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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by 이창섭 posted Jun 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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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과 개혁파 정통신학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죽산 박형룡 박사(1897-1978)는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을 보급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가 꽃다발처럼 엮어 한국교회에 소개한 신학은 오늘날에도 한국장로교회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국기독교 전체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강세(强勢)를 보이고 있다. 박형룡이 가르친 신학은 고신교회와 보수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전 장로교회신학교(평양)의 교수였으며 만주 동북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박형룡을 초대 교장-교수로 초빙한 것은 그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계승하고 전수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신교회는 정통신학운동으로 출범했다. ‘정통신학’은 박형룡이 소개한 개혁주의 신학을 뜻한다. 고신파는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나면서 보인 신행불일치 행보는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그가 소개한 신학에는 높은 존경심을 보여 왔다.

 

박형룡은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보급하고 파수하려는 강박관념으로 살았다. 신학저작 전집을 출간하면서 “이 모든 문서들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적 정통신학을 보수 전달하려는 일편단심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전국 교계가 알아주시면 합니다”고 고 말했다. “우리의 사상적 환경은 변천무상할지라도 우리 교회는 이 신앙을 영구히 지켜 변치 말기를 성심으로 축원한다”고 말했다. 1953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신학교육의 목표와 신학 노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명확한 신학적 자아의식을 가지도록 할 것이며,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에 정신(挺身)할 것이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박형룡은 순수한 청교도적 개혁신앙을 주지(主旨)로 삼아 그것을 전달하고 한국교회가 영구히 보존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한국문화와 사회의 격변기라는 시대 환경에서 바울, 어거스틴, 칼빈이 가르치고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18-19세기 구프린스톤신학자들이 체계화한 신학을 소개하고 한국교회가 그것을 영구히 보존하기를 바랐다. 박형룡이 사도적 전통과 동일시하면서 바른 신학으로 여겨 소개한 신학에는 청교도주의, 세대주의, 한국적인 요소 등이 가미되어 있다. 박형룡이 강조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개혁파 정통신학,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칼빈주의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Ⅰ. 신학적 갈등의 시대

 

박형룡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창건한 해에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여 서당교육을 받았다. 그는 가슴을 울리며 실존적 결단을 재촉하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박형룡은 신성중학교(평북 선천)와 숭실전문학교(1916-1920, 평양)를 졸업하고, 26세에 중국의 국제도시 남경의 금릉대학교(1921-1923)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감부열 선교사의 권유를 따라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수학(1923-1926)하고 신학사(B.Th.)와 신학석사(Th.M.)학위를 동시에 받았다. 이듬해에 켄터키주 루이빌시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의 박사 과정에 두 학기를 등록했다. 귀국 후에 ‘자연과학의 반기독교적 영향’(Anti-Christian Influences from Natural Scienc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1932년)를 받았다. 박사과정에서 변증학을 전공하고, 신학과 심리학을 부전공했다.

박형룡은 귀국하여 산정현교회의 전도사, 숭실중학교의 성경교사, 숭실전문학교의 강사로 봉사했고, 1928년에 장로회신학교 임시 교수, 1931년에 전임 교수가 되었다. 그는 남궁혁 박사·이성휘 교수에 이어 세 번째로 이 학교의 한국인 교수가 되어 변증학, 신학난제, 기독교 윤리 등을 가르쳤다. 장로회신학교가 펴내는 『신학지남』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고했고, 강의안과 몇 편의 논문을 모아 처녀작 『기독교신학난제선평』(1935)을 출간했다.

박형룡은 1938년 여름에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되는 등 일제의 기독교 박해가 심해지자 그 해 가을에 동경으로 망명했다. 1942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동북신학교에서 교수했다. 광복 후 고려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귀국하여 교수,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연합교회 등의 선교부와 한국장로교 총회의 지원을 받는 신학교육을 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사 청산문제나 공적 참회고백의 필요성에는 느슨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떠나 총회파와 합류하여 장로회신학교(1948, 서울)를 세웠고,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장로회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에서 학자, 행정가로 활동했다.

박형룡은 『신학지남』에 기고한 ‘차대에 종교가 소멸될까?’(1928)를 시작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에 이르는 많은 논문들을 발표했다. 4권의 『표준성경주석』, 4권의 설교집, 7권의 『교의신학』, 변증학, 험증학(驗證學)을 집필했다. 이것들을 모아 『박형룡박사저작전집』(1978년) 15권을 출간했다. 이 책들은 개혁파 정통신학을 소개한 것들로, 한국장로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신학적 골격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박형룡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구프린스톤신학과 일치했다. 프린스톤의 신약학자이며 변증학자인 그레이스앰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그는 상해에서 프레지덴트 매케리호에 승선하여 미국으로 가던 선상에서 일본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이 발행하는 『학지광』(學之光)이란 책에 실린 ‘무종교자의 종교관’이란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에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을 접하고서 의분을 느껴 신학적 변증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 복음진리의 변증 옹호에 정력을 집중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신학 갈등을 잘 알고 있는 보수계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Moffet)과 배위량(William Baird)은 그로 하여금 변증학에 관심을 갖도록 영향을 미쳤다.

박형룡이 신학을 공부하며 학문활동을 왕성하게 한 시기는 세계 신학계의 격변기였다. 미국은 대륙에서 밀려 온 두 가지 신학사조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첫 번째 경향은 리츨(Albert Ritschl)의 윤리 신학이었다. 기독교의 궁극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윤리가 종교의 지고의 선(善)이며 아울러 인간의 이상이라고 믿었다. 실용주의 경향을 가진 미국 기독교계는 이러한 윤리신학에 매력을 느껴 이를 적극 수용했다. 두 번째 흐름은 19세기 말부터 독일에서 발달된 성경비평학이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들이 이를 수용했다. 리츨의 윤리신학과 독일의 성경비평학은 이를 추종하는 현대주의자들과 저지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갈등을 가져왔고, 창조론과 진화론에도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냈다.

프린스톤신학교도 이 돌풍을 피할 수 없었다. 개혁파 정통신학의 보루인 이 기관은 이성을 최고의 재판관으로 삼으면서 맹위를 떨치던 영국의 이신론(Deism, 17세기)에 대항하는 복음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졌다. 프린스톤신학교는 칼빈이 봉사한 생피에르교회의 목회자이고 제네바 신학자인 프랜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의 개혁파 전통신학을 전수받았다.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아치발드 하지(A. A.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그레이스앰 메이첸(J. Gresham Machen)으로 이어지는 신학 전통을 따르는 학교였다.

프린스톤신학교는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영감된 무오(無誤)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경본문에 대한 문헌적인 비평방법이 성경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이 성경을 해석’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학방법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근대 과학방법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관련이 있다. 찰스 하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경과 신학자의 관계는 자연과 자연과학자의 관계와 똑같다. 성경은 사실의 보고(寶庫)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는 방법은 자연과학자가 자연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똑같다”고 말했다.

한편, 프린스톤신학교를 운영하는 미국북장로교회는 뉴욕의 제일장로교회가 침례교 목사 해리 포스틱(Harry E. Fostick)을 부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시작으로 근본주의-현대주의 갈등을 겪었다. 포스틱이 1922년 5월 21일 주일 아침에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문제로 미국북장로교회가 신학적으로 양분되어 있을 때 필라델피아 아치스트리트장로교회의 목사 클라렌스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불신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글로 응답했다.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를 저술하여 현대주의 신학을 반격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닌 ‘별종 종교’이며, 자유주의와 기독교의 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규명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목사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설교에 반발하면서도 화평주의, 포용주의 태도를 보였다.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목사들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 다수의 중도파를 대변하는 지도자들은 포스틱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화론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를 개방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대명사인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는 처음에 150명의 목사들이 서명을 했으나 6개월 뒤에는 1,270명 이상이 서명했다. 미국북장로교 총회가 결정한 다섯 가지 근본 신앙조항인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 부활, 초자연적 이적 등을 하나의 학설,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근본 도리들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다.

프린스톤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를 수용하는 관용파와 엄격한 태도를 지닌 보수파의 갈등이 표출되었다.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고 생각하여 격분하고 있는 동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접근했다. 칼빈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이 학교는 미국북장로교회와 함께 좌경화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 지지자들의 정치적 수완에 정통신학 지지자들이 따라 가지 못했다. 근본주의-현대주의 갈등은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로 막을 내렸다.

자유주의 신학의 승리와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반발하는 몇몇 교수들은 프린스톤신학교의 신학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필라델피아 근교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과학방법론과 스코틀랜드상식실재론과 관련된 구프린스톤신학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성에 대한 신앙의 수위(首位)’와 전제주의 방법(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을 지향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을 태동시켰다. 프린스톤신학은 ‘신앙에 대한 이성의 수위(首位)’를 중요하게 여겼다.

박형룡은 1923년 무렵에 프린스톤신학교가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메이첸(G. Machen)의 신약학, 그린(W. Green)의 변증학, 하지(C. Hodge)의 조직신학, 워필드(B. Warfield)의 성경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바탕을 둔 장로교 고백주의 전통을 배웠다.

박형룡이 프린스톤에서 배운 것은 칼빈주의,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는 명칭을 가진 신학이다. 그는 자신이 신약학을 가르치는 메이첸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메이첸은 프린스톤신학자 가운데 가장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바울종교의 기원』(1921)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1930)이라는 저서를 출간했고, 미국북장로교회가 오번선언서에 서명한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목사, 선교사)을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형룡은 메이첸의 신학노선을 따랐다. 한숭홍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는 박형룡이 메이첸으로부터 4가지 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 극단적인 배타적 변증적 신학방식, (2)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3) 강한 반론과 비판의 논쟁술, (4) 교단 분열과 신학교 분리 설립의 선례 등이다. 위 두 번째와 세 번째 지적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박형룡은 귀국하여 줄곧 개혁파 정통신앙의 전사(戰士)로 활약했다. 한국교회 안에 “천태만상의 이사상(異思想)의 가지가지가 유혹의 촉수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권두언을 문제 삼고 이의를 제기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장로교신학교 기관지에 기고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의 여권 문제에 반대 입장을 밝혔고,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강력히 천명했다.

박형룡도 근대과학 정신과 고등비평에도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집필한 ‘아빙돈 주석’을 구독하지 못하게 했고 총회가 『표준성경주석』(1956)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 그는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혹독하게 평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본질을 간파한 그가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근본주의는 1920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통적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독일신학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는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과 그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앞에서 언급한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초자연적 이적 능력 등을 불신했다.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근본주의자들』(The Fundamentalists)이란 잡지를 중심으로 응전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캘리포니아 어느 석유회사 소유자가 재원을 부담하여 출간한 12권으로 엮어진 이 책 300만 부가 보급되었다. 프린스톤신학자들은 메이첸의 주도하에 공동의 적이던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기 위해 이 운동에 동참했다. 프린스톤신학은 지성적이며 교리 우선적이고 변증적인 특징을 지닌 점에서 다른 근본주의자들과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근본주의 안에 달갑지 않은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디모데 웨버(Timothy Weber)가 지적한 대로 미국 근본주의 운동은 복합적인 현상 속에 일어난 신학 운동이다. 1920년 당시의 근본주의는 여러 가지 신학 전통을 포함하고 있었다. 칼빈주의자, 알미니우스주의자, 오순절파, 침례교인, 장로교인, 세대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근본주의 안에는 새로운 신학지식을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인사가 있었는가 하면 지성적이며 주지주의적인 사람도 있었다. 세대주의 천년왕국론자, 오순절주의자,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주의자도 있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와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리·사회·정치·교육·신학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박형룡은 개혁주의 곧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근본주의를 동일시했다.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전통적·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곧 정통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큼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방지하려고 노력하는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며 교회의 “참된 사도적 전통”을 파악하려는 자들이며, “순복음 진리를 신앙과 행위로써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박형룡은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근본주의라는 별호(別號)를 얻은 보수주의”라고 말했다. 『파수군』에 기고한 ‘근본주의 신앙’(1961)에서도 근본주의를 정통신앙과 동일시했다.

신복윤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의학)는 정통파[칼빈주의]와 근본주의를 동일시하는 박형룡의 입장에 당황하면서 “장로교회의 전통적 입장인 칼빈주의는 근본주의가 아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걱정은 박형룡이 말하는 근본주의를 칼 매킨타이어, 훼이스신학교, 밥존스대학교 계열의 전투적 근본주의(Militant Fundamentalism) 또는 종파적 근본주의(Sectarian Fundamentalism)와 같은 것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박형룡은 반지성적인 극단의 근본주의자가 아니었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신학계에서 비하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박형룡이 소개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사도적 복음에 충실한 신학이며, 1920년대까지 프린스턴신학교가 표방해 오던 지성적이며 유서 깊은 역사적 칼빈주의이다.

 

 

Ⅱ. 개혁파 정통신학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에서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을 수입하는 데 거부감을 표명하면서 “어떤 젊은 세대 인사들은… 장로회신학교 당시에는 신학은 내용 없는 무엇이었다고, 이제 개혁주의 신학을 새로이 개발하여야 될 것 같이 말하고 있다”고 했다. 박윤선은 미출간 논문 ‘한국에서의 칼빈주의’에서 장로회신학교(평양)의 교육이 철저한 칼빈주의를 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박윤선은 개혁주의를 선호하고 보수주의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다.

박형룡은 광복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매몰되어 있던 개혁주의 신학의 회복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개혁주의란 말을 점차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개혁주의란 말을 제한 없이, 막연히 사용하여 마치 유럽 대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를 우리 교회에 새로이 직접 수입해 오려는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들게 한다”고 걱정한다. 장로교회는 개혁파 신학을 포함하고 있지만 “개혁주의보다 한술 더 뜬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교회가 “개혁주의를 모른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드물게 썼고 혹은 장로교회란 말에 그것을 포함시킨 것뿐[이므로]… 개혁주의를 새로이 개발하거나 수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유럽 대륙의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주의를 가미하여 가진 장로교회이니 전자(유럽 개혁주의)의 직접 수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청교도적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확고히 보수하면서 그것의 해설에 필요한 보완을 행할 것뿐이다”고 말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드러난 영국 청교도 신학이 유럽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더 정통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박형룡은 종교개혁운동의 신앙고백적 규범들을 굳게 붙잡으면서 사도들과 교부들이 구현된 진리와 연속성을 가지는 ‘올바른 교훈’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개혁파 정통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신학전통은 편의상 초기, 전성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1560년-1640년까지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신앙고백을 공교하게 정립한 시기이다. 1565년에 이르러 개혁파의 선두 주자들인 쯔빙글리(Zwingli), 칼빈(Calvin), 부처(Bucher), 오에이콜람파디우스(Oemcolapedius), 베미글리(Vermigli), 히페리우스(Hyperius), 무스쿨루스(Musculus)가 세상을 떠나고 불링거(Bullinger)만이 남았다. 개혁파 신학은 우르시누스(Ursinus), 올레비아누스(Olevianus), 잔키우스(Zanchius), 베자(Theodore Beza), 유니우스(Junius), 폴라누스(Polanus) 등이 발전시켰다. 도르트총회에 참석하여 세심한 신앙개요를 제시하고 신조주의를 정착시킨 왈래우스(Walaeus), 폴리안더(Poliander), 루베르투스(Lubbertus), 고마루스(Gomarus), 에임즈(Ames), 알스테드(Gomarus) 등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개혁파 정통신학은 그 전성기인 17세기에 이르러 폭넓은 신학적 성찰을 성취했다.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항하는 더욱 날카로운 논쟁을 펼쳤다. 부르만(Burmann), 투레틴(Francis Turretin), 마스트리히드(Mastricht), 마키우스(Mackius), 레이(Leigh), 오웬(John Owen), 픽테트(Pictet) 등이 이 신학을 이어갔다.

개혁파 정통신학은 18세기에 들어서서 스태퍼(Stapfer), 베네마(Benema), 무어(Moor) 같은 정통주의 후기 학자들의 저술을 거치며 다듬어졌다. 그 무렵의 대학교들은 기독교를 전통적인 개념으로 논의하지 않고 성경에서 떠난 명확하지 않은 형태의 사고를 점차 선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신학적 통찰을 전승하면서도 중세 후기에 유행하던 스콜라주의 학문방법 곧 상세하고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방법으로 학문활동에 임했다. 이러한 특징은 교회가 이성의 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결과이다.

유럽의 개혁파 정통신학은 실질적인 변화 없이 프린스톤신학자들과 미국 개혁교회 신학자들에게로 연결되었다.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알렉산더 하지(A. A. Hodge),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등의 작품에서 그 진수가 드러난다. 하지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ticae)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신정통주의자이지만 그들의 신학체계의 전체적인 구조와 기본 정의에는 정통주의의 충격이 남아 있다. 정통신학은 신론과 성경론을 강조하면서 발전했고, 성경을 교리의 유일한 절대적인 규범으로 규정하고 고백했다.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칼빈파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더욱 합리적으로 체계화하여 고백문서로 남겼다. 제2스위스신조(1566), 도르트신조(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48) 등은 대표적인 개혁파 신앙고백서이다. 1618-1619년 사이에 화란 도르트에서 소집된 도르트총회(Synod)는 알미니우스가 주장하는 구원론을 반박하면서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적은 신조문을 채택했다. 그 핵심의 첫 글자들을 모아 튤립(TULIP)으로 표현했고, 이것이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주의는 네덜란드 지역의 교회 움직임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웨스트민스터총회(Assembly)에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8)를 작성했다. 아일랜드의 더불린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이며 칼빈주의자인 제임스 어셔(James Usher, 1581-1656)가 작성한 104조항의 아이리쉬 신조(The Irish Articles)를 기초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예정, 언약사상, 죄의 용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혁파 정통신학의 심장에는 칼빈사상이 관통하고 있다. 양자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성령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칼빈주의자들은 성경 자체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역설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이 고심하여 작성한 『교리문답서』(Catechism, 1538)를 좋게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에 예정론을 중요한 것으로 여겨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들은 칼빈이 가진 신앙의 역동성, 열정, 구속사역에 대한 감격 등을 대체로 자신들의 메마른 지성 안에서 다루었다. 칼빈이 신앙을 가슴(heart)의 문제로 본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점차 교리를 인정, 수긍, 수납하는 것을 신앙과 동일시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형룡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을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에서 찾았다. 한국장로교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다. 박형룡은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을 정통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 신학 전통은 박형룡이 말한 대로 약 300년 전에 유럽에서 체계화된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중심의 영국신학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미국에 건너가서 거기서 약 200년 동안 새롭게 발전된 것이다. “청교도형의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20년 간 자란 한국장로교회는 교의와 규례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를 채용함으로 청교도 개혁신학 위에 법적으로 확립했고, 아울러 이들이 장로회신학교(평양)를 설립하고 그들의 신학으로 교역자를 양성해 냄으로 전 교회의 신학사상과 신앙생활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풍토로 인도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만들어진 ‘12신조’는 한국장로교회가 오랫동안 교리 표준으로 수납해 온 고백문서이다. 12신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삼위일체·창조·인간·자유의지·신조·성령·예정과 선택·신자의 본문·심판과 형벌에 대해 고백한다.

한국장로교회는 다양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되었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칼 큐츠라프, 중국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던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등 스코틀랜드 선교사들과 캐나다와 호주의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건설에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신앙의 정형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간하배 교수(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선교학)와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교회사)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반위(antithetical)개념으로 파악하여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대립의 역사로 보았다. 간하배는 이러한 구도 안에서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가져온 분들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이나 인도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은 이 땅에 처음 찾아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이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면에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 수십 년 간 북장로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 한국교회가 보수주의적이라는 이유의 일부분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교회는 영국이나 유럽에 있는 교회들보다 언제나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복음의 문호를 개방할 당시의 미국교회는 무디를 위시한 여러 부흥사들의 설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 나왔던 초대 선교사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부흥운동 기간에 회심의 경험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한 미국 선교사 허버트 블래어(Herbert E. Blair)도 이와 비슷한 구도로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성경은 거듭 강조되고 연구된 유일한 교과서이다. 이와 같이 모든 목사들에게 이런 신학적인 인상을 끼쳐 준 신학교는 역시 대부분 선교사들의 손에 있었다. […] 웨스트민스터신앙표준과 정치에 관한 장로교 형태를 수학하는 역사적 말씀으로 의심 없이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초에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된 복음 이야기를 솔직한 바울의 초자연적 해석으로 가르치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누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던 선교사들을 제외한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정통신학을 따르고 있었고, ‘12신조’에 일치하는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특징을 지닌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미국개혁교회(RCA) 출신인 언더우드 같은 부흥회-청교도형 인물이 있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사조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1920년에는 메이첸의 『신앙이 무엇인가』가 번역 출간되고, 베트너의 『개혁파 예정론』이 번역되어 신학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 견해가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선교사 게일(James Gale)은 블랙스톤(W. Blackstone)의 『예수의 오심』(Jesus is Coming)을, 언더우드(Underwood)는 무어헤드(W. G. Moorhead)의 『모세의 법』(Mosaic Institution』을 번역했다. 게일과 언더우드는 세대주의 신학의 상징인 『스코필드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공동으로 번역했다. 시대 종말에 대한 관심, 성경의 문자적 해석, 절대적 권위로 성경을 강조한 세대주의는 한국의 문화와 시대 정서에 상당히 어울리는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의 연례보고서(1922)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사역하던 40명의 선교사 목사들은 7개의 신학교 출신이었다. 프린스톤, 맥코믹, 샌안셀모(현 샌프란시스코신학교), 뉴욕의 유니온, 뉴욕비브리컬신학교를 졸업생들이었다. 무디성경학교 등 약 10개의 성경학교 출신들도 있었다. 그 밖에도 미국남장로교회의 여러 개 신학교 출신들과 캐나다교회와 호주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개혁주의 전통 아래에서 신학교육을 받았으나 교단 배경이 다르고, 교회 전통이 달랐다.

미국에는 세 그룹의 개혁주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그룹은 무오한 성경과 그것에 포함된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고수하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최대의 신학적 표현으로 수납하여 찬동하며, 이 고백 표준문서들을 구성하고 있는 중심적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구파(Old School)에 충실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교리와 그것에 따르는 고백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폐합되고 없어진 미국북장로교회와 미국남장로교회는 모두 이러한 고백주의 전통을 따랐다.

두 번째 그룹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강조를 두면서 교리, 성경의 권위, 개혁파의 역사적 신조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네덜란드계 미국 개혁교회가 여기에 속했다.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가 주이심을 확신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기독교 원리들을 알아내고,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보며, 기독교 세계관 또는 인생관에 강조를 둔 전통이다. 뉴번스위크신학교, 웨스턴신학교, 칼빈신학교가 이 노선에 서 있었다.

세 번째 그룹은 다양한 신학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교리에 느슨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대각성운동 유형의 경건주의를 강조하고, 교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보다는 경건한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을 지닌 신파(New School)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부흥운동을 지지하면서 구파(Old School)에 속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으로부터 분리했다. 신파와 구파는 1758년에 연합했다. 이때부터 미국장로교회는 경건주의―부흥운동주의와 교리를 앞세우는 고백주의가 병립하면서 내면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경건주의―부흥운동주의 장로교인들로 구성된 신파계는 뉴잉글랜드의 회중교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점차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어졌고, 반면에 교리주의―고백주의 장로교인들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미국북장로교회는 청교도 전통 아래에 있었다. 청교도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이다. 엄격한 칼빈주의를 강조하고, 깊은 경건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문화창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은 후천년 개념을 가지고 뉴잉글랜드가 하나님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사회생활이 기독교화 되기를 기대하면서 청교도들에게서 물려받은 문화비전과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을 결합시켰다.

18세기에 이르러 신파계의 신학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며, 성경의 권위에 도전했다. 유럽계 장로교인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동참자 가운데는 신파계 사람들도 있었다. 엄격한 고백주의를 따르는 유럽계는 근본주의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신파계, 경건주의, 부흥운동에 가까운 장로교인들과 얼마 동안 협조했다. 메이첸을 비롯한 고백주의 장로교인들은 근본주의 운동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지성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휘튼대학, 무디성경학교 등 부흥운동적 근본주의와 세대주의 노선의 장로교인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근본주의 운동의 양상은 세대주의의 출현으로 복잡해졌다. 세대주의는 개혁주의 토양에서 생성되었다. 그러나 엄격한 유럽계 고백주의자들은 세대주의자들이 율법시대(구약)와 은혜시대(교회)를 나누는 것을 꺼려했다. 유럽계 장로교회보다는 부흥운동, 사회운동, 경건주의적 특성을 가진 신파계가 세대주의를 더 쉽게 수용했다. 이들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운동 기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칼빈주의자 그레이스앰 메이첸은 1937년에 독립장로교선교회와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뉴번스위크노회로부터 제명되었다. 메이첸은 그 교회를 떠나 아메리카장로교회(현 정통장로교회)를 출범시키는데 가담했다. 그와 함께 미국북장로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세대주의 견해를 가진 칼 매킨타이어가 주도하는 부흥운동적 칼빈주의자들과 이별했다. 그 무렵 교리주의―고백주의 입장을 견지한 미국남장로교회는 세대주의를 반대한다는 견해를 표방했다.

 

 

Ⅲ. 한국형 개혁파 정통신학

 

박형룡은 개혁파 전통의 다양한 유산들 도입하고 소개하면서 한국형 정통신학을 만들어냈다. 일편단심 “순복음적 정통신앙”을 지키고 개혁파 정통신학을 보수하고 선전하고자 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이 신앙을 영구히 지켜 변치 말기를” 희망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형룡에게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 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정(正) 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 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박형룡의 정통신학의 핵심은 칼빈주의였다. 그의 신학 작품들은 개혁교회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와 바빙크 작품의 영어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이스 벌코프(1873-1957)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41)에 신세를 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계 장로교회 전통을 따라 박형룡은 “구주대륙에서… 5대 요령으로 하여 전개된 칼빈 개혁주의 신학이 영국에 건너가 열렬하고 심각한 경건으로 받아들이는 교인들로 구성된 청교도들의 신학으로 발전”한 것을 근간으로 삼았다.

박형룡이 한국교회가 네덜란드의 개혁주의를 수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표명된 청교도 신학이 유럽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더 정통적이라고 말한 것은 주로 성령사역과 안식일 준수 문제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제임스 패커(James Packer)의 말을 인용하여 청교도적 칼빈주의 전통이 성령 사역에 치중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전도의 실천에 매진하며, 주일의 안식일화, 엄격한 경건생활을 위한 노력 등의 특징을 가졌다고 했다. 성령사역에 치중하는 청교도들의 전도방법은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신적 권위, 확신 있는 전도의 실천과 관련이 있다. 주일을 안식일로 받아들이는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은 안식일을 창조율례(Creation Ordinance)로 여기지만, 유럽의 개혁교회는 “대륙적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교리와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다. 청교도주의는 로마가톨릭적인 관습 일소(一掃)에 열중하고 아울러 타락한 사회에서 종교적 소신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문서들에 실린 교리를 금과옥조(金科玉條)의 교훈처럼 여겼다. 박형룡이 말하는 청교도 개혁주의는 이처럼 유렵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정을 가미한 신학이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 문서들을 요의(要義)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했다. 미국북장로교 외국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이 증언한 것과 같이, 1911년까지의 선교사들은 전형적 청교도형 사람들로서 안식일을 한 세기 전 뉴잉글랜드 조상들이 지킨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 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로 여겼다. 신학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 이러한 선교사는 강력하게 보수주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로 믿었다. 그리고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박형룡은 개혁주의자이면서도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했다. 세대주의는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보수주의 신학운동으로 그 핵심은 전천년설이다. 세대주의와 칼빈주의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칼빈주의자 가운데 세대주의에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다. 프린스톤신학교의 구약학 교수 알리스(O. T. Allis)는 시대경륜설을 지지했으며, 세대주의의 요람인 달라스신학교로 옮겨갔다. 미국남장로교회 안에는 전천년주의자가 상당수 있었다. 주한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에도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박형룡은 세대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천년왕국론을 따랐다. 칼빈주의자들이 옹호한 무천년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세에 관한 많은 예언들을 설명되지 못한 채로 무의미한 언설로 버려두게 되는 약점을 가진다. 구약과 신약의 많은 왕국 예언들은 아무리 비유적인 언사를 많이 포함하더라도 확실히 어떤 종류의 장래 황금시대를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이 세계의 질서가 끝나기 전에 저 복스러운 어떤 시기가 인류를 기다린다고 믿는 천년기 전론과 천년기 후론이 보다 더 신중히 성경 예언에 대면한다고 보여진다. 무천년기 재림론의 통상한 해석에 의하면 사탄의 결박은 초림 중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 속죄로 사단 위에 승리하실 때에 수행되었다. […] 그러나 사단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지상 왕정의 기간에 있을 사단 활동의 제지를 의미한다고 하는 천년기 전론의 견해가 가장 성경의 문맥과 문의에 적합하여 보인다.

 

박형룡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른 신학’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면서 세대주의 천년기론을 정통신학에 포함시킨다. 첫째로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이다.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이것을 “선교사들이 가르치고 한국교회는 무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둘째는 전도방식에서 잘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이다. 이것은 “천명(天命)을 믿는 한국사람 고유의 사상과 잘 조화되는” 것이므로 환영을 받는다. 셋째는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하는 것이다. 안식일 성수를 엄격하게 하며 기도, 예배의 경건생활을 강조한다고 한다. 넷째는 확신 있는 전도이다. 청교도적 개혁주의 메시지를 가지고 교회와 학교에서, 도시와 촌락에서 말과 글로, 행위와 사업으로 전도하며,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복음을 온전히 또 단순하게 열심히 전파하려고 노력한다. 다섯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천년왕국 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천년기전 재림설이다.

박형룡은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눌서(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선교사가 역사적 천년기전 재림론을 신봉했으며, 자신은 광복 후 여러 해에 걸쳐 역사적 천년기전 재림론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고신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유럽의 개혁신학이 확신하는 무천년설을 가르치는 신학자도 있고, 후천년설 개념의 종말론 사상을 가진 목회자도 있다.

박형룡의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1976)은 한국교회가 유럽의 개혁교회보다 장로교 전통에 더 충실할 것을 바라고 있다. 자신의 신학과 서양 개혁주의 신학이 정확하게 같은 것은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박형룡은 자신의 신학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꽃피운 칼빈주의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것의 복사판이 아니고, 교리우선주의, 고백주의 전통에 바탕을 둔 구프린스톤신학을 받아들이지만 문자적으로 답습한 것이 아니며, 청교도들의 경건과 삶의 방식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자신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했다.

 

 

Ⅳ. 신학방법론

 

박형룡은 개혁파 정통신학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적 표현들을 “꽃다발 방법”으로 집약하여 소개했다. 새로운 것을 창작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배 신학자들의 글을 옮겨 소개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베낄 뿐 창작하지 않음)의 원리를 신학 방법론으로 삼았다. 박형룡에게 꽃다발 만들기는 개혁주의 신학과 선교사들이 전해 준 것을 가장 잘 조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본의는 칼빈주의 개혁파 정통신학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데 있고 감히 무엇을 창착하려는 것이 아니다…. 팔십 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하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바른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선진 정통신학자들의 사상을 “되도록 정확하게 소개한다”고 했다. 박형룡의 작품에는 그가 밝힌 대로 벌코프, 하지, 워필드, 땝네, 쉐드, 스미스,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 개혁파 진영의 최근 대표적 신학자들의 신앙 사조가 움직이고 있다.

박형룡은 『교의신학: 서론』의 제1장 첫머리에서 “본서는 정통주의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 교의신학 혹은 교의학을 논술하기로 한다. 우리는 정통 기독교 신도가 이해하는 대로의 교의신학이 가장 정당하며 교의신학은 개혁신앙에 가장 모순 없이 표현되어 있다고 믿는다.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몇 대 교파들의 신학 중에 개혁파 교의신학은 내면적 구조의 견실함에 가장 정당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책은 “다른 사람들의 화원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에 지나지 않다”고 말했다.

총신대학교의 박아론 교수는 ‘꽃다발 방법’을 관현악단의 연주에 비유하면서 “박 박사의 『교의신학』이라고 하는 ‘관현악단의 여러 가지 악기들’이 하나의 완전한 곡조를 연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서양의 선진 정통신학자들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학적 특정들과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박 박사의 손에서 하나의 아름답고 장엄한 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박형룡 박사가 끼친 신학적 공헌이며, 박 박사의 신학을 가리켜 ‘다양 중에서 통일이 있는 지로적(指路的)신학’이라고 말한 충분한 이유이며,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된 거대하고도 웅장한 건물과도 같은 신학이다”고 했다. 박아론의 평은 정당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선친이 창의적이지 않은 학문활동을 한 데 대한 변명의 말로 들릴 수 있다.

박형룡은 갈등의 시대에 살면서 바른 신학, 정통신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학작업을 했다. 박형룡이 술이부작(述而不作) 방법으로 영구히 지키려고 한 것은 ‘사도적 전통의 정(正) 신앙’이었다. 바울, 어거스틴, 칼빈, 칼빈주의자들, 프린스톤신학자들을 거쳐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였다. 박형룡은 꽃다발 방법으로 보수계 개혁주의 진영의 다양한 신학자들의 사상을 하나로 종합했다.

박형룡을 가르친 선교사들은 리츨의 윤리신학과 자유주의의 성경비평학이 등장할 때인 19세기말부터 1920년대까지 계속된 신학논쟁기에 공부를 한 사람들이었다. 프린스톤신학자들은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이러한 신학 작품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바빙크의 영향을 받은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하지와 워필드의 칼빈주의, 그리고 세대주의 종말론 등을 꽃다발처럼 엮었다. 박형룡은 구라파에서 발흥한 개혁파 정통신학과 영미 청교도주의, 세대주의, 부흥운동주의, 한국인의 실재주의(naive realism) 사물이해, 시대 정서 등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박형룡은 자기 시대의 두드러진 신학사상과 문화·민족·시대의 상황을 ‘꽃다발’로 엮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표현인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다. 박형룡이 칼빈주의 선배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새 세대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개혁파 정통신학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하여 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오늘날 고신교회와 보수계 장로교회가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라고 일컫는 신념체계이다.

 

 

결론

 

한국의 보수계 장로교회들이 말하는 정통신학은 초기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전해 준 것이며, 박형룡이 체계적으로 소개한 개혁파 정통신학이다. 이 신념체계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신앙고백적 확신의 바탕이었고,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교 구심점으로 하여 “교회의 품질을 좌우(左右)하는 정통신학운동 곧 정통체계에 [선] 진리운동”을 펼치고자 한 그 신학이다.

박형룡은 자기 시대의 교회의 필요를 채워주었지만 오늘날의 교회가 요구하는 것들에 필요한 모든 답을 제공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보완, 보충되어야 하고,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있다.

개혁주의 진영 안에는 박형룡을 “극단의 근본주의자”(Ultra- Fundamentalist), “극단적 보수주의자,” “좁은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자”로 평가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박형룡이 극단의 근본주의자이면 그의 신학체계를 기본 골격으로 삼는 고신교회와 한국의 보수계 장로교 진영은 반지성적인 극단의 근본주의 집단으로 분류된다. 박형룡의 신학은 1920년의 미국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시대의 용례에 따르면 근본주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 개념으로 보면 근본주의가 아니다. 그가 소개한 신학은 성경적이며 지성적인 것이었으므로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박형룡이 구체적으로 소개한 신학체계는 장로교회만이 아니라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에도 이런 저런 형태로 널리 알려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보아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따른다고 할 만큼 이 신학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시대경륜설적 세대주의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이것들을 결속시킨 초기 선교사들의 노력과 ‘바른 신학’을 집대성한 박형룡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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