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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승율 <5> 전공 불교철학에 회의… 세속적 성공에 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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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서 첫아이를 낳고 난 이듬해인 1975년에서야 나는 비로소 대학생이 됐다.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불교철학을 선택한 것은 탄허(1913∼1983) 선사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탄허를 만나 공부해서 철학교수를 하면 실존주의를 뛰어넘는 사상을 정립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탄허의 정규과정 강의시간에 배우고 개인적으로도 따라다니면서 수학했다.

이 시기 나는 세속의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있었다. 생활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와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안에서 조금씩 보내주는 돈으로 겨우 살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후 서울 갈현동 언덕 막다른 골목집에 전세 100만원을 주고 살았는데 어느 날 집달리(집행관)가 들이닥쳤다. 집주인이 사채를 써 우리 전세금마저 떼일 형편이었다. 채권자의 제안을 받고 이 집을 사서 한 달 수리해 내놓았더니 금세 팔렸다. 공사비는 물론이고 전세금을 되찾고도 100만원의 수입이 생겼다. 이 돈이 지금 운영하는 회사의 종잣돈이 됐다.

1978년 2월 아내의 전공(조경)을 살려 서울 강남구 영동시장 앞에 40㎡(약 12평)짜리 사무실을 냈다. 당시만 해도 조경 사업은 초창기였다. 설계와 공사를 나눠 각각 종합환경계획연구소와 반도조경회사를 설립했다. 개업한 뒤 2년간 영업실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 한국전력 토목부장을 만나 일본의 사례를 들어 평택화력발전소에 조경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설계를 공짜로 해주는 대신 시공은 반도에서 맡게 해달라는 턴키베이스(일괄수주계약) 조건이었다. 이 공사에서 제법 큰돈을 만졌다.

나는 드디어 세속적인 성공에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다녔는데 불교철학에 회의가 들던 때였다. 불교는 화두(질문)는 많았지만 답을 주지 못했다.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니 세속적인 성공이 마약 같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런 나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었던 것일까. 갑자기 사고가 났다.

1980년 빗길에 아내와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무려 80바늘이나 꿰맸다. 석 달 이상 부부가 입원했다. 그사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둬 가셨다. 집 짓다 부채까지 떠안고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나에게 눈물로 신앙생활을 권면했고 때만 되면 기도원에 가서 사나흘씩 묵고 왔다. 그러나 나는 외면했다.

1년 넘게 생활하던 비닐하우스에서 탈출하게 된 1981년 가을, 아내가 추수감사절 헌금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심코 그러라고 했는데, 아내는 500만원을 감사헌금으로 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려운 그 시절에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끝난 일이니.

이듬해 우연히 현대건설로부터 조경 요청이 들어왔다. 이명박 당시 사장 집(서울 논현동 사저)이었다. 그 뒤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서울 성북동 영빈관, 계동 현대사옥, 경기도 양평 별장의 조경과 충남 서산간척지 산림복구 등을 줄줄이 맡았다. 이때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나는 믿음을 가진 1990년에서야 아내의 기도와 헌금이,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눅 21:1∼4)’임을 알았다.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채워주셨던 것이다. 할렐루야!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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