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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1907년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바울이 이해한 민족 복음화의 이방선교의 관계에 기초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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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부흥운동에 대한 평가:바울이 이해한 민족복음화와 이방선교의 관계에 기초한 평가

 

 

이한수 교수(총신대, 신약신학)

 

 

I. 평양대부흥운동이 남긴 과제

 

올 해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평양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간 부흥운동의 불길은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중요한 전기를 제공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190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운동이 내면적으로 어떤 선교신학적 토대 위에서 진행된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빈약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약을 전공하는 학자가 자신의 전공 분야도 아닌 영역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기는 어렵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처음부터 선교신학적 방향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평양에까지 확산되었고,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부흥운동의 불길이 당겨진 것은 1907년 1월 장대현 교회에서 개최된 부흥사경회 때부터였다. ‘사경회(思經會)’란 말이 시사하듯이 평양 부흥운동은 기본적으로 말씀강론을 통해 죄를 자복하고 생활의 갱신을 촉구하는 실천적인 회개운동 또는 영적 각성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사경회는 이렇게 1932년까지 수많은 평신도에게 성경을 배우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그러한 기회를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치고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더 나아가 새로운 윤리적 자각을 가지고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사경회를 통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고향에 내려가 전도를 하고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경회를 통한 부흥운동은 나중에 사회 각 계층 인사들만 아니라 미션 스쿨에 다니던 일반 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이들은 학교 수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사경회에 적극 참석하였고 또 이들에 의해서 집단적인 전도 활동도 전개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에 뒤이어 일어난 것이 소위 말하는 “백만명 구령운동” (1909-1910)이었는데, 이로써 사경회로 시작된 초기 부흥운동이 자연스럽게 전도운동을 촉발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정책이 더해지는 가운데 당시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민족을 살리는 길이 정치나 경제적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복음화하는 것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고, 이러한 확신은 부흥사경회를 넘어 백만인 구령운동과 같은 전도 운동을 낳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운동이 일제 탄압이라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모종의 굴절을 겪게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초기에 실천적인 회개운동 또는 영적 각성운동의 성격을 띤 부흥사경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때로는 “탈역사적”이고 “내세지향적인” 부흥운동으로 (길선주 목사의 부흥운동), 때로는 개인 내면의 신앙체험에만 몰입하는 “신비주의적인” 부흥운동으로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 또는 “초자연적인” 신유와 기적을 추구하는 부흥운동으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바뀌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굴절 경험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사경회의 영향 하에 전국으로 확산된 백만인 구령운동은 민족복음화에 큰 전기를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복음화를 넘어 세계선교의 과제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였는가? 박용규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동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으로, 이것은 다시 국내 선교를 넘어 해외 선교둔동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박 교수는 이렇게 평가하게 된 근거들 가운데 하나를 평양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된 학생 선교회에서 찾는다. 학생 선교회는 평양신학교 출신 전도사 한 명을 복음이 닿지 않은 경상도 지역에 파송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생 선교회의 활동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한 대한 예수교 독노회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국내 전도활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평양의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해외선교에 눈을 뜨게 만든 계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07년에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결정이 있었고, 1909년에 독노회는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 주변에 정착한 한국인들의 사역을 위해 최관흘 목사를 파송하였고, 동경의 한국 학생들을 위해 한석진, 박영일 장로를 파송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선교사 파송은 여전히 해외에 있는 교포들을 위한 전도활동에 머물러 있었던데 반해서, 1912년 이후로 한국 장로교 총회는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를 중국 산둥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본격적인 중국인 선교가 시작되었다. 1912년 이후로 해외 선교가 확장되어 장로교 총회는 순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 사역과 해외 한인 교포를 대상으로 한 선교 사역을 구분하였다. 박용규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 교회가 부흥운동 이후에 이룩한 선교 결실이 대단했다”고 평가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히려 필자는 평양 대부흥운동은 민족복음화와 해외 선교에 눈을 뜨게 한 계기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앞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처음부터 전도지향적인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사경회를 통해 실천적인 회개 운동내지 영적 각성으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자연히 영혼 구령에 눈을 뜨게 만들어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또한 한국에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 내의 교포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곳에 사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적 환경 속에서 모종의 굴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초기의 부흥운동이 지향했던 영적 각성과 사회적 갱신의 방향을 점차 잃어버리고 탈역사적인 내세지향적 운동으로, 신앙의 내면적 세계에로만 침잠하는 신비주의적 운동으로, 초자연적인 신유와 기적을 높이 치켜세우는 은사주의 운동으로 변모한 역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굴절 경험에도 불구하고 평양대부흥운동이 우리 시대에 남긴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참된 영적 각성을 통한 민족복음화를 발판으로 어떻게 세계 선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있다. 초기의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영적 각성운동이 어떻게 민족복음화를 넘어 세계선교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선교신학적 깨달음과 인식을 가졌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탄압 정치라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당대의 많은 한국인들은 현실을 극복할 힘과 위로를 얻기 이한 돌파구로 부흥사경회에 매달리게 되었고, 선교사들도 일제를 축출하고 독립운동을 지향하고 있던 민족교회와의 대결을 피하고 그들과의 연대성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부흥사경회를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에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선교사들의 진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원산에서 하리영은 암담한 “정치적 교회적 상황에서의 해결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부흥사경회에 임하였고 그 때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성령의 세례 밖에는 이 난경을 돌파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1906년에 있었던 부흥회에서 블레어 선교사도 역시 민족교회와 선교사들간의 적대감과 반목과 불신을 통탄히 여기면서 “절망적인 국가의 운명에 대해서는 상처받은 영혼을 거기서 돌려 하나님과의 고고한 인격적 교섭에 주안(主眼)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부흥회를 진행시켰다고 고백하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이렇게 시대적 암울한 상황과 맞물려 현실 극복을 위한 힘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돌파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뚜렷한 선교신학적 반성에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었으나 그것의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민족복음화와 해외선교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 평양 대부흥운동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남긴 중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성취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러한 반성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쪽에서는 민족 복음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세계 선교냐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세계 선교는 한국 교회의 시대적 과제이며 신적 사명이기 때문에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민족 복음화도 내적으로 시들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편에서는 민족 복음화를 우선시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하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전자를 후자의 발판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본 논문은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이해한 유대 민족 복음화의 과제는 무엇이고, 그것이 이방 선교 사역과 어떤 내면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는 목적을 갖고 있다. 물론 그들이 씨름했던 유대인 복음화 과제가 오늘날 우리의 민족 복음화 과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신약 저자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방 선교의 과제를 그들의 이스라엘 신학의 틀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밝힘으로써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관계 패러다임 설정을 위한 유익한 통찰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약의 저자들 가운데 바울이 우리의 주제에 가장 분명한 시각을 가진 저자라고 판단하고 그의 신학적 반성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남겨진 과제를 해석하는데 적용하고자 한다.

 

 

II. 로마서에 나타난 유대민족 복음화와 이방 선교

 

이방 선교의 정당성 문제를 이스라엘 신학의 전망 속에서 체계적으로 다룬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평생을 이 소명 실현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깊은 연민과 고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롬 9:1-3). 따라서 사도 바울의 신학을 이해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자신의 정체성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대인 의식이다. 이 두 의식은 바울의 신학 전개 전체 과정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연결되어 작용하면서도 때로는 서로 간에 긴장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이신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의 빛 속에서 재해석하여 이방 기독교인들을 그의 합법적인 후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지만, 자칫 그 논리를 극단화하면 아브라함 후손의 인종적 차원을 해체시키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선을 무너뜨려 그들 모두를 ‘죄 아래’(롬 3:9; 갈 3:22) 있는 존재로, 따라서 하나님의 동일한 치유책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설정할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믿음이라는 공통 근거 위에서 아브라함의 동일한 후손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도대체 구원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인가?

 

1.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 대한 변증

 

상기 질문에 대한 답변은 로마서 9-11장에서 등장한다.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에서 이미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모두 ‘죄 아래’ 있는 사람들로 선언한 바 있다 (3:9): 유대인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세상적 존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분명히 이것은 언약백성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졌던 당대 유대인들이 볼 때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며 언약 백성의 구성원 된 표지로서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며 또한 “율법에 속한 자”(4:14), 즉 시내산 언약의 구성원들이었지만, 바울이 볼 때 그들은 기껏해야 “표면적 유대인”에 불과할 뿐이다 (2:28). 공관복음서 저자들처럼 바울도 이스라엘을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만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 언약적 성실성을 가지신 분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버리실 수 있는가? 바울의 답변은 “결코 그럴 수 없다”(11:1)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이어 “자기 백성”을 예정론적인 언어를 빌려 재정의한다: “하나님은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1:2). 이것은 육신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바울의 인식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9:6).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란 이스라엘 중에서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11:5)를 가리킨다. 이것은 공관복음의 저자들처럼 바울도 후기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라 “남은 자”(remnant) 신학을 옹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27,29; 11:5).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 적용되는 대상은 육신적 이스라엘 이 아니고 “남은 자”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성실성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은 항상 ‘선택’(election)과 ‘버리심’(deserting)의 원리에 기초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이스마엘을 버리시고 이삭을 택하셨고 (9:7)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9:11), 엘리야 시대에도 다수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 (11:4). 구원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형성하는 원리는 그의 주권적인 선택 행위에 있으며 그 본질은 그의 자유로운 “부르심”(calling)에 놓여있다 (9:7,11, 24, 25-2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에 의해 형성되었다 (롬 4:17).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약속과(9:8) 선택에(9:11)에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부정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재정의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이런 식의 재정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 개념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개념이 이방인들조차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옹호하려는 바울의 시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여전히 분명치 않은 채로 남아있다. 바울은 과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 개념을 붙들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개념을 성공적으로 변호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와 이방 선교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혈통이나 인간적 성취와 같은 외적인 조건들에 의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부르심’에 놓여 있다면 (9:11),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부르실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점을 구체적으로 해설되고 있는 곳은 토기장이의 비유이다 (9:19-26). 어떤 학자들은 이 비유를 신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전망과 관련하여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바울이 이해한 하나님은 한 그릇은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만들고 다른 그릇은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만큼 무엇이든지 임의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신가? 전통적인 신정론(theodocy)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 안에 두 평행되는 의지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개념을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신정론과 같은 어떤 추상적 원리를 논증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최종상과 같은 학자들은 바울의 주된 관심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동등성”과 같은 역사적인 문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문맥적으로 모세를 강팍케 하신 출애굽기 이야기(9:14-18)가 토기장이 비유보다 선행한다. 전자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14절)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제시되는데, 이 질문 역시 6-13절에서 전개되는 바울의 논지에 대한 반론 형식을 띤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의 어떤 외적 조건들과 관계없이 한 사람을 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신다면 (11절 참조)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밖에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바울의 반박은 출애굽기 33:19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사실에 기초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15절). 몇몇 학자들은 이 인용구가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고, 하나님의 의가 “항상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활동하시는 그의 불가항력적인 결의로 구성되는 한에서” 그의 선택과 유기 행위 가운데서 균형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5절의 인용구에서 바울은 왜 ‘강팍함’이란 단어가 빠진 본문을 선택하였는가? 파이퍼(J. Piper)는 이 본문 선택이 갖는 함축을 본 섹션의 문맥과 구조 속에서 발견하는데 실패한 것 같다. 바울은 출애굽기 33:19을 근본적인 원리로 삼아 하나님이 왜 개인들을 선택하고 버리심에 있어서 불의하시지 않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본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긍휼의 자유에 있다: 왜냐하면 ‘긍휼’(eleos)란 술어가 로마서 9-11장 전체의 논의를 지배하는 핵심 개념이기 때문이다 (11:30ff). 특히 이 구절은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의 모든 선행하는 논의들에 대한 결론을 형성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둠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가 진노를 나타내시는 과정 중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무슨 의무나 책임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비록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불의하시지 않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아무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긍휼이 이렇게 죄인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의지나 노력 또는 그들의 어떤 외적 조건들에 의존해 있지 않다 (16절). 그렇다고 바울 사도는 ‘긍휼히 여김’과 ‘강팍케 함’을 서로 대등하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의지들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전자는 후자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베풀어지며, 후자는 전자의 실현을 도울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강팍케 하셨다는 바울의 진술도 이런 문맥 속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17절). 전통적인 교의신학자들은 이것을 이중예정론의 증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크랜필드(Cranfield)가 잘 지적한 것처럼, 강팍케 된 바로는 "지금 복음을 반대하는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예표”로서 작용한다. 칠십인경 출애굽기 9:16을 자유롭게 인용한 17절의 핵심 논점은 ”내 능력“과 ”내 이름“이란 술어들에 놓여 있다. 출애굽기 문맥에서조차도 ‘뒤나미스’(dynamis)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고, ‘이름’ (onoma)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속에 나타나는 그의 인격을 지칭한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그의 거룩한 이름을 알리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이었다. 역설적이나마 17절은 바로 역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것을 세우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를 강팍케 하심으로써 그를 온 세상에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이스라엘과 바로 사이에 역할 반전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은 ‘긍휼의 그릇’이었고 바로는 ‘진노의 그릇’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지금 강팍케 된 바로의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불신 이스라엘인 반면에,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의 위치에 있었던 이방인들이다. ‘바로’는 이중적인 상징성을 갖는다: 구약 시대에 그는 진노의 그릇 역할을 했던 이방인을 예표하지만, 바울 시대에 그는 불신 유대인들을 예표한다. 바로에게 사용되었던 ‘강팍케 함’(hardening)이란 술어가(9:18) 불신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것이 (11:7-8) 그것을 증명한다.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출애굽 시대 바로 이스라엘

 

 

바울 시대 이스라엘 이방인

 

하나님은 다른 종류의 그릇들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자유를 가지신 분이다. 하나님이 그런 그릇들을 빚으신 목적이 9:22,23에 설명되는데, 이 구절의 주된 난점은 기본 구조에 있다. 그것은 귀결절은 없고 조건절만 담고 있다. 22-24절을 21절과 연결시키는 ‘데’(de)란 접속사는 중요하다. 이것은 토기장이의 비유가 22-23절과 모종의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바울은 아마도 “하나님의 방식이 토기장이의 것과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비유가 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아마도 이 조건절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분사 ‘뗄론’(qe,lwn)의 의미 해석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원인이나 또는 양보를 나타낼 수 있다. 후자의 의미를 택하게 되면 “오래 참으심”과 마지막 절을 함께 연결할 필요가 있지만 그것은 문법적으로 아주 어색하다. 그리고 진노와 능력을 나타내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성취되지 못했다는 사고방식은 로마서 1:18에 언급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현재적 계시와 일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대다수 주석가들처럼 그것을 원인을 나타내는 분사로 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23절 초반의 ‘카이’(kai) 접속사는 23절의 ‘히나’(i[na) 절에 담긴 목적을, 22절 상반절과 중반절의 부정사들로 표현된 처음 두 목적들과 연결시켜 놓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 목적들 중에서 마지막 ‘히나’ 절에 담긴 목적이 궁극적이고, 부정사들을 통해 표현된 처음 두 목적은 여기에 종속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나’ 절에 표현된 마지막 목적이 제일 나중에 위치하고 있고, 부정사 대신에 ‘히나’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긍휼의 그릇들에게 영광의 부요함을 나타내려는” 세 번째 목적을 (‘히나’ 절의 목적) 위해서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참으셨고, 세 번째 목적의 성취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목적들의 (“그의 진노를 보이고 그의 능력을 알리는 것”) 성취를 요청한다. 이러한 관찰이 맞는다면 하나님의 의지는 진노와 긍휼의 의지들 사이에 분열이 있어서 마치 그것들을 두 평행되는 대립 의지들인 것처럼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2절은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이 진노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현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로마서 2:4과 3:25과 비교될 만하다. 만일 이러한 비교를 배제할 만한 다른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9:22에 언급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makroqumi,a)을,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려는 그의 선하신 성품과 연관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가 이점을 고려한다면, 정관사 없이 사용된 “진노의 그릇” (skeu,h ovrgh/)이란 표현은 영원 전에 멸망을 위해 예정된 어떤 고정된 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바울은 에베소 이방 독자들이 전에 “진노의 자녀들”(엡 2:3)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엡 2:4; cf. 딤전 1:13,15-16). 더욱이, 전에 바로처럼 진노의 그릇이었던 이방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의 그릇이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형성하는 일이 그의 자유로운 ‘부르심’에 있다면 (9: 11), 그는 유대인 중에서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부르실 수 있는 신적 토기장이다 (9:24).

결론적으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은 고정된 숫자의 사람들(numeri clausi)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후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이다. 바울은 호세아서에서 인용된 일련의 본문들을 사용하여 이방인들이 본래 하나님의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게”(9:25-26)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길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닫혀버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보이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한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11:31-32).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강팍하게 하신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잠정적’이며 ‘부분적’으로 조치하신 일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완악함이 제거되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11:26) 것이며, 또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이 “더러”(in part) 완악하게 되었을 뿐이다 (11:25).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최종적으로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자신의 마음대로 그릇들을 만들 자유를 가진 것처럼, 한 때 진노의 그릇이었던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그들을 자유롭게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실 수 있는 분이다. 과거에 긍휼을 입었던 이스라엘이 지금 바로처럼 완악해졌으나, 그들 위에 임한 완악함도 최종적인 것은 아니고 언젠가 다시 긍휼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유사한 논리가 접붙임을 받은 감람나무 비유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이 비유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변모해가면서 ‘교만’에 빠진 (11:20) 로마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뿌리를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본래 돌감람나무에 불과했지만 원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자가 되었다. “베어내고 접붙인다”는 그림언어는 자신의 백성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능력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열매를 잘 맺게 하려는 목적으로 열매 없는 가지들을 잘라버리고 돌감람나무 가지를 좋은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이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잘렸지만, 이방인들은 그러한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접붙임을 받았다. 하지만 이방 신자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이방 교회를 지탱하는 뿌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의 비유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replaced)는 단순하고도 대중적인 관념의 위험성을 드러내준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교훈하려는 것은 이방 신자들이 족장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에 기초한 한 통일된 구원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유산을 완전히 거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종교이다.” 다른 하나는 “베어내고 접붙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능력이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열매 없는 가지를 베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가지를 접붙이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이 불신앙으로 인해 꺾인 것처럼 이방 교회도 순종에 머물지 않으면 찍힌 가지가 될 것이다 (11:20,22). 하나님은 또한 잘린 가지들을 다시 접붙일 수 있는 능력도 가지셨다: “네가 원돌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11:24).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 백성을 형성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개념에 대해서 열렬하게 옹호한다. 하지만 그 배후에 놓인 바울의 동기는 두 평행되는 하나님의 의지의 ‘이원성’(duality)을 논증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기계적인 동등성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구원사적 우선성이 있음을 허용하는 동등성이다 (1:16).

 

3.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 선교의 내면적 관계

 

바울의 이방 선교 신학도 흔히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지녔던 유대교의 종말론적인 기대의 일반적인 틀 안에서 이해되곤 하였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이며 (롬 9:5), 약속된 이새의 뿌리이다 (롬 15:12).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종말론적인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전 10:11 참조).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남은 자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롬 9:27,29; 11:4-5). 이스라엘이 이렇게 회복될 때 열방이 시온으로 몰려드는 오랜 대망의 때가 임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후기 예언서들은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 이방인들도 시온으로 각종 선물들을 가지고 올라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사 60:1-9; cf. 49:6). 누가가 사도행전 15:16-17에서 인용한 바 있는 아모스 9:11-12은 이방 선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맞물려 있는지를 시사해준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최근 많은 학자들은 바울 사도도 예언자들에 의해서 예언된, 이러한 종말론적인 순례자 기대들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샌더스(E. P. Sanders)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바울의 사역 전체는... 마지막 날에 이방인들이 시온으로 순례 여행을 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흔히 논리적으로 부정확하게 제시되곤 하는데, 로마서 11:25-27을 종말론적인 순례자 기대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이 그 실례이다. 상기 구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진술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전통적인 순례자 소망에 따르면,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구속과 시온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서의 구절은 먼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전후 관계를 뒤바꾸게 되면 그것은 전통적인 순례자 기대를 단순히 수정한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들은 열방의 회심을 이스라엘 회복의 산물로 내다본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회복을 산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취하는 사고방식은 전통적인 유대교 순례자 기대들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은”(9:30) 데 반해서,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31절). 이스라엘은 불순종에 빠졌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되었다 (10:1). 그들은 바로와 같이 완악한 상태에 갇혀 있다 (11:7). 결국 바울은 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11:11)고 선언한다. 물론 그들의 실족과 넘어짐은 영구적인 것은 아니고 이방인의 충만한 때까지 잠정적으로 지속될 것이며, 그들의 완악함도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다 (11:25).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11:12)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는”(11:12) 하나님의 섭리적 조치였다. 과거에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았으나,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그들이 도리어 이제 긍휼함을 입게 되었다 (11:30). 하지만 긍휼을 얻는 길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긍휼로 이스라엘도 언젠가 긍휼하심을 입게 될 것이다 (11:31). 바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순례자 기대와는 분명히 상치된다. 바울도 선지서들 가운데 나타나는 유대교의 순례자 기대를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그는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취하는 것일까?

겉보기에 바울은 유대교의 순례자 기대를 옹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울의 내면적인 확신의 세계에는 이방 선교의 전제로서 이스라엘 회복 신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학자들은 두 가지 다른, 그러나 내면적으로 서로 연관된 방식으로 이를 논증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인격화된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인데, 라이트(N. T. Wright)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담의 죄로 시작된 인류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수단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마저 동일한 죄에 빠져 포로로 잡혀가 저주 받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가나안 땅에 돌아온 이후에도 이러한 포로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반전시킨 분이다. 라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이스라엘을 체현한 집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수행해야 할 사명을 성취하였다. 바울의 이스라엘 신학은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회복 종말론의 틀 속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구현되고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라이트는 바울의 이방 선교를 종말론적인 순례자 기대를 기독론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이 시작되고 있고, 이방인들은 그러한 회복에 동참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선지자들이 대망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이방인들도 그 축복에 참여할 것이다 (사 2:2-4; 암 9:11- 12; cf. Tobit 14:6). 라이트의 이런 기독론적 해석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란 표현과, 특별히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로 언급한 갈라디아서 3:16의 진술의 집합적인 성격에서 그 근거를 발견한다.

둘째는 이방인 구원과 관련하여 ‘남은 자’와 그 역할을 고려하는 접근방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방 선교의 전제 조건이 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순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유대 기독교의 남은 자의 출현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은 남은 자의 출현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확증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롬 15:8-9). 여기서 남은 자는 그리스도와 이방인들 간의 연결고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유일한 씨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령을 따라 난”(갈 4:29) 아브라함의 참 후손을 형성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 시작되었으며, 남은 자의 존재는 그것을 증거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전통적인 순례자 기대를 명시적으로 개진하지 않지만, 남은 자의 존재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는 것을 함축하는 여러 진술들을 남겨 놓았다. 이방인들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그 뿌리로부터 진액을 수여받는 자들이 되었다 (롬 11:17).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도된 결과였다 (15:8-9). 뿐만 아니라 바울의 헌금 수집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15:25-27).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 (15:27).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가장 웅변적인 실례는 회심한 바울 자신이다 (11:1-2). 3-5절에 뒤이어 바울은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둔”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구약부터 존재하는 남은 자의 현재적 실례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회복 종말론이 바울의 이방 선교 신학 배후에 놓여있다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상 노선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바울은 한 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방 선교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넘어짐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관념들이 실상은 서로 보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예고된 심판의 결과였고 (롬 10:19-20) 초대교회의 현실 역사였다 (행 13:46; 18:6; 28: 25-28). 그러나 이방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주체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체현한 예수 자신과 그의 메시야 사역을 통해 회복된 이스라엘 또는 남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그의 앞에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세상을 구원하는 도구로 섬기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두 목적 중 어느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본래 부과된 사명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이방 선교는 그리스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의 결과이며 지향점이다. 바울 신학은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회복 종말론의 틀 속에서 작용하지만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4. 선지자 이사야 비전의 모델 성취자로서 바울

 

바울은 로마서 15:19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리스너(R. Riesner)와 같은 학자는 바울이 선교 사역을 수행했던 지정학적 장소들의 범위를 이사야 66:18-21과 같은 구약의 예언에서 발견하였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이사야의 구절은 이방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은 여호와의 종의 종말론적 소명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이사야 49:6과 함께 다메섹 사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이해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본문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사야 49:6은 이미 사도행전에서 바울에 의해 인용된 바 있다 (행 13:47): 그는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이사야 예언의 비전을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소명의 근거로 이해한다. 본래 이 구절은 여호와의 종 메시야의 소명에 대한 예언이었는데 (cf. 눅 2:32), 바울이 그것을 자신의 이방 선교의 논거로 사용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사야 66:19만이 이방인을 위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피력하는 문맥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지정학적인 장소들을 언급한다. 이사야서가 바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소명의 근거로서 66:18-21에 포함된 예언적 비전에 주목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이 이사야의 이 비전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면, 그의 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이방 지역들을 향해 나아가는 메시야의 승리적인 진군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사야서는 메시야의 이스라엘 회복이 이루어지면 열방들이 여호와께 바칠 선물들을 가지고 시온으로 몰려들 것을 예언하기도 하지만 (43:6; 49:22; 60:1-22), 그것은 동시에 마지막 장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종 메시야를 열방 나라와 섬들로 보낼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66: 19). 우리가 이미 앞 섹션에서 살핀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 중에서 종말론적인 순례자 기대를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 않는 대신, 후자의 본문은 자신의 이방 선교 사역을 통해서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사야 66:19의 예언이 로마서 15:16-24 배후에 놓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열방을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바울의 “말과 일”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할 때” (롬 15:18) 시작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이방인들을 위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케 하신 것처럼 (롬 15:9), 그는 자신이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담당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롬 15:16). 어떤 학자들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바울의 표현이 이사야 66:20을 회상하게 만든다고 본다. 로마서 11:25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는데, 바울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얻는 일을 자신의 일차적인 소명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 자신의 내면적 확신의 세계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to.. plh,rwma tw/n evqnw/n)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광범위한 이방사역을 통해 복음을 “편만하게 전함으로”(peplhrwke,nai) 하나님께 드려지는 “이방인의 제물”(h` prosfora. tw/n evqnw/n)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사야 66:19에서 여호와의 종은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자들에게 보냄을 받는다. 바울이 로마서 15:20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진술한 것은 우연일까? 바울이 실제로 인용한 것은 이사야 52:15이지만 그것은 이사야 66장과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보고 있으며, 이사야 66:19도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 말한다. 이사야 66:19은 “구원받은 자”(sesw|sme,nou)가 보냄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울 자신도 자신을 “구원받은 자”(롬 5:9; cf. 8:24)로 이해한다. 이사야 66:21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들 중에서 택하여 나(여호와)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최근 이사야 주석가들은 이 본문이 언급하는 “이들”(avpV auvtw/n)이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이나 (B. Duhm) 이방인을 (A. S. Herbert) 가리키는가, 아니면 둘 다를 지칭하는가(C. Westermann)? 아마도 바울은 21절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자신과 같은 종말론적인 유대 사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사역을 이사야 66장이 말하는 제사장 사역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스페인 전도여행 계획을 말한 뒤에 (롬 15:22-24) 곧바로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 수집에 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롬 15:25-28).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마지막 때의 선물로 예루살렘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을 구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 66:20).

만일 바울이 자신의 이방 선교 과정에서 이사야 66:19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 언급된 이방 도시들이 어떤 곳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도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리스너(R. Riesner)에 의해서 상세하게 분석된 바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개연성이 있는 현대적 이해를 따르면, 신약 시대에 우리는 이사야 66:19에 등장하는 지역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길리기아의 다소; (2) 리비아 (구레네) 또는 길리기아; (3) 소아시아의 루디아; (4) 갑바도기아 또는 무시아; (5) 코카서스 또는 비두니아; (6) 그리이스 또는 마케도니아, 그리고 (7) 세계의 서쪽 끝. 팔레스틴 동쪽이나 남쪽에 있는 어떤 나라들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253쪽).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모으기 위해 오시는 곳이기 때문에 항상 출발지점에 놓여 있다 (사 66:18). 그 이후에 서쪽으로 옮겨가는 움직임의 방향은 로마서 15:19이 언급하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사야 본문에 기초한 추론의 성격을 갖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이방 사역을 통해서 이사야 66:15-21의 비전을 성취하고 있다고 보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사야 예언에 근거한 이러한 확신 때문일 것이다 (롬 11:13; cf. 15:17).

 

 

III. 결론적 관찰과 현실 적용의 가능성

 

지금까지 필자는 이스라엘 회복과 이방 선교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사도 바울의 선교신학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바울이 처한 상황이 현대 한국교회가 직면한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필자는 바울이 이해한 이스라엘 회복과 이방 선교 간의 내면적 연결점들을 찾아내어 한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과제를 떠맡고 있는 한국 교회에 유익한 시사점들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1. 주석적 관찰

 

우선 필자는 이제까지 관찰한 것들을 요약하고, 그 바탕 위에서 한국 교회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 시사점들을 찾고자 한다.

첫째로, 선행하는 주석적 관찰에 기초해서 결론을 지을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는 이방 선교 문제를 그의 이스라엘 신학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뿐만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도 이점에서는 유사한 사고틀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범죄에 빠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본래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선포할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부르심의 목적 가운데 어떤 것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정해졌고,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죄 아래’ 있는 세상적 존재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어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지게 하셨다. 그는 참 이스라엘 또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로서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전시키셨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시키고 이방인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 선교의 관계에 대한 두 다른 사고 패턴을 공유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는 현실 역사에 기초한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실패와 거부로 인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선교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두 사고 노선은 겉보기에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약 저자들의 종말론적 인식 속에서 서로 조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에 빠져 이방인들이 처할 운명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좌절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배척함으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된 반면, 이방 선교 사역은 모두 예수의 메시야 사역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남은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공통 근거 위에서 신약 교회는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메시야 공동체가 되었다. 신약 저자들은 신약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replaced)는 대중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약 교회는 이스라엘의 거절과 배척으로 인해 잠정적으로 이방 기독교인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지만, 그들의 뿌리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약속된 언약에 기초한 하나의 통일된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이 되었다. 특별히 바울과 같은 신약 저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유산을 완전히 거부하기보다는 그것을 기독론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확장하여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종교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이 동등성은 산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우선성을 허용하는 개념이다.

이방인 구원의 신학적 논거에 대해 가장 깊은 성찰을 제공한 저자는 아무래도 사도 바울 일 것이다.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롬 3:29). 이로써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인 신론 개념이 극복된다; (2) 이신칭의론은 하나의 백성, 한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한다 (롬 3:29). 이방인들이 믿음이란 공통 근거 위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가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자유롭게 부르실 수 있는 분이시다 (롬 9:24). 바울은 이로써 유대교의 민족주의적 선택 개념을 보편화시킴으로써 극복한다; (4)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로서 (갈 3:16) 통일된 아브라함 가족, 즉 범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러 오셨다 (갈 3:28); (4)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적대의 담을 허물어 그들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인류로 지어 화목케 하였으며 (엡 2:16),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자들을 속량하여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였다 (갈 3:13-14); (5) 바울의 아담 기독론은 무엇보다도 세계 선교의 중요한 논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이 인류 역사에 끌어들인 죄의 지배를 반전시키고 그들에게 의와 생명의 통치를 가져다주었다 (롬 5:12- 21). 그는 또한 마지막 아담으로서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재창조의 질서를 끌어 들인다 (고전 15:45). 바울은 또한 이방 선교 신학을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우선성이란 개념의 틀 속에서 전개하기도 한다: (6)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란 참감람나무의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존재이다 (롬 11:17-24). 하나님은 열매 없는 본 가지를 베어내고 거기에 다른 가지를 접붙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것처럼, 그는 또한 잘려진 가지들을 본 나무에 다시 붙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롬 11:24). 이방 교회도 열매 없는 가지가 될 때 언제라도 다시 꺾일 수 있다 (롬 11:20). 이런 내용들은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 바울의 독특한 신학적 반성들이지만, 그것들은 공관복음서의 기본적인 신학적 노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특별히 바울은 로마서 15:16-28에서 자신의 이방 사역이 이사야 49:6과 66:18-21의 예언적 비전을 성취한 것으로 이해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누가는 예수의 메시야 사역을 이사야 49:6의 예언적 비전에 따라 이해하였는데 (“이방의 빛,” 눅 2:32), 사도행전 13:47에서 그는 바울이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진술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사야 49:6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기본 내용은 이사야 66:19과 같은 맥락에 속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이방인을 구원하는 예수의 사명이 바울과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바울은 이사야 66:21의 비전에 따라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직을 감당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에 빠져 그러한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심판을 자초했으나 “땅 끝까지 구원을 선포하는” 일은 바울과 같이 회복된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2. 현실적 적용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상기 주석적 관찰로부터 우리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과제를 떠맡은 현대 한국교회를 위해 어떤 적용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지적한 것처럼 1세기 신약저자들이 씨름했던 문제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한국교회가 공유할 수 없는 구원사적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경험들은 현대 한국교회를 위한 교훈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롬 15:4).

 

①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인 것처럼, 한국교회 역시 그러한 목적을 실현할 의무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다. 신약교회가 새로이 재편성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무에는 변한 것이 없다. 회개는 여전히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의무들 가운데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해 삶의 변화,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 복음전도, 해외선교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적 교훈에 부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운동에서 배우고 회복해야 할 교훈이 이것이다.

 

② 이스라엘이 선택에 동반되는 소명을 실현하는데 실패함으로써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간 것처럼, 한국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을 실패할 때 동일한 박탈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요 동시에 경고이다.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셨다면, 하물며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겠는가!

 

③ 이방 선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제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이방 선교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선교의 동력은 교회의 회복에 있다. 후자가 동력을 잃어버릴 때 전자 역시 점차 시들어져버릴 것이다. 진정한 회복은 부흥(revival)을 넘어 변화(transformation)로 옮겨져야 한다. 수적 부흥만 아니라 내면의 변화가 동반된 부흥이어야 한다. 초기 평양대부흥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참된 회복은 실천적인 회개 운동과 영적 각성을 내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로운 윤리적 자각에 근거한 사회와 이웃을 위한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탈역사적인 내세지향주의로, 내면의 신앙세계에만 침잠하는 신비주의로, 비범한 은사와 기적만을 추구하는 초자연주의로, 60년대 이후에는 현실적인 축복만을 지향하는 현세구복주의로 변모해갔다. 이러한 변질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점들이다.

 

④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이 걸어간 전철을 다시 밟고 있지 않나 우려가 된다. 참된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해 양적, 질적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던 초기 한국교회와는 달리, 후대 교회의 급작스러운 교회 성장은 외형적 부피를 불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부작용과 문제점들을 배태시키고 말았다. 도덕적 타락, 신유, 축사 중심의 성령운동, 샤머니즘적 현세구복 신앙과 맞물린 축복과 번영의 신학, 물량주의, 외형주의, 탈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인 개인주의, 세속화 경향, 교회 내의 분쟁과 갈등, 성경교육 훈련의 부족, 목회자의 권위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교회의 생명력을 좀먹고 있는 중이다.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 가나안의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함몰되어갔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회복된 남은 자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의 사명을 담당하게 하셨다. 회복된 자가 역사적 소수일지는 몰라도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는 항상 소수의 남은 자들의 몫이다. 1세기에 회복된 이스라엘 또는 남은 자의 전형은 바울이었다. 변화를 경험한 개인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변화된 바울 한 개인을 통해서 유럽과 세계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이방의 빛”으로, 또는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행동과 삶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울과 같이 변화된 시각을 가지고 “이방의 빛”으로 부르신 한국교회의 사명을 담당할 남은 자 운동이 필요하다.

 

⑤ 특별히 선교사역은 뚜렷한 선교신학의 뒷받침이 있어야 지속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복음이 이스라엘로부터 이방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온갖 핍박과 저항, 신학적 편견과 오해들이 있었다. 특별히 이방 선교는 어떻게 하다가 우연하게 예루살렘에서 이방 세계로 넘어간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부터 뚜렷한 이방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에 처음부터 분명한 선교 개념을 확립하고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할례와 음식법 문제로 이방 기독교인과의 교제가 문제가 되었을 때도 바울은 한결같은 신념으로 이방 기독교인의 합법적 신분을 옹호하였다. 이방 선교가 이렇게 온 세상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은 바울 한 사람의 확고한 신학적 신념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처음부터 뚜렷한 어떤 선교신학적 확신에서 시작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신학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⑥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 헌신한 사람이었지만, 때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유대인 회당을 자신의 선교 사역의 발판으로 활용하였다. 회당에는 유대인들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외하는 이방인들도 있어서 그는 회당을 이방 선교의 전략적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해외동포들과 그들의 교회를 활용하여 현지 원주민 선교를 위한 교두보와 발판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평양대부흥운동 이후로 한국 교회가 중국과 일본에 있는 한국 교포들을 대상으로 선교 발판을 만들어 그곳에 사는 현지 주민들을 선교한 것은 선교전략상 옳은 일이었다고 사료된다.

 

⑦ 바울은 이스라엘 선교와 이방 선교의 과제를 서로 구분되지만 중첩되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선교가 완수될 때 인자의 재림이 있겠지만, 재림 전까지 이방 선교도 지속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다수는 복음에 불순종하는 상태에 놓여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먼저 회복되어야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사경회를 통한 회개와 영적 각성 운동이 한민족 전체의 구령운동으로 이어졌고 동시에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 선교에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영적 각성운동을 통해 민족 복음화는 세계 선교의 수행을 위해서도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면서도,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세계 선교도 중단 없이 지속되어야 할 동시적 과제이기도 하다. 주의 재림은 어쨌든 만국에 복음이 전파된 후에나 있을 것이다.

 

⑧ 한국교회는 선교의 신적 동력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부르심을 실현하는데 실패하였을 때 하나님은 복음의 불꽃을 이방 세계로 옮겨 놓으셨다. 하지만 이방인의 수가 차면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주권에 따라 움직이셔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겸손과 신뢰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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