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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구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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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근호 목사

 

 

한글을 깨우친 사람이 아마 못 읽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다 읽었다 치자.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의의가 남아 있어야 한다. 한쪽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성경을 다 포괄하는 한 사상으로 남아야 한다. 정말 이점이 중요하다.

구약 성경은 모두 다 이스라엘이라는 고대 국가의 민족사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의 고대사를 왜 20C 후반을 사는 한국인이 왜 알아야 하는가?

마태복음 8:29-30에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나이까" 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되묻고 있는 마귀의 말을 곰곰이 새겨보자. 과연 이 한국 민족이 멀리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메시야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세상에 모든 민족이 신을 신봉하고 있는 마당에 왜 하필이면 단군의 자손들이 믿는 신을 버리고 멀리서 살고 있는 히브리인의 신만을 참된 신으로 모셔야 하는가? 그것은, 구약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이스라엘 빼놓고서는 나머지 모든 나라는 참된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족속에 속한다는 것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예레미야 10:25 상)

참으로 논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이스라엘에게만 제공된, 소위 '언약'이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계속 펼쳐 나가는 것이 구약 성경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예레미야 11:3)

여기서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대목을 한평생 동안 놓치지 않고 유념해 봐야 한다. 마치 신약에 있어 고린도전서 16장의 말씀과 같이 상호 비교할 만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교회를 오래 다닌 자나 처음 온 자나,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에 대한 정립된 개념과 그 동안 풍월을 준해서 '언약'이라는 것이 이 중심 개념을 빼먹고 교회를 다닌다. 기껏해야 양심에 의한 윤리, 도덕이나 혹은 종교 테크닉 발휘나 교회에 대한 열성 있는 봉사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째로 보면 구원은 그런 것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오직 언약을 모르면 저주를 받고 반대로 언약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

과연 '언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성경 전체를 통해서 확인해 보자.

첫째, 에덴 동산에서부터 노아 시절까지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의 주체는 인간이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이 회복이라는 것이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그 자리에다 건설하고자 하신다. 인간 나라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죄악 된 인간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이 약속에 의하면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패가 갈리게 됨을 뜻하고 그리고 이 두 패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며 동시에 치고 침을 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한쪽의 여자의 후손들이고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들이다. 이미 역사의 질이란 이처럼 고정된 것이다. 어중간히 모호한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은 각자 별개의 두목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목들로 인해서 중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은, 반드시 누구나 적이 있게 마련이며 그리고 그 적들로부터 침범을 당하는 경우와 그리고 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는, 뱀의 후손은 어떻게 생겨나며 여자의 후손은 어떤 식으로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고수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뱀의 후손이 된다(창세기 3:22). 이들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이미 챙기고 있는 선과 악의 윤리적 기초 위에서 모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다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영생이 없다. 하나님이 이들에게서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인간들이 지상에서 아무리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종교 행사를 벌린다 할지라도 그 노력으로 차단된 길이 열리지 않는다. 즉 영생이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와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우리들이 달라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16)

이로서 영생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으니깐 소위 '종교', 또는 '종교 행위'들이 인류들의 생의 한 복판에서 확산되어 간다. 영생을 준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지만 너무나 허전하니깐 마치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시 선악 지혜를 기준으로 해서 발생되는 종교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축복에 차등이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런 법칙은 하나님의 일방적 긍휼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마치 헌 부대에 헌 술을 담는 식이다.

그러면 영생은 누구에게 주시는가? 어떻게 주시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 행위'가 지상에 떨어진다. 소위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의 등장이다. 누구든지 저를 축복하는 경우에만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선택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들의 특수한 선택됨을 부인하면 영생도 축복도 어림없다.

 

둘째,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선택받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택성을 가지고 세상을 이미 지배하고 있는 악을 징벌하려 나선다. 하나님이 약속을 통해 주신 의로서, 인간들이 만들어 쥐고 있는 의를 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주장하는 의란 고작 자기의 선악 지혜에 기초해서 축적한 어설픈 의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즉 종교적인 열성과 윤리, 도덕적으로 생산될 수 있다고 믿는 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인간들이 만드는 의도 아니요, 율법으로 주어지는 의도 아니다. 오직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담보로 얻어지는 의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차등이 없고 차이가 나지 않는 의이다. '대신 죽은 자'의 공적만이 밑바탕을 차지해서 주어지는 의이기에 이 의(義)를 정말 받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종교적 공로나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만약 타인과의 의나 복에 차별성을 말한다면 이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종사하는 종교인에 불과하지 결코 신자는 못된다. 왜냐하면 '대신 죽은 자'만을(오직 이 분만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죽여 제사지내려 한다. 왜냐하면 장차 메시아는 이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대신 죽어야 될 분임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너희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복음8:56)

이삭 이후에도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야곱이다. 야곱은 그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처음에 자기 힘을 의지했고 자신의 속임수까지 동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의 노력과 공로의 방법은 하나님의 싸움 방법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싸움 방법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마저 이기려고 덤벼든 꼴이 되고 말았다. 즉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여 살려준다. 여기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쟁 방법은 야곱 자신이 사용한 힘에 의존한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는 데서 주어지는 긍휼이 생명을 살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용서라는 것은 누군가 대신 희생물이 되었기에 그 근거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이다. 그 희생을 보여주고자 태어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자기가 뭔가 특별한 사명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자기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희생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성실했고 유혹까지 물리치면서 바르게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신세는 초라해지고 반대로 주위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왜 자기를 그런 쪽으로 사용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요셉의 그런 희생적인 운명은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었다.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그전에 오히려 형제들을 위해 희생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가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 48:16-19)

손을 어긋나게 손자에게 축복하는 그 야곱은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바로 계시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다 들어 있다. 요셉이 총리 대신이 된 것은 결국 야곱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다. 부모와 다른 형제들을 살리는 방식이 기존의 야곱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적인 것이다. 바로 이 방식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가나안 땅에 등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등장되면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의 지배가 4대만에 달성될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

 

이스라엘은 이상한 나라이다. 인간들의 지도자가 필요 없는 나라이다. 제사장의나라이기에 왕이 불필요하다. 제사장이란 하늘에 계신 왕인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꾸 희생 제물만 드리는 자들이다. 바로 이 '희생 제물' 혹은 '대신 죽음'이 유일한 용서의 원리로 통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진 동기는 유월절어린양의 희생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 갇혀 있었을 때에,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아들들은 죽었다가 다시 희생의 피로 되살아난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참된 아들이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모습을 엿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천국 백성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인들도 애굽인도 모두 다 하나님의 저주의 사자를 맞이한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장자만 살아 남았다. 왜 그럴까? 종교적 열성이 애굽인들보다 탁월해서인가? 아니다. 오직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려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이 아닌 잡족들 가운데서 이 언약의 피를 준수한 자도 함께 생명을 얻게된다. 결코 히브리인들이 잘나서 구원한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구원의 약속으로 제시한 대리 희생물만 의존했다. 이로서 하나님은 어떤 특정 혈통을 약속의 자손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약속 안에만 거하는 자를 자기 아들로 삼으신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를 칠 수 있는 속성은 그들이 끝까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정신 안에 놓여 있을 경우뿐이다. 만약 이 정신에서 벗어나서 힘으로 적들을 대결하려고 하면 하나님부터 가만있지 아니한다. 자기 백성이라도 버린다. 왜냐하면 약속(언약) 밖으로 벗어나 있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에는 전쟁, 전쟁의 연속이다. 그들의 적들은 한결같이 여호와하나님의 약속을 비웃는 국가들이다. 그들은 약속 대신 자체적인 힘을 의지하고있다. 즉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면서 정치하는 국가들이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하나님의 공로를 기초로 한다. 이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물로 주어진 것이 증거궤, 즉 법궤이다. 나중에 이 법궤를 중심으로 성전이 약속의 땅에 안착 될 것이다.

 

넷째, 왕이 필요치 않는 나라, 이스라엘

 

세상의 국가는 인간이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이 인간을 다스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신의 나라는 하나님만이 다스리게 된다. 신의 은총만이 이 나라의 헌법이다. 그러나 막상 왕이 없는 체제로 접어들자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즉, 자기 자신이 왕으로 행세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자기 보다 더 힘이 센 적국이 나타나니깐 그 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다. 다시 적이 물러가고 평안해지면 예전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시험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사사기 2:20-23)

정말 그들이 하나님의 공로로 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산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하나님 의도에 대한 관심도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위가 조금만 평안하면 곧장 자기 소견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로보다 자기 식대로 사는데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민족은 인간들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인들은, 저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가 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줄을 모르고….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약속할 때에 분명히 언급하기를, 세계가 다 내게 속해 있다고 하셨다(출애굽기 19:5).

이 점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이다. 막강한 적의 군대 앞에 기가 죽은 것이다.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이 적들을 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쉴새없이 적의 침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 자들이 이방민족과 꼭 마찬가지로 힘의 의존해서 살아가니, 이 어찌 약속의 백성이요 축복의 백성이라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게 한다. 이것은 약속대로 일어난 징벌이다.

이러한 징벌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방여인 룻을 이스라엘 속에 살게 하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신앙의 노선을 이어나가신다. 룻이 이해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약속대로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참으로 살아 계시고 늘 움직이고 일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자 한 것이다. 이런 여인이 정말 하나님의 왕 되심을 더 높이는 백성이다. 왕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이방화 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속된 이스라엘 속에서 이 여인의 후손이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시키게 된다.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된다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약속 한대로 은총을 모르는 이방민족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계속해 나가는 위치에 앉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소유된 유일한 국가요 복 받은 유일한 국가로서 세상 어느 나라 보다 번창해야 될 운명의 나라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백성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왕이 여호와를 버리고 제사장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죄를 짓고 있으니 완전히 이방 나라화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하면 징벌 받아야 될 저주의 나라인 것이다.

누가 징벌하느냐? 물론 하나님이 징벌하신다. 어떤 과정을 밟으면서 징벌하느냐? 우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인물을 만들어 백성들 앞에 나타나게 하신다. 그러면 지독히도 믿음이 없는 민중들은 이 인물을 학대하고 배척한다. 그러면 그 인물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에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난 뒤 하나님은 이 희생자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서 징벌을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이스라엘이 불신앙이 제대로 살고자 하는 자를 학대했다는 증거가 남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딴 데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내부에 살아있고 남아있는 참된 신앙인을 학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된 자의 임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타협 없이 고발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선지자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리기 앞서 왜 너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그 원인을 들추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지만 인간인 왕인 사울왕으로부터 쫓김을 당한다. 시편이 쓰여지게 된 주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편을 보게 되면 다윗은 이유 없이 억울한 배척을 당한다.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에 그슬리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렸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놓고서도 계속 사울왕은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하려고 한다. 나라는 사울 패와 다윗 패로 깨어진다. 다윗 패는 계속 쫓겨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이방민족이 다윗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고 자처하는 그들로부터 다윗이 배척을 받는다. 이 고난 당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그 동안 이스라엘이 얼마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척해 왔던가가 증명된다. 결국하나님은 사울왕을 할례 받지도 못한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심판이다.

다윗은 정식으로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다윗의 자신의 왕 됨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진정 이스라엘 왕으로 모신다. 그 증거로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을 건립코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한가운데 자리잡을 유일한 왕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이방나라에게 승리를 거두고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은 모두 다 만군의 하나님 덕이지, 결코 다윗 자신의 덕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다윗의 태도에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아예 다윗의 가문 전체가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전례를 남긴다. 그리고 진짜 왕은 장차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직접 이스라엘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약속이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이 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려 왔지만 지금부터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통치 받는 그런 형식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인간이 진정 다윗의 후손이 자격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다윗의 혈통? 아니다. 그러면 누구인가? 사실 다윗도 이 점을 알지 못했다.

하루는 다윗이 성(城) 중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래에서 목욕하는 것을 발견하고 음욕을 품고 자기 아내로 삼고 말았다. 그리고 억울하게도 그 남편 우리아 장군은 다윗의 손에 죽고 만다. 다윗의 개인적 자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왕의 자격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말은, 다윗 본인이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가 마치 이스라엘의왕처럼 행세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에서 원수란 다름 아닌 자신의 왕 됨을 거부하는 그 모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적이 되고 우리아는 하나님 때문에 희생물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마치 흠 없는 어린양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죄명은 "하나님 말씀을 업신여겼다“ 라는 것이다(사무엘하 12:9).

다윗은 심하게 통곡한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은총뿐임을 안다.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외친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편 51:14)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오 번제도 아님을 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을 성을 쌓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억울한 우리아의 죽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간에게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흠 없는 자의 대리 죽음 앞에서 말이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다윗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이렇듯 자신의 죄성 안에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바른 은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자를 알게 된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 본래의 이스라엘 나라는 오직 은총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로 밧세바 사이에 난 아이로 결정한다. 전에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죽었던 적이 있다. 그 아이의 희생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했다는 표시로 이 솔로몬은 다윗의 후계자가 되고 동시에 성전을 건립하는 자격이 있는 다윗의 정신계승자가 된다. 장차 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 오실 분도 바로 이런 다윗의 정신을 잇게 될 분인 것이 명백하다.

다윗은 말기에 예언하기를 그런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직접 원수를 물리치시고 그 원수에게 사로잡힌 자기 백성을 끄집어 낼 분이시다(시편 110편).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분께서 오셔서 이 땅에서 자기백성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될 운명을 지니시게 된다.

다윗 왕은 우리아의 죽음을 통해서 그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다윗 이후에는 숱한 선지자들이 이 우리아의 슬픈 운명을 이 땅에서 사라져 간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몰이해에서 발생되고 또한 오해는 자신의 죄에 대한무지가 가장 큰 원인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적인가? 자신의 죄를 모르는 자가하나님의 적이다. 그들은 필연적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다. 단지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서 그 힘만 이용하려 들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인데 반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성의를 다해서 드렸다는 종교의식과 번제와 제사와 여러가지 노력 공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고 믿는 이방인들이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자들, 이들 때문에 우리아 같은 사람은 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예수님의 족보에 우리아의 이름을 올려놓으신다(마태복음 1:6). 하나님은 우리아의 왕으로서 다윗을 구원코자했다. 이 우리아 덕분은 이스라엘은 다시 은총을 회복하게 되는데 그 증거로서 솔로몬 대에 와서 국가의 번영이 절정기에 이른다.

그러나 솔로몬도 참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다. 이방나라와 교류를 시작한 것이다. 이방나라에 대한 정복과 지배는 솔로몬 자신의 군사력이나 정치적 자질에 달린 게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상한심령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이 때부터 이 왕들의 세속정치화에 대항하는 선지자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다섯째, 고난받는 선지자들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스라엘을 세상나라로 일치시키는 큰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있다. 이 무지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힘을 축적하고 거기에다 온전히 매달리는 세상나라와 똑같은 행정을 한다. '힘에 의한 다스림' 바로 이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 선지자들은 하나 같이 힘없는 모습으로 대항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다 할지라도 힘을 얻기 위해 찾게 되면 이방나라에서 섬기는 우상들과 일치된다는 점을 이들 왕들은 모르고 있었다.

솔로몬 이 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쪼개진 이유도 지파간의 세력 다툼에서 비롯된다. 결코 종교가 없어진 것도 아니요, 제사가 멈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전 종교와 반복되는 제사와 안식일 지킴이 참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결국 그런 것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반대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체적인 힘을 축적하자는 동원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함 심령'인데 그들은 그것을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단결시켜 결집력을 만드는 내는 단합대회로 만들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왕이란 백성을 섬기라고 주어진 자리이다. 즉 하나님의 희생을 전 백성들에게 보여줄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섬기기는커녕 힘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려 했다. 그렇게 되어 버리는 그 나라는 인간 나라가 되지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가 아니다. 중간에 인간 지도자가 등장해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가로막은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 왕들의 패역함과 교만함에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은 처참하게 죽게 될 뿐이다. 모진 수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엘리야 같은 선지자는 정상적인 의식주조차 해결 받지 못했다. 겨우 까마귀가 와서 먹을 것을 집어 던져 줄 정도이다(열왕기상 17:1-7). 이러한 비참한 생활고는,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어 줄뿐이다. 인간들의 왕은 이스라엘이 마치 자기 나라인 양 간주했다. 고통받는 선지자의 외침을 귀 밖으로 거절했다.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 약 7000명을 하나님이 남겨 놓았다(열왕기상 19:18).

약속에 따른 선택적 능력이 이처럼 놀랍다. 남겨진 7000명은 그들의 불굴의 용기로서 남은 자 된 게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강한 섭리로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이 땅에 계속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로 작용하라고 죄악 된 환경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대신 죽음만이 입에 오르내린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만 하나님이 알아서 챙기신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이 하나님 눈에 역겨운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는 그들의 거짓됨과 범죄함을 폭로를 시키신다.

에덴동산에서 여자에게 한 약속에 의하면 악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다투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핵심 된 흐름이다. 그러니 여기서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선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왕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를 모른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내세우고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하나님은 오직 조상들에게 내린 약속 안에서 긍휼로만 하나님 나라가 유지되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여호와를 일종의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간주해서 그 종교로서 백성들을 구슬리고 자기는 그 힘의 최고 정점에 앉아 있는 것이다. 북쪽 이스라엘 왕의 원조인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나라에 마음 두지 않기 위해서 유사 여호와종교와 유사종교인을 배양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전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브니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 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 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열왕기상 12:25-33)

가짜 여호와를 신봉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계속 이스라엘로 남겠다고 하니 하나님입장에서 이런 이단을 그냥 둘 리가 만무하다. 여기서 선지자들은 그들 앞에 서게 한다. 물론 저쪽에서 가짜 선지자들이 우글거린다. 그 가짜 선지자들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얼마든지 융합될 수 있는 선지자들이다. 왜냐하면 다같이 왕의 권력에 눌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짜 선지자들이 하는 일을 최고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다. 즉 권력 잡은 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일이다. 힘에 대한 맹종 같은 것이다.

예레미야 5:30-3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또한 열왕기상 22:5-28에 보면, 400명쯤 되는 거짓 선지자와 미가야 선지자가 맞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누가 거짓인가를 판가름난다. 미가야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열왕기상 22:19-23)

그 때 시드기야라는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미가야의 뺨을 친다. 그리고 말하기를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라고 주장한다. 뺨 맞은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 때문에 뺨을 맞는 수난을 당한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당하는 수난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미가야가 옳은가, 아니면 시드기야가 옳은가 하는 것은 땅에서 인간들의 판단으로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장차 오실 메시야의 기준에서 보게 되면 하나는 체제 옹호주의자이고, 하나는 오직 신의 나라만 주장하는 자로 판명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만난다. 예레미야 23:16-22에 보면 다음과 같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어 그 말을 들었느뇨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예레미야가 자신이 옳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는, 현재 이스라엘상태로 봐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거하여 마땅히 징벌을 받아 멸망당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은 자꾸 백성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 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혀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꺼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6:12-15)

하나님이 이처럼 벌하시는 이유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민족에 대한징벌이라는 아브라함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모산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깍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예레미야 9:25-26)

이스라엘이 육신에 새긴 할례는 무용지물이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이방민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라 무엇을 뜻하는가?

신명기 30:6에 보면 "네 하나님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고 되어 있다.

곧 마음의 할례란, 인간의 나라를 포기하고 신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고아나 과부처럼 은혜가 요청되는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보는 것이 마음에 할례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신명기 10:16-22에 나와 있다. 힘의 법칙이 시행되는 인간나라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희생에 근거한 은혜의 원칙이 통용되는 세상을 선지자는 외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 당시의 거짓 선지자는 예레미야를 구금한다. 현 체제를 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예레미야 20:1-4/28:10-17). 예레미야를 구박한 하나냐 선지자는 그해 곧장 죽게 된다. 예레미야 그 당시의 성전, 곧 종교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이방신상으로 여기는 것이다(예레미야7:1-7). 예레미야 뿐 아니라 이사야도 기존의 종교체제와 왕 체제를 부정한다. 너희가 손을 들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희가 절기를 지키고 제사와 번제와 제물을 바친다고 하나님이 받을 분이라 아니라는 것이다(이사야1:10-17/예레미야 14:10-12). 기본적으로 도대체 이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이 고발의 원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형식만 갖추어진 여호와 종교를 가지고 이사야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말하고 있다(이사야 1:9).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도 멸망과 심판이다. 그리고 남은 자 끼리만 모이는 새로운 신의 나라의 성립이다. 제대로 된 신의 나라만이 하나님이 원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남은 자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 남은 자는, 인간은 종교적 행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받아 멸절했을 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불쌍히 여김으로만 남게 된 자를 말한다.

그러니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란, 인간들의 종교적 욕망의 무능성과 죄악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본능인 동시에 악마의 도구로 이용되어 진다. 그것으로 자신의 공적에 따라 남들보다 복을 많이 받을 거라고 자위한다. 종교를 통해서 자기를 위대하고 멋있는 존재로 위장하려는 것이다. 악마적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러니 하나님의 공격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구현하면 되는 것을 특정한 종교로 물질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망해 가는 이스라엘의 남은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교라는 것이 필요조차 없다. 오직 자신의 죄로 인해 회개하는 자만이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한 종류의 인간만을 부지런히 찾고 계신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제물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노를 삭히는데 아무런 구실도 못한다. 오히려 화만 돋울 뿐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아모스 5:21-24)

구약의 선지자 고난을 이해하게 되면, 신약에 와서 구원받게 되는 이방민족들이 자신의 구원의 근거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과거 이스라엘이 실수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이 선지자의 고난을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치게 되면, 옛날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이 어김없이 재현되어 쏟아져 나온다. 즉 교회도 아니면서 예수 이름으로 종교단체를 건립해놓고 구원의 단체라고 선전할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것이다. 아담하고 신비스럽게 조성한 예배분위기로 사람들의 종교욕을 유발시키고, 또한 사람을 좋게 하는 축복과 평강의 외침을 통해서 예배자를 확보하려는 유혹은 그 때 이스라엘이나 지금의 교회나 다같이 받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것이 뒤틀려진 것이다. 바른 선지자들을 통해서 아무리 바른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전해도 인간들 자신의 탐욕과 배치되게 되면 늘 거부했고 그런 선지자를 핍박해 왔었다.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신의 나라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나라를 원한다. 인간들의 공적이 인정받고 인간들이 수고한 땀과 희생이 영광을 받는 그런 인간나라를 원하고들 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날 때부터 죄인이다. 너희들의 하는 수고와 노고는 모두 죄의 방출에 불과하다. 이 끊임없는 죄의 방출이 정치와 종교, 경제와 사회, 문화 활동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땅을 더럽혀왔다!”

어찌 하나님께서 여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왜 인간나라에 대해서 공격을 하시려 하는지 그것부터 알아야한다. 왜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시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만 한다. 선악과를 따먹고 그 선악체제 안에 놓여 있는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영광과 자기 자랑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살 맛과 인생을 보람을 못 느끼는 중병을 앓는 환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를 누가 가리고 있는가? 인간들이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서서 자기 공로와 권리와 주장을 떠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가리는 이런 사탄적인 사태를 그냥 보고계시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격에 대항해서 인간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힘을 집결해서 끝까지 반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도대체 인간 배후에 누가 있어 인간세계에 이런 심성을 심어 놓았는가?

이 점에 대해 다니엘 선지자가 알려 주고 있다. 다니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마저 삼켜버린 막강한 힘의 나라에 포로 잡혀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막상 알고 깨달은 것은, 이 나라들이 짐승의 나라라는 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세가 왕 자신의 소유로 전락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왜 자기 유다 나라가 다시 포로가 되고 말았는가 그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유다 왕들이 짐승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잡혀 있던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기어이 이런 짐승의 나라를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뭉개버린다는 것을 예언하다. 비록 조그만 돌멩이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이 세상의 큰 우상으로 비유되는 짐승의 권세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태산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 나라만이 영원무궁한 유일한 나라로서 지속될 것이다. 그 나라가 바로 현재 고난받는 인자인 다니엘의 신세와 같이 고생 받은 인자 같은 이의 나라이다.

다니엘은 결코 이스라엘나라의 재탕을 내다보고 있는 게 아니다. 징벌의 기간 70년이 지나고 다시 본국에 돌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나라는 인자의 나라이지 그런 성전의 나라가 아님을 그는 미리 말한다. 70이레가 지나고 나면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고 그 계약에 의해서 새로운 백성이 모집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짐승의 나라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제사와 예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신의 나라이다(다니엘 9:27).

그런데 이 인자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어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그 죄를 인간이 어디까지 끄집어 보일 수 있는가를 드러내는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 멸망은, 곧 인간세계의 멸망이다. 인간이 그 어떠한 몸부림을 친다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적이다. 인간세계가 아무리 변신한다할지라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종말이란, 오직 이스라엘 국가만이 제대로 감지하게 된다. 그들만이 그 동안 선지자를 통해서 제대로 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나라는 망하지만 그 망한 현장에서 다른 나라가 맛보지 못한 무서운 종말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말을 그대로 다른 이방나라의 종말로 연장시켜 보신다. 이러한 연장과 확산에 필연적으로 등장되는 인물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들은 현 이스라엘의 멸망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다른 나라, 예를 들면 앗수르 같은 나라를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로 사용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다(이사야 10:5-15). 그렇다고 해서 앗수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더 훌륭한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관계하는 순간자신들의 교만성이 드러난 경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옛날 가나안 민족을 칠 때에 히브리인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쳤지만 결코 히브리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의로운 민족이 아니듯이 말이다(신명기 9:4-5). 히브리인들이 이방민족을 친 것은 순전히 조상들에게 준 약속을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요령으로 약속에 땅에서 버티고 산 것처럼 교만을 부릴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추방하신 것이다(레위기 26:14-45).

그러니 종말이란, 특정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전 인류에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을 적용시켜 약속대로 심판하는 시기가 종말이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승리하심이 드러나야 한다. 단순히 승리의 결과만이 아니라, ‘왜 승리하게되었으며 패배자는 왜 패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원인까지 밝혀지는 시점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위에 시행되는 하나님이 약속대로의 징벌을 보면서 곧 나의 국가에 대한 징벌로 간주하지 않는 교만한 이방 나라에게도 심판은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 선지자가 나타나야 한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아모스 3:7). 그러니 선지자의 입장에서 봐서 자신들의 등장 자체가 종말의 현상이 된다. 종말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나타나서 외치겠는가? 이 선지자들은 특정 혈통이나 종족을 싸고도는 일이 없다. 모두 다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편에만 서 있어야 한다. 종말에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이 선지자들은, 바로 현재 인간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괴로운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선지자는 사적인 감정을 끊고 모두들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 아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마음 뿐 아니라 희생제물의 길을 가야 한다. 아무도 이해 못하는 말을 해야 한다. 이러한 분통은 곧 아무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세상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분통을 곧 대변하는 것이다. 선지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의 운명과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본심을 담아 내어야한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건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나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하나이다"(예레미야 20:7-10)

이러한 선지자의 마음을 가진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라기 선지자가 미리 언급을 하고 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5-6)

자, 그러면 신약성경에 와서 어떻게 완성이 되는가? 한 아기, 이사야 선지자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이사야 7:14/9:6-7) 한 아기의 등장은 창세기 3:15-16에서 언급한 뱀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아기이다(요한계시록 12:1-17). 따라서 아기 예수를 노리는 공격이 처음부터 있어 왔다.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박사에 대한 공작과 두 살 아래 되는 아기에 대한 헤롯의 살해 명령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하늘 쪽에서도 방관만 하신 게 아니다.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 시켰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다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써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하늘이 쪼개지면서 그 틈 사이로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앉은 일이다. 이 일은 예수님만이 천상의 존재이며 또한 하늘의 존재자로서 수행해야 될 특수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특수 사명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수행해야 될 일이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말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애굽기 4:22-23)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 있음이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지상의 이스라엘인은 아들의 사명을 감당할 자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와야 한다. 아들의 사명이란 바로 창세기 3:15에 나와 있는 대로 악마와 전투하는 일을 해야한다. 하나님아들이 천상의 존재가 되는 것은 시편 1편에서 이스라엘의 희망 사항이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게 주어진다. 범죄한 이스라엘전체를 대신할 한 분 '그 하나님의 아들'은 공생애 시작부터 적의 본성을 만나는 기회를 갖는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시험의 장소로 몰아 넣으신 것이다(마태복음 4:1/마가복음 1:12).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지상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가짜 하나님을 조장하는 그 배후에 누가 있었던가?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을 망쳐 놓은 것이 사탄이라고 봤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탄을 정면으로 만나게 해주신다. 그것도 장소가 광야이다. 광야란, 국가이스라엘이 여물어져 간 공간이었다. 이 광야에서부터 사탄은 참된 이스라엘의 왕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기존의 이스라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사탄의 속셈이다.

그러면 도대체 사탄은 기존 이스라엘에게 어떤 식으로 가짜 하나님을 주입시켰는가? 마태복음 4:1-11과 누가복음 4:1-13에서 사탄은, 나름대로 가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런 메시야 상을 이스라엘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그리고 정치적인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모습을 사탄은 각각 나름대로 정립해서 예수님 앞에 던진다.

첫째로, 경제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상이란, 경제적으로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사명으로 오시는 것이 메시야로서 당연하다는 주장을 사탄이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참된 이스라엘은 말씀과 관련 있다. 말씀에 의해서 살려지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하나님보시기에 죽은 자이다. 삶과 죽음의 기준은 말씀의 여부이다. 죽는 것도 말씀에 의해서죽고 사는 것도 말씀에 의해서 산다. 말씀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사용한 것이다. 그 천지창조의 위력의 말씀만이 죄로 죽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할 수가 있다. 거기에 비해 사탄은 기존의 죄로 물든 세상을 계속 고수하려 든다. 기존 세계를 수리하고 보선하고 개선하므로 보다 나은 세계가 되리라 여긴다. 그러나 주님은 재창조를 시작하려 하신다. 재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 여기에 사탄도 함께 제거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해서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둘째로, 정치적 지도자 상으로서 사탄은 권세와 영광을 제시했다. 이 지상에서 권력과 거기에 맞는 영광스러움이 없으면 정치력을 상실한다고 사탄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사탄 자신에게 굴복하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기에는 올바른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주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는 것이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서 새로 지음 받은 제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셋째로, 사탄은 성전에서 기적을 행하는 종교적 지도자 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면모를 보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들의 시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해서 선택한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은 인간들의 모든 판단력을 능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입장이다.

이처럼 사탄의 예수님에 대한 시험은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세계의 붕괴를 마리 알고 있다. 곧 자신들의 종말이 이미 왔음을 안다. 예수님 앞에서 어떤 위기와 종말감을 느끼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자이다. 사탄의 이런 위기감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미리 읽고 있다. 예수님과 무덤에서 살고 있는 귀신들린 자와의 대화에서 사탄의 초초감은 감지된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태복음 8:29)

도대체 사탄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탄을 괴롭게 하는 것은,현재 사탄 지배하에 있는 인간세계에서 사탄을 그 권좌에서 추방해 버리는 일이다.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사탄을 쫓아내는 일이다. 이렇게되면 사탄의 나라는 괴멸된다. 더 이상 사탄이 지배를 받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을 성령과 예수님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태복음 12:28-29)

사탄이 자신들의 권력자라는 인식을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권력자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추방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탄의 권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사탄은 이기는 것은 순전히 사탄 보다 더 강한 분의 도래에만 기대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에 힘입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인간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에 의한 인간 구원은 우선적으로 현재 사탄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질 않았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한복음 8:33-35)

인간들이 현재 사탄의 종이 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로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참된 아들과는 전혀 다른 신세에 놓여 있다. 또 복음을 제대로 전해도 받아 드리지 못한다. 설득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4)

이 세상의 악한 신이 복음을 믿지 못하기 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다. 어쨌던 사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제일 두려웠다. 어쨌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요, 메시야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방법의 핵심은, 소위 하나님의 계시로 알려진 하나님의 율법과 예수님의 행위를 비교시켜 그 차이점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저지하려한다. 예수님에 대한 광야 시험부터 나중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부까지 율법에 대한 해석 문제가 핵이 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약속의 메시야가 과연 나사렛 예수이냐 하는 것이다. 뱀과의 투쟁의 밑바닥에는 계시에 대한 해석 논쟁이다. 병 고침,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이런 것은 사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정말 할 수 없는 것은 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율법을 완성했을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의를 사탄은 해당이 안 된다. 그러나 사탄은 율법을 가지고 가짜 의를 유발할 수는 있다. 그래서 생긴 가짜 의를 가지고 진짜 의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에다 인간들의 종교적 욕구에서 나온 행위와 생각들을 엮어서 가짜 메시야를 기다리게 한다. 이것이 사탄이 내세우는 기쁜 소식이다. 이 기쁜 소식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유감없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쁜 소식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건져 낼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구원받았다는 안도감을 갖게 함으로 참된 복음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제시한 가짜 메시야는 어떤 형태인가?

마태복음 16:21-23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사탄은, 베드로가 기존 인식하고 있던 메시야 상을 고수하도록 독려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롭게 제시하는 메시야 상을 거부토록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셨다. 사람의 일이란, 곧 사탄의 일과 동일함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야 상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메시야 상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전 이스라엘이 메시야만 오시기를 학수고대하는데 어찌 메시야를 오히려 박대할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심어준 메시야 모습이며 또한 사람의 일에 속한다.

사람의 일이란 항상 참된 하나님의 일과 배치된다는 의식을 인간들은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들이 하나님과 원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늘에서 오시는 참 메시야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임무를 띠고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메시야가 보여주는 수난과 십자가는 인간의 기존의 삶이 하나님에게는 역겨운 저주 거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계속 자기네들 세계에 집착하고 그들의 문명과 문화에 찬사와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메시야는 수난으로 일관된 삶을 보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한 그 유혹은 그 이후에는 세상 멸망당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강조되는 땅의 원리로서 작용한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통해서 더 이상 이 인간 나라는 희망 없음이 확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인간 나라의 전체 사고에 관여해서계속해서 인간 나라에 미련을 갖도록 독려하고 있다. 사탄과 메시야간의 투쟁은 새로움이냐 아니면 기존 체제의 고수냐의 싸움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 의가 없기 때문에 망해야 한다면서 회개를 촉구했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지도자들은, 그 의는 자기네들이 완벽한 율법을 가지고 조성한 특별난 종교 제도가 있기 때문에 의를 만들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님은 거짓된 율법 적용에 대해서 공박하고 완전한 율법을 제시하신다. 여기에 따를 것 같으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형식적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율법 해석이라 말로 참된 의며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을 완성하려 오셨고 그분이 추구하는 율법의 완성의 수준에 대해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잘 가르쳤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원 뜻을 모르고 단순히 양을 노략질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는 주여, 주여 라는 부르짖음과 상관없이 사탄적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태복음 7:15-24)

사탄의 공격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하는 것이요 또 만약 의가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주력한다. 어쨌던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바로 여기가 투쟁의 핵심이다. 예수님을 유혹하려 했던 사탄은 제자군에게 작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예수님이 이점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을 투쟁의 현장 한가운데로 부르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태복음 16:24-27)

또 요한복음 15:19-20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오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십자가의 삶이란,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는 적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발생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원인도 이유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탄이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일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살아오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이 사탄의 일이라는 예수님의 의견에 동의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 종교적 형태에 대해서 매료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십자가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라는 이야기는, 죄인으로서 갈 바를 가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형상이다.

이사야 53:6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는 다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모습으로 아버지의 심판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제자들도 같이 자신의 죄인 됨의 모습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한다. 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제시한 율법에 의해서 다 드러났다. 모든 인간들이 사탄의 꾐에 빠져 온전한 율법 완성으로서의 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진정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는데 있음을 안다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고 또한 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만나서 영생을 얻고자 했던 한 젊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영생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찐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태복음 19:16-22)

재물을 포기하지 못한 청년은 대신 예수님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님과 세상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묘책은 있을 수 없다. 청년은 온전하게 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계명의 완성을 거부했다. 재물 때문에 근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계명의 진수인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계명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 청년이참으로 온전을 원한다면 예수님을 따라야 했다. 이 처럼 십자가 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죄라 여기고 버려 버리고 예수님의 운명의 길로 나서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4:25-27, 그리고 33에 다음과 말씀이 나온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 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란, 스승의 뜻에 동조하여 삶을 같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는 자는 제자도 될 수 없을 뿐더러 구원에도 도달되지 못하게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옛 생활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탄과 한 패가되고 예수님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처신이 용납 안 된다. 세상은 두 패로 나뉘어져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편에는 소속이 되어 스승과 함께 수난 받아야 한다. 세상의 사탄의 고수하려는 경제적 욕망, 정치적 욕망, 종교적 욕망과 싸워야 한다.

사탄이 제시한 이 유혹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다. 바로 이 세가 지 제안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탄을 거부하는 동시에 이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거부의 몸짓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다. 그저 이 땅에 살면서 수난을 당하고 욕을 먹고 고생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없다. 수난에도 이유가 정당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과 정치적 야심과 이 세상에 대한 희망에 집착을 하다보니 주어지는 고생을 오히려 사탄적이며 사탄의 나라에서 영웅으로 칭송 받는 순교자가 될 뿐이다. 주여, 주여 소리치면서 순교의 길로 갔건만 그 모든 것이 이 세상 나라의 영광과 발전에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주의 제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제자이다. 예수님의 제자란,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보내준 제자가 될 수 없다.

요한복음 5:53-54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떠나고 만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한복음 6:60,66)

예수님께서는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한복음 6:65) 그리고 나서 12제자에게 묻는다. "너희도 가려느냐"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은 제자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시기를 "내가 너희 12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자격은 바로 예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마태복음 11:25-27에도 같은 취지가 나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계시 받을 자를 자신의 소원에 근거해서 정해졌다는 것은, 모든 권세가 사탄으로부터 자기에게 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현재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항상 사탄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굴욕의 신세에 놓여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대로 구원받을 자를 제자로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실세가 이미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12제자의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사탄의 세력을 무안하게 만들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을 뜻한다. 옛날 국가 이스라엘의 시작은 바로 애굽나라의 종 되었던 히브리인들이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이 해방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을 때 그들이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아무 것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선택에 중심부를 차지한다. 오직 약속의 흠 없는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제 그 약속의 국가를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세워진 국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변의 우상국가를 멸절시키려고 한 것처럼 이제 새로이 발생되는 주님의 나라를 통해 이 세상나라 전부를 짐승의 나라로 간주해서 멸망시켜 버리고 그 자리의 인자의 나라를 건설코자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결코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15:16)

따라서 적어도 제자라고 한다면 주님의 선택의 은혜가 온 삶에 가득 차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생존과 영생의 근거이다. 따라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의 선택의 요소 외의 것을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미 생명의 근거는 확실해졌으니 따로 스스로 살고자 애쓰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만약 스스로 사는 길을 모색하고 그 길로 가고자 한다면 가롯유다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마귀를 하나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선택의 의도와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자라면 비록 잠시 제자가 되어 권능을 행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고 복음을 전했다 할지라도 항시 탈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택의 사랑이 담겨 있는 자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누가복음 4:25-27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활동은 옛날 출애굽 시절의 여호와의 선택 행위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도 선택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병자를 다 고치자는 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자는 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 하나님은 선택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은혜성을 극도로 높이신다. 따로 선택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사랑 받을 자격자가 아님을 보여 준다. 사랑은커녕 오히려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랑이 주어진 것은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자들이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하려 함이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인간세계를 선악체제로 물들려 놓고 인간들과 합세해서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에 반기를 들게 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무효화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가불합리하고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 항변하게 한다. 그리고 선악에 대해서 인간에게도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 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들어있는 신적인 요소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 라고 일축하신다(이사야 2:22). 모든 육체는 풀에 지니지 않고 인간의 모든 영광은 잠시 피었다가 사그라지는 꽃에 비유된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 즉 말씀뿐이다(베드로전서 1:24-25).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 행위를 가능케 하기 위한 말씀이다. 즉 누가 선택된 제자인가 아닌가를 판정하기 위해 복음은 전달된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제대로 전달되지 아니하면 선택되지도 않은 자가 가롯유다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간주되는 수도 생길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저지하고 방해하기 위해 거짓 복음 전달자들을 이용해서 복음의 영광성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망하는 자에게만 실효를 거두겠지만.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3-4)

사탄은 인간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과 경쟁에 나서게 만든다. 누가 더 솜씨를 부려서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확보하느냐에 대한 경쟁이다. 예수님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려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 쪽으로 쏟아지는 것을 우려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살해하기를 결정한다. 예수님 정도는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는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예수님이 죽는 것이 인간세계의 본체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남긴 적이 있었다.

"한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하였더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마가복음 12:1-9)

예수님이 살해되는 십자가의 사태는, 사탄으로 봐서는 자신의 권세가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이 완성되는 순간이기도하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요한복음 19:30). 즉 예수님이 마귀에게 패배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이 예수님을 놓쳐버린 순간이다.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실체로서의 사탄의 본질이 만천하에 다 들통난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에게 경배하고 찬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배후에 사탄의 조종을 받는 사탄의 제단임이 드러났다. 인간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로도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대신할 수 없다. 위장하거나 흉내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선택된 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탄에 붙잡혀 있어 사탄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주님의 일방적인 사죄의 은총과 선택 행위만을 고수하고 나머지 인간들의 자기 공로를 스스로 깍아 버리지 않는 단체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 단체는 나름대로의 존재의 가치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활동을 대신하려 덤벼들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단체가 오히려 그리스도의 앞을 가로막은 사탄의 군병들로 작용한다.

여기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지상을 향해 사역을 할 필요성이 있다. 성령을 보내지 아니하면 그들은 선택행위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된 것에 대해서 전혀 보탬을 준 경력이 없는 자들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하여도 고작 지나간 과거 인물로서의 스승을 소개하는 형식에 머물고 만다.

중단 없는 선택 행위의 대상으로서 제자가 되고 또 그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한다면 전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했던 선택 행위가 현재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성령 안에서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그런 입장에서만 아버지의 지속적인 뜻을 지상에 펼쳐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 안에 제자들을 합류하려 하신다.

요한복음 14:9-12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제자들을 참여시켜 제자들을 통해서 아버지와 주님 자신의 일을 계속 실시하기 위해서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버지와 예수님만의 세계에 제자들이 끼여든다. 이렇게 끼여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처소가 필요하다. 왜 따로 인간들을 위한 처소가 새로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를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케 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내심을 받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주된 임무는, 주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기존 세상의 죄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멸망되는 이유를 선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주님에 의한 새 창조작업의 개시를 알리는 일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7-11)

성령이 임재 하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드러나고 그 죄의 기준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다. 그리고 회개가 촉구되면서 주님의 선택에 의한 새 창조 사역도 계속된다.

 

 

* 믿음 확인 문제 ??

 

다음과 같은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다음 여러 항목 중 하나만 골라 보세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38-39)

 

(1)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해도 예수님은 우리들 인간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이 뜻을 행하는데 실패하신다. 예수님을 거들어 드리자.

(2)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할지라도 인간의 고집도 대단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안 믿겠다고 버티면 아버지가 주신 자 중에서 다소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최선을 다했으니 예수님에게는 책임 추궁이 안 들어온다.

(3) 위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 좋겠다" 하는 식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기 때문에 꼭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4) 택한 자는 기본적으로 구원받지만 또 덤으로 더 구원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이 크게 더 기뻐하신다.

(5) 위의 말씀이 옳기는 하지만 전도를 열심히 해야하는 신자로서는 듣고도 못들은 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도의 의욕이 떨어져 교회 부흥이 안 된다.

(6)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천국에 움집이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어떻게 일부 사람에게만 결국 구원이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은 말인가? 참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왜곡된 뜻일 것이다.

(7) 예수님은 예수님 나름대로 일하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일하면 된다.

(8)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비웃어도 위의 말씀은 빈틈없이 성사된다. 그것도 오직 예수님 혼자서의 공로이다. 어떤 인간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 더불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같이 믿고 싶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하였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65)

 

끝으로, 우리 인간들이 어떤 충성을 바치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을 충분히 더욱 깊숙이 수납하고 감사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성도는 오직 증거자에 머물러 있어야지 새삼스럽게 무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늘 주님이 하신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주님이 일이 지상에 진행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의 성도를 향한 뜻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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