회주의(6,7세 때)->무교회주의(24,5세 때)->기독교 유일 종교성 부정(24.5세 때, 고백은 1964년)->종교상대주의(1942년 이후)->무종교주의(1964년 이후)->탈종교주의(1964년 이 후)->도덕종교주의(1964년 이후)로 진행해 가는 과정을 갖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 주의(主 義)론의 이전과정의 연대가 그의 새로운 종교사상의 출현시기와 동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전기에 표현된 것을 기초로 하여 산출한 것이므로 그가 각 종교주의를 갖게 된 시기는 그의 전기에 발표되기 휠씬 이전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종합적 사상을 통해서 추리해볼 때, 이런 진행과정의 궤도로 갈 경우 틀림없이 탈종교주의 선언이나 무신론선언으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소지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왜 당신은 무교회주의자로나마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살아 왔는가? 모든 종교가 하나라면 특정 종교에 머물러 있다는것 자체가 교조주의적 신앙에 빠진 특정 종교 절대주의 자일진대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는 그의 삶으로 표현했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는 말만이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라면 모든 종교의 교리상이나 제도상의 종파들은 하나같이 같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어느 종교의 어느 종파든지 이단일 수 없고, 모두 정통이요, 법통이요, 전통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교회주의는 배척하는가 이단은 없다고 한다면 모든 종교는 정통이요, 기독교의 모든 종파도 모두 정통인한, 기독교의 이단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여 인정했다. 그것이 그의 이 하나의 세계(그의 자서 전 가운데 소제목)선언은 결국 그가 어떻게 이해했든지 간에 그를 이단으로 비판했으며, 그가 기독교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거의 울분에 치를 떨며 욕설에 가까운 강한 어조로 교회의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고 있다.

교사, 목사, 신부치고 고린내 아니 나는 것 있던가 사범엘 들어가고 나서야 그것을 느껴서 이런 데를 왜 왔나 후회했다. 대학에 가서 자루없는 칼을 받아 가지고 잘못해 몸에 상처를 내고 사람을 더러 잡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번 자유로운 연구를 해보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다. 대학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사람을 해하는 것이 칼로 죽이는 거라면 교사, 목사, 신부가 죽이는 것은 목아지를 비틀음이요, 입을 막고 코를 막아 숨이 차서 죽게 함이 요, 가스로 독살하는 셈이다. 그 노릇을 하다니! 내가 죽을 때 후손을 위해 유언하는 일이 있다면, 백대 천대에 경찰관 노릇은 애여 해먹지 말라 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만, 거기 한 마디를 덧붙일 여유가 있다면, 신부, 목 사, 교사를 거기 넣을 것이다.

 

Ⅶ. 함석헌과 칼 마르크스

성서조선의 공헌을 말한다면, 일제치하의 어려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건 속에서도 조선인의 손으로 15년 동안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연구를 위한 순수 신학전문지로서의 성서조선은 한국 기독교의 신학 발전에는 거의 공헌한 바 없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강한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성직제도 반대, 성찬예식 반대, 성서의 정경성 반대, 일본식으로 토착화하려는 내촌적 무교회주의 주장, 무교회 신앙형태 고수와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 극단적 부정주의, 성서해석자유권 주장, 개성주의 반대, 종교동일동질론 등을 내세웠을 때 무교회주의가 정상적인 기독교신학의 한 신학이론이나 주의로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기성 교회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무교회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심지어 그들과의 접촉도 원치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무교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성서조선의 호수가 거듭할수록 극단화, 과격화해가면서 초창기에는 가톨릭주의적 교회 이해를 비판하던상황에서(마치 루터의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론에 대한 비판정신처럼,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데까지 발전해 가다가 심지어 함석헌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부정, 즉 무기독교주의로 발전 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와 불교의 동일시(1942년), 그리고 모든 종교는 동일함 (1950년)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종교주의로 옮겨갔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맨 처음의 교회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하나는 예수의 인격적인 생명의 힘에서요, 또 하나는 밖에 대해서 자기네가 절대로 힘없음을 스스로 느낀데서 일 것이다.

위의 진술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힘없음(약함) 때문에 인간이 초자연적 위력, 즉 종교를 창출했다는 주장이다.

소년기에(이미 6,7세 때부터 기독교 접함) 유신론자였던 함석헌이 말년에 철저한무신론으로 변신한 것은 이른바 무신론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빵이냐? 말씀이냐? 란 글에서 분명히 선언되었다. 그의 무신론 선언서같은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들은 툭하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 이니라 하는 말을 한다. 이 말 때문에 허다한 사람이 육신으로 굶어죽고 정신으로도 굶어죽는다. 그 말씀은 성경책도 신부, 목사의 설교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종교의 경전, 종교가의 설교로 안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신부들이요, 목사들이다. 그들은 이것이 참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빵으로는 못산다고 입에 침을 말려 가면서 책과 말을 순진한 농사군에게 주고는 그 손에서 빵을 빼앗아, 돌아서서는 제가 먹는다 빵이 정말 먹고 사는 것이 못된다면 저는 왜 먹었나? 밥 아니 먹고 산 종교가가 이날껏 한 사람이나 있었나? 성경만 보고 산 신자가 이날껏 하나이나 있었나?](주50)

그의 선언의 첫째 명제는 결국 성직계급이 인민 대중을 종교의 이름을 팔아 착취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을 마르크스-엥겔스의 종교생성과 소멸의 5단계설과 거의 유사한 주장을 하고있다. 변중법적 유뮬론에서의 종교생성 제2단계에서 종교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배자의 권력을 보강하기 위한 수 단이었으며, 따라서 종교는 인민 대중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이미 지옥과 천당이라는 내세의 두 세계 개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종교라는 미신적-망상적 도구를 내세워 억압, 착취, 지배를 했다고 한다(주51)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셋째 단계에서 종교는 성직자들의 기만의 결과(Folge priesterlichen Betrugs)로 보기도 한다.(주52) 무교회주의에서 무종교주의로, 그리고 종국에는 무신론으로 변신한 함석헌의 철저한 무신론적 웅변은 거의 흥분된 감정이 섞여있다. 그는 계속하여,예수는 말을 입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 했다. 그래서 자기 말이란 말을 내살을 먹고 내피를 마셔라 했다. 그가 피땀흘려 한 말씀을 몇주일 교회에 가고, 몇해 신학교에 건들건들 다니고는 제거나 되는 듯 팔아 먹으려는 놈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제 딴으로 조금 얻은 것 있어 그것을 증거하고 그 때문에 참이 뭔지 아는 민중 이 조금 거기 귀기울이는 것 보면 제 편에서 저건 가짜라고 큰소리치는 놈들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내 모르지만(주53), 설혹 있다해도 배꼽이 떨어져서부터 황토 밑에 들어가는 날까지, 언제 한번 그 흙을 만져 본 일도 없고, 일생 70년 하루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먹는 밥을, 그 벼를 언제 어떻게 심으며 그 쌀에 물을 얼마나 두는지 한번 알아도 보지 않는 놈은, 그 천당에 절대 가지 못할 것이다. 기적기적, 권능권능 하지만 흙에서 밥을만들어내 는 이거야 말로 권능있는 기적 아닌가? (주54) 이러한 기적, 즉 그가 주장하는 실천적 생활상태에서 성취되는 삶의 정황의 이루어지면 종교도 없어질 것이다. 아니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종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사랑의 원리인 줄을 믿듯이, 나는 내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보편적.종교적인 것인 줄 믿는다."(주55)

이 말은 유물론자가 물질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유물론자의 보편적.종교적인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좀더 명료하게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주56)라고 강조하여 단정하였다. 흙에서 밥을 만들어 내는 것을 전능있는 기적으로 믿는 자는 과학적 유물론을 종교로 신봉하는 신자가 아닐까? 위의 문맥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 이해, 즉 성직계급에 대한 이해는 1)성직자들은민중을 착취하는 불로계급이 며, 2)성자들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민중을 기만하고 속이면서 철저히 배타적인 계급이며, 3)그 스스로는 내세가 진정 있는가 의심을 하는 회의주의에 빠져있으나 민중착취의 수단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강조하며, 4)종교에서의 권능이나 기적이란 없고 오직 있다면 물질적 형성, 식물의 배아와 결실현상이 기적일 뿐이라는 내용으로 약술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유물론적 종교비판과 동일하다.

함석헌은 위에서 개관해 보았듯이, 공산주의의 종교의 생성과 소멸의 5단계설과 거의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종교생성과 소멸의 5단계설에 의하면,(주57)

1)인간은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그리고 환상 (Phantasie)에 따라 초자연적 위력을 창출해냈다.

2)종교는 지배자의 권력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인민대중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즉, 종교라는 미신적-망상적 도구를 내세워 억압, 착취, 지배를 했다.

3)종교는 성직자들의 기만의 결과(Folge Priesterliche Betrugs) 이다.

4)종교의 도움으로 착취계급은 노동자들의 현세적 고통은 천국에서 보상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기만하며 지배와 착취의 정당화를 시도했다.

5)인간의 실천적인 생활상태가 자연과의 이성적인 관계들을 늘 철저하게 제시하는 한 이 세상에서 종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신앙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주58) 하나님이 나의 첫 신앙이었고, 이성(理性)이 나의 두번째 신앙이었으며, 인간이 나의 세번째요 마지막 신앙이다 (Gott war mein erster Glaube, die Vernunft mein zweiter, der Mensch mein dritter und letzter).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비판의 주형(Matrix)을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적 종교비판에 적용시켜 보면 똑같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함석헌의 고백형식을 빌어 표현으로 꾸며보자.

'하나님이 나의 첫 신앙이었고, 세계종교, 문학, 철학, 사상 등의 지성(知性)이 나의 두번째 신앙이었으며, 씨알이 나의 세번째요 마지막 신앙이다' 그가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첫 신앙은 그가 여섯이나 일곱 됐을 때,(주59) 그리고 남강, 도산, 조만식의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그의 신앙으로 수용한 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주60) 두번째 신앙은 지성주의였는데, 종종 그는 지성주의를 강조하다가 때로는 지성비판을 냉철히 하곤 한다. 그러나 지성이 그의 두번째 신앙이었음은 그의 전생애가 입증한다.

세번째 신앙은 씨알 사상에 대한 그의 사회사상적, 솔직히 표현하면 민중주의적 신념, 혹은 이념에 대한 신념(= 신앙)이다. 마르크스가 그의 세번째 신앙이라고 표현한 인간(=민중)이 함석헌에게서는 씨알(=민중)인 것이다.

함석헌은 씨알을 민중, 평민, 천민, 머슴, 종, 억눌린자,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아는 자61라고 정의한다. 이런 분명한 개념정의적 맥락에서 이해할 때 씨알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 그의 정의를 좀더 진지하게 경청해보면 이러한 이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도록 하 자.

" 이 나라의 민중아, 너는 씨알이지.

여물어 떨어져 땅에 들어가 썩는 씨알이지.

모든 뿌리, 모든 줄기, 모든 가지, 모든 잎, 모든 꽃이 네게서 나갔건만 하나도 너를 받드는 놈은 없지.

모든 꽃, 모든 잎, 모든 가지, 모든 줄기, 모든 뿌리가 너 하나를 위해 있건만, 너 될대로 되는 날 곧 떨어져 땅속 으로 들어가 숨지.

너는 참 섬구나.

하지만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계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설음은 네 허리를 묶는 띠요, 네 머리에 쓰이는 관이다.

너는 작지만 씨알이다." (주62)

그리고 1970년 4월 함석헌은 비장한 마음으로 선언하기를 나는 민족주의는 아닙니다. 세계주의입니다(주63) 라는 신념을 밝혔다.

필자는 여기에서 함석헌이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의 틀과 구조가 마르크스 레닌사상과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진술했듯이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그는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정도 깊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연구했는지는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알대로 알아 보려 애썼다.(주64)

우리의 주장 요지는 1) 함석헌이 교회주의적 기독교 신자에서, 2) 무교회주의로 전향하고, 3) 그후 몇차례의 변신을 거쳐 종교상대주의에 빠졌으며, 4) 그의 종교관은 말년에 가면서 종교다윈주의와 종교동일주의의 색채(=종교 세계주의 )를 가미한 다음, 5) 결국 탈종교주의적 혹은 무종교주의적으로 발전했으며, 6)그의 종교이해가 마르크스 레닌의 종교생성-소멸이론과 우연히도(우연인지 의도적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음) 일치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려는데 있다. 우리의 관심은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분석-비판-평가하려는데 있으며, 그의 씨알주의로 볼 수 있는 사회사상, 즉 민중론은 여기에서 배제하였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방대한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주제와는 직접 깊은 관계가 없다.

 

Ⅷ. 글맺음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무교회주의의 원조격인 인물들, 김교신과 함석헌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해 보았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무교회주의의 이론과 사상이 여러 차례의 상황 조건과 사상의 변천을 거쳐 탈종교주의적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종교사상비판과 거의 동일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우리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 은 신자들이 그들의 착취계급인 성직자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그리고 그들의 본질이 그래서 주체로서의 인격체인 씨알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무종교적-비종교적 사상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틸리히의 표현대로 모든 문화의 본 질이 종교라는 사상에서 볼 때 종교없는 씨알은 존재가치를 물(物), 빵, 밥에서만 찾자는 유물론이 아닌가 기독교가 말씀의 공동체인가 밥의 공동체인가 이 문제도 한국신학사상의 한 흐름에서 분석-평가되어야 한다. 무교회주 의의 한국 민중신학, 물(物)신학, 저항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씨알신학이기 때문이다.

 

[주(註)]

1. 함석헌, 나의 자서전: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서울:삼중당, 1964), p.39. 이 책을 이후로는 자서전으로 표기함

2. 자서전, p. 73.

3. 자서전, p. 76.

4. 자서전, p. 78.

5. 자서전, pp. 77-78.

6. 자서전, p. 115.

7. 자서전, p. 122.

8. 함석헌, 서풍의 노래(서울:한길사, 1983), p. 361.

9. 함석헌은 남강을 참되게 산 표본으로 생각하며, 추앙했다.

10. 자서전, pp. 154-158.

11. 자서전, p. 162.

12. 함석헌, 참구세주, 성서조선 제23호(1930. 12), p. 4.

13. 함석헌, 무교회(上), 성서조선 제86호(1936. 3), p. 4.

14. Ibid., p. 6.

15. Ibid., p. 7.

16. 함석헌, 무교회(下), 성서조선 제87호(1936.4), p. 3.

17. Ibid., p. 5.

18. Ibid., p. 7.

19. 함석헌, 무교회신앙과 조선, 성서조선 제85호(1936. 2), p. 18.

20. 성서조선 제86호, p. 6.

21. 성서조선 제87호, p. 4.

22. Ibid., p. 3.

23. Ibid., p. 4.

24. 성서조선 제85호, p. 23.

25. 성서조선 제86호, p. 5.

26. Ibid., p. 6.

27. Cf. Ibid., p. 6.

28. 성서조선, 제87호, p. 4.

29. 자서전, p. 158.

30. 자서전, p. 165.

31. 자서전, p. 166.

32. 자서전, p. 166.

33. 자서전, p. 166.

34. 자서전, p. 167.

35. 자서전, pp. 11ff.

36. 자서전, p. 19.

37. 자서전, pp. 26ff.

38. 성서조선, 제87호, p. 6.

39. Ibid., p. 7.

40. Ibid., p. 7.

41. Ibid., p. 9.

42. 자서전, p. 165.

43. 자서전, p. 166.

44. 자서전, p. 167.

45. 자서전, p. 167.

46. 김교신, 성서조선의 해(解) 성서조선 제75호, 권두언.

47. 자서전, p. 168.

48. 자서전, p. 174.

49. 자서전, p. 295.

50. 자서전, pp. 228-229.

51. 한숭홍, 문화종교학(서울:장신대 출판부, 1987), p. 56.

52. Ibid., p. 57.

53. 자서전, p. 228, 내 믿음엔 천당 지옥없다.54. 자서전, pp. 230-231.

55.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전집1)(서울:한길사, 1986), p. 41.

56. Ibid., p. 41.

57. 한숭홍, 문화종교학, p. 55.

58. Ibid., p. 59.

59. 자서전, p. 147.

60. 자서전, p. 118.

61. 함석헌, 씨알의 참 뜻, NCC 신학연구위원회편, 민중과 한국신학(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7), p. 14.

62. 자서전, p. 255.

63. 민중과 한국신학, p. 13. 씨알의 참 뜻은 함석헌이 1970년 4월에 발표하였다.

64. 자서전, p.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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