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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907년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과 복음주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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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과 복음주의 신앙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국개혁신학회초대회장/조직신학)

 

 

머리말

 

1907년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은 복음주의적 한국교회의 영적 산실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로 중생케 하는 역사적 본성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원산에서 감리교 의료선교사였던 하디(Robert A. Hardie, 1860-1949)의 성령체험과 회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였던 길선주는 이 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 이 각성운동에서 한국교회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특별한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였다.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은 당시 웨일스와 인도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나타나심이었다. 미북장로교 선교사 조지 맥큔(George M. McCune)는 다음같이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우리가 웨일스ㅡ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하여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의 체질을 복음주의 기독교로 특징짓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영적 각성운동을 통해서 장로교와 감리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는 경건주의-및 복음주의 기독교로 체질화된 것이다,

Ⅰ. 복음주의 선교사들

 

교회사의 대가 라토렛(Latourrette)이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부흥운동(revival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이원론(dualism), 경건주의적 복음전도(pietistic evangelism) 중심의 선교사였다”고 평가한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아펜젤러는 경건주의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화란 개혁교회의 신학교인 뉴저지 소재 뉴브룬스윅신학교(New Brunswick Seminary)를 졸업하였다. 그는 펜실베니아와 뉴저지 지역내의 화란 개혁교인들에게 경건주의 운동을 심어준 18세기 화란의 경건주의자 프렐링하우젠(Theodore Jacob Frelinghuysen)의 영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학생시절부터 강한 전도의 열정으로 충만한 전도자로서, 구세군 운동에 참여하여 열정적인 전도운동과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언더우드는 “깩깩 소리 지르는 감리교도”(roaring Methodist) 혹은 "장로교 선교부의 감리교 설교가"(the Methodist Preacher of the Presbyterian Mission)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경건주의 유형의 설교가였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언더우드는 화란 개혁주의 의 경건주의적 특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신장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를 기도로 살려 그 가정을 믿게 한 치유의 사역(Prayer Cure)을 하였다.

 

평양숭실의 창립자 베어드 박사, 평양신학교 창립자 마펫 박사, 대부흥회의 주역인 블레어 선교사 등도 역시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1870년대부터 1920년까지 진행되었던 미국의 제 3차 영적 대각성운동(드와이트 무디 Dwight L. Moody, 루벤 토레이 Ruben Torrey, 빌리 선데이 Billy Sunday등에 의해 주도)에서 성장한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무디의 3대 목표인 3R(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스도에 대속의 피의 공로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중생)을 믿었다. 그러므로 무디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징하는 칼빈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 기독교의 영적 권능, 뜨거운 전도열정, 인간의 자유와 평등, 십계명 준수 등 성경적인 세계관과 가치와 규범을 전파하는데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그래함 리(Graham Lee), 윌리엄 스왈른(William L. Swallen), 번하이젤(C. F. Bernheisel), 윌리엄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선교사들은 모두 미국 시카고를 중심한 무디(Dwight L. Moody) 부흥운동과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McCormick Seminary) 출신 선교사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각별히 복음전도에 열정을 지닌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그래함 리와 스왈론은 1892년 맥코믹 졸업생이며, 번하이젤은 1900년, 블레어는 1901년 졸업생이었다. 1907년 부흥운동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던 장대현교회 당회장이었고 평양신학교 설립자요 초대학장이었던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과 숭실학당 설립자요 초대학장이었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는 맥코믹신학교를 1888년에 졸업한 동창생이었다. 이들 외에도 아담스(J. E. Adams), 로스(C. Ross), 클라크(C.A. Clark), 피어슨(A. A. Pierson), 윈(R. E. Winn) 선교사들이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선교 25주년을 맞은 1909년 당시 미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출신신학교을 보면 총 40명 가운데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맥코믹신학교 출신이 11명 그리고 안셀모신학교 출신이 4명이었다. 선교지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들은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 아니라 맥코믹신학교 출신이라는 것도 중요하게 여길만하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는 워필드와 핫지 등의 개신교 정통주의(구학파)에 의하여 지배받았다. 워필드는 특히 [사이비 기적](Counterfeit Miracle)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는 중지되었다는 은사중단설(cessation doctrine)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서 맥코믹신학교는 무디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러한 은사에 열려 있었음도 주목할 만하다. 맥코믹신학교는 교리적인 면에서는 구(舊)학파의 전통을 따랐으나, 전도와 선교적인 면에서는 신(新)학파가 강조한 복음전도와 선교열정의 입장을 취하였다.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는 당시 아더 피어선(Arthur Pierson)이 인도한 학교부흥회에서 큰 도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경험한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이미 본국에서 무디를 통한 영적 각성을 경험한바 있는 원산의 로버트 하디, 펜윅, 그리고 평양의 마펫, 제임스 게일 등은 자기들의 선교지인 한국교회 역시 영적 각성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한국의 정치적 시련과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는 등 국가적 위기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정경분리 원칙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정치적인 일에 간여(干與)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가도록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영적으로 이 국가적 위기현실을 타개하도록 하는 영적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다.

 

한국선교사들은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흥운동에 찬성하고 있었고 다른 교파에 연합하여 복음을 전파한다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의 영감을 믿었고, 교리중심의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회심이라는 경험을 추구하는 청교도 신학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장로교선교사들은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한국선교사들은 1903년 10월 극동 아시아 순방 중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The Scandinavian Missionary Alliance) 책임자 프란슨(Franson)을 초청하여 서울과 원산에서 연합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무디와 함께 활동했던 프란슨은 원산에서 1주간 하디 선교관에 머물면서 장로교 창전 예배당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그 지역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한 주간 연합성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소개하였다. 이어 그는 1903년 11월 2일과 3일에 서울 상동교회와 제중원에서 열린 전도집회에서 미국 무디부흥운동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소개하면서 한국교회에 도전을 주었다.

 

그리고 1906년 한국선교사들은 웨일스와 인도를 거쳐 내한한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위원이며 부흥사였던 하워드 존스턴(Howard Agnew Johnston)을 초청하였다. 그는 웨일즈에 이어 인도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장로교및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이들 한국 선교사들은 이미 경건주의자였고 복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있었다. 이들은 선교지인 한국에도 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랐든 것이다. 존스턴의 집회에 참석한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 번하이젤(Charles F. Bernheisel) 선교사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같이 쓰고 있다: “나는 서울로 올라가 그 곳에서 열리는 서울 선교사 사경회, 특히 존스턴 박사가 인도한 사경회에 참석했는데 이들 집회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했다.” 그래함 이(Graham Lee)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평양 선교사 사경회가 끝난 직 후 우리는 연례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하워드 에그뉴 존스턴을 만났으며, 그로부터 서울 선교사들은 대단한 은혜를 받았다. 존스턴 박사는 평양에 와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인도의 놀라운 성령의 현시를 말해주었다. 그것은 우리 몇몇 사람들에게 이곳 한국도 동일한 은혜를 받도록 대단한 열망을 불어 넣었다.”

 

따라서 한국선교사들은 단순히 도전을 받은 데서 그치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기 위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고 성탄 휴가를 반납하고, 정오기도회를 여는 등 한국에도 영적 각성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3년 원산 하디의 성령 체험은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불씨가 되어 선교사들 사이에 번져 나가면서 평양에까지 번졌으며, 특히 평양의 그래함 리와 윌리엄 블레어에게까지 영적 각성의 불을 점화한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면 한국교회는 1900년대 초의 국가존망의 위기의 상황 속에서 전혀 영적 각성에 이르지 못하고 자포자기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영적 각성의 불씨가 된 것이다. 길선주 장로가 1907년 영적 각성운동의 주역의 하나이기도 하나 당시 그는 장로였고, 블레어 등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영적 인도 아래 있었다. 길선주는 선교사들을 증오한 자기의 죄책을 고백하게 되었고 한국의 영적 각성은 개통된 것이다.

 

 

Ⅱ. 복음주의 기독교 탄생: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전개한 부흥운동

 

1907년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은 한국선교 초기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한국교회의 성향을 결정짓는 운동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1세기 전 하디슨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이 들어 왔고, 일본에서도 이미 반세기 전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왔으나, 이 두 나라에서는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이러한 영적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회개와 중생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체질화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주의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주류(主流)운동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속회나 구역예배, 저 세상 지향적 개인구원, 선교적 열정, 부흥회와 사경회 등이었기 때문이다.

 

원산에서 선교했던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선교사들의 수양회에 초청되어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다. 그는 은혜를 체험하면서 자신의 선교사업의 부진이 자신의 교만과 영적 나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하디는 조선인의 미개함을 무시하는 인종차별적 의식을 회개하였고, 소명의식이 약화된 자신의 선교태도를 철저히 회개하였다. 하디는 그 후 1904년 1-2월 개성지방사경회, 새술막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904년 4월에는 서울 종교교회, 배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하디는 1906년 평양의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연합기도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러한 부흥의 불길은 1907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합동으로 모임을 갖는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적 대각성운동은 한국교회 안에 독특한 경건주의-및 복음주의 신앙을 형성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길선주이다. 그는 관우를 섬기는 일종의 무교인 관성교와 선도(仙道)를 거쳐 기독교를 온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래의 어떤 종교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도둑질, 살인, 간음 같은 죄는 거의 모든 민족과 부족이 죄로 간주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 하나님 이외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죄 중에 죄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다. 따라서 길선주는 종교다원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여기에 복음주의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길선주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체험이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전해진 반면,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구체적인 체험으로 전해진 것이다. 길선주의 아들 질진경은 그의 부친의 중생 체험에 관하여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 ‘예수가 인류의 참 구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라는 말이 끝나지도 전에 갑작스럽게 옥피리 소리가 땅을 진동하더니 요란한 총소리에 선생이 깜짝 놀라는 순간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너무나 무섭고 떨려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자세대로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터지면서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대곡하였다... 선생의 기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음에는 기쁨이 용솟음 치고 감사한 눈물이 샘물처럼 흘러넘쳤다...예수가 구주임을 알게 해달라고 상제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선생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

1907년 영적 대각성운동을 통해 다시 회개의 은혜를 받은 길선주는 하디와 저다인(J. L. Gerdine)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각 부흥회는 성령의 동일한 죄의 고백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은 길선주는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와 저다인과 함께 연합으로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영적 대각성운동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전개한 부흥운동이었다.

 

따라서 영적 대각성운동은 평양의 장대현장로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인 평양의 남산현 감리교회에서도 일어났다.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감리교 노블(W. A. Noble) 선교사는 다음같이 보고하였다: “한국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나심은 없었을 것이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까지 임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쓰러지고 의식을 잃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했다.”

 

1907년 영적 대각성운동을 현장에서 목도한 미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7년 한국교회에 임한 놀라운 신앙적 각성은 명백히 성령의 사역과 권능의 현시였다. 이 땅에 교회의 태동을 가져다준 오순절처럼 평양의 교회 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임하던 때는 확실히 한국에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한 날이었다.”

 

 

Ⅲ. 길선주의 새벽기도회 도입과 복음주의 신앙: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통한 죄의 고백

한국교회의 영적 특성 가운데 하나인 새벽기도는 길선주에 기인한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행했던 관성교와 선도(禪道)의 새벽예불을 개종 후에는 새벽기도로 드렸다. 이 새벽기도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형식, 즉 복음주의 신앙의 체질을 만든 것이다. 새벽기도란 성경에는 있으며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절에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의 기독교에는 없다. 그런데 한국에 복음이 들어와 한국 재래종교의 경건 형식(새벽예불)을 빌린 것이 바로 새벽기도인 것이다.

 

길선주는 1906년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의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 더불어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교인들 중에도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300명-400명이 매일 모이는 집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장대현교회 시무장로였던 길선주는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6년 가을경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전형적 기도로 자리 잡은 것이다.

 

복음주의 신앙의 특징이란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공부와 회개와 전도이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성령의 임재 속에 기도와 말씀과 회개와 전도로 특징지워진다. 부흥회의 핵심은 사경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평양 대부흥운동도 말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경회에서 출발하였다. 로이 쉐어리(Roy E. Shearer)가 피력하는 바같이 사경회는 “한국의 부흥운동의 실제적 기초"이며, ”부흥운동의 진정한 수단“이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열렸던 사경회의 핵심요소도 성경공부와 기도와 회개와 전도였다.

 

1. 성경공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인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그의 저서[속히 예수 밋으시기를 ?라?이다](God in Korea)에서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50여년이 넘도록 한국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각자 나름대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사경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성경공부는 사경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성경을 한 구절씩 공부하고 조직적으로 공부하였다. 이러한 성경공부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증가해주었고, 기존 신자들에게는 나태해진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교회에서 멀어진 신자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초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백낙준이 말하는 대로, 기도회와 사경회는 한국 부흥운동의 기원이었다: “부흥운동의 기원은 선교사들 가운데 실시된 사경회와 기도회와 연계되었고, 평양 대부흥운동도 장로교 남자 사경회 때에 일어났었다.”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은 오늘날에도 장로교만이 아니라 성결교, 감리교에서도 영적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2. (통성)기도

 

사경회에서 기도는 말씀공부와 함께 항상 연결되었다. 말씀을 배우면서, 그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간절한 통성기도가 항상 뒤따랐다. 사경회 시에는 새벽에는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아침시간에 성경공부를 한 후 이것이 실천되도록 기도회를 갖고, 오후에는 성경공부한 후 축호전도로 나가서 사람들을 저녁 부흥집회에 초청하였다. 저녁 부흥집회는 말씀을 강해하는 설교를 통해서 깨어진 심령들이 죄를 통회하고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통성기도로 끝을 맺었다. 이 통성기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많은 참석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중생하는 영적 체험을 하였다. 통성기도는 한국교회 기도의 특징이기도 하다.

 

선교사 맥큔(George S. McCune)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기도에 관하여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어떤 이들은 기도 속에서 그들이 범한 죄들에 대하여 울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였다. 비록 많은 소리가 있었지만 혼란은 전혀 없었다. 감정적인 요소는 없었고, 각자의 기도에는 완전한 집중이 있었다.“

 

3. 회개와 중생

 

한국 부흥운동의 원산지인 1903년 원산 부흥운동도 원산 감리교회 사경회 기간(8월 23일-30일)에 일어났다. 이 사경회도 성경공부와 기도와 회개와 전도로 진행되어 졌다. 1907년 부흥운동도 사경회 기간(1월 2일-15일)에 일어났는데, 이 사경회도 성경공부와 기도와 회개와 전도로 진행되어졌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많은 사람이 참회하고 중생의 체험을 하였다. 길선주는 이때 다시 한번 참회를 하면서 성령의 체험을 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마지막 날인 15일밤 길선주가 회개하는 모습을 그의 아들 길진경은 다음같이 기록한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해서 특별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길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 아니라 특히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 고 하며 보기에도 비판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길선주는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시무장로였고, 또 장로회신학교 졸업반으로 6개월 후면 졸업을 하게 되고 그해 9월에 새로 생겨난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중 1인이 되는 영적 지도자였다.

 

4. 전도와 선교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에서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러한 전도의 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전도로 이어져서 커다란 전도의 결실을 가져왔다. 예일대 교회사가 라토렛은 선교사들의 복음전도의 열정, 한국인의 절망적 상태, 애국주의적 소원, 더 나은 것에 대한 미래의 소망 특히 서구의 교육, 다른 종교의 약점 등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다고 진단하였다. 신자들은 부흥회 마지막 날에 복음을 전하는데 시간을 드리겠다는 전도서약인 “날 연보”(collections of days)를 드리게 되었다. 전국에서 1년에 모두 4만일 정도가 약속되었다.

 

캐나다 장로교 여선교사 매컬리((Louise Hoard McCully)는 [부흥의 열매](Fruits of the Revival)란 1907년의 보고서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전도에 매진하여 열매를 거둔 한국인 전도부인(婦人) 한나(Hannah)의 이야기를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7년 1월의 첫째주간, 함흥에서 열렸던 부흥집회에서 분명히 한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계속되는 집회에서 그 성령의 체험은 심화되었고, 한나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힘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한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육신의 방법을 따라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성령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총 426권의 성경을 가르쳤고, 3000명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주일마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전도의 열정과 노력은 100만인 구령운동(A Million Souls for Christ Movement)과 해외선교로 나타났다. 블레어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1909년 그리고 1910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은 대부흥운동의 결과들 중 하나이다. 또 다른 결과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가 그 당시 겪고 있었던 심각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국가적 상황에서도 꾸준히 앞으로 전진하였다는 것이다.”

 

 

Ⅳ. 시대사적 사건 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영적 갱신으로 탈출구 모색

 

당시에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평양에만 고립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영국 웨일스와 인도, 미국 LA의 아주사에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은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1907년 1월에서 4월까지 평양에서 대폭발의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1906년 8월 평양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회는 당시 러일전쟁 이후 조성된 조선이라는 선교지의 정치적 불안감과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은 두 가지 이유로 불안감을 가졌다. 하나는 토착교회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3년부터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 선교사들은 네비우스(Nevius) 정책에 따라 토착교회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교회운영과 치리권을 토착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씩 넘겨주고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토착교회가 권한을 넘겨받고 난 후에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지 불안해졌다.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적 정세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두 인접 강대국들,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렀다. 청일과 노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고 평양은 유린되었다. 이것은 조선인들을 심각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이긴 배경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서구의 과학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서양종교인 기독교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895년 일본 낭인(浪人)에 의한 명성황후의 실해사건은 한국민을 좌절감에 빠지게 하였다. 러일전쟁(1904)에서 일본이 이기자 일본에 대한 놀라움이 되살아났고, 교회가 “안전한 피난처”라는 의식이 생겼다고 본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모든 외교권이 박탈당하므로써 민중들 사이에 나라에 대한 절망감과 일본에 대한 증오감도 높아졌다. 그리고 한국교인들이 선교사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한국인들은 미국이야말로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친구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1905년 가츠라-대프트(Katsura-Taft) 밀약(密約)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제를 미국이 인정해준 이후에 민중 사이에 미국에 대한 신뢰감은 깨어졌고 미국 역시 믿지 못할 나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이 비밀협정은 미국이 필립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밀약이었다. 이것은 1882년 체결한 한미우호조약에 대한 미국정부의 배신이었다. 블레어(W. N. Blair)는 한국인들의 반외세(anti-foreign)성토에서는 일본에 대한 증오감과 미국에 대한 실망감이 섞여있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이 당면한 정치사회적 상황은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일본과 을사보호조약 체결, 국권강탈 및 상실, 1907년 고종의 퇴위라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가는 과도기인 1907년은 정부와 나라를 빼앗기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한국인과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들을 지배한 시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국인들도 국권상실의 위기의식 속에서 어떤 전통종교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교인들은 국권상실의 비운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펫은 당시 정치사회적 불안을 다음같이 설명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체제 붕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영향이 일본의 군사적 영향으로 대체되었고, 민비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500년 역사의 조선왕조가 붕괴되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기존의 기반이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은 옛 종교들과 유교와 불교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원시토착 신앙은 특권을 잃기 시작했다.” 젊은 지식인들은 고유문화의 쇠퇴를 깨닫고, 서양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국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마펫은 다음같이 말한다: “어떤 이들은 개인적 안락보다 국가 재건의 소망 때문에 새로운 신앙을 찾았다.” 블레어는 말한다: “모든 눈들이 기독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 안에서 한국의 유일한 희망을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정교(政敎)분리의 원칙을 천명하여 한국교회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비정치화 하였다. 1901년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정치공론 못할 것이요”라고 결의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도덕적으로 저항할 것과 인내로 일본의 박해를 극복하라고 가르쳤다. 선교지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감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여기에 시대적 상황을 통해서 그의 높으신 주권적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평양의 영적 대각성운동은 당시 세계적으로 있었던 영적 각성운동과 연관되어 있다. 1904년에 웨일스의 영적 각성운동, 1905년에 인도의 영적 각성운동, 1906년에 미국의 오순절 운동, 1906-8년에 아프리카의 영적 각성운동, 1908년에 중국의 영적 각성운동이 있었다. 평양 영적 대각성운동은 이러한 190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영적 각성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일어났던 세계적인 영적 각성운동들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1903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슨(Franson, 1852-1908)이 원산에 와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1906년 9월에는 존스턴(Howard A. Johnston)이 입국하여 1904년에 있었던 웨일스 부흥운동, 1905년에 있었던 인도 영적 각성운동, 1906년 미국의 오순절 부흥운동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신자들과 선교사들은 그 같은 부흥이 한반도에서도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실제로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은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번져나갔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시려고 정치적으로 한국민족에게 이러한 시련의 연속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한국민족의 마음을 갈아 엎으시고 옥토를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다. 유대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 하나님은 강대국 바벨론과 앗시리아를 데려와 유대를 점령하여 포로로 끌려 가게하시고 이들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양의 각성운동은 정치적 암흑기를 통해서 그 마음을 갈아 엎으시면서 복음주의로 한국교회를 체질화 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1907년의 영적 대각성운동이란 정치적 절망과 울분을 종교적으로 토로한 종교사회학적 카타르시스 현상으로만 해석해서는 않된다. 종교사회학적 해석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하는 신학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Ⅴ. 하디와 마펫의 신학적 영향력: 경건주의적 진보적 감리교신학과 복음주의적 보수적 장로교신학 형성

하디와 마펫은 각기 한국 감리교와 장로교 신학을 기초지우는 초석을 역할을 하였다. 하디는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을 통해서 ‘영적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는 1890년에 한국선교사로 올 때 본래 카나다 장로교 출신의 평신도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카나다 장로교의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디가 일으킨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와서 부산과 원산에서 의료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비문제로 1898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 소속을 바꾸었다. 그는 영적으로 고갈한 상태에서 원산과 평양의 부흥운동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받고 영적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의 은혜 체험은 한국교회의 영적 중생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하디는 1909년부터 서울의 감리교 협성성경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장이 되어 23년간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성서신학자로서 [신약총론](1918)과 구약총론(1921) 등 20여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전공분야인 성서신학 외에 웨슬리 신학과 교회사 분야까지 취급하였다. 하디의 신학적 성향은 당시 구미 신학계에서 유행하던 성서비평학을 수용할 정도로 진보적이었다. 그는 “신앙에서 보수, 신학에서 진보”를 추구하였다. 하디는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연구와 뜨거운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경건훈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경건, 학문, 실천”이라는 감리교 신학교육전통을 세웠다.

 

하디의 죄고백과 성령의 체험은 감리교회 안에서 경건주의적 전통을 형성하였다. 이 경건주의 전통은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약한 노블(W. A. Noble)과 쉐어러(W. C. Swearer)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들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들은 “감리교의 사관학교”(The West Point of Methodism)라 불리며, 엄격한 신앙훈련으로 유명한 드류신학교 출신이었다. 아펜젤러는 본래 개혁교회 출신으로 프랑크린 마샬 대학시절 중생을 체험한 후 감리교회로 이적하고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여 경건과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 미국 남감리교 출신 저다인(J. L. Gerdine), 크램(W. G. Cram), 무스(J. R. Moose) 선교사 등은 한국에 와서 성령체험을 했거나 미국에서 성결운동에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일 모라비안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영국 존 웨슬리의 성령을 통한 은혜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한국의 감리교회 가운데 오늘도 광림교회(김선도 목사), 정동교회(조영준 목사), 금란교회(김홍도 목사), 한사랑교회(임영훈 목사), 임마누엘교회(김국도 목사), 종교교회(최이우 목사), 분당만나교회(고(故)김우영 목사, 김병상 목사)등이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반면 오늘날 감리교의 진보신학의 전통은 그 뿌리를 신학교 설립자인 하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디, 노블, 스웨어러 등 북감리교 선교사들은 경건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과 체험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평양 장로교신학교의 마펫이 강조한 보수적 칼빈주의와는 달리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한 진보신학을 무리없이 수용하였다. 이러한 하디 등이 딱아놓은 신학적 자유로운 풍토에서 정경옥, 윤성범, 변선한, 유동식 등 신학적으로 자유로운 감리교 풍토가 나온다. 정경옥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한창이었던 1938년에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주장하는 박형룡을 “성서의 문자적 영감과 문자적 석의(釋義)를 고집”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의 대언자”라고 비판하였다. 정경옥은 1930년대 있었던 장로교 내의 김재준의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을 비판한 박형룡의 논쟁에 있어서 이미 신정통주의적 입장에 서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평양장로교 신학교를 설립하고 평양 숭실대 3대 학장을 역임한 마펫 박사는 청교도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전통을 확립하였다. 평양의 장로교의 본산인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한 성령의 역사이었다.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도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마펫 박사는 신학적으로는 하디와는 달리 구미의 신신학인 성서비평학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청교도적인 장로교 신학을 가르쳤다. 길선주 목사가 성령의 은혜를 받고 보수신학의 기수가 된 것은 마펫이나 베어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의 보수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수신학의 분위기는 약 15년 후인 장로교의 해외 유학파 신(新)신학자들 (김재준, 김영주, 송창근 등)이 되돌아 오던 시기 1930년대에 나타난다.

 

1930년대 희년 기념예배 설교에서 마펫 박사는 다음같이 선포한다: “근래에 와서 교회에서도 종종 이런 말이 들린다. 교회를 좀 바꾸어야 한다. 혁신하여야 한다. 그 전처럼 전하면 듣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새 시대에 옛 복음은 적당하지 않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복음을 전하지고 한다지만 이런 사람들은 바울의 두뇌와 비교하면 작은 자들이다. 바울은 그 당시에 다른 복음을 전할 만하였으나, 결단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철학과 재간, 학식이 있고 로마 시민권자라는 특권이 있었으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다. ...오늘날 마 목사는 너무 수구적이요 구습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근자에 흔히 새 신학, 새 복음을 전하자고 한 자는 누구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조심하자. 조선의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이 축소된다 할지라도 형제여! 조선교회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를 전파하자. 나와 한석진 목사가 13도에 전한 그것,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 전한 그 복음, 양순백 목사가 선천에 전한 그 복음은 사람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요,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복음이니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라!” 그 후에 장로교는 신정통주의인 기장(基長)과 신정통주의에 호의적인 예장 통합과 정통신학을 보수하는 예장합동과 합신과 고신의 신학교들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보수적 전통을 이어가는 데는 마펫과 그의 신학을 계승한 길선주의 영향이 지대한 것이다. 이러한 마펫이 닦은 보수적 신학풍토에서 박형룡, 신복윤, 이근삼, 오병세, 차영배, 김의환, 박아론, 김명혁, 서철원, 정일웅, 심창섭, 이수영, 김중은 등 정통신학이 나온다.

 

 

Ⅵ. 한국의 청교도적 복음주의 탄생

 

이러한 1907년 장로교의 모교회인 평양장대현교회의 부흥은 숭실 전문대학과 각 인근 중고등학교로 파급되었다.

 

평양 장로교신학교와 평양 숭실대를 세운 선교사들, 베어드와 마펫, 맥큔 등은 청교도적 정통주의 신앙을 가지고 온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장로교회(PCUSA)의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은 1911년 [극동의 지배](The mastery of the Far East)에서 한국선교가 시작된 후 첫 25년 동안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고등비평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아주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하는” “강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고 피력하고 있다.

 

초기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감리교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평신도 선교사요 의사인 알렌(H. N. Allen)과 스크랜턴(W..B. Scranton) 등은 모두 20대 후반의 젊고 선교의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일어난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교의 열정이 불탔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영적 각성을 중요시하는 프론티어 정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청교도적인 경건과 보수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마펫 목사는 청교도적 보수신학을 가지고 있었고, 1893년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국의 총신대 교수로 오래 있었던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사 간하배는 한국장로교의 사상적 뿌리를 청교도사상과 미국의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가져온 분들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일본이나 인도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은 이 땅에 처음 찾아온 선교사들이 대부분이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면에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년간 북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복음의 문호를 개방할 당시의 미국교회는 무디를 위시한 여러 부흥사들의 설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 나왔던 초대 선교사들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부흥운동 기간에 회심의 경험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보고는 마펫이나 베어드 등 초대 장로교 지도자들이 특히 청교도적 보수신앙을 소지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한국교회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들이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신학은 영미의 “정통주의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이러한 청교도적 칼빈주의 신학의 풍토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남으로써 한국교회는 단지 정서적으로만 아니라 지식적으로도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신앙을 확신하게 되었고 새벽기도를 체질화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복음적 실천을 체질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보수적 복음주의적 신학과 신앙이 1930년대 구체적으로 박형룡과 박윤선에 의하여 대표적으로 계승되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평양숭실 출신으로 서울에서 세워진 오늘날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과 기독교학과의 신학적 토대가 되고 있다.

 

 

Ⅶ. 비판적 성찰: 세대주의적 요소 가미, 알미니안주의적 왜곡 위험

 

당시 영적 각성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 이길함(Graham Lee), 방위량(Blair), 스안론(Swallon), 곽안련(Clark), 마펫(Moffet) 등은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앙을 한국교회에 가져다주면서도 무디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초창기 한국교회에 심어 주였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박형룡과 길선주를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열광주의자들에게 시한부 종말론 등 재림에 대한 시한부 해석을 하는 틀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영적 대각성운동이 영국의 웨슬리 운동이나 미국의 대각성운동 처럼 사회적 윤리변화에 적극적이지 않고 주로 내면적 윤리의 갱신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이러한 세대주의적 요소는 영적 각성운동이 대사회적인 영향으로 나아가는데 한계를 그었다. 박형룡의 후기신학이 개혁주의에서 이탈하여 근본주의 경향을 보인 것도 이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주의 전통은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이나 종말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세대주의적 요소는 한국교회가 씻어 내어야할 잔재이다. 한국교회는 문화변혁적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찰스 피니의 인위적인 부흥 기법, 즉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는 소위 “알미니안적 칼빈주의”라는 가설은 평양대부흥운동에 나타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본주의적으로 왜곡하는 해석이다. 찰스 피니의 부흥기법을 말하는 것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역사가 인위적인 기법, 비정치화내지 탈역사화 방법이 가져왔다는 자유주의 해석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평양대부흥운동이 공개적인 죄의 고백이라는 인위적 부흥기법에 의하여 촉발되었다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보는 인본주의적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알미니안적 칼빈주의”는 한국에서는 없다. 19세기 미국 찰스 피니의 부흥기법이 부흥이 오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등 인간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기법은 조나단 에드워드나 휘트필드 등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엄격하게 배격되었다.

 

당시 원산 집회에서 하디 선교사는 사경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중 성령의 역사에 사로 잡혀 공개적인 죄의 고백을 하도록 내면적으로 강권되었다: 다음은 하디의 증언이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로 명하신 것은 내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였던 이곳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하였다는 것과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괴롭고 창피한 일이었다.” 길선주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에 강권하여 죄책 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부흥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원산의 하디 선교사의 고백이나 평양 대부흥운동의 길선주 장로의 고백 등은 찰스 피니의 부흥기법이 아닌 성령의 강권하는 역사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에서도 길선주의 회개 장면은 전혀 인위적인 기법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이다. 부흥회 마지막 날 밤 길선주의 회개를 그리는 모습이 그의 아들 길진경의 글에 있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회개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길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위량(W. N. Blair)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것 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온갖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도록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이것은 찰스 피니의 알미니안적 기법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오순절 다락방 처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불이 임하여 120문도가 회개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과 죄에 대한 책망이 있는 것이지, 회개를 유발시키는 인간적인 기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맺음말

 

1907년 영적 대각성운동은 한국기독교의 체질을 복음주의적 기독교로 특징짓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막론하고 한국 기독교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기독교로 체질화된 것이다, 정교분리의 교회의 비정치화 정책이 대부흥운동을 가져왔다는 해석이나 피니적인 부흥기법이 대부흥을 가져왔다는 해석은 하나님 주권적 영적 각성운동의 본질을 왜곡하는 해석이다. 장로교는 길선주의 복음주의 신앙과 마펫 선교사의 복음주의 신학에 의하여 보수정통신앙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감리교는 하디의 복음주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역사비평학을 허용하고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는 등 포용적이었기 때문에 경건주의의 풍토 안에서도 자유주의 신앙과 신학이 같이 혼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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