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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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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756: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가룟유다는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요, 열 두 사도 중에 하나가 될 것이고,(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져본 자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동역자들과 함께 직접 들은 자요, 신비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 영적 이스라엘 12지파 중의 하나에게 보냄을 받을 자입니다.

 

왜 열둘을 선택했겠느냐? 지구상에 남자들은 열둘밖에 없었느냐? 다른 남자들도 많습니다. 유능한 자들도 많습니다. 100명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열 둘 만이냐?

 

처음에 부르실 때 인물이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연령이나 상관없이 부르셨습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르셨다고 아무렇게나 여겨질 복음의 종들이냐? 오히려 세상에서 볼품없는 자기에게 그 방편을 써서 세상에서 제일 큰 은혜주심을 더욱 더 감사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더냐? 예를 들면 사람에게 공기가 얼마나 중요하냐? 5분만 거두어 간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 귀한 공기를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찌 될 뻔 했겠느냐? 돈을 안 주고 공기를 마신다고 무시할 수 있느냐? 공기를 무시하고 살 사람이 있겠느냐?

 

가룟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로 선택된 그 중요성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가 영원적 신령세계에서 되어질 일을 미리 생각을 해 본다면 가룟유다가 저렇게 놀아서는 안 될 일이라고 봅니다. 열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 어찌 인간 제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일이더냐?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감히 막중한 이 일을 맡기시나이까?’ 하며 그저 감사해서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인데

자기를 부르심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진리의 가치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부르심의 존영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구원의 효력성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막 되어먹습니다.

진리 팔고, 스승 팔고, 자기의 구원을 싼값으로 넘기고, 칼과 몽둥이를 든 폭도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또 이들의 배후 조종자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이들이 보낸 것입니다. 누가 감히 그들을 대적하랴!

 

그들의 행동과 활동이 그런 것은 그들 속에 그런 정신 사상이 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대로 말도 나오고 활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최고의 본질적인 하나님의 선한 것과 의를, 아가페 사랑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사단 마귀가 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가룟유다는 엄청난 배경을 가진 부러워할 만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참 부럽지? 하지만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런 배경을 가진 가룟유다가 한 두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자기의 신앙성분을 모르니까 자기는 가룟유다가 아닌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이지! 사람이 진리인격화로 만들어지지 않고 선악과 따먹은 주격적 정신으로 살면 그 성질들 속에는 칼과 몽둥이가 다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속에 그런 요소들이 다 들어 있으니까 가룟유다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폭도들과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을 맞추는 그가 예수니 그를 잡아라제 삼가자 볼 때는 예수를 굉장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를 찾았으니 그렇게 기쁠까?

 

예수를 찾는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를 죽이는데 누가 앞장을 섰느냐?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구속을 기념하는 축사의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가 어디로 갔는지 잘 압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를 팔아먹을 자, 진리를 팔아먹을 자는 예수 믿고 따르는 자에게서 나옵니다. 환난 핍박을 주는 자는 성경을 자기고 있는 자들이 환난 핍박을 줍니다. 예수를 믿기 전 세상소원 목적성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이름으로 세상소원 목적성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자들이 종교적 제도적 직분적 직책적인 권세를 가지고 세력을 잡으면 반드시 불신세상 무리들과 합력하여 주님의 진리와 진리성도들을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 세습도 딴 사상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사상들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으면 그런 현상이 얼어나는 것임을 미리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50절에 주님께서 가룟유다 자기보고 친구여할 때에 어떻게 들렸을까?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불렀을까?

 

가룟유다가 들을 때 어떻게 들렸을까?

그렇지, 나의 배경이 커지니까 이제사 예수가 나를 친구로 알아주는구나?’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코끝이 찡하면서 가슴이 뭉클하더니 맥박이 콩닥콩닥 뛰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친구여하고 불렀을까?

가룟유다를 진짜 뜻이 잘 통하는 친구로 의식을 하면서 부르신 건가?

친구로 대하고 싶어서 친구여하신건가?

비 구원적인 운동, 활동에 등용되어 예수님의 일을 잘 도와주지만 영원히 후회될 심판받을 짓을 하기 때문에 측은하고 불쌍하여 친구여하신 것인가?

 

진짜 친구는 뜻이 같고, 소원 목적도 같고, 의사소통도 같고, 그래서 늘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일, 자기 목적대로 열심히 예수님과 대적적으로 한다고 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일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셈입니다.

 

가만히 보면 친구도 친구 나름입니다.

처음에는 길을 같이 가거니 해서 좋았는데 만날수록 멀리하고픈 친구가 있고,

처음에는 별 볼일 없거니했는데 만날수록 정이 가는 친구가 있고,

친구를 자기의 사욕에 이용해 먹는 친구가 있고,

옳은 길을 가게 권면을 잘 하는 친구가 있고,

부지런하고 마음이 따뜻하여 자기 일처럼 봐주는 친구가 있고,

게으르고, 말 많고, 마음이 차가운 친구가 있고,

일하자하면 비협조적이고 변명이 많고, 요리조리 살살 잘 빠지고, 자기 이익만 챙기면 싹 달아나는 친구가 있고,

북 치고, 장구 치며 노는 데는 빠지지 않는 친구가 있고,

같은 길을 가다가, 같은 일을 하다가 자기 볼 장 다 챙기려고 딴 곳으로 가서 그 곳에 등용되어 진리의 원수노릇을 하는 친구도 있고,

몰라서 각기 다른 길로 가다가 깨닫고 옳은 길을 찾아서 그 길을 가는 자들을 자기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협력 동참하며 가는 친구도 있고,

 

어쨌든 멀리하고 싶은 친구도 있고, 가까이하고 싶은 친구도 있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친구도 있고, 원수 대적 노릇을 하는 친구도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가룟유다의 원수지? 그럼에도 가룟유다의 방법을 쓰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원수가 되고, 가룟유다가 자기의 친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마음으로 가룟유다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룟유다의 방법을 쓰고 있으니 가룟유다와 제일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룟유다를 자꾸 욕하지?

 

우리가 면밀하게 분석을 한 번 해 봅시다. 분석을 하려면 먼저 영원 궁극적 구원이라는 기준을 세워 놓고! 왜 이것이 기준이라야 되느냐? 그야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 역사이고, 또 우리의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된 구원이 바로 그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단 마귀의 수법 중 대립적 대립은 누구든지 아는 것이니까 말할 것 없고, 호응적 대립을 종교적 사상적으로 말한다면 종교적 조직적으로나 교단배경으로나 어떤 사명의식을 가지고 종교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영원 궁극적 구원에 해당되는 성화구원이 아니면 주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종교운동이던 그 근원이 육으로 되어 있으면 그것은 천국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 궁극적 구원에 관한 것이 천국복음이지 외식주의는 영적인 신령한 천국의 개념은 아닌 것입니다. 노아가 말씀의 척도대로 방주 짓는 것이 복음이었지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는 것이 천국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다는 걸 처녀 총각들의 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자가 진리이신 주님을 붙잡고 진리로 인격적 결합은 할 줄 모르고 예수이름으로 세상을 붙잡겠다고 하는 것은 그 신앙사상부터가 이미 세상과 짝이 지어져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혼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우상숭배)

 

이제 가룟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을 한 것을 그 때 그 순간만 생각을 말고 시간적으로 오늘날까지 계속 늘어뜨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을 굉장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오늘날까지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세상적 외식적인 종교계로 팔아먹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외식운동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죽이는 운동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찾는 활동이 예배로 나타나면 사단 마귀의 호응적 대립입니다.

영적 천국복음사상의 예배와, 육적 세상복음사상의 예배를 비교하면 한 쪽은 분명히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영적 면을 사냥하는 사단 마귀의 교활한 행동인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입맞춤으로 접근입니다. 굉장한 사랑의 방식으로! 하지만 우리가 가룟유다의 속마음을 아는 이상 닭살이 돋고 징그럽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이것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그들이 어떻게 잡겠느냐? 만능의 능력을 써버리면 그들이 어떻게 잡겠느냐? 잡는 자들이 도리어 죽임을 면치 못하지! 육신을 잡혀주니 잡히는 것이지!

 

잡혀주는 것은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고,

계시사상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성경 표면적 문자적으로 그들에게 잡혀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즉, 구원은 그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기를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다하신 것입니다.

 

세상적 종교적 혼합적 외식적 그런 종교신앙 사상을 가지고 예수를 잡지 못합니다. 안 잡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사성을 받아들이고, 그 의사성을 내 의사로 만들고. 마음이 맞으면 예수님은 기뻐서 좋아서 잡혀주지!

 

그러나 외식자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알 리가 없습니다. 육신을 잡아 죽이면 없이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천지창조주 하나님의 일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면 두렵고 떨리는 일인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몰라도 이렇게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대립적인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다 택자의 구원으로 이용을 합니다.

 

가룟유다의 신호로 폭도들이 예수를 붙잡으니 옆에 있던 성질 급한 제자가 느닷없이 칼을 빼어 가지고 예수를 붙잡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린 것입니다. 머리를 보고 내리쳤는데 살짝 피하는 바람에 귀만 잘렸는지? 그렇게 되었다면 그 사람 참말로 운 좋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밝혀 놓기를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입니다. 성질 급한 사람이 칼을 들고 당신의 신분이 뭐요?’ ‘대제사장의 종이다하니까 이라 와라, 네 귀를 잘라야 되겠다하고 자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고 자를까요, 말까요하고 자른 것도 아닙니다.

 

왜 남의 귀를 잘랐나? 종은 대제사장이 자기의 상전이니까 대제사장의 명령을 듣고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를 자르려면 주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자기의 귀나 자를 것이지 왜 남의 종의 귀를 자르나? 그리고 성질 급한 이 제자가 예수님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냐, 방해하는 것이냐? 자기는 보호하고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지?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일을 옆에서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일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얼굴을 더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교역자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질 급한 사람이 칼까지 가지고 있으면 살인이 일어나기 쉽지! 자기 성질 하나 못 고치고 어떻게 무슨 수로 주의 종이 될 것이며, 무슨 수로 주님의 일을 돕겠느냐? 남의 귀나 자르는 일을 하면 그게 복음이 되겠느냐? 그리고 상대는 칼과 몽둥이를 가진 폭도들인데,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닌 여러 수십 명이 될 터인데 자기 성질대로 칼을 휘두르면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자기 성질부리다가 성난 폭도들이 자기의 동료들까지 죽이면 성질 급한 자기가 뭘 어떻게 책임을 지겠느냐? 자기 칼 한 자루 가지고 예수님과 열 동료들의 목숨을 보호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3년을 따라다니면서 배웠어도

자기 성질 하나 못 고치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 주님을 똑 바로 모르고,

동료들은 칼을 안 가졌는데 자기만 칼을 가지고 주님과 동료들을 근심을 시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자기를 날마다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존성격도 안 죽은 주제에 예수가 질 십자가를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지겠다고 장담을 하지 말라! 장담하는 사람은 자기는 안 죽고 말씀 가지고 남 죽이고 돌아다닐까 무섭습니다.

 

잘 드는 칼을 가지고 자기를 말씀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기를 해부하고 병적인 것을 수술을 해야지 다른 사람을 수술하려고 달려들면 성한 것까지 못 쓰게 만듭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자기가 보이면 고쳐라! 자기가 안 보이면 오지 말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서 망한다

 

예수 믿는 성도는 진리로서 사는 것이고, 진리로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진리생명이 아닌 것에 자기 성질까지 합쳐서 쓰는 것은 이룰 구원을 다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주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붙잡혀주고, 인간 너보고 도와달라고 하겠느냐? 만능의 능력자 주님이 그렇게 되는 것이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너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 때문에 만능의 능력자가 피조물들에게 그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의 기록을 이루려 함이니라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그 소리를 듣더니만 그만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죽는 자리에까지 가겠습니다하며 장담하던 때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지금은 무슨 마음으로 다 도망을 간 것인가? 만찬석상에서 다 주를 위해서 죽기로 하던 그 결심은 어디로 갔나? 남이 하니까 자기도 따라 했나?

 

주님이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삶을 사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사죄 칭의 새 생명의 구원을 입히는 삶이고, 우리 또한 예수를 믿으며 성경대로 사는 것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자기의 영원 궁극적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인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성경의 본질대로, 하나님의 본질대로, 신령천국의 본질대로 자체적으로 실력적으로 능력자로 만들어져 오기를 바라심입니다. 신령천국이란 하나님의 본질로 만들어진 것만큼 누려지고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지자의 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말씀인데 말씀이 말하는 대로 살아보자하니까 다 도망을 가버립니다.

 

숫자적 부흥, 제도적 부흥, 금전적 부흥, 건물적 부흥, 명예적 부흥을 원하면 품속에 칼과 몽둥이를 감추고 있는 무리들을 따라가면 됩니다. 돈주고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가서 합류하면 되고, 자기의 세상취미 소원 목적 성질 성격 안 고쳐도 됩니다. 안 고치고 더 강해지면 더 훌륭하게 그들 눈에 뛰어나게 보여져서 저 놈은 참 쓸 만한 놈이다라고 하며 등용되어 앞장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으신 정신대로 사상대로 살자고 하니까 그만 가재가 뒷걸음을 치듯 슬금슬금 구멍을 찾아갑니다. 자기의 은신처로! 웬 변명이 그리 많은지! (계속)

 

 *************************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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