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박형룡의 성경관과 한국 장로교 - 김재준과 벌인 성경관 논쟁을 중심으로

첨부 1


박형룡의 성경관과 한국 장로교:

김재준과 벌인 성경관 논쟁을 중심으로

 

 

김지찬 교수(총신대, 구약신학)

 

 

 

 

 

Ⅰ. 들어가면서

 

1. 박형룡-김재준의 성경관 논쟁

 

박형룡의 신학을 한국 교회사라는 문맥 안에서 다루면서 구약 신학적 입장에서 논하려면 성경관을 놓고 벌인 김재준 교수와의 논쟁을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논쟁은 김재준이 창세기 1 장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함으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관 논쟁은 두 사람의 신학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였을 뿐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에 획을 그은 논쟁으로서 한국 교회의 여러 교단의 고백적 정체성을 결정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김재준 교수 편에서 이 논쟁의 핵심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교수는 이 논쟁을 “자유주의 신학 대 정통주의 신학의 논쟁” 이라고 규정하면서 성경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이 논쟁의 핵심이라고 밝힌다.

 

“박 박사는 진정 선교사들의 신학, 즉 율법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정통신학 (미국에서 형성된 근본주의 신학)을 확보하려고 했고, 그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신학을 수립하려고 했다.” ...

 

“즉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은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과 같이 성서의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을 그 신학 사상이 이대근간 사상으로 삼고 발전되었다. 이것은 후에 나타나듯이 장로회 총회가 성서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유일의 척도로 하고 새로운 신학 사조에 대한 검토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신학 계열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철저한 성경 문자 무오설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데 있다. 이것은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막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 신학의 절대화로 계속적인 교회 분열을 가져오게 되며 (그것은 비성서적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화의 기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성서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결국 주재용은 박형룡의 신학이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막은 공로는 있으나,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율법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정통신학이 한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주재용의 이런 평가는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교단의 기본 입장임을 알 수가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 changgong.or.kr/home.htm)에는 기장 교단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53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성경 해석, 곧 김재준 목사의 새로운 '성경연구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순수한 신학적 이유 외에 더 많은 비본질적 요소들이 상승작용을 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적 교회사 사건이었다. ...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숫자라는 힘으로 단죄하고 추방시켜버린 결과로 기장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신학교 설립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장은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가는 교단이다.” (강조는 필자의 첨가).

 

기장은 보수주의자들이 축자 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 신학을 가지고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숫자로 단죄한 교권주의의 횡포로 보고 있다.

 

2. 문제 제기와 논지, 그리고 절차

 

주재용과 기장의 주장은 박형룡의 신학의 핵심인 성경 무오설과 축자적 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이런 박형룡의 율법주의적 정통주의가 교권주의자들과 함께 한국 장로교 교회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옳은가? 과연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인은 박형룡의 성경관에 그 원인을 돌려야 하는가?

본고의 논지는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며, 한국 장로교 분열의 원인과 책임은, 만일 우리가 물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한국 교회를 성경유오설로 흔들어댄 김재준에게 더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역사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누구에게 장로교의 분열의 원인과 책임이 있는지를 굳이 물으려고 한다면, 최소한 박형룡과 김재준 모두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김재준이 박형룡을 공격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상세히 살펴보고, 과연 박형룡의 신학이 그러한 공격을 받을만한 성격의 것인지를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미래 한국 교회를 위해 박형룡-김재준의 성경관 논쟁의 아쉬운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Ⅱ. 김재준의 박형룡 비판

 

1. 축자 영감은 불경건이요 비진리

 

김재준은 박형룡을 비롯한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문자 무오설”을 기계적 영감설로 이해하고 있다. 1949 년 11 월 “대전 전후 신학 사조의 변천” 이란 제목으로 행한 “제 1 회 장로교 청년 전국 대회 초청 강연”에서 김재준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정통주의 신학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후까지 지키려는 아성은 ‘성경 문자 무오설’입니다. 즉 성경이란 책은 하나님이 부르고 사람이 그대로 쓴 것인데 기계적인 영감에 의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잘못 부를 리가 없고 사람이 잘못 썼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문자적으로 일점 일획이라도 틀릴 수 없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신자라 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김 재준의 이 같은 입장이 박형룡에 대한 단순한 오해인지 아니면 후에 박형룡이 비판한대로 “승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짚 인형을 만들어 세우고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모략”, 다시 말해 의도적 전략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찌되었든 김재준은 축자 영감설을 기계적 영감론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서는 상당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김재준은 1950 년에 “십자군” 지에 발표한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 이라는 논문에서는 축자 영감설의 기원을 접신 (接神) 으로까지 보고 있다.

 

“하나님이 최대한 활동하고 사람은 최소한으로 활동하는 경우에 영감은 더 커진다고 믿는 것이 보통 민속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영감이란 것은 그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주 기계처럼 되어서 자기 의식까지 잃어버리고 접신하였다는 무당같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강조는 필자의 첨가). 이런 생각에서 소위 축자 영감설이 생겨난 것이니....”

 

축자 영감설의 기원을 접신으로 보는 모습에서 우리는 김재준이 축자 영감설에 대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알레르기 반응을 넘어서서 축자영감설을 희화화하여 조롱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김재준은 축자 영감설을 성경 자체의 성격에 근거하지 않은 학자들의 억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성서 절대 무오설 즉 성서의 축자적 무오설을 수립하기 위하여는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이 요청되며 따라서 축자 영감설이 득세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비위에 맞는 어떤 학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그 학설에 맞추어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것은 불경건한 태도임과 동시에 불진실을 초래할 것이다.”

 

김재준은 축자 영감설을 불경건한 태도요 비진리라고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김재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의 축자 영감설을 “사이비적 경건” “문자적 광신” 으로 맹 비난하고 있다.

김재준은 단순히 성경 무오와 축자 영감설을 가지고 성경에서 교리만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부 정통주의자들의 우매한 행동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성경 무오설과 축자 무오설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왜 문자와 의문의 전통의 무거운 짐을 기어코 지우려는가? 성경 절대 무오설을 믿어야 그리스도교가 권위 있게 되고 교회도 잘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 성경 축자 무오설에 그리스도교를 붙들어 매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친구가 아니다 (강조는 필자의 첨가).“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과 예장과 기장으로 분열하는 시점을 전후로 정통주의의 성경 무오설과 성경 축자 영감설을 주 공격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비판의 강도가 날카로울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박형룡과 총회로부터 “자유주의자” 로 정죄된데다가 교단이 분열되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이런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김재준의 축자 영감설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감정적이요 공격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 김재준은 한국의 보수 정통주의의 핵심인 “성서 축자 영감설”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고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김재준은 성경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김재준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 문자 무오에 두기보다는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정통주의 신학이 그동안에 그리스도교의 많은 근본적 진리를 보수해 온 공적이 크다 할 수 있으나 지금에 와서 성경 문자 무오설을 최후의 아성으로 삼아 성서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것은 심한 오산일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기록의 무오에 두지 않고 살아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수립하는데 성공한 오늘날에 있어서 승산 없는 옛 싸움을 반복하는 것은 자력 소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근본적인 진리는 대개 다 신정통 학파에서 시대적인 무기로 장비시켜 재 등용하였으므로 그리 격분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재준은 극단의 정통주의와 극단의 자유주의를 둘 다 배격하면서 소위 “신정통신학” 의 성경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이들 (신정통주의자)은 성경 비판학을 전적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데는 추호도 동요 없이 확신합니다.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중심으로 한 신앙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이들을 가리켜 신신학이라 부르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을 사변적인 정통주의신학자라고 평합니다.”

 

결국 김재준은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을 가지고 박형룡의 축자 영감설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정통주의의 사이비적 경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2. 성경 무오설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음

 

김재준은 축자 영감성은 성경 무오설은 성경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7 년 51 명의 조선 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의 가르침에 대한 불만을 제 33 회 총회에 호소문의 형식으로 제출한 것을 보면 김재준이 성경 유오설을 강의실에서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 는 신조 위에 조선 장로 교회는 섰고 이 신조는 조선 교회 안에 영원히 보수되어야 할 우리들의 가장 순수하고 복음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타는 소명감에 모여 장로회 총회 직영 신학교인 조선 신학교에 적을 두고 성경과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지 년여에 우리가 유시로부터 믿어 오던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혀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에 총회는 8 명의 심사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가 요구한 성명서에서 김재준 목사는 성경의 절대무오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위원회 앞에서는 이 절대 무오는 문자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자연, 역사, 과학에서까지 무오한 것은 아니라면서, 무오를 신앙과 행위에 제한 시켰다. 궁극적으로는 김재준은 성경 유오설을 이야기한 것이다. 실제로 조사 위원회와 김 교수의 문답을 보면 김 재준의 성경의 오류를 강의 시간에 이야기 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성경의 유오성을 믿고 있었다.

 

“문: 김교수 진술서에 의하면 성경의 오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답: 있는 것을 없다고 하겠습니까?

문: 어떤 부분에 오류가 있습니까?

답: 창세기 1 장에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에 있고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다고 하는 말이나, 땅이 기초를 두어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비과학적이 아닙니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성경의 무오설에 대해 비교적 수세적 공격의 모습을 보이던 김재준은 기장의 분열이후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박형룡 박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공세적 공격의 자세를 띄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제 성경 무오설을 문자적으로 변증하기 위하여 애쓰신 박형룡 박사의 소론을 참고해 보기로 한다. ... 그러나 이어서 그는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 고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이 과연 과학적으로 절대 정확하다면 왜 ‘과학 교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 천문 지질 생물 등에 관한 문구가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통속적 또는 시적 표현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오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의 본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사유의 범주를 혼동함으로 말미암아 용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적’ 이라는 말과 ‘통속적’ 이라는 말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용어가 아니다. 통속적으로 탓할 것이 아니라고 과학적으로도 탓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론은 서지 않는다.

 

가령 창세기 1장에 있는 대로 본다면 땅은 태초에 혼돈 무형한 원시해 (原始海) 로 싸여 있는데 하나님이 그 물 가운데서 궁창 (딴딴한 유리 같은 물체)을 만들어 위로 떠 받치니 그 원시해가 궁창 위엣 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지고 궁창 아랫물은 한데로 몰려 바다가 되고 육지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 궁창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달아 놓아 땅을 비취게 하였다. ‘땅은 물 위에서 떠서 동하지 아니하며 궁창의 벽은 지주에 의지하였고 땅속에 음부가 있어 별세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가 있다’ 는 등의 생각은 통속적으로는 별로 따질 것이 없으나 이것을 과학적으로 검토할 때에는 결코 정확하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통속적’ 의미에서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학자의 관심처가 아니니 만치 그대로 통과할 것이나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 고 장담한다면 그때에는 천문 지질 생물 등 부문의 과학자가 각기 실증 과학의 척도를 가지고 재일 것이니 거기에 맞지 않는 때에는 ‘오류’ 로 딱지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해가 동에서 떠나 서로 넘어간다’ 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나 순정 과학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적으로는 ‘오류’인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 고 이야기하는 박형룡의 입장이 “과학적 오류가 있다” 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변호와 변증이 아니라, 마치 성경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적극적인 주장인양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박형룡은 성경 유오설에 대항하여 성경의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변증하는 자세로 성경 무오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류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난제” 로 보고 때로는 과학 등의 지식이 발전되기까지 지켜 보자는 태도로 성경에 대한 경외의 자세를 지속적으로 견지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재준은 창세기 1 장에 나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앞서 살핀 대로 총회 조사 위원회 앞에서 뿐 아니라 조선 신학교 이사회 앞에 보낸 진술서에서도 이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양선은 김재준 교수가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고 인정하고 있다.

 

“동 진술서는 주로 성경관과 교리 문제에 대한 변해 (辨解) 인데 될 수 있는대로 일반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매우 온건한 태도를 표시하였으나 자유주의 신학자로서의 태도를 엄폐 (掩蔽) 하거나 부인하지 아니하여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김재준은 성경에 과학적-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확신이 너무 컸기에 성경의 문자 무오설과 성경 축자 영감설은 “사실은 성경 정신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고 보았을 뿐 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사기로 까지 본 것이다.

 

“내가 성서 문자 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것인 까닭이다. 성경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 이다. ... 또는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또는 문장적 오류가 다소 있다고 말한데서 무슨 큰 일이나 난 것 같이 야단 법석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성경에 원본은 없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사본이 원본가 꼭 같다고는 못할지라도 크게 틀린 것은 없으리라고 믿고 보면 사실 성경에는 문자적 오류 과학적 역사적 등 부분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오류는 오류인 것이다.”

 

결국 김재준은 성경의 문자 무오설은 성경 자체의 사실과 다르기에, 문자 무오설은 “경건한 기만” 이라고 비판한다. 김재준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입증하려는 태도로 성경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변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박형룡의 입장을 “경건한 사기”로 까지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해 확고한 무오설을 가지고 있는 박형룡을 학자적 양심으로 보기 보다는 경건한 사기로 본 것은 어떻게 보아도 지나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박형룡의 공격으로 인해 본인이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실존적으로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재준의 공격은 도를 넘어서는 느낌이 든다..

 

3. 김재준의 비판: 요약

 

김재준의 박형룡 신학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음과 같다.

 

(1) 박형룡의 축자 영감설의 기원은 무당의 접신 (接神) 같은 기계적 영감설이며, 축자 영감설은 거짓 학설을 성경으로 입증하려는 불경건한 태도요 더 나아가 사이비적 경건이다.

(2) 박형룡의 성경 무오설은 오류가 분명하게 있는 성경 자체의 사실과 맞지 않는 이론으로 경건한 기만이기에 비복음적이다.

 

우리는 박형룡의 성경관이 김재준의 이러한 공격을 받을만한 성격의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Ⅲ 박형룡의 성경 무오와 축자 영감설의 진의

 

1.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

 

박형룡 박사가 성경 무오와 축자 영감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이를 비판하는 것을 정통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들인 박아론 교수는 박형룡의 신학을 "성경 무오 사상에 입각한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 이라고 정의할 정도이다. 실제로 박형룡은 성경을 절대 유일의 무오한 진리 기준으로 삼았다

 

“영원한 종교적 진리에 관한 최후의 단언을 내릴만한 권위는 절대적이요 불변적인 소위 인식학적 권위가 아니면 안된다. ... 절대적인 인식학적 권위는 오직 천계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에 있는 것이다. 순전히 성경에 따라서 거기 기초하고 거기 부합하는 종교적 의견이면 옳은 의견 즉 정통 신앙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교회의 교의를 제정함에 있어서 다수인의 권위나 선생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 바 아니다. 그러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다. 그 의견이 성경과 합하느냐 않느냐를 상고하여 성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의견을 정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있기에 박형룡은 성경의 권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이는 신학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한 것이다. 물론 박형룡과 당시 교단 총회가 오직 성경에만 부합하는 의견으로서 “정통” 의 모습을 삶과 신앙 행위에서 항상 드러내 보였느냐는 문제는 쉽게 다룰 문제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교회 역사가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여기서는 단지 박형룡이 최소한 성경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의견을 “정통” 으로 보았기에 성경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이 판단한 이론에 대해서는 정통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때로는 “자유주의” 로 판단한 것을 지적하려는 것 뿐이다.

 

2. 축자 영감설은 언어적 영감을 강조한 것

 

박형룡은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였기에, 성경의 권위를 드러내는 성경의 축자 영감을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형룡은 김재준이 주장하는 대로 축자 영감을 기계적 영감으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계적 영감으로 보는 것은 오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축자 영감은 필연적으로 기계적 영감을 의미한다고 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령의 지도가 용어의 선택에 미쳤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나 그 지도는 오히려 기계적 방식으로 공작하지 않았다”

 

한 걸음 더나아가 박형룡은 축자 영감을 기계적 영감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공격이라고 지적한다.

 

“이 이론은 축자 영감을 믿는 신자들에게 불공정히 또는 고집스러히 돌리어 그들의 부절한 거부에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 아래 온다. 이것은 승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짚 인형을 만들어 세우고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은 모략이다. (강조는 필자의 첨가) 17세기의 어떤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이 이 같은 견해의 풍미를 가진 표현들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시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계적 영감관을 재가하는 인정된 신앙고백서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보면 김재준이 축자 영감설을 기계적 영감설로 이해하고 공격한 것은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 전략의 하나이거나, 최소한 박형룡의 성경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박형룡이 성경 축자 영감을 강조한 것은 김재준이 비판하는 대로 성경의 권위를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에서 찾지 않고 “기록의 무오에 둔” 것이 아니다.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기록의 무오를 분리시켜 대조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박형룡은 사상을 그리스도와 기록의 무오를 대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사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영감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뿐이다.

 

“축자 영감의 교리는 기술한 바와 같은 견실한 성경적 증명에 추가하여 상당히 공고한 추론적 증명을 가지고 있다. 영감은 하나님의 계시하신 사상을 정확히 전달케 하기로 의장 (意匠) 되었는데 문자들의 정당한 사용이 없이는 사상의 정확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 ‘사상들은 단어들에 있다. 이 둘은 나누일 수 없다. 만일 제사 (祭司), 제사 (祭祀), 대속물, 보상, 화목제물, 피에 의한 정화 같은 말들이 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하면 그 말들이 체현하는 교리가 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Charles Hodge, op.cit., 164).' 사상들과 문자들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단어들에 변동은 사상에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상사다.”

 

박형룡은 만일 성경이 어떤 의미에서든 영감되었다면, 이는 언어적으로 영감된 것 (verbally inspired) 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 뿐이다. 성경의 내용을 담은 가죽이나, 종이나, 아니면 내용을 적은 잉크가 영감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영감된 것은 가죽이나 종이나 잉크가 아니라 거룩한 본문의 메시지이고, 이 메시지는 다름 아닌 단어들을 (words) 통해 전달된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주격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에 물상화 (物相化한) 의문 (儀文) 을 믿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잘못된 대조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느냐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의문에 불과한 성경 대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반대가 사실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박형룡이 축자적 영감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경이 그 문자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어 무오하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모든 성경 (γραφη) 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바울은 “성경” 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inspired of God) 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여기서 “성경”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그라페 (γραφη; graphe) 는 "쓰다“ 는 헬라어 동사 ”그라포“ (grapho) 의 명사형이다. 결국 ”모든 쓰여진 것“ 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기록에서 ”쓰여진 것“ 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단어들이 아닌가? 결국 단어들로 쓰여진 성경이 영감되었다면, 성경의 단어들이 영감 받았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재준이 말한 것처럼 축자 영감설은 성경의 성격과 맞지 않기에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건한 사기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박형룡은 바울이 말한 성경의 영감 주장을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 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박형룡의 글을 직접 살펴보자.

 

(1) 유기적 영감

“성경이 보여주는 영감의 방식은 유기적 (有機的) 방식이다. 유기적 영감이란 명사는 감력적 영감 (dynamic inspiration) 이란 말과 교대적으로 사용되는 때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용법이 아니다. ‘유기적’ 이란 말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기계적 방식으로 (필기자가 붓을 임의로 두르듯이) 사용치 않으셨고, 기록시키려는 단어들을 그들의 귀에 불어넣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의 내면적 실유의 법칙과 조화되는 유기적 방식으로 동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경의 영감은 무생명한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그들의 성격, 성벽, 재능, 교육, 수양, 용어, 문체대로 사용하신 유기적 작업이다.“

(2) 완전 영감

“‘완전 영감’ 은 ‘성령의 충분하고 충족한 감화가 성경의 모든 부분들에 확장되어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적 계시로 만든 결과 그 계시는 사람의 마음들과 의지들을 통하여 오되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 축자 영감

‘축자 영감’ 은 ‘거룩한 저자들을 둘러싼 신적 감화는 일반적 사상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문자들에도 확장된 결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기로 의도하신 사상들이 무오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것, 저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말씀하였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관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1).

 

박형룡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사상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문자에까지 영감이 되게 하신 것으로 본 것이다. 언어적 영감이란 단어들의 실제 형태와 용도와 연관된 개념이다. 다시 말해 문장 안에 명사, 동사, 전치사, 정관사들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을 인도하여 이들이 사용한 모든 언어적, 문법적 형태와 문체까지도 조화롭게 신적으로 인도하여 진리의 세밀한 의미들을 전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축자 영감이란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축자” 란 단어의 의미를 너무 기계적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김재준 교수가 “성경의 권위를 성경 문자 무오에 두기보다는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문제가 있다.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문자의 미로 속을 신물나게 다녀 본 사람이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문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문자가 담고 있는 정신을 이야기할 능력이 있을까? 이런 점을 강조하는 용어로 “축자 영감” 이 정확하다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강변일까? 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심도 있게 주해해 본 사람은 누구나 문자 위에 기초해 있지 않고는 결코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3. 성경 무오설과 변증적 태도

 

박형룡이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재준이 주장하는 대로 “경건한 기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한 변증의 자세에서 주로 나온 것이다.

 

성경에 오류가 많다고 하는 말은 성경의 정통적 권위를 부인하고 그 권위의 소재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전용적 주장이다. ...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또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성경의 과학적 오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는 성경의 자연 현상에 관한 기사가 현대의 자연과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 기독자와 함께 이를 공격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저 머리를 숙이고 성경은 자연과학과는 부합하지 않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로다 하고 수수 방관할 바가 아니다.”

 

박형룡은 적극적 의미에서, 다시 말해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공격을 하니까 이를 변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한 것이다.

 

"구약의 어떤 구절들에 천문, 지질, 생물 등에 관한 문구들이 기재되었으나 그 기록의 본의가 과학적 해설을 시도하려는데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발현과 권능의 표현을 묘사함에 있어서 통속적, 또는 시적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엄정하기로 이것을 이해치 못할 까닭은 없을 줄로 안다. ... 즉 성경은 과학과 더불어 충돌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직 불완전하여 진리의 경에 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성경이 말한 바 자연관을 정당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과학이 현대 보다 좀 더 진보할 수 있다면 장래 어떤 시기에는 결국 성경과 합치하게 되리라고 관측하고 있다.“

 

박형룡은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문자적 의미가 과학적 진리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박형룡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이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라는 점과, 과학이 진보하면 후에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과학과 상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능하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려고 한 것이다.

김재준 교수가 자꾸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박형룡 교수가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하는 것이나 결국은 자신의 확신과 학자적 양심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김재준 교수는 성경은 과학서가 아니니까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박형룡 교수는 과학서가 아니니까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학서가 아닌 성경을 가지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김재준 교수의 태도는 자기 말로 경건이고, 과학서가 아닌 성경을 가지고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박형룡의 태도는 불진실이요 경건한 사기인가? 과학서가 아닌 성경에 과학이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고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불경건이 아닌가? 성경이 과학서가 아니기에 성경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경건한 것이 아닌가?

 

4. 창세기 1 장과 과학

 

최근에 구약 학자들은 김재준 교수가 이야기하는 대로 창세기 1 장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커녕, 과학적 연구를 지지하고 있다고 본다. 창세기 1 장은 반복과 대칭의 문예적 기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는 땅을 조화롭고 질서 있게 창조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 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연구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고든 웬함 (Gordon J. Wenham_ 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내리고 있다. Genesis 1-15, 39:

 

 

“최근에 창 1 장은 자연 과학의 연구 노력에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다양하다 못해 자의적인 체험 현상 아래에 통일성과 질서가 깔려 있다는 자연 과학적 연구의 전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논리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제하시는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창세기 1 장의 주장 위에 놓여 있다. 이런 전제만이 경험적 방법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자의적인 수많은 신들에 의해 통제된다거나, 단순히 우연에 지배된다면, 경험적 방법에 의한 결과에서 어떤 통일성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어떤 과학 법칙도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창세기 내러티브가 창조주의 창조의 일관성과 목적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은 기법, 즉 다양한 창조 행위들을 육일로 나눈 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함으로서 마치 과학과 성경이 서로 다투고 상충하는 것 (서로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으로 만든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제대로 이해를 하면 창세기는 자연의 통일성과 질서라는 과학적 체험을 정당화시켜준다. 6 일의 틀은 창조 안에 내장된 체계와 질서를 강조하기 위해 창 1 장에서 사용된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반복되는 공식, 단어들과 어구들은 열 혹은 일곱 개씩 나오도록 반복한 것, 키아즘과 인클루지오 같은 문예 기법, 창조 행위들은 서로 상응하는 그룹이 되도록 배열한 것등이 다른 여러 수단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재준이 총회의 조사 위원회에서 “창세기 1 장에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에 있고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다고 하는 말이나, 땅이 기초를 두어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비과학적이 아닙니까?” 라고 한 것은 위의 주석적 결과에 따르면 옳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김재준은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받아들인 것이다. 김재준은 성경의 과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 ‘땅은 물 위에서 떠서 동하지 아니하며 궁창의 벽은 지주에 의지하였고 땅속에 음부가 있어 별세한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 가 있다’ 는 식의 표현은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는 문자주의적 해석을 김재준 스스로 하고 있는 자가 당착을 본다. 얼마든지 비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굳이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 후에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는 것을 주장을 공세적으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다른 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통주의에 대한 실존적 반발이 기저에 깔린 것은 아닐까?

 

5. 김재준의 자가당착

 

김재준은 박형룡의 축자 영감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면 굳이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그 (박형룡 박사)는 성경에는 과학적 오류가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절대 정확하다면 왜 ‘과학 교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는가?” (99)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재준은 자신이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확립하자. 그리고 우리는 똑똑히 외치자! ‘성경을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도 아니다.’ ‘철학을 가르치기 위한 철학 개론도 아니다.’ ‘성경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를 지향 증언하는 책이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면 굳이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김재준은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닌데, 굳이 성경에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굳이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면, 동일하게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경에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함으로서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 의도인가?

 

5. 성경의 무오는 성경의 자증

 

박형룡이 성경 무오설을 강조한 것은 김재준이 이야기하는 대로 경건한 기만이 아니라 “성경의 자증 (自證)” 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성경이 실질적으로 참되다고 말해두는 것이 충족하지 않은가? 정통적 성경관에 무오를 부여하는 것은 공연히 이 것의 입장을 곤난에 빠치는 과도한 처사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말함은 주로 성경이 이것을 자주장 (自主張) 하며 성경의 내용이 그 주장과 융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기본 저자 하나님이 이것을 무오하게 하신 것은 무오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김재준이 성경 축자 영감설은 학자들이 자기 학설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끌어다 대는 억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최소한 박형룡을 오해한 결과임을 잘 보여준다. 김재준이 자신이 주장하는 성경 유오설이나 목적 영감론이 성경의 성격에 맞는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형룡 역시 축자 영감설과 성경 무오설은 성경 자체의 자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경에 대한 확신이 서로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지, 경건과 비경건, 진실과 사기가 맞부딛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의 축자 영감설과 성경 무오설은 성경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경건한 기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 아니 오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오류가 아니고 난관일 뿐

 

박형룡은 무조건적으로 성경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무식한 변증가는 아니다. 박형룡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에 난관이나 난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단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오류는 난제일 뿐 “입증된 오류”가 아니라는 일관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앞장 끝단에서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의 교리는 성경의 오류가 많은 현상에 모순된다는 비평에 대하여 성경에 난관은 있으나 ‘입증된 오류’ 는 없다고 답변하였든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어떤 명제를 증명하는 증거가 반박되지 않는 한 제출된 이의는 난관에로 과도하는 것이 논리의 원칙이라고 한 워필드의 변명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성경에 대해 너무 쉽게 오류를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 오늘의 문화와 당시 성경 저자들의 문화 사이에 차이가 있기에, ‘난제“ (hard sayings) 로 표현하는 것이 온당한 것이다. 장신대 김중은 교수 역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성경에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윤리적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판단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윤리적 기준, 과학적 법칙등은 성경의 진술을 비평함에 있어서 결코 최종적이나 절대적일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볼 때,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나타나는 역사적, 과학적 등등의 ‘오류’ 는 사실상 오류가 아니며, 성경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역사적-문화적 간격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차이점들’ (differences) 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박형룡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면 최소한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존경과 순종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형룡은 이런 성경의 오류에 대한 지적은 교회 역사 안에 오랜 현상이기에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 이라고 냉소를 보내고 있다.

 

금일에 “오류”의 혐의를 받는 어떤 성구들은 교회사의 진정에 줄곳 존재하여 그 존재가 기독교의 친우들과 대적들에게 아울러 인식 되어 왔다. 이 소위 “오류”들은 금일 비평가들의 새 발견이 아니라 고대에도 잘 알려져서 켈수스와 폴리피 같은 초대 기독교의 큰 대적들의 때에 인용되었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참으로 “오류”가 아니라 난관들이기 때문에 복음의 전진에 하등 손해를 주지 아니하였다. 만일 이 소위 “오류”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항하는 정당한 반대들이 있다면 어째서 오래전에 성경을 둘러 엎는데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인가? 만일 이 “오류”들이 공정한 고찰과 연구에 의해 해명될 수 없다면 기독교회는 어떻게 성장하고 확대되었으며, 초대 교부들 같은 대사상가들이 계속하여 성경을 신뢰할만하고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가? 금일의 비평가들이 이 “오류”들을 “현대 학구” 의 새 발견인 것처럼 교회에 대해 위협을 감행하는 것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이것은 김재준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을 “지적 패배를 감정적 잔인으로 보복하려는” 자들, “세계적인 지위” 에 오르지 못한 무지한 자들로 비판하는데 대한 박형룡의 응수로 보인다.

 

7. 경외의 정신과 변증의 태도

 

박형룡이 때로는 반대편에서 볼 때 지나치게 엄격하고 경직된 사상을 가진 인물로 본 것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확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우선 신앙의 태도여야 한다고 박형룡은 본 것이다.

 

경외의 정신과 변증의 태도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대하여 우리가 가질 적정한 정신과 태도다. 이 정신과 태도를 가지는 자는 성경에 난관이 있음을 인정하되 그것을 오류라고 단정하지 않고 자기의 무식을 한탄하며 힘이 미치는 한 그것의 해명에 노력한다. 반면에 이 정신과 태도를 가지지 않는 자는 성경의 난해한 곳을 볼 때마다 즉시 오류로 단정하고 자유자재로 파괴적 비평을 가한다.” (364)

 

박형룡은 성경의 난해한 곳을 볼 때마다 즉시 오류로 단정하는 것은 “경외의 정신과 변증의 태도” 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국 박형룡과 김재준의 논쟁은 박형룡은 김재준을 “경외의 정신이 부족한 자”로 비판하고 김재준은 박형룡을 “경건한 기만”을 감행하는 자로 서로 비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박형룡과 김재준은 “신념 대 신념” 의 논쟁을 한 것으로 보인다.

 

(1) 경외의 정신. ... 모든 지식의 추구와 명철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도적 원리요, 중심적 요소다. 여기서 떠날 때에 인생의 마음은 문득 자아 구경성 (自我 究竟性)을 단언하고 암흑과 미로에 방황하여 받은바 교훈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그를 노엽게 할까 두려워하여 매사에 조심하는 사람들은 실로 참 지식을 얻는 도상에 있다. 하나님 앞에 가지는 경외의 감은 모든 지식의 추구에 있어서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영적 진리를 학습함에는 더욱 그렇다.

 

(2) 변증적 태도

경건의 정신으로 성경을 대하는 자는 성경에 난관이 발견될 때마다 이를 변증하여 해명하고 해명이 곤난하거든 자기의 무식을 자백하고 장차 해명될 때가 오기를 대망한다. 역대의 경건한 성도들은 이같은 태도를 취하여 성경의 난해한 곳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한 건 두건 해명됨을 보고 마음 속에 만족하며 성경의 무오한 권위에 대하여 회의하지 않는다. ...

 

성경에 대하여 경건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난해한 곳을 보면 즉시 오류로 지적하고 다른 각종 “오류들”을 성경에서 찾아내기에 열중한다. 성경을 불신임하는 편견이 그들의 판단을 좌우하여 성경과 다른 증거의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에는 오류가 성경에 있다고 단정하여 버린다. 성경과 외적 증거의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에는 성경이 그르고 외적 증거가 옳다고 보며 성경의 증거보다 학자의 의견을 더 존중하여 후자로써 전자를 말살시킨다. 그리하여 성경의 오류를 많이 적발하여 자유자재로 비평하여 버린즉 성경에 신임할만한 진리적 요소는 많이 남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는 성경의 자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나 다음에는 그 역사적 사상적 각종 오류를 발견하기에 매진하여 성경의 전면적 파괴로 종결한다. 이 일은 자유주의자들의 비평적 심리에 만족을 줄 것이나 교회 신도들의 신앙을 크게 파괴하여 원수 마귀의 악의에 또한 만족을 줄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으랴! (366).

 

박형룡은 성경의 유기적이며 완전 축자 영감 사상을 조금이라도 수정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것” 이 못된다고 본 것이다.

 

 

Ⅳ. 교단 분열의 책임은 누구에게

 

흔히 교단 분열의 책임을 김재준 측과 기독교 장로회는 박형룡과 예수교 장로회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미 김양선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