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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죽산 박형룡과 한국 개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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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박형룡과 한국개혁신학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국개혁신학회 초대회장, 조직신학)

 

 

 

 

 

머리말

 

죽산(竹山) 박형룡은 변증학에서 시작하여 조직신학으로 나아가 한국의 정통적 개혁신학을 형성한 거대한 사상가이다. 죽산의 변증학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은 그가 졸업한 숭실대학 교수진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죽산은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과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의 장로교 정통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평양 숭실대 학장인 조지 맥큔(George McCune)은 죽산의 신학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맥큔은 숭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를 하기로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 확고부동한 청교도적 신앙을 지닌 신학자요 선교사요 목사였다. 숭실에서 이미 주입받아 심어진 죽산의 변증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은 그가 프린스턴으로 가서 보수신학자 메이첸을 만나므로 신학적으로 확고한 방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죽산은 1920년 숭실을 졸업하자, 유학길에 올라 중국의 금릉대학에서 3년을 공부한후, 1923년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으로 갔다. 이곳에서 변증학과 조직신학분야를 전공했다. 죽산은 프린스턴에서 찰스 핫지(Charles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로부터 장로교 정통신학을 배웠다. 특히 프린스턴 구(舊)학파의 지도자요 변증학자인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죽산의 지도교수로서 그에게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프린스턴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를 마친 죽산은 1927년 9월 켄터키주 루이빌(Louville)에 위치한 남침례교 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의 변증학 교수 물린스(E. Y. Mullins)지도하에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죽산은 1929년 1월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제출만 남기고 귀국한다. 귀국후 평양으로 돌아와 모교 숭실대에서 강사로 나가고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보았다. 1930년 3월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임시교수직을 맡았고 1931년 4월부터 전임교수로 승진하였다. 1932년 봄에 그가 제출한 “자연과학으로부터 반 기독교적 추론”(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죽산은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죽산이 프린스턴에 유학한 시기 1923년-1926년은 신학적으로 대격동의 시기였다. 그는 1924년 미국북장로교 총회의 어번선언(Auburn Affirmation)과 1925년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프린스턴이 점차 신학적으로 포용화 되는 대격동의 시기를 경험하였다. 변증학에서 시작하여 조직신학에 이르는 죽산의 신학적 형성과정은 그가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으로 가장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귀국하여 한국교회 안에서 다시 현대주의와 만난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그럼으로 해서 그의 생애와 한국교회의 신학형성은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Ⅰ. 신(新) 신학 진단과 보수적 변증

 

1. 1934년 [신학지남]의 권두언 사건

 

1934년 [신학지남]의 편집장인 남궁혁이 미국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장공(長空) 김재준에게 [신학지남]의 편집사무를 맡겼다. 그러나 [신학지남]은 장공의 손을 통하여 나오면서 혼란에 빠졌다. 장공은 [신학지남] 권두언에서 보수신앙을 맹종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한국적인 새로운 신학을 제창했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라는 논문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동정녀”에서 “여자”로 고쳐버렸다. 그래서 그는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을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해석하였다. 당시 장공은 [신학지남]에 8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정통주의로 통조림 된 한국장로교회에 어딘가 숨쉴 구멍을 튀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장공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가 1929년을 기해 관용적이 되었는데 유독 평양신학교만 보수신학의 입장만을 고수할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장공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보다는 역동적 영감을 믿었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무오 보다는 신앙적 불오를 주장하였고, 교회의 전통과 정통교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신정통주의자였다.

당시 장공의 신정통적 입장에 반대하면서 정통신학을 수호한 자가 죽산이었다. 이때 죽산은 프린스턴에서 귀국한지 수년이 지난 때였으며, 프린스턴에서 그의 스승 메이첸이 실천한 것 처럼 이제 한국교회 안에 나타난 현대주의에 대하여 전투적으로 도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신약학 교수 남궁혁이 [신학지남]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죽산은 편집위원으로서 사표를 제출하고 [신학지남]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리하여 1935년 5월 이후 장공이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싣지 못하게 하였다.

죽산과 장공은 같은 1920년대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하여 같은 스승인 메이첸에게 배웠다. 죽산이 졸업한 후 장공이 프린스턴에 입학했으니 죽산이 장공 보다는 프린스턴 선배인 셈이다. 죽산은 프린스턴에서 3년을 공부하고 졸업을 했으나, 장공은 프린스턴의 보수적 분위기가 맞지않아 한학기만 공부하고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로 옮긴다. 이러한 죽산과 장공(長空)은 한국에 돌아와 한국교회의 신학사(神學史)를 형성하는데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신학사상과 교단까지 가르는 운명적인 만남의 관계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이미 두사람의 신학적 출발과 동기가 아예 달랐기 때문이다. 죽산은 평북출신으로 기독교학교의 선천 신성중학교와 특히 보수적 정통신앙으로 세워진 숭실전문을 졸업하였다. 이러한 그의 보수적이고 정통적 신앙은 프린스턴에 가서 바로 보수정통주의자인 메이첸의 전투적 근본주의와 만나게 되어 보수적 전사의 불길을 이어받게 된다. 이에 반해서 장공은 함북출신으로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후 장공은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이 중심이 된 서울 YMCA를 중심으로 종교의 사회참여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당시 청산학원은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를 그대로 반영하는 신(新)신학의 분위기였다. 장공은 졸업논문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하는 바르트 신학에 매료되어 ”바르트의 초월론“을 쓴다. 여기서 장공의 신학은 신정통주의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장공은 프린스턴에서 메이첸에게서 한 학기를 공부한 후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를 받고 귀국한다. 메이첸에게서 보수신학을 공부하면서 장공은 죽산 처럼 감동을 받고 마음에 불길을 받기 보다는 이 길이 자기 신학의 길이 아님을 알기에 이른다. 장공은 프린스턴을 떠날 때 ”극단의 정통주의 신학 역시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고민하는 발악상“을 보는 느낌을 갖는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이처럼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와 사고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사실을 우리는 죽산과 장공의 신학적 삶을 통하여 보게 된다.

 

2. 창세기 저자문제와 [아빙돈 성경주석] 사건

 

1934년 총회에서는 자유-보수 그룹간의 신학적 대립이 냉전에서 전교회적으로 표면화 되던 해였다. 서울 남대문 교회 목사 김영주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한 것이 발단이었다. 김영주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제소되었다. 죽산은 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어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연구위원회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권을 부인하고 성경의 정확무오한 권위를 모독한 목사는 신조 제 1조에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 됨을 거절함이 가하다“고 결론지었다.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는 유형기 목사 편집변역인 [아빙돈 성경주석](Abingdon Bible Commentary)이 제소되었다. 이 주석은 신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자유스러운 감리교회 희년기념으로 출판된 것인데 번역자들 가운데 장로교회 목사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신(新) 신학 사상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자가 바로 죽산이었다. 죽산은 [아빙돈 성경주석]에 대하여 다음같이 비판하였다. “단권 성경주석은 [아빙돈 성경주석]을 국내 여러 인사들에게 분담시켜 번역한 것으로서 모든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동서는 성경을 파괴적 고등비평의 원리에 의하여 해석하였으며 계시의 역사를 종교진화론의 선입견을 가지고 고찰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제권의 전통적 작자와 연대를 의문 혹은 부인하며 도처에서 후인의 가필을 지적하고 성경의 신관에 변천이 있다는 것, 성경의 계시는 이적이 아니라 인생의 경험에 의하였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아빙돈 성경주석]의 번역진에 참여한 필진들(송창근, 김재준)은 총회의 징계를 받아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기고할 수 없게 되었다. 죽산은 [아빙돈 성경주석}의 구매를 금지시켰고 번역자들을 공개사과하도록 하였다. 죽산은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바른 성경주석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표준 성경주석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했으며 그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1937년부터 [표준성경주석]이 나오기 시작하여 그후 모두 8권의 책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3.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결정적 비판과 답변서

 

1935년 죽산은 신(新) 신학이 교회와 신학을 어지럽게 하는 데에 대한 학문적 응답을 내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대작인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이다. 프린스턴에서 1923년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메이첸이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현대주의를 응징한 것 처럼, 박형룡은 1935년 이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한국교회 안에 출현한 현대주의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응답하고자 한 것이다,

죽산은 저작의 동기를 “천태만상의 이(異)사상이 바야흐로 정통신앙의 존속을 위협하려는 이 때에 비정통적인 신학제설을 고사(考査)하여 비평을 가하기로 목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죽산은 19세기의 여러가지 자유주의 신학자들, 쉴라이에르마허, 리츨 등의 신(新) 신학을 비평하고, 사회복음주의, 진화론, 마르크스 종교론, 신비주의, 무교회주의, 고등비평 등 여러 가지 현대주의 사상을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이 저서는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신 신학에 대한 학문적인 답변이었고 대작이었다. 이 저서는 죽산으로 하여금 “한국 최고의 보수주의 신학자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죽산은 40년후인 1975년에 [기독교 현대신학 난제 선평]의 증보판을 내었다. 여기서 그는 신정통신학(바르트의 위기신학), 비신화신학(불트만), 존재의 신학(틸리히), 신자유주의 신학(세속화, 사신신학, 소망의 신학, 역사의 신학, 과정신학, 상황윤리 신학), 비교종교신학, 종교심리신학 등을 보완하여 온갖 비정통주의 사상을 망라하여 비평하고 있다. 죽산은 1964년 논문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에서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초기 50년동안 정통신학의 보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못했던 것이다. ..암암리에 정통신학에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 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겨났던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 유학하면서 자유신학을 배워 가지고 본국교회의 정통신학 보수에 대한 불평을 품고 돌아온 인사들이었다. 1934년은 한국선교 50주년인 동시에 한국교회 창립 50주년이었는데 미국에서 프린스턴신학교가 개편되어 자유주의화 한 지 5년 후였다. 나는 그때에 간행된 몇종류의 종교잡지와 역서를 섭렵하고 자유주의 신학 사상의 가지가지가 자유롭게 발표된 것을 발견하였다.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를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신성, 십자가의 대속, 재림 그리고 내세(來世) 상벌을 부정하는 문자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열되었던 것이다.”

죽산의 [기독교 근대신학난제 선평]은 현대주의의 도전에 대한 확고한 보수신학적 응답이었고 보수주의가 하나의 신학으로서 현대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학문적 무기를 제공하여주었다. 그리고 죽산은 이 저서의 출판을 계기로 보수주의의 대변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Ⅱ. 청교도주의의 경건과 복음적 신앙 실천

 

죽산은 숭실에서 베어드(William M. Baird), 마펫(Samuel A. Moffett) 등의 청교도적 복음주의 신앙을 배웠고 칼빈주의적 신학의 기초를 닦았다. 1920년 숭실전문시절 그는 숭실전문 전도대원으로 남한 일대를 전도여행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강한 설교 때문에 일경에게 붙들려 우호익 등 동료학생 5명과 같이 체포되었다. 죽산은 “천의 검”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이것이 일제의 비위에 거슬려 설교도중 목포경찰서로 검거되어 8개월의 옥고를 겪기까지 하였다.

죽산은 근본주의적 신앙을 소유했으나 동시에 복음적 신앙실천을 중요시하였다. 그는 칼빈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죽산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메이첸에게 받은 보수신앙의 뜨거운 열기를 가지고 산정현교회에서 전도사 직분을 수행했고 그의 신앙의 열기는 최권능 목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죽산은 1931년에 평양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산정현교회의 부목사일을 보았다. 일제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죽산은 그가 산정현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도록 협력해준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호응하였다. 죽산은 신학적으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죽산은 동경으로 망명하여 표준성경주석을 저술하였고, 1943년부터는 만주 봉천에서 세워진 평양신학교의 망명신학교라고 할 수 있는 봉천신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죽산은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구원과 경건에만 국한 시키려는 근본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칼빈주의의 포괄적인 사상체계에 자신을 투신하여 살고자 하였다. 죽산은 저술활동과 교수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열심히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복음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보수신앙을 변증하는 신학적 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제목설교로서 “교리강좌”을 연상케 했으나 열정적이었고 많은 신앙적 감화력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제목설교를 많이 하는 것은 죽산의 영향일 것이다.

죽산은 이미 한국교회 안의 복음의적 청교도적 선교사들을 통해서 내려온 청교도적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죽산은 정통주의 신학을 단지 머리로만 변호하려고 하지 않고 경건과 정열로서 받으려고 하였던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신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단순한 사변적 정통주의가 아니라 청교도적 개혁신학이었다.

 

 

Ⅲ. 열린 근본주의 -태도적 근본주의 아닌 교리적 근본주의

 

죽산은 자신의 신학을 1960년대까지는 근본주의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죽산은 현대주의에 대립된 용어로 “근본주의”라는 표현 대신에 “정통주의”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960년 통합측과 결별후 죽산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60년 “근본주의”라는 논문에서 죽산은 근본주의를 “현대주의에 반대하여 성경의 무오와 프로테스탄트적 기독교의 근본원리들로서의 신경의 문자적 수납 같은 전통적 정통신념”, 그리고 “교회가 참된 사도적 전통을 파악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려고 하는 때‘” “교회의 역사적 신앙을 옹호하려는 교회전체의 움직임”으로 이해했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주의란 죽산에게 정통주의 신앙을 변호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죽산에게는 “근본주의는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요 “기독교 자체”였다. 죽산은 근본주의를 단지 187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언급한 근본진리 5가지에 국한시켜 협착하게 이해하지 않고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정통주의 기독교 운동으로 이해했다.

1961년 죽산은 고려파에서 출간하는 “파수군”에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근본주의 신앙을 변증하였다. 죽산에 의하면 근본주의란 “근대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무오와 신경의 고귀한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노력”이다. “교리적 혼란기에 성경에 의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재진술, 재긍정, 재추종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출발한 노력”이다. 근본주의 신앙이란 “기독교 본연의 정통신앙을 그대로 지키는 노력”이며, “환난핍박 중 신앙을 지키며,” “성경의 숭고한 권위를 믿음으로 성경공부, 경건 치중, 직접 전도, 자급연보에 노력,” “일인의 신사참배 강요와 핍박에 순교"하고 ”공산군의 핍박과 전란 중에 순교“하는 신앙의 자세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죽산이 옹호하는 근본주의 신앙이란 바로 초대 한국교회를 개척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 마포삼열, 곽안련, 이눌서, 그레인, 맥큔, 모의리 등이 가졌던 청교도적 신앙이었다. 더욱이 베어드는 숭실전문의 창립자요 학장으로 15년을 봉직하였고 마포삼열(Samuel Moffet) 역시 평양신학교 창립자요 초대학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장로교 신학을 주도하였고 당시 유일한 4년제 대학인 명문 숭실전문의 학장으로 10년이나 봉직하였다. 특히 맥큔은 죽산이 숭실을 졸업할 당시의 학장으로서 그에게 깊은 신앙적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이 정통주의 신앙은 구 프린스턴의 핫지와 워필드, 메이첸이 생명을 내걸고 지키려고 투쟁했던 신앙이었다.

죽산의 신학적 근본주의 신앙은 그가 프린스턴에서 유학하던 1923년에서 1926년 동안 있었던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fundamentalism /modernism controversy)이 절정을 달하던 시기의 신학적 실존의 체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200백년 이상 미국 기독교를 지배한 청교도적 보수주의가 무너지고 고등비평과 진화론과 세속화와 유물론이 전통기독교를 위협하는 시대 속에서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위협을 느낀 신학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때 프린스턴의 구학파의 지도자 메이첸이 1923년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저서를 내었다. 여기서 메이첸은 성경의 권위를 평가절하하고 성경의 초자연적 영감을 부인하는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의 최대의 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죽산은 프린스턴 구학파의 마지막 거장이며 그의 지도교수 메이첸의 신학사상에 매료되었고 그의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죽산이 미국유학시 체험하였던 메이첸의 신학과 삶은 죽산의 신학을 현대주의에 대하여 투쟁적이며 정통주의 신앙을 사수하도록 하며, 근본주의에 대한 열정을 갖도록 하는 모델이 된 것이다. 메이첸은 차선의 선택으로 “근본주의” 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로 불리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나 현대주의와 대립되는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한다면 근본주의자로 불리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스승 메이첸의 영향을 받아 죽산도 현대주의와의 투쟁에서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자신을 근본주의에 위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산은 학문을 무시하거나 현실문화를 무시하는 극단한 근본주의를 표방하지 아니했다. 죽산의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에 대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신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적이고 교리수호적 근본주의였다.

죽산은 미국여행시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교수를 방문하여 담화하고 한국교회가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죽산은 스위스 바젤의 칼 바르트(Karl Barth) 교수를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을 소개하고 담화를 나누는 열린 태도를 견지했다. 죽산은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장로교 연합회 총무 프레돌 벨두를 방문하여 담화하면서 “근본주의”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격려를 받는 등 죽산은 해외 신학자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었다,

죽산은 이들과 대담할 때에 “자신이 근본주의 교회에서 온 자”라고 소개 하였다. 죽산은 1960년초 근본주의 본산지 미국에서 근본주의 운동은 “소수의 모반자, 시대에 뒤떨어진 운동, 반문화주의, 분리주의자, 반사회주의자, 반지성적인 무리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죽산은 근본주의가 가진 약점, 특히 고질적으로 안고 있던 “도덕적 불완전, ”단결심의 결핍“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산이 근본주의를 그처럼 변호했던 것은 바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동기에서 이 근본주의 신앙을 그처럼 귀중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죽산의 아들인 한국의 핫지 박아론은 1979년 여름에 열린 신학 세미나에서 박형룡의 신학을 무조건 근본주의로 매도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는 메이첸의 신학을 ”근본주의이면서 칼빈주의“ 라고 말할 수 있듯이 죽산의 신학도 근본주의이면서도 칼빈주의 그래서 ”근본주의적 칼빈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Ⅳ.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의 정립

 

1947년 10월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사에서 죽산은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신학적 정체성을 “칼빈주의적 정통신학”이라고 하였다. 1953년 죽산은 장로회 신학교장 취임사에서 다음같이 강조하였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정(正)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베어드, 마포삼열, 이눌서, 구레인 등)은 프린스턴의 구학파 전통에 서서, 한국 장로교에 청교도적 신앙과 보수주의 정통신학의 씨를 뿌렸다. 프린스턴에서 보수주의의 거장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에게서 직접 신학교육을 받은 죽산은 이것을 가꾸어서 한국 보수 정통주의 신학의 초석을 세웠다. 더욱이 성경에 대한 무오와 영감이해는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고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경에 토대를 둔 복음주의적 교회가 되게 한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죽산에게 정통신학은 칼빈주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죽산은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핫지나 워필드, 메이첸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 정암 박윤선이 개혁신학이 주도하는 화란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이 용어는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정통신학, 칼빈주의, 개혁주의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죽산은 1963년부터 [교의신학] 제 3권(인죄론)과 제 5권 (구원론)을 출판하여 1964년 제1권(서론), 1967년 제 2권(서론), 1970년 제 4권(기독론), 1973년에 제 6권(교회론), 제 7권(내세론)을 완간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죽산은 한국교회를 위한 최초의 정통적 교의신학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죽산의 교의신학은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면서 찰스 핫지, 워필드, 쉐드, 스트롱, 댑니, 카이퍼, 바빙크, 메이첸, 보스 등 서양의 선진 정통신학자들의 신학적 특징과 차이를 수용하여 아름답고 장엄한 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죽산은 벌코프와 바빙크를 따라서 "신 인식의 외적 원리는 특별계시, 즉 성경이며, 내적 원리는 신앙"이라고 천명한다. 그래서 죽산은 이성신학을 거부하고 계시신학의 입장에 서는 개혁신학의 정수를 제시한다. 죽산은 이성은 신학의 원리가 아니라 수단으로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입장을 표명한다. 그럼으로써 죽산은 신학의 합리성과 변증성을 강조하는 핫지-워필드(Hodge-Warfield) 노선보다는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과 이성의 방편성, 즉 계시의존 신앙을 강조한 바빙크-벌코프(Bavinck-Berkhof)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죽산은 1976년 가을호 [신학지남}에 기고한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글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라고 밝히고 있다. 죽산은 이것을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청교도적 개혁신학“은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신학“이다. ”청교도적 개혁신학“이란 죽산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이며 한국교회가 끝까지 보수해야 할 정통신학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Ⅴ. 학문적 신학의 거대한 체계 정립

 

1953년 죽산은 장로회 신학교장 취임사에서 다음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명확한 신학적 자아의식을 가지도록 학적으로 교육하고자 한다. 우리 학생들은 근대에 신흥한 비사도적 신학사상에 대항하여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 입장을 명확히 인식하고 또 그 위에 확고히 서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모든 신학설(神學說)을 다 섭취하되 시비판단을 똑똑히 하여 정확한 결론을 지어야 할 것이다”.

죽산은 정통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두었다. 그래서 죽산은 그의 [교의신학] 제 1권 서론에서 “성경의 영감”이라는 독립된 장을 마련하였다. 성경관이 무너질 때 그 위에 정리되는 신관, 기독론, 구원관과 내세관 등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죽산은 구 프린스턴 신학자 핫지와 워필드의 성경관을 그대로 수용하여 유기적이고 완전축자 영감설로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죽산은 한국교회의 정통적이고 복음주의 성경신앙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란 성경기자들의 인격, 지성, 생육배경을 사용하셔서 기록케 하시되 오류가 없도록 성령께서 지도하셨다는 것이다.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이란 성경의 부분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책이 전부 영감 되었다는 것이다.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이란 사상영감(thought inspiration)이 아니라 저자가 한 단어 단어를 사용할 때 마다 성령께서 영감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경의 무오(inerrancy)를 주장하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죽산이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고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한다고 왜곡하였다. 이에 대하여 죽산은 다음같이 대답한다. “보수주의는 성경을 전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나 비유 상징적 해석은 성경의 본의를 상실한 위험이 있으므로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성경 영감관은 아무리 완전 영감, 축자 영감을 강조할지라도 기계적 영감을 역설하는 일은 없고 유기적 영감에 맞는다”. 죽산은 근본주의자들 처럼 영감에 있어서 저자의 지성과 인격과 생육환경을 도외시하고 인간은 단지 녹음기처럼 받아썼다고 주장하는 기계적 영감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죽산은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성령이 인간 저자의 지성과 인격과 생육환경을 사용하면서 오류를 방지하면서 성경을 기록케 했다는 유기적 축자영감설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신학의 형식적 원리인 성경의 영감과 무오의 기초 위에 그는 개혁신학을 4세기 니케아 신경, 5세기 콘스탄틴노플신경에서 17세기 토르트신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의 교리사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죽산은 개혁신학을 철학사와 현대신학과의 대결 속에서 변증하였다. 이러한 교리사적이고 철학사적이고 현대신학사적인 배경 속에서 죽산은 그의 신학을 화란의 정통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의 개혁신학을 틀로 하여 개혁신학 전통의 학자들, 바빙크와 카이퍼(Abraham Kuyper), 핫지(Charles Hodge)와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형성하였다. 죽산은 교의신학 제1권, 신학서론(1964년)에서 시작하여 교의신학 제2권 신론(1967년), 교의신학 제3권 인죄론(1963년), 교의신학 제4권 기독론(1970년), 교의신학 제5권 구원론(1963년), 교의신학 제6권 교회론(1973년), 교의신학 제7권 내세론(1973년)에 이르기까지 교의학 7권을 저술하였다. 여기에 그의 유명한 현대신학 비판서인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선평]이라는 방대한 저서와 비교종교학, 변증학, 신학논문들 그리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에 대한 표준성경주석 등이 있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저서들은 단편적이 아니라 하나로 엮어지는 거대한 체계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에 하나의 거대한 학문적 족적을 남긴다.

 

 

Ⅵ. 신정통주의 비판 -1930년대및 1950년대 현대주의-정통주의 논쟁 주도

 

죽산의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바로 장공을 중심으로 보수장로교회와 신학 안에 뿌리 내리려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도전을 차단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1933년 [신학지남] 사건에서 일어났다. 편집사무를 맡은 장공이 [신학지남]을 통하여 “정통주의에 대한 불평과 자유주의 색채를 문면에 나타내자” 이에 대하여 죽산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죽산이 더 이상 편집사무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죽산은 1934년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권 부인에 대한 권징을 제안하고 신학적 방어를 위하여 1935년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아빙돈 성경주석]번역 참여자들에 대하여 이들이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하도록 하는 제재와 아울러 [표준성경주석] 편집과 출판을 추진하였다.

평양 숭실대의 학장을 지낸 마포삼열은 1935년 희년 기념예배석상에서 신정통주의를 겨냥하면서 다음같이 설교하였다. “근래에 와서 교회내에서도 종종 이런 말이 들린다. 교회를 좀 개혁해야 한다. 혁신해야 한다. 복음을 전과 같이 전하면 듣는 자가 좋아하지 않는다. 새 시대에 옛 복음은 적당하지 않다. 새 시대에는 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저들의 지혜는 바울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그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아니하기로 힘썼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마포 목사는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옛 복음에는 구원이 있어도 새 복음에는 구원이 없는 데야 어찌하랴. 우리들이 바울이 전하신 옛 복음을 그대로 전할 때는 교회가 매우 왕성하였다. 무엇 때문에 옛 복음을 새 복음으로 대치하겠는가”. 우리는 죽산을 길러낸 평양 숭실의 마포삼열의 보수신앙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죽산은 신 신학과 대결할 때 항상 초대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굴종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평양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는 폐교됨으로써 죽산은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서울에서 신사참배에 응한 조선신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친일파 및 신정통주의 세력이 한국교회를 지배하였다. 신정통주의 세력은 1940년부터 해방 시에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1947년까지 세력을 장악하였다. 1946년 한상동목사를 중심으로 진해에서 정통신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성경학교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고려신학교의 전신이다.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복구를 목표로 하고 조신신학교의 개방적인 신학이념, 즉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를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신학교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이 한국에서 재현되었다. 조선신학교는 1946년 해방이후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의 총회진정서 제출을 계기로 장공의 신정통주의 신학은 문제시된다. 진정서에 나타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경관에 있어서 신구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다, 문서설을 주장한다, 성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노아홍수에 대한 역사성을 부인한다, 바벨탑 기사의 역사성을 부인한다, 여리고성의 함락은 신경전에 의한 정신적 승리라는 해석 등이었다. 교리에 대해서는 “정통주의는 위장된 인본주의, 정통적 이단”이라고 주장, “예정론은 숙명론”이라는 주장 등이었다. 진정서에 대한 답변에서 장공은 성경은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 점에서는 불오(infallibility)하지만 자연과학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까지는 무오(inerrancy)하지 않다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확인해주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논쟁에서 총회는 죽산을 필요로 했다. 죽산은 총회에서 파견한 송상석의 안내로 1947년 봉천에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죽산은 장공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하여 “그의 성경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경관이요, 교리문제에 대한 답변은 신 신학의 교리관“이라며 51인 학생들의 진정이 근거있다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죽산은 조선신학교의 개혁을 담은 개혁안을 제출하자 조선신학교는 이를 거부하였다. 고려신학교가 총회의 인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고립의 길을 걷자 총회는 1951년 구 평양신학교를 재건하는 장로회총회신학교를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죽산은 다시 총회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신정통주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정통신학의 보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52년 신사참배 문제로 고려파가 분리되어 나간후, 1953년 조선신학교룰 중심으로 신정통주의자들이 장공을 중심으로 분리하여 기장교단을 세웠다.

1947년 죽산이 귀국할 때 소수에 불과하던 지지자가 1951년에는 다수가 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 다수의 정통주의자가 소수가 되어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나야 하는 프린스턴의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 장로교에서는 정통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장공은 죽산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장공은 죽산과 그를 따른 자들을 겨낭하여 ”소위 정통장로교파의 암약에 대하여 일언“ 한다며 ”메이첸 박사를 중심으로 소위 전투적 불평주의자 그룹“이라고 하고 ”그들의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가 아니라 관념의 종교이며 성신의 종교가 아니라 책의 종교“이며, ”그리스도 시대의 바리새교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미국에서 1920년대에 일어난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이 공적 논쟁으로 일어난 것이다.

1922년에는 미국에서 침례교 출신의 뉴욕 제 1장로교회 임시목사 해리 에머슨 포스틱(Harry Emerson Fosdick)이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Can the Fundamentalists Win?)라는 설교는 프린스턴 구(舊)학파가 변호하던 성경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역사적 재림을 거부함으로써 전통적 신앙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근본주의의 대한 포스틱의 도전적 설교는 장로교가 폭이 좁다고 생각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하여 근본주의자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불신이 이길 것인가?"(Shall Unbelief Win?)라는 글로 응전하였으나 대세는 기울어졌다. 포스틱의 사건 이후에 진보주의자들이 뉴욕 어번(Auburn)에 모여서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이것이 오번선언서(the Auburn Affirmation)이다. 1924년 1월 1차로 출판할 때는 150명이 서명하였으나 그해 5월 2차로 출판할 때는 무려 1293명의 목회자들이 서명함으로써 미국장로교는 진보주의자들이 승리하였다. 그 여파로 프린스턴 신학교는 진보주의자들의 아성이 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다수의 신학파 학자들은 구학파가 가르쳤던 교과과정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하여 전면 개편하여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시켰다. 북장로교는 진보주의자들이 총회를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교단 신학교인 프린스턴에는 오번선언에 참여했던 목회자들이 이사로 기용되었다.

정통신학의 마지막 보루인 프린스턴에서 정통신학을 마음대로 가르칠 수 없는 분위기에 직면하자 메이첸 주도로 알리스(Allis), 윌슨(Wilson), 밴틸(Van Til) 등은 1929년 프린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트신학교를 세웠다. 박형룡이 프린스턴에 유학한 시기는 1923년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애서 구학파와 신학파 사이에 현대주의 논쟁이 진행되었다. 메이첸은 그의 명저 [기독교와 자유주의]을 출판하면서 “로마 가톨릭신학은 기독교의 변형일지 모르나”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므로” “자유주의는 정통기독교의 최대의 적”이라고 선포하였다. 죽산은 메이첸의 이 가르침에 접하게 된다. 죽산의 프린스턴 유학시절인 1923년 1926년 3년간은 신학적 변화의 격량 - 1922년 포스틱의 도전, 1923년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출판, 1923년 북장로교 총회의 근본진리 천명, 1924년 북장로교 1293명의 오번선언, 온건파 의 지지를 받은 찰스 얼드만(Charles Eerdman)의 총회장 당선, 1925년의 생물학 교사 스코프스(John T. Scopes) 재판사건 등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의 소용돌이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죽산은 평양의 보수신학의 체질에 맞는 보수신학의 거장 메이첸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았던 것이다.

1920년대 미국 장로교에서의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대결 근 30년 후1950년대에 한국장로교에서는 메이첸의 제자인 죽산과 포스틱의 지지자인 장공 사이에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적 대결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죽산이 신학적 주도권을 쥐게된 것이다. 장공세력은 1953년 소수파로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기장총회를 구성함으로써 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장공이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바로 장공 자신에게 붙여야 할 명칭인 것이다. 장공은 총회에서 그의 뜻이 거부되고 제명을 받자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총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이것은 메이첸이 미국 북장로교에서 제명받고 정통장로교(1936년 교단 명칭을 정통 장로교회로 바꾸었다. 창립회원은 목사 34명, 장로 17명, 평신도 79명)를 세운 것과 같은 사건이다. 단지 한국에서는 보수파가 승리하고 미국에서는 진보파가 승리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장공이 자신의 분리를 정당화하여 자칭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메이첸을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한 그의 비판은 정당할 수 없다. “분리주의자”라는 의미에서 장공의 제자인 주재용은 박형룡을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호칭이 과연 적합한지 다시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장공의 입장을 바로 규정해야 한다. 장공은 보수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바 같이 교회나 성경을 부인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는 성경의 역동적 영감과 신앙에 대한 무오를 받았다. 이런 점에서 장공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y)의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Ⅶ. 후기 죽산의 신근본주의적 경향

 

1. 죽산의 근본주의 이해: 방법적 근본주의

 

죽산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앞길을 보여주는 “지로(指路)적 신학자“였다. 1940년대에는 죽산은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가리켜 ”근본주의“ 보다는 ”칼빈주의적 정통신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는 ”복음주의 보수신앙“으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1960년부터 ”근본주의“와 동일시 한다: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근본주의는 기독교자체다.“

죽산은 근본주의를 협의(狹義)적인 의미와 광의(廣義)적인 의미로 구분한다. 협의적인 의미는 사전(辭典)적인 의미로서 1870년대 이후 형성된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전정한 기독교의 5가지 근본신조를 옹호하는 운동이다. 광의적인 의미는 “현대주의에 반대하여 교회의 역사적 신앙을 옹호하는 운동으로 성경의 무오와 개신교의 근본원리를 변호하는 운동이다. 죽산은 근본주의를 광의의 의미에서 사용한다. 죽산에게는 근본주의란 새로운 신학운동이 아니라 정통주의 신앙을 변호하는 신앙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죽산에게는 근본주의란 기독교 자체였다. 그는 그의 스승 메이첸이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선언한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에 근본주의야말로 유일한 기독교자체”라는 주장을 수용한다.

1961년 1월 예장 고신측의 잡지 [파수군]이라는 잡지에 “근본주의의 신앙”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죽산은 여기서 근본주의란 “근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무모와 신경의 고귀한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노력”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죽산의 근본주의 이해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들은 그의 입장에 동의할 수 있다. 1930년대와 1950년대의 현대주의와 정통주의 대결 가운데서 정통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지키는 그의 의도는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박형룡의 근본주의 이해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대립되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의 천명과 사수(死守)라는 방법적인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메이첸 자신도 현대주의와 대립되는 입장을 가진 자로서 자신을 근본주의자라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용어는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1940년 이후에 근본주의가 신근본주의로 변질하면서 “소수의 모반자” “시대에 뛰 떨어진 자들”, “반문화주의자”, "반지성주의자들“ 등의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20세기 후반과 특히 21세기에 들어와 2001년 모슬렘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자살테러에 의하여 근본주의 용어의 어감이 부정적인 함축을 가진 것을 모면하기 어렵다. 근본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정통주의”, “복음주의” 내지 “열린 보수주의”라는 용어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

 

2. 신근본주의 경향

 

그런데 죽산이 교회의 흐름에 따라서 근본주의를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맞추어서 규정하기는 했으나 점차 보수적인 집착증으로 흘러간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아마도 보수신앙의 지도자로서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인간 죽산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죽산 자신은 자유주의 도전에 대항하여 교회의 신앙적 순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 사고의 경향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근본주의가 1930년 이후 초창기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소진시키고 독선과 정죄와 배타적 사고방식으로 변질한 메카니즘, 즉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어갔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합동측이 1959년 WCC 참여여부 문제로 통합측과 결별한 후 1960년 이후 후기 죽산은 교회의 순결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룻된 신학으로 인한 오염의 위험 때문에 신앙사상이 다른 자들과 기독교적 교제를 나누는 것도 꺼린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 구체적인 예가 진보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WCC 참여에 대한 반대와 신복음주의 운동의 모기관인 NAE(WEF) 탈퇴 및 전투적 비판, RES 탈퇴, 빌리그래함 전도방식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이러한 죽산의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은 미국에서 1930년대 메이첸의 별세이후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형성된 미국의 신근본주의 사고와 유사하다.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는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주권과 기독교 계시를 문화와 사회적 삶에 관련시키지 않고 개인의 경건생활에 국한시키는 신근본주의였다. 이러한 변질된 근본주의는 주초문제, 전도방법 등 지엽적인 문제로 서로 비판하고 분열되는 근본주의 운동의 자기분열을 초래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도 1950년대와 1970년대에 비숫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1) WCC 참여 반대

첫째, 죽산은 1950년대 WCC 참여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WCC 참여를 반대하는 세력은 WCC 참여를 지지하는 세력과 분리되는 교단 분열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예장총회는 통합과 합동으로 나누어지고, 죽산은 통합과의 분리이후 근본주의 입장을 더욱 강조하기에 이른다. WCC 안에는 진보주의 교회도 있고 보수교회도 있다. 그래서 죽산이 선교의 방법적인 문제를 두고 여태까지의 전투적 근본주의 입장을 견지하여 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WCC에는 급진적 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이들은 주로 이끌고 나가는 일부 세력이며 대부분의 참여교회는 통합이나 대신 처럼 복음주의적 교회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신학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자유주의가 창궐하는 세계교회와 사회를 향하여 밝혀야 할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따라서 WCC 참여를 지지하는 자라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없다. 보다 개혁주의적 사회와 문화변혁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신자와 교회는 배교(背敎)사상이 난무하는 세계교회의 모임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 복음을 들고 이들에게 나아가서 세계교회를 복음으로 변혁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죽산이 교리적 순결성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연합운동을 반대함으로써 교단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신복음주의 비판

둘째, 죽산은 1970년대에는 신복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신복음주의 운동의 모(母)기관인 복음주의 연합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전투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단체는 전도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다양한 복음주의 교단들과 개인들로 이루어졌고, 메이쳔의 제자로서, 보스톤의 파크 스트리트 회중교회 목사였던 해롤드 존 오켄가(Harold John Ockenga)가 1942년 창설한 것이었다, 죽산은 NAE를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WCC 소속 교파들 안에 머물면서 개인적으로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국제적 연합”으로서 “WCC와 NAE는 결국 같은 노선을 견지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합동측은 1963년 RES(Reformed Ecumenical Synod)에 1968년 정식회원으로 기입했으나 죽산의 신복음주의 비판으로 신학적 좌경화라고 단정하여 1972년 RES에서 탈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죽산의 신복음주의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주의자 진영의 집안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오켄가(Harold Ockenga)를 중심으로 1950년대 일어난 신복음주의(the New Evangelicalism)는 근본주의 운동이 1930년대 지도자 메이첸이 서거하고 보수주의 연대가 깨어지면서 본래목적을 상실하고 소수 분리파 운동(신근본주의)으로 전락한 근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이었다.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승리할 것인가?”(Can Fundamentalism Win America?) 제목의 기고문에서 오켄가는 근본주의 사고가 지닌 소아병적 부정주의를 염려하고 자유주의의 탈선과 더불어 싸워온 가운데 이러한 부정주의가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체질화 되어버린 오늘날 근본주의의 철저한 자체 개혁이 없는 한 미국교회에서 승리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당시 부흥사였던 찰스 풀러의 자금 지원을 받아 1942년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다. 풀러신학교는 칼 헨리(Carl F. Henry), 에드워드 제이 카넬(Edward J. Carnell), 월버 엠 스미스(W.M. Smith), 에버레트 해리슨(E. Harrison), 글리슽 아처(Gleason Archer), 헤롤드 린젤(Harold Lindsell), 조지 래드(George Ladd),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 폴 케이 제워드 등의 우수한 교수진을 갖추었다.

신복음주의는 1930년대와 40년대의 근본주의운동이 신학적 역사적 학자적 자질이 결여되었고, 그리고 문서활동이 결핍되었고 교파주의, 세대주의 종말론, 반문화주의와 반지성주의 그리고 반동주의, 소수의 모반자 운동에 빠졌으며 복음을 개인적인 종교체험으로 축소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현대주의에 대하여 투쟁한 교리에 대하여 찬성하면서 단지 근본주의가 이러한 투쟁 가운데서 소홀히 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문화적 변혁의 책임을 회복하려고 했다. 칼 헨리가 편집자로 한 [오늘날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는 신복음주의 운동의 대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0년대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던 복음주의의 정신이 1950년대 이후 다시 부흥하게 되고 진보적 교단이 감소하고 자유주의도 쇠퇴하게 된 데는 이 신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산은 신복음주의를 20세기 하반기에 등장한 “신정통주의”라고 하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 “성경무오의 부정”, “유신진화론과 점진적 창조론”, “사람의 진화적 창조”, “이적 부인의 경향", ”NAE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 ”빌리 그래함을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내용을 열거하면서 ”위험한 신신학운동“, ”신자유주의운동“으로 정죄했다.

이러한 죽산의 신복음주의 비판은 객관적인 사실적 관찰이라기 보다는 그가 참고한 신복음주의에 관한 자료들이 미국에서 신복음주의운동을 반대하는 소위 근본주의 진영에서 나온 출판물에 근거하고 있다. 그 예가 죽산의 비판적 견해는 신복음주의가 “신정통의 일반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평한 에릭슨(Millard Erickson)의 견해와 신복음주의운동을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 보다 더 위험한” 운동이라고 본 우드브리지(Charles Woodbridge)의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복음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죽산의 비판 가운데는 근거가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신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성경의 영감이 바로 무오를 강요하지는 않다”고 한 해리슨(Everett Harrison), 그리하여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구분하는 풀러(Daniel Fuller), “원본 무오” 사상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뿐이라는 내쉬(Ronald Nash), 무오를 역사적 사실이나 문법적 구조 등 지엽적인 문제까지 확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라이트너(Robert P. Lightner), 성경을 현대과학에 비추어 해석하고자 하면서 “점진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램(Bernard Ramm), 처녀 탄생에 대해 과학적 이해를 시도하고 진화과정 자체를 하나님의 창조과정으로 보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을 수용하고 메이첸의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분리주의적 사고”로 규정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 카넬(Edward J. Carnell) 등에 대한 죽산의 비판을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경무오와 영감교리를 유보한다고 하여 “신현대주의자”(new modernist) 내지 “신자유주의자”(new liberalist)로 정죄하는 것은 독선적이며, 폐쇄적인 신근본주의 부정적 사고방식의 태도이다. 후기의 죽산은 자기도 모르게 교회의 정화와 교리의 순결성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와 다른 자를 정죄하는 지경에 빠졌다.

 

3) 복음주의운동의 지도자 비판

셋째, 죽산은 [기독교 근대신학 비평]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운동까지 비판하고 있다. 죽산은 이 운동이 “첫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역사적 분계선을 파괴하려는 고의적 조직적 시도”로서 “헤겔의 정, 반, 합의 원리를 따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종합의 상징”이며, 둘째, 빌리 그래함 정책은 모든 분리운동에 직접적 반항이 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죽산이 이러한 신복음주의자, 특히 칼 헨리나 빌리 그래함 등을 WCC의 민권투쟁, 빈민행진 같은 과격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참가하여 협력하는 사회복음주의자로 정죄하는 것은 미국의 1940년대 신근본주의가 보여준 부정적 사고방식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모든 신복음주의자들이 성경무오나 영감에 유보적인 것은 아니다. 칼 헨리나 빌리 그래함, 가이슬러(Norman L. Geisler) 등은 성경무오와 영감 등 기독교 근본교리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마스덴(George Marsden)이 그의 저서 [근본주의 개혁](Reforming Fundamentalism)에서 말하고 있듯이 새로운 방향에서 복음주의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며 스스로를 근본주의자로 인식하면서 경직된 복음주의에 활력을 주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신근본주의자들이 망각한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환기시키고 학적 근거를 갖춘 복음주의를 역설한 자들이었다. 1950년대 역사적 복음주의운동을 새롭게 전개한다는 뜻에서 오켄가가 “신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나 1960년대 들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신(Neo)이라는 접두사가 가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컸기 때문에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신”이라는 접두사를 빼고 본래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1940년대의 복음주의, 즉 신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로 분류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1979년 시카고 ICBI 선언에서 보여주듯이 성경무오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4) 분리주의적 입장

교리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죽산은 신복음주의를 비판하면서 ”신복음주의자들이 WCC의 포용주의와 관용을 비평하는 동시에 ICCC의 배타주의와 협량을 비난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죽산은 WCC의 포용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ICCC의 배타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옳지 않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은 그의 스승 메이첸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이다. 극단한 분리주의는 1930년대 메이첸의 별세 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신근본주의의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간하배(Harvie Conn)는 ICCC적 근본주의 운동을 20세기 초엽의 근본주의운동과 구분하여 신근본주의(Neo- fundamentalism)로 규정하고 있다. 메이첸은 정통교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싸우는 근본주의자였지 신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부인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재림론의 차이, 세례의 방식의 차이나, 성례의 효과에 대한 견해 차이나 심지어는 가톨릭일찌라도 “그러한 지엽적인 차이라면 기독교적인 교제(christian fellowship)를 나누는 일은 지극히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메이첸이 세운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도 개혁신학을 소유한 성공회 신부 필립 휴스(Philip E. Hughes)를 방문교수로 초빙했고, NAE의 지도자 칼 헨리(Carl F. Henry)를 특별강사로 초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역사적 복음주의자들, 웨슬리(J. Wesley), 휫필드(Whitefield), 피니(Charles Finney), 무디(D. L. Moody), 선데이(Sunday) 등은 전도를 위한 집회만은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5) 국제적 고립화

죽산은 전기에서는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의 침투를 막아내는 데 까지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후기에 세계교회 연합운동에 참여까지 거부함으로써 한국교회가 그 복음적 영향력을 세계교회에 미치는 데 소극적이었다. 죽산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와 국제적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입장에 대하여도 부정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1942년에 설립된 복음주의 단체인 NAE, RES 등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관계도 단절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신세계와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일차적인 복음주의적 선교의 사명에서 물러선 순결성 보존이라는 콤플렉스(complex)에 빠진 고립적인 태도라고 하겠다. 현대주의와 배교주의가 밀려오는 시대의 예언자로서 죽산은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분리주의적 태도는 그가 초지일관 가졌던 개혁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이었다. 이러한 후기 죽산의 신근본주의적 경향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총신 교수들 사이에 서로가 신(新)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집안싸움의 사고방식을 길러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국에서 1920년대 초반까지 다수를 이룬 근본주의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포용주의에 자리를 내어주었고 1930년대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폐쇄주의와 분리주의로 흐른 나머지 미국의 사회와 문화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는커녕 신근본주의라는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30년대 이후 근본주의는 소수의 분리주의로 전락하였다. 한국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이 사회문화적 변혁에 관심이 없고 독선과 자기와 다른 자에 대한 비판과 비난과 분쟁과 분열(1952년 고신분열, 1953년 기장 분열, 1959년 통합측 분열, 1980년 합신측 분열, 80년대 광신측 분열과 2005년 복귀 등)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1930년대 이후의 미국의 근본주의의 패배가 한국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6) 사회적 문화적 책임 도외시: 문화신학으로서의 개혁신학의 전개 미흡

후기 죽산의 이러한 신복음주의 비판은 신복음주의가 다시 일깨웠던 사회적이고 문화적 책임 의식과 수행도 사회복음주의라고 정죄하는데 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보수교회가 1960년대 70년대 독재와 유신체제 속에서 고통하는 한국사회에 대하여 묵인내지 침묵하도록 하는 현실방관주의 내지 영합주의로 나아가도록 했다.

후기 죽산의 신근본주의의 경향은 개혁신학을 문화신학으로 꽃피우는 사명을 다하는 데 미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화란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 글라스 스킬드, 미국의 리처드 니버 등은 개혁신학을 문화신학으로 전개하였다. 신학이란 교리만을 지키는 교의신학에 머물지 않고 이 교리를 오늘날의 시대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도전하는 세속의 사이비종교와 아울러 각종 문화적 물결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하여 그 의미와 윤리와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1935년 초판을 내고 1975년 증보판을 낸 죽산의 저작 [기독교 근대신학난제 선평}에서 전개하였던 진화론, 마르크스주의, 세속화 신학, 상황윤리, 정치신학 등 현대의 사조에 대한 변증신학의 작업은 후기에는 죽산의 신근본주의 경향으로 인하여 일면적인 비판작업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쉽다. 개혁주의적 대안인 적극적인 문화변혁의 신학이 대안으로 제시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맹용길은 죽산의 이러한 사상을 역사의식이 부재된 “하늘의 독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주재용 역시 박형룡은 비정통주의 신학을 “비판과 반대를 하기 위해 인용할뿐,” “자기의 신학을 감히 창작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근본주의적 경향은 적극적인 사회참여신학과 개혁주의적 정치신학이나 문화변혁 신학을 제시하는 계기를 제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보수교회는 1970년대 현대 한국의 급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당시(유신정국 하에서) 독재적 정권에 침묵내지 굴종하는 비예언자적 태도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죽산의 신학에 독창성이 없다고도 비판하나 이것은 신학의 첫 세대로서 “벌코프의 화원에 바빙크, 핫지, 워필드의 꽃들을 옮겨심은 것”이라고 죽산 자신이 밝히고 있다. 신학의 토대가 없는 한국교회에 죽산은 벌코프(Louis Berkhof)나 바빙크(Herman Bavinck) 같이 칼빈주의 개혁파 정통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것을 일차적 사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독창적으로 발전 계승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서구 개혁신학의 한국적 발전과 전개는 이제 우리 세대의 과제로 주어진 것이다.

 

 

맺음말

 

죽산은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비평을 하지 않으면서 한국교회의 장래를 걱정하여 신(新)신학과 이단 사설을 공격하고 정통사상을 확립하는데 공헌한 신학적 거성이다. 죽산은 그의 시대적 상황에서 현대주의의 침투 속에서 자신을 한국의 메이첸이라고 느끼고 칼빈주의적 정통신학을 변호해야겠다는 사명을 실천하였다. 죽산이 당시 [신학지남]에서 발표한 경고는 오늘날에도 타당하다. 그 경고란 오늘날 새 세대들이 외국 가서 신 신학을 배워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개혁정통신학의 보고를 깊이 연구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죽산이 한국 개혁신학에 끼친 영향이란 이러한 현대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는 보수주의와 개혁주의의 심각한 신학적 위기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5대 근본교리(Five Points Essentials)(성경의 무오, 이적의 초자연성,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와 사도적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을 변호하고 정립한 일이다. 죽산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신앙을 변호하려고 했지 근본주의 태도나 사고를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죽산이 변호하려는 것은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변호하려고 했던 기독교 신앙의 [근본진리들}(The Fundamentals)이었다. 죽산은 정통주의 신학에 이것을 단지 머리로만 변호하려고 하지 않고 경건과 정열로서 받으려고 하였던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학은 단순한 사변적 정통주의가 아니라 청교도적 개혁신학이었다.

그러나 죽산이 교리의 정체성 보존에 너무나 열정을 쏟은 나머지 1960년대 이후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자처하고 1970년대 이후에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시대의 아들로서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근본주의 태도나 사고방식이 아니라 복음주의요 개혁주의요 사도적 신앙이며 정통주의이며 역사적 칼빈주의이다. 이것은 간단히 “개혁주의적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고 부른다. 죽산은 이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를 변호하기 위하여 근본주의를 표방하면서 투쟁한 것이다. 2000년대 초 총신에 있는 몇 교수들 사이에 있는 신학적 논쟁은 죽산이 당면했던 현대주의와 근본주의라는 기독교의 사활을 거는 논쟁이 아니라 서로를 먹칠하는 너무나 명분없고 한심한 논쟁거리였다. 이제 이 부질없는 논쟁이 정리 되고 있으니 한국교회와 신학을 위하여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신학이 초기 죽산이 싸웠던 그 선한 싸움, 교회의 사도적 전통과 교리를 지키는 이 선한 싸움에 오늘날 우리는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후기 죽산이 남겨놓은 신근본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그가 초기에 보여주었던 그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승해 나가야 하겠다. 이제 새 천년에 이미 들어선 우리는 이 선한 싸움에서 호전적 비판보다는 균형과 안정과 긍정을 중시하는 완숙하고 원만한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우리에게 죽산의 후기의 신근본주의적 경향을 제외하곤 죽산의 조직신학은 모든 한국교회와 신학이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할 보고이다. 그의 아들 한국 핫지 박아론을 중심으로 죽산의 신학은 계승되고 있다. 우리 모두 죽산이 남겨준 신학적 보고를 발전시켜 새 천년을 향한 한국적 복음주의, 정통적 개혁신학을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정통적 개혁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의 경건과 신앙의 열정을 오늘날의 영성으로 계승하는 영성신학이다. 이것은 열린 보수주의요, 진지한 대화를 향하여 개방되고 논리를 진지하게 다루는 신학이요, 자기 독선에 빠진 신학이 아니라 상대방의 다름을 경청하는 포용과 설득과 관용의 신학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안에서 병든 문화의 변혁을 가져오는 문화신학이며, 소외된 개체생명과 오염된 환경의 치유를 가져오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대립과 갈등의 화해와 공생과 영생을 증언하는 생명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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