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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개혁신학과 주 5일 근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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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과 주 5일 근무제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이제 주 5일 근무제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되었다. 주 5일 근무제는 처음엔 낯설게 들렸지만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현실이다. 이미 실시 중인 데도 있고, 곧 실시할 데도 있고, 장차는 거의 모든 곳에서 실시하게 될 전망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개혁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묻고, 개혁신앙을 표방하는 사람들로서 적절하게 대처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런 기회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개혁신학 전통에 있어서 주 5일 근무제 자체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없는가를 밝히고, 이어 주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를 고찰하고, 노동과 휴식에 대하여 살핀 뒤에, 주 5일 근무제라는 현대적 변화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I. 개혁신학 전통에 있어서 주 5일 근무제 자체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없는가?

 

처음 이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에 찬반 여부를 떠나서 신앙적 입장에서 불가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 주된 이유인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출 20:9)라고 명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단순하면서도 문자적인 적용 입장에서 불가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 표현이 주장하는바 핵심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을 중요시하는 칼빈조차도 이 표현과 관련하여 이 대목을 두고 6일간의 수고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하였다. 칼빈의 표현을 보아 칼빈 당시에도 이미 그 같은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의 핵심은 6일간의 노동이 아니라, 하루의 안식이다. 최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 24회 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 연회에서 이성희 목사는 ‘주 5일 근무제에 따른 목회 방향’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가운데 이 같은 문제점을 의식한 가운데, “주 5일 근무제는 ‘한 주에 5일만 일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량을 (한 주에)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하자는 것으로서 성경에서 말하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하루는 안식하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주 5일 근무제는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이미 우리 사회의 현실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최소한 칼빈의 입장을 보아서도 개혁신학의 전통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II. 개혁신학 전통에서 주일에 대한 입장

 

주 5일 근무제의 문제는 ‘주 5일 근무’라는 것 외에 그로 인한 주말의 시간 활용 문제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와 맞물려 더 크게 부각되는 감이 없지 않다. 앞서 언급한 이종윤 목사도 “주말이 되면 도시 공동화 현상으로 역기능이 일어날 것이고, ‘성수주일’을 생명처럼 지켜온 교회는 긴 주말로 인해 신앙심이 약한 성도들이나 준비되지 않은 예비 신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어렵게 될 것이다”고 반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앞의 문제가 보다 원리적인 문제라면, 이 문제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이다. 보다 실질적인 문제이긴 해도 우리의 신앙 원리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먼저 구약에 명시되어 있는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안식일 준수의 계명

1) 계명의 자리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 이것은 10계명 중에서 제 4계명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 본문에 있는 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출애굽기를 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0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제 칠일과 관계하여 그 날이 안식일이므로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나 종이나 심지어 짐승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들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친히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비하여 다른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신명기를 보자.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켜라 하느니라”(신 5:12-15). 대부분의 내용은 출애굽기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 같은 안식일 계명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계명들과 차이가 난다. 첫째는 십계명 안에 기록된 계명들 가운데서 안식일 준수의 계명이 가장 길다는 것과 둘째는 다른 계명들은 출애굽기에 있는 내용이나 신명기에 있는 내용이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유독 안식일 준수의 계명만은 그 근거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 두 진술의 차이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각 본문의 문맥을 보면, 다른 계명들은 별 차이가 없는데, 유독 이 계명만은 계명 준수의 의의를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 계명의 준수 의의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말하고 있는데 비하여, 신명기에서는 그 의의를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21)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신명기에서는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켜라 하느니라”(신 5:15)고 말하고 있다.

 

3) 육신과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과 아울러 고찰해 보자.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 일의 중단과 휴식이 주로 명해지고 있는데, 주로 책임을 맡은 사람이 주도하여 쉬도록 명하고 있으며, 심지어 종이나 짐승까지도 쉬도록 명하고 있다. 철저한 준수를 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명령이 창조의 질서와 관계하여 육신의 안식에만 치중하기 쉬우나, 신명기의 말씀을 근거하여 안식일 준수의 의의가 비단 육체의 휴식에 머무르지 않고 영혼의 안식에까지 이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들이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애굽으로부터의 해방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에, 저들은 매주 지키는 안식일을 통하여 보다 근본적인 안식에 대하여 기억하고 마음에 새겼어야 했을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 여부의 바로메터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는 동안에는 안식일이 잘 지켜졌으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약화되거나 없게 되면 안식일 준수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안식일 준수 명령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표징”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곧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더 크게 여겨지는 듯이 보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죄로 간주되었다.

 

2. 안식일 준수에서 주일성수로

1) 안식일 준수의 계명

 

안식일 준수 명령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10계명은 율법 가운데서도 도덕법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인생들에게 보편적이며 항구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개혁자들은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나누어 생각하였는데, 10계명은 그 중에서 도덕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다. 칼빈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인간은(호 13:4-9) 자신 속에서 오직 불행, 연약, 사악, 죽음, 한 마디로 지옥 그 자체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고 인치셨다(롬 2:1-16)”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보시고서 완전한 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지켜져야 하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 기록된 율법이 “자연법에 대한 증인”이다. 칼빈에 의하면 “안식일 준수는 경건과 하나님 예배 양자에 관련되어 있는데,”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이므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되었다고 한다(갈 4:8-11; 골 2:16-17).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이 율법의 교육 하에서 표현되었던 그 의식들과 외적 제사는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우리가 공히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안식이 무엇인가? 칼빈은 여기서 “진정한 안식”을 말하면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이며, 이에 비하여 유대인의 안식일은 사실상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고 한다. 일곱째 날과 관계하여서도 그 날은 최종적이며 영원하다고 말하면서, 신자인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그것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인데, 그 말 속에는 안식 위에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사 66:23). 이런 전제 위에 그는 이 논의를 주일과 연관시킨다. 그는 이 성화의 요지를 “인간들이 자신들을 부정하고 그들의 지상적인 성품을 포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의 지배와 안내를 받을 때 일어나는 육의 사망(the death of the flesh)”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안식일의 적합한 용법을 “자아부정(self-renunciation)”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의 뜻에 이끌리거나 자기 자신의 소원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스스로 지도되는 사람만이 참으로 자신의 일에서 손을 떼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 7일과 관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세계의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에 제 7일을 자신의 날로 떼어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모든 염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일의 아름다움, 탁월성 그리고 적합성을 숙고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이런 근거에서 그는 백성들이 단지 집에서 쉬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그들이 성전에서 모이는 가운데 거기서 기도와 제사에 관여하여 율법의 해설을 통해서 신앙적인 지식에 발전을 보도록 하셨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도 하루를 자유롭게 지내는 가운데 좀 더 잘 배우고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 할 수 있도록 옛날 사람들처럼 안식일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21장 7절상)고 하여 이 면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주일 성수

주일 성수(主日 聖守)라는 말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의 한자표현인데,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으면 안식일을 지켜야지 왜 또 주일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은 비단 ‘제 칠일 안식교’인이 아니더라도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이다. 칼빈은 먼저 주일은 “우리가 ... 그것을 거룩하게 여기게 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모든 날들을 똑 같이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특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롬 14:5). 주일은 “교회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듣는 것과 성례의 시행을 위해 모이도록 제정한 것(갈 4:8-11; 골 3:16)”이라고 한다. 이런 전제 위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을 이러한 일들에 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기계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해야 하며, 이 생의 행위와 관계있는 모든 추구들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는 것은 “종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통의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규정된 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을 그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기나 하는 것인 양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날에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칼빈의 정신은 그의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 문답서 중에서 제 166-184문이 안식일 준수와 관계된 문답인데, 그 문답들에서 이 계명이 갖는 의식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명시하고 전자에 있어서는 폐기되었으나 후자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183문에서 “이 계명의 내용 중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유효한 것이 무엇인가?” 묻고는, “말씀 청취와 공중기도 그리고 성례를 위해 교회 내에서 제정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자들 가운데 세워진 영적 질서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고 답한다.

 

이에 비하여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날로 바뀌었다. 이 날을 주일(主日)이라고 하며,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웨민 21장 17절하). 이에 대한 증거구절들로는 통상 행 20:7; 고전 16:1-2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표현에서는 종교개혁가 칼빈에게서 보이던 영적이며 유연한 자세는 보기 어렵고, 단정적이며 실천적인 규범이 돋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신명기 5장에서 언급한 안식일 준수의 의의와 잘 맞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켜라 하느니라”(신 5:15). 이 부분은 안식일이 단순히 육체의 쉼을 넘어 영혼의 쉼을 누리게 하는 면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식일이 영혼의 해방을 되새기는 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중시하여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안식일 대신에 그 다음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충분히 신학적인 근거가 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사망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주일 성수의 방식

주일 성수의 방식은 구약 성도들의 안식일 준수에 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첫째로 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둘째로 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 셋째로 그 날의 모든 시간은 공예배와 사적 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책임과 자비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웨민 21장 8절)고 밝혀 성수주일의 방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성도들로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단순한 금령으로서보다는 주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내도록 하기 위한 건설적인 제안으로 받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고 생각된다. 교단 헌법의 예배모범에서도 제 1 장에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6개항에 걸쳐서 상세히 지시하고 있다. 장로교회 교인들이 그 교회 헌법이 명시하는 대로만 행하여도 교회는 이 땅 가운데서 견고히 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성도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헌법에서 제안하는 바를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4)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

우리 교회 헌법의 예배모범에서 지시하는 주일 성수의 방식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들의 전통에 서 있는데, “청교도들은 주일을 창조의 질서에 명령된 날로 보았고, 이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도덕적이요 보편적인 명령으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칼빈에 비해서 보다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여 주일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철저히 지켜 나갈 것을 고수하였다.” 17세기에 영국에서 살았던 윌리엄 구지(W. Gouge, 1578-1653)라는 신학자는 주일성수에 대한 간략한 글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심사숙고하고 노력해야 할 것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85개의 물음을 묻고 대답하는 문답형식으로 된 이 책에서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들”(문 5-42)이란 제목 하에 “그 모든 시간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문 5)라고 묻고는 “명령되어진 것들을 지킴으로써”(렘 17:22) 그리고 “허락되어진 것들을 지킴으로써”(출 12:16)라고 지혜롭게 답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탁월한 주권으로 명령되어진 의무들은 반드시 수행되어져야 한다. 그 의무들은 그것들을 바로 수행함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 날에 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다. 이에 비하여 허락되어진 일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려한 것으로서 이 날에 행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비록 안식일이 그런 일들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들에 의해서 보다 더 낫게 거룩하게 되어지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다시 “명령되어진 의무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문 6)라고 묻고는 “경건의 의무”(눅 4:16)와 “자비의 의무”(막 3:4)로 나누어 대답하고 있다. 또한 “어떤 봉사의 일이 안식일에 허락되는가?”(문 23)라고 묻고는 그에 대한 다양한 경우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들을 일별하면서 느끼는 것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열정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반문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차제에 안식일 준수 계명에 대하여 논하고 주일 성수에 대하여 논하면서 앞서 간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그 열정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받으면서 우리에게도 그러한 열정이 있어야만 하겠다. 보다 실질적인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이 단지 실질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 원리에 대한 우리의 자세 문제라고 여겨진다. 이제 이 주제를 보다 유연하게 다루기 위하여 노동과 휴식의 문제를 성경적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III. 노동과 휴식

1. 일

노동이라는 말을 ‘일’이란 말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일에는 다양한 종류의 일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 언급된 일의 종류만 해도 참으로 다양하다.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의 일이 있으며, 선한 일이 있고 악한 일이 있으며, 빛의 일이 있고 어두움의 일이 있으며, 성령의 일이 있고 육체의 일이 있으며, 하나님의 일도 있고 마귀의 일도 있다. 일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일의 성질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사람이 행하는 다양한 일들을 두고 이러한 내면적 구분법을 적용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에 형식적으로는 전자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자에 해당하는 일들도 있을 수 있겠다. 내면적으로 전자에 해당한다면 외면적인 일의 종별은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2. 부지런하여야

일과 관계하여서는 게으름을 멀리하고 부지런하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물론 이러한 명령이 전자에 해당하는 일을 두고 말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라!”(잠 6:6)고 하신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지혜로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는 것”(8)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계하기를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10-11)고 하신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까지 말하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어라!”고 권하였다.

 

3. 처음 명령

일과 관련하여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처음 명령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창조하신 분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사람에게 맡기셨다. 어떻게 정복하며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지으신 분의 마음을 헤아려 지으신 분처럼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어 계속되는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8-15)라고 되어 있는데, 그들의 노동의 현장은 바로 에덴이었다. 에덴에서 하나님을 순종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은 행복과 보람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에덴은 행복의 곳, 만족의 곳, 희망의 곳, 사랑의 곳일텐데, 하나님을 외면한 인생들에게는 불행의 곳, 불만의 곳, 절망의 곳, 미움의 곳일 수밖에 없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4. 두 번째 명령

일과 관련하여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은 조금은 심각한 것이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 3:17-19).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도록 하셨다. 이제 일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그야말로 노동인 것이다. ‘노아’라는 이름과 관계하여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그 이름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창 6:29). “종신토록 수고”하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으리라는 이러한 말씀이 우선 보기에 저주 같으나, 거기에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가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범죄한 인생, 타락한 인생, 죄에 물든 인생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죄성을 가진 인생이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과연 그가 바람직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마에 땀을 흘리도록 하신 것은 결코 단순한 형벌만은 아니다. 안식에의 명령은 창조질서와 관계하여서도 의미가 있겠지만, 구속질서와 관계하여서는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노동은 한편으로는 좋은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달픈 것이다. 자기 가치를 실현하고, 대가가 넉넉하게 주어지며, 그 결과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노동이라면 보람 있고 좋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억지나 강제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마지못하여 하게 되며, 그에 대한 대가도 넉넉지 않으며, 그 결과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지도 못한다면 그런 노동은 좋지 않고 많은 경우에 고달플 것이다.

 

5. 휴식에의 명령

중요한 것은 안식과 관계된 표현이 창세기 3장 이후에 처음으로 나오지 않고 창세기 2장에(2, 3절) 이미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식’이 소위 ‘노동’과 관계하여서도 중요하지만 비단 노동과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 및 구속질서와 관계된다는 말이다. 안식은 한편으로 창조의 원리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구속의 원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안식일 준수 계명은 철저히 휴식을 명하고 있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 5:14). 칼빈은 이를 가리켜 “안식일의 셋째 목적(a third object of the Sabbath)”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종들을 위한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하려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이 대목에서 “6일간의 수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여기서 종은 물론이거니와 객이나 짐승에게까지 철저히 안식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칼빈은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위배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거슬리게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였다”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눈을 돌리거나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자극을 받도록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앙단련을 위해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만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처럼 철저한 휴식에의 명령은 우리를 속박하려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자유케 하려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지 더 얽어매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계명을 받는 사람들이 계명을 주시는 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 영적 휴식까지도

이러한 휴식은 비단 육체적인 일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안식일은 영혼의 안식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일은 더욱 가중되고 심령에 평안이 없는 인생에게 있어서 육체의 휴식과 아울러 영혼의 안식은 참으로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신명기에서의 표현은 그러한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약 시대의 주일 성수는 신명기의 정신과 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0계명을 도덕법으로 이해하고, 모든 인생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는다 하더라도, 신명기적인 정신은 더욱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합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이성희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노동과 안식은 별개가 아닌 하나이며, 삶을 의미 있게 산 사람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안식이란 교외에서나 여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나아옴으로 누릴 수 있는 세계”라고 밝혔다.

 

 

IV. 건설적 대안 제시

 

1. 이제까지 논의의 요약

지금까지 안식일 준수의 계명에 대하여, 주일 성수에 대하여, 그리고 노동과 휴식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안식일 준수의 계명과 관계하여서는 안식일 계명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두 진술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출애굽기의 진술이 창조질서와 연관된 것이라면 신명기의 진술은 구속질서와 연관된 것이며, 이 안식일 계명은 인생들의 육신과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주일성수에 대하여서는 먼저 안식일 준수의 계명이 도덕법으로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킨다는 것, 주일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는 구약 성도들의 안식일 준수에 준한다는 것 등을 말하고, 청교도 신학자 구지의 주일성수 방식에 대한 자세를 살펴보았다. 노동과 휴식과 관련하여서는 성경이 말하는 일의 다양한 종별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선하고 긍정적인 일과 관계하여서는 부지런할 것을 권한다는 것, 그리고 일과 관계하여 사람에게 주어진 처음 명령과 두 번째 명령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살펴보고, 휴식에의 명령이 단순히 육체적인 휴식뿐만 아니라 영적 휴식까지도 명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2. 지나가는 기회

이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지키고 싶어도 주일에 일을 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을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곧 다방면에서의 손해와 불이익의 감수를 의미하였다. 이런 경우가 환란과 핍박 속에서 성도로서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다. 이제 이런 유의 환란과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유의 시험이 없으니 좋다고만 할 것인가? 주일성수와 관계하여 성도가 마련할 상급과 면류관의 기회는 이제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주일에 등교 거부와 그로 인한 체벌, 직장에서 주일에 직장 출근 거부와 그로 인한 해고, 군에서 주일에 작업 거부와 그로 인한 구타, 법학을 전공한 법대생임에도 사법시험이 주일에 있기 때문에 응시를 포기하는 일, ROTC 1년 차 훈련을 마치고 2년 차 진급 시험이 주일에 있다는 이유로 관복을 반납하고 사병으로 입영하는 일, 상고생(商高生)이면서도 승급시험이 주일에 있기 때문에 응시를 포기하는 일 등등이 우리의 신앙선배들로부터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그 때 그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0-12)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일은 없게 되었다. 앞으로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면에서의 칭찬과 상급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3. 새로 오는 기회

정부가 들어서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다니. 나라가 들어서 주일뿐만 아니라 하루 더 쉬게 하다니. 살다 보니 별스런 시절도 있구나 싶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지키는 일로 더 이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일어나고 있다. 토요일과 주일에 걸쳐서 연휴가 되게 되면 과연 주일 예배에 어떤 악영향이 없을까 하는 염려이다. 앞선 세대에 비하면 한참이나 수준이 떨어지는 고민이다. 앞선 세대들은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어떻게 주일을 지킬 것인가?’로 고민한 데 비하여, 오늘 우리 세대는 ‘주어진 여유로운 기회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신앙수준과 형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환란과 핍박의 시대는 가고, 유혹과 회유의 시대가 오는 듯하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전에는 환란과 핍박 앞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고백해야 했지만 이제는 유혹과 회유 앞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한다. 환란과 핍박이 쉽지 않은 만큼 유혹과 회유 또한 쉽지 않다. 이전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참고 견디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고 견디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오는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절제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다 쓰지 않는 것이다. 시간도, 힘도, 경제적 여유도 자기를 위하여 다 쓰지 않는 것이다. 그 기회를 주신 분 앞에서 주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그 기회를 쓰는 쓰도록 힘쓰는 이런 자세가 오는 시대의 미덕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런 신앙담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는 이번 주말에 어디를 가고, 누구는 이번 월차에 어디를 다녀오고, 누구는 이번 휴가에 어디를 다녀오고, 누구는 무엇을 사고, 누구는 차를 무엇으로 바꾸고 하는 말들을 귀 너머로 들으면서, 이번 주말에는 어디에 가서 봉사하고, 이번 월차에는 어느 장애인 시설에 가서 돕고, 이번 휴가에는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새로 사기보다 수리해서 고쳐 쓰면서 절약한 돈으로 누군가를 돕고, 오래된 차를 한 해 더 타더라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성도를 도와야 하겠다고 하는. 성도들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이미 있는 것이 모자라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가진 것이 비록 많지 않더라도 이미 받은 것으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나누며 섬기며 살까 하는 고민 때문에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주 5일 근무제는 이미 현실이 되었고 장차는 보편적인 현실이 될 것이다. 문제는 주일 외에 주어지는 여가의 하루를 어떻게 쓰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 최소한 시간적으로는 이전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생활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그 여유를 즐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받쳐 주지 않으면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권해보고 싶다. 지금껏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시간에 쫓겨 손대지 못했던 일들을 이제는 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일이든, 가족을 위한 일이든, 이웃을 위한 일이든, 교회를 위한 일이든. 결국 여유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와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단지 먹고살기에만 급급했던 우리 백성들에게 이유야 어쨌든 이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주일 외에 하루의 여가시간이 더 주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그 하루를 쓰도록 할 것인가? 교회에 속한 성도들 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조차도 이 기회를 인격적으로 한 차원 더 수준을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W. Twiss, The Christian Sabbath Vindicated in a Treatise(Newbury, London, 1641)

T. Cartright, 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London 1616)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Four Last Books of Moses arranged in the Form of a Harmony, Vol.Ⅱ(Grand Rapids: Eerdmans, 1948)

H. Davies, The Worship of the American Puritans, 1629-1730(New York: Peter Lang, 1990)

구지, 「주일을 거룩하게」, 김성봉 역 (서울: 나눔과 섬김, 2003). 원제: 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

김성봉 외, 「주 5일 근무제와 한국교회」,(서울: 예루살렘, 2002)

김재성, 「칼빈과 개혁신학의 기초」,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7)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마태복음을 중심으로」(서울: 이레서원, 2000)

칼빈, 「기독교 강요(초판)」, 양낙흥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역(서울: 경건, 1995), 「헌법」,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개혁), 서울: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개혁) 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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