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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죽산 박형룔의 구원론 -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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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박형룡의 구원론: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

 

최윤배 부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Ⅰ. 서론

 

필자가 죽산 박형룡(朴亨龍)(1897.3.28~1978.10.25)의 신학, 특히 그의 구원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1차적으로 본 학회의 제21차 정기학술심포지엄(2006.11.4)의 주제가 “박형룡의 개혁신앙 재조명”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대학원생 논문지도 때 겪었던 개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 경험이란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상당한 오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이다. 어떤 사람들은 박형룡의 인격과 신앙과 신학을 근거로 그를 지나칠 정도로 영웅시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지나칠 정도로 폄하한다는 사실이다. 윤천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박형룡의 신학, 특히 그의 성령론에 대한 오해들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신학의 발전을 위해 어떤 특정한 신학자나 신학에 대해 평가할 때, 가장 먼저 확보되어야할 조건은 객관성을 가진 공정한 눈과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비록 이 기준에 필자라고해서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의식하면서 본고를 전개하고자 한다. 만약, 이 같은 과제가 본고를 통해서 성공한다면, 앞으로 보다 발전된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계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박형룡의 구원론 전체를 다루는 것이 좋겠지만, 지면 등의 이유로 그의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만을 다루기로 한다. 본고의 제목 상으로는 그의 구원론만 다루면 되겠지만, 본 학술대회의 주제가 박형룡의 개혁신앙에 대한 재조명이기 때문에, 재조명을 위해 그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겼던 쟝 깔뱅(Jean Calvin, 1509~1564)의 구원론을 칭의와 성화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고, 박형룡의 신학의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 소위 ‘개혁전통’에 대한 정의를 필자 나름대로 먼저 내리고자 한다. 이로 인해 논문 전체에서 양적으로 박형룡의 구원론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줄어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질적인 확보를 위해 그의 주저『교의신학?구원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Ⅱ. ‘개혁전통’에 대한 정의

 

무엇이 ‘개혁전통(改革傳統)’(Reformed tradition)인가? ‘개혁전통’에 대해 한 마디로 분명하게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학자들마다 여기에 대한 견해들이 매우 다양하여 아직도 논쟁이 뜨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전문적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현상적으로 그리고 역사적(歷史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구별 또는 차별내지 대조되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있고,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교파들[(예,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개혁교회, 영국성공회, 순복음교회, 동방(그리스, 러시아)정교회 등]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종류의 프로테스탄트교회 중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또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라는 이름으로 많은 교회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삶을 ‘개혁전통’으로 명명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개혁전통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개혁전통은 16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 운동과 좌파적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재세례파 운동이나 토마스 뮌처의 농민운동 등) 외에 종교개혁 운동 속에 독일 중?북부의 루터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과 독일 남부(스트라스부르 등)와 스위스(즈네브와 쮜리히 등)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다. 독일 중?북부의 루터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은 오늘날 ‘루터교회’ 전통 (루터, 멜랑흐톤, 『아웈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 『협화신조, 1557』)으로 계승되었고, 독일 남부(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처)와 스위스(쮜리히의 쯔빙글리와 불링거, 즈네브의 파렐과 깔뱅)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은 유럽 대륙에서는 깔뱅과 베자(Th?odore de B?ze)를 거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로 명명되어 계승되고 있고, 영국에서는 깔뱅과 녹스(John Knox)를 거쳐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es)로 명명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혁전통’은 깔뱅에 의해서 집대성되어 유럽대륙에서는 베자를 거쳐 스위스(『즈네브 요리문답, 1537/1542』), 프랑스(『프랑스신앙고백, 1559』), 네덜란드(『네덜란드신앙고백, 1561』) 등에서 꽃을 피웠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녹스를 거쳐 장로교회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8』, 『스코틀랜드 제일신앙고백, 1560』) 꽃을 피웠는데, 때로는 정통주의 형태로, 때로는 경건주의 내지 청교도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전통의 근원을 형성한 16세기의 개혁파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 부처, 깔뱅의 전통은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나 청교도주의 및 개혁파 경건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나 워필드와 네덜란드 계열의 미국의 루이스 베르꼬프의 『조직신학』이나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아브라함 까이뻐나 독일의 헤르만 헤페의 『개혁교의학』에서 나타난다. 20세기와 21세기의 현대신학에서 대표적인 개혁파 신학자는 스위스의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로흐만(체코), 독일의 슐라이어마허, 오토 베버, 한스-요아킴 크라우스, 위르겐 몰트만, 미카엘 벨커, 네덜란드의 베르까우어와 헨드리꾸스 베르꼬프, 영국의 토렌스, 미국의 니버 형제와 밀리오리 등으로서, 세계적으로 걸출한 신학자들의 대부분은 개혁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개혁전통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어떤 특정한 시대의 개혁신학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의 개혁신학을 절대화하거나 개혁신학 전체와 동일시하는 경우이다. 때로는 루터신학 자체가, 때로는 츠빙글리신학 자체가, 때로는 깔뱅신학 자체가, 때로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자체가, 때로는 바르트신학 자체가, 때로는 몰트만신학 자체가 개혁신학의 전체 내지 개혁전통의 전체로 이해되는 경우이다. 개혁전통과 개혁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을 본질적으로 공유하면서도, 루터와 차별을 보인 소위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인 츠빙글리, 부처, 깔뱅을 출발점으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와 18-19세기 슐라이어마허를 거쳐서, 20세기와 21세기 초의 현대개혁신학자 바르트나 몰트만 등을 비롯하여, 현재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신학과 삶을 총망라한 500여년의 전통 속에서 빛나고 있다. 우리는 각 시대와 각 신학자에게 나타난 개혁전통 각각을 500여년의 전통이라는 큰 틀 속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에 비추어 공정하게 평가하여, 각 장점을 받아들이고, 각 단점을 보완하여 보다 바람직한 개혁전통을 21세기에도 계속적으로 계승?발전시켜 나가야할 것이다.

 

 

Ⅲ. 깔뱅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

 

1. 구원론에서 신학 용어와 구조

 

1) 시간적?단계적 순서와 신학적?논리적 순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용어와 개념을 먼저 정리하여 신학적 혼동을 피하고자 한다. ‘구원론’은 구원의 은혜를 죄인에게 전달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을 다룬다. ‘구원의 순서 또는 서정’[선택, 소명, 칭의, 성결(화), 영화(부활) 등]’(Way of Salvation, ordo salutis, Heilsaneignung, Heilsweg)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객관적 사역(works)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실현(적용)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루터파 또는 개혁파)에서는 구원의 순서가 시간적?단계적으로 파악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깔뱅의 경우, 구원의 순서는 시간적?단계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순서로서 신학적?논리적으로 이해되었다.

 

2) 성화 ? 중생 = 회개

일반적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단 일회적 사건을 ‘중생’(회개)으로, 중생한 뒤에 성도 안에서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성화(결)’로 이해되지만, 깔뱅은 일생동안 거룩해지는 과정인 ‘성화’를 ‘중생’ 또는 넓은 의미의 ‘회개’로 이해한다. 그의 『기독교강요』(1559) 제 III권 제3장의 제목은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 회개”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을 개혁파 정통주의 용어로 바꾼다면, “믿음에 의한 우리의 성화(결)”가 될 것이다.

 

3) 성화 → 칭의

구원의 순서와 관련해서 깔뱅은 선택이나 칭의를 먼저 언급하지 않고, 개혁파 정통주의와는 달리 성화(결)를 제일 먼저 언급 한 뒤에, 칭의, 선택, 영화의 순으로 언급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칭의를 약화시키거나 희생시키면서 선행과 성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여, 종교개혁 초기에, 특히 루터는 칭의를 강조함으로써, 루터 이후 종교개혁 제2세대에서는 성화와 윤리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판을 의식한 종교개혁 제2세대인 깔뱅은 종교개혁신학에서는 칭의는 물론 성화와 윤리도 약하지 않다는 것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논쟁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이나 칭의 보다도 성화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4) 구원의 개관적 내용과 구원의 주관적 적용

구원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은혜(총)이며, 구원의 적용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Christus extra nos)가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Christus in nobis)가 되는가? 그것은 성령과 신앙은 통해서이다. “우리가 신앙으로 이것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모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볼 때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는 성령이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은 신앙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이 독특한 생명을 바울은 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과 대조시킨다.” “신앙은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에 있는 것이다”. “신앙의 지식은 이해에 있다기보다는 확실성에 있다.” 깔뱅에 의하면, 마음의 확신으로서 신앙을 무시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신학자들은 과오를 범했다.

 

2. 하나님의 ‘이중적 은혜’로서 칭의와 성화

1) 칭의와 성화는 상호 동일하지 않고, 상호 구별되나, 상호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칭의’ (justification)는 ‘전가된 의 (imputed righteousness)’이고, ‘성화’ (sanctification)는 ‘분여된 의’ (imparted righteousness) 또는 ‘효과적인 의’라고 불러진다. 칭의 속에서는 죄책이 제거되고, 성화 속에서는 죄의 얼룩이 지워진다.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게 만들고, 성화는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만든다. 칭의는 새 신분을 수여하는 반면, 성화는 사람 안에 새 성격을 창조한다. 깔뱅의 경우, 칭의와 성화는 상호 구별되면서도, 상호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1:1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며 우리가 이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 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 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깔뱅은 특별히 본질적인 칭의 개념을 가지고 칭의를 이해한 오시안더(Osiander)의 칭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루터처럼 칭의의 법정적인 개념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혼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 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고전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께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중 은혜(duplex gratia)를 받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심판자 대신에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삶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2) 중생(=회개 ? 성화)

깔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성화’를 ‘회개’ 와 ‘중생’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나는(= 깔뱅) 회개(repentance)를 중생(regeneration)으로 해석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손상되고,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깔뱅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엡4:24)”이다. “회개는 두 가지 부분, 즉 육의 죽임(mortificatio)과 성령을 통한 살림(vivificatio)으로 구성된다.”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거룩과 순(정)결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이 싸움은 죽음을 통해서만 끝이 날 것이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이 평생토록 달릴 수 있는 회개의 경주(競走)를 하게 하신다.”

 

3) 칭의(稱義)

깔뱅이 이해한 ‘칭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행동, 선행)를 통한 의’와 ‘믿음을 통한 의’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한 때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의롭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날 때 - 신앙에 의해서 의로움을 받는다.” 깔뱅은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호의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서 받아주시는 것에 대한 승인(인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칭의가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깔뱅의 구원론에서 기독론과 성령론은 신앙론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깔뱅은 구원의 순서를 시간적?단계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논리적?신학적으로 이해했다. 깔뱅의 경우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로서 상호 동일하지 않고, 상호 구별되며,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깔뱅에 의하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내용으로 이루며, 칭의에서 법정적 개념이 중요하며, 칭의는 ‘행위를 통한 칭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칭의’다. 깔뱅의 경우 회개와 중생은 상당히 포괄적 개념으로서 성화와 연관된다.

 

 

Ⅳ. 박형룡의 구원론

 

1. 구원론에서 신학 용어와 구조

 

박형룡은 “「구원론」(Soteriology)은 「구원함」혹 「구원」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테이리오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교의학의 이 부분을 혹 「성령론」(Pneumatology)”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부분에서는 구속(救贖)의 적용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구속의 적용은 성령(聖靈)의 사역(事役)인 때문”이라고 말하고, “성령의 사역에 의한 구속의 적용을 논하는 이 부분만을 구원론이라고 명칭함이 가장 적정(適正)하다.”라는 말로 그의 구원론을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박형룡이 구원론을 성령론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형룡은 구원 순서 또는 서정을 순전히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이해한다. 구원서정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객관적 사역이 죄인의 마음과 생활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다양한 행복들이 피택 죄인에게 적용되는 순서 혹 배열의 제시다. 이것은 구속 사역에서의 성령의 다양한 동작을 그 논리적 순서로, 또는 그 상호 관계에 의하여 묘사하기로 목적한다. 이 순서는 구원의 행복들이 명확한 시간의 선후에 따라 죄인에게 주어지는 듯이 순전히 시간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박형룡에 의하면,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 양식(樣式)에서 16세기 신학과 후대신학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구원 서정에 대한 기술 양식의 다양성을 보이면서도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唯一造成者)”로 높이고,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돌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박혁룡은 개혁신학과 성경주석의 논의를 통해서 구원 서정으로서 소명(召命), 중생, 회심(= 회개+신앙), 칭의, 수양(收養), 성화, 성도의 견인(堅忍), 영화(榮化)의 순서로 언급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은 소명을 외적 소명(vocatio externa)과 내적 소명(vocatio interna)으로 나누고, 비교적 중생에 대한 바람직한 정의는 ‘새 생명의 심음과 주관적 성향의 성화’이며,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고, “수양”(收養)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하나님이 중생시키고 은혜의 상태에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최후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 얻을 것이 확실하다는 교리이다. 영화는 구속의 적용의 최후 국면이다.

 

2. 칭의

 

박형룡은 “죄악한 인생에게 칭의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칭의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는 히브리어 “「히츠띠크」와 같은 의미를 가지어 「사람을 의롭다고 선고함」을 가리킨다. 이 말은 사람의 윤리적 의(倫理的義)에 관설(關說)하지 않고, 재판적 혹 법적 결정의 결과인 의(義)의 신분(身分)에 언급한다.” 박형룡이 칭의를 정의할 때,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에드워즈, 하지(A.A. Hodge), 베르꼬프(L. Berkhof)의 정의를 직접 인용?나열만 한다. “또 조금 다른 말로 정의하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하여 죄인에 관한 율법의 주장이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 513).” 그는 칭의의 은혜적, 법정적, 선언적, 제정적(규정적), 즉각 완전 최종적 성격을 말하고, 칭의의 특징으로서 죄책의 제거, 일회적으로 우리의 밖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재판, 의롭다고 선고하시는 주체가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박형룡은 칭의가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칭의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그리스도의 의는 첫째로 율법(律法)의 형벌을 만족시키고, 둘째로 행위 언약(行爲言約)에 적극적 조건들을 만족시켰으니 곧 율법의 교훈들에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의 신자들에게 전가(轉嫁)는 첫째로 형벌의 보상과 죄의 용서를 취득하였고, 둘째로 신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언약이 성취되고 그것의 모든 약속들이 법적으로 시행된 자들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인정하심과 그들에게 영생 얻을 권리를 부여하심으로 구성된다. 이것을 구성하는 두 성분을 구별하게 되나니 곧 소극적 성분인 사죄와 적극적 성분인 영생권의 부여이다.” 능동적 또는 객관적 칭의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의 칭의이니 하나님의 법정(法廷)을 경역으로 단행된다(롬3:20; 갈3:11). 이것은 죄인 안에서 되는 주관적 칭의의 기초이니,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에 관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의 신분의 제정과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수동적 혹 주관적 칭의는 죄인의 심정(心情) 혹 양심(良心)을 경역으로 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박형룡은 칭의의 시점(時點)과 관련하여, “영원부터의 칭의”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의 칭의”를 성경주석적, 신학적 논의를 통해서 전적으로 거부하고, “신앙으로 칭의”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죄인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수납하는 때에 이루어진다. 죄인의 신앙이 있기 전에 그의 칭의가 있을 수는 없다.” 칭의와 신앙의 관계에서, 신앙은 칭의의 원인(“때문에”)이거나 공로적인 무엇이 아니라, 도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으로 칭의”에 대한 술어적 표현을 중심으로 박형룡은 깔뱅 등이 이해한 기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으로서 신앙, 이용기관(利用器官, appropriating organ)으로서 신앙, 없을 수 없는 조건(conditio sine qua non)으로서 신앙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신앙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객관적 주관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중 의미에서 이용 기관이라 칭할 만하다.”라고 말한다. 박형룡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칭의의 근거는 소극적으로 인간의 미덕이나 선행이 결코 아니라, 칭의의 근거는 적극적으로 죄인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가 어떻게 전가되어 우리의 것이 되는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회계되어 이것이 당연히 받을 법적 결과를 그가 받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돌려짐이다.” 전가에서 우리의 회계로 넘어 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한 용서와 수납의 결과를 받을 권리이다. “전가의 기초는 우리의 그리스도에게 연합함이다. 이것은 다만 그가 완전한 사람, 우리의 대표인 사람이 되신 때문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 우리의 신비적 연합(神秘的聯合)이 있는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법적 머리(元首)도 되시고, 영적 머리도 되시는 고로 우리의 죄가 그에게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정당하다.”

 

3. 성화

 

박형룡이 구원 서정에서 칭의와 성화 사이에 두고 있는 “수양”(收養)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수양은 은혜의 사역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양자(養子)되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으며 자기의 자격(子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거룩과 성화의 개념은 신약에서도 구약과 다를 바가” 없지만, “구약에서 신약에로 건너가면 현저한 차이를 의식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과 동등에 선 자가 없으나 신약에서는 거룩이 하나님에게 드물게 돌려졌다.” 하나님의 위엄적 거룩성은 윤리적 거룩성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거룩성은 “단순한 도덕적 단정(道德的端正)만이 아니며, 성화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일이다. … 성경은 단순한 도덕적 개선(道德的改善)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의 연고로, 하나님의 봉사를 위하는, 도덕적 개선을 교훈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된 성화를 역설한다.”

성화의 필요성은 자기의 백성을 자기와의 사귐에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숙한 명령에서 따라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명령에 순종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억제하며 극복함으로써 장래의 완전한 거룩을 준비하기 위하여 성화의 은혜와 노력이 요구되며, 신자 안에 죄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내면적 투쟁을 일으킬지라도 그 안에 성화의 생활은 실재성을 갖는다.

박형룡은 성화를 개혁전통의 신앙고백과 하지(A.A. Hodge)와 베르꼬프의 정의를 직접 인용하여, 나열한다. “「성화는 성령이 이로써 칭의된 죄인을 죄의 더러움에서 구출하시며, 그의 온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更新)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롭고 계속적인 공작이다」.”

성화의 특징과 관련하여 성화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새 사람의 창조인데, 이 두 가지는 계기적(繼起的)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同時的)이며, “신체와 영혼, 지 정 의(知情意)를 포함하는 사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하며, 신자의 영혼은 죽음 순간이나 직후에, 신체는 부활 시에 성화가 완성된다.

특별히 박형룡은 성화의 주체로서 성령 자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사용하시는 성화의 다양한 방편 내지 수단을 강조한다. “신자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함이 필요하다. 성화를 조성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살전 5:23). 특별히 성령이 성화를 조성하신다. 그리고 그의 성화의 공작의 양식은 신비하여 헤아릴 수 없다.” “성화는 3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우리는 성화가 전적으로 성령에 의뢰한다는 것을 명심함이 가하다. 사람의 영적 발전은 인적 성취가 아니라, 신적 은혜의 사역이다. 우리는 물론 사람의 활동이 성화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구적(器具的)으로 이 일에 공헌하는 것 뿐이니 아무 공적도 인정받을 것이 없으며 의뢰할 바 아니다.” “성화에서 성령의 공작은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오염으로부터 진보적으로 정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더욱더욱 변화됨에 의뢰하는 성령의 내주와 사람의 심력(心力)들 위에 행하시는 감화의 양식을 알지 못한다.” 박형룡은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몇 가지 방편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묵상과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을 거론한다.

박형룡은 성화의 칭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성화는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할 것이나 결코 분리되지 못할 것이다. 칭의는 성화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화됨은 우리가 칭의된 때문이요, 우리가 성화된 때문에 칭의되는 것이 아니다. 은혜 언약에서 칭의는 성화보다 앞서서 성화의 근거가 된다. 행위 언약에서는 의와 거룩이 이와 정반대의 순서를 취하였던 것이다. … 칭의는 성화를 위한 재판적 근거다. … 성화가 하나님의 무상 은혜에 탁월히 의뢰하는 칭의를 근거로 하여 서는 사실은 우리가 성화로써 어떤 공로를 세운다는 관념을 제외한다.”

박형룡은 특히 공로의 근거로서 선행에 대한 상(賞)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행에 대한 상을 주장한다.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한편으로 행위와 상 사이에 적응(適應)이 있음이 주장하여야 되고 다른 편으로 선행에 생길 수 있는 공로마저 부정하여야 한다. 로마 교회에 의하면 이것은 역리적(逆理的)이며 자가모순적(自家矛盾的)인 해결이다. 그러나 개혁파 신도게요들에 의하면 이것은 성경적 전도(聖經的傳道)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way)이다. 신자들의 영생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한 것이니 은혜로 얻음이 분명하고, 영생에 추가하여 받는 상은 선행에 기초하나 그 구경적(究竟的)인 기초는 역시 은혜요, 선행을 장려하기 위한 위안(慰安)을 포함한다.”

 

 

Ⅴ. 깔뱅과 박형룡의 비교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깔뱅과 박형룡의 구원론을 상호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은 상호 유사성과 차이점이 발견된다.

 

① 깔뱅과 박형룡은 모두 구원론을 성령론 속에 정초시킨다.

② 깔뱅과 박형룡은 모두 구원 순서(서정)를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지 않고, 논리적 순서로 이해한다.

③ 깔뱅과 박형룡에게서 공히 ‘이중 은혜’는 상호 구별되나, 상호 분리되지 않고,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④ 깔뱅과 박형룡의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이 나타난다.

⑤ 깔뱅과 박형룡의 성화 개념 속에 “옛 사람의 죽임”과 “새 사람의 살림”의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⑥ 깔뱅과 박형룡에게서 칭의는 ‘행위를 통한 칭의’가 아니라, ‘신앙을 통한 칭의’이며, 여기서 신앙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고, 도구적으로 이해된다.

⑦ 깔뱅과 박형룡의 칭의에 나타난 중요 개념은 법정적(forensic) 개념이다.

⑧ 깔뱅과 박형룡이 이해한 성화는 지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완전히 완성되지 않는다.

⑨ 깔뱅이 이해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고, 박형룡이 이해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영생권의 획득으로 구성된다.

⑩ 깔뱅은 구원 서정을 중생(= 회개 ?성화), 칭의, 선택, 영화 등으로 배열하고, 박형룡은 소명(召命), 중생, 회심(= 회개+신앙), 칭의, 수양(收養), 성화, 견인(堅忍), 영화(榮化) 등으로 배열한다. 깔뱅이 중생을 칭의보다 먼저 기술한 것은 그가 처했던 시대 상황에서 일어난 변증적 이유 때문이었다.

⑪ 깔뱅의 경우 중생은 성화보다도 더 포괄적인 개념인 반면, 박형룡의 경우 중생은 매우 제한적이고도 좁은 개념이다.

 

 

Ⅵ. 결론

 

우리는 본고의 주제를 선택하게 된 동기에 대한 기술과 ‘개혁전통’에 대한 정의로부터 이 글을 시작했다. ‘개혁전통’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을 공유하면서도, 루터 전통과 차별화되고, 개신교(= 기독교) 전통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삶으로서 500여년의 전통 속에서 빛나고,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의 조명 하에 검토하여, 보완하고, 계승?발전시켜야할 전통이다.

우리는 깔뱅의 주저 『기독교강요』(1559)에 근거하여, 깔뱅의 이중 은혜를 중심으로 그의 구원론의 신학 용어와 구조를 살피고, 이중 은혜를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박형룡의 구원론을 그의 주저『교의학 V』에 기초하여 그의 이중 은혜를 고찰하였다. 특히 구원 서정에 대한 분류에서 박형룡이 더욱 섬세하고, 깔뱅은 덜 섬세하였고, 깔뱅은 더 변증적이었고, 박형룡은 더 조직신학적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이중 은혜에 대한 이해는 본질적으로 거의 같았다.

필자가 읽어 본 바, 박형룡의 구원론의 내용은 베르꼬프(L. Berkhof)의 구원론에 가장 접근하고 있는데, 다만 구원 서정 부분에서 박형룡은 ‘수양’(收養)을 도입하고, 베르꼬프는 영화를 생략한다. 그러나 박형론의 성화론과 베르꼬프의 성화론에서 가장 큰 차이는 박형룡은 성화의 주체자로서 성령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박형룡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박형룡은 일반적으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약점들 중에 하나인 성령의 약화를 잘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깔뱅 처럼 그를 ‘성령의 신학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성령의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두 가지 가능성, 즉 신앙체험과 신학연구를 억측해본다면, 전자의 경우, 선교 초창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겪었던 영적 신앙체험이며, 후자의 경우, 성경연구 및 성령을 강조한 개혁교회 신앙전통(깔뱅, 아브라함 가이뻐, 베르까우어 등)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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