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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임재의 증거

by 정용섭 목사 posted Jul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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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8년 5월6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고넬료 이야기


초창기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연한 현상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과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시작한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 3:1절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맞춰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의 종교 관습을 그대로 따랐다는 뜻입니다. 초창기 유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좀더 극단적인 형태를 띤 이들을 할례파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식사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이런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오늘 설교 본문(행 10:44-48)은 고넬료라는 로마 장교 집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고넬료는 전형적인 이방인입니다. 베드로가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진 다음의 이야기가 행 11장에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 중에서 할례파들이 베드로를 비판했습니다. ‘당신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했다. 이게 말이 되냐, 해명하라.’는 게 비판의 요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길게 설명합니다.

2) 바울이 쓴 갈 2:11절에는 객관적으로 좀더 확실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함께 안디옥에 머물러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곳에 왔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할례자들입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던 베드로는 할례자들에게 책잡힐까 염려하여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피했고, 바나바도 따라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지만, 당시 기독교가 이방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조심스러워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의 선교 방향을 결정해야할 기로에 섰습니다. 유대인들만의 교회냐, 아니면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교회냐, 하는 결정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의해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요즘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에 많은 교회를 세웠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도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급기야 로마를 거쳐서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졌던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습니다(롬 15:23,28).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즉 유럽 선교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뒤 큰 결실을 확인하지는 못하고 어디선가 죽었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그가 죽은 뒤에 엄청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을 다룬 책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볼 때 이방인 선교의 출발은 바울의 활동시기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최초의 이방인 선교는 빌립에 의한 것입니다. 행 8:26절 이하에 따르면 빌립은 에디오피나 간다게 여왕의 관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건은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행 10장 전체에 걸쳐서 보도됩니다. 베드로는 로마군 장교인 고넬료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식사를 함께 했고, 세례를 베풀게 했습니다. 고넬료 사건이 더 중요한 이유는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에 갔지만 고넬료는 가이사랴 교회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려면 그럴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장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할례파를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들을 설득시킬 근거는 성령 임재입니다. 행 10:45,46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라.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 집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다시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임했다는 겁니다. 행 11: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이런 고백은 단지 베드로의 발언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유대 기독교와 다른 길을 간 이방 기독교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성령이 그 일을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본문은 그 증거를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방언


첫째는 방언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방언이 두 가지 종류로 나옵니다. 하나는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현상으로서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열광적인 상태에서 기도를 하다가 혀가 꼬이면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우리나라 기도원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납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 교회에서 방언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거꾸로 통역이 가능하면 방언기도를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방언 통역이라는 걸 저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타부타 말하기는 힘들지만 다만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내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지만 아이의 엄마는 알아듣습니다. 기도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2장이 보도하는 방언 현상입니다. 제자들이 평소 자신들이 쓰던 언어로 기도를 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말로 전해 들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우리말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를 방문한 러시아 사람이 제 설교를 러시아어로 알아듣는 거와 같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완벽한 동시통역이 가능할 겁니다. 어쨌든지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은 기도하는 사람의 혀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고,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은 듣는 사람의 귀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들이 전혀 다른 언어를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방언을 실제로 성령 임재의 증거로 볼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에는 방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위에서 설명했듯이 고전 14장과 사도행전에 아주 간략하게 몇 번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방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없고, 제자들의 경우도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언급하면서도 방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습니다(갈 5:22,23). 이런 걸 놓고 볼 때 방언은 초기 기독교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지만 방언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방언은 초기 기독교의 일부 지역에서 열광적인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종교 현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현상을 오늘 우리가 똑같이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저는 방언을 언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언어를 보십시오. 하나님, 성령, 믿음, 칭의, 종말, 창조, 십자가, 부활, 영생, 재림, 은혜 등등이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언어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이런 언어가 가리키는 삶을 이해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언어로 진행되는 예배도 근본적으로는 방언입니다. 우리의 신앙언어와 예배가 우리들에게는 생명 충만한 삶을 공유하는 촉매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없고 소통도 불가능한 문자 그대로 방언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방인들의 방언을 성령 임재의 증거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신앙언어의 새로운 세계를 더 깊이 경험했으면 합니다. 단순히 신앙용어를 상투적으로 내뱉으라는 게 아니라 그 신앙언어의 깊이로 들어가자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은 단순히 언어현상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삶의 문제입니다. 방언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그는 그 방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이게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흙과 대화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무나 풀과 대화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구름과 비와 달과 바람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질적으로 꿈꾸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대화와 이런 기다림은 모두 비밀한 언어인 방언입니다. 그런 방언을 경험하고 그런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 임재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높임


행 10:46절이 말하는 성령 임재의 두 번째 증거는 ‘하나님 높임’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로마 장교였지만 유대교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넬료에 관해서 행 10:1,2절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종교성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세 가지 특징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은 구제를 하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을 높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삶은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혁명적인 변화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저 자신을 놓고 보더라도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는 크게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을 높이려면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높인다고 찬양을 크게 부르고 기도를 간절히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높이는 게 인간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9절 이하).


형식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높이는 기도였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거나,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자기보다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높입니다. 자기를 높이지 않으면 사람은 견디지 못합니다. 속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걸 기독교는 죄의 본성인 교만(휘브리스)이라고 합니다. 2) 하나님을 높이려면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의 권력과 권위를 낮춰야만 합니다. 이것도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 권력과 권위를 절대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삽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냉소적으로 대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소중합니다.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절대화하지 말아야만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힘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이 현실(reality)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뭐람, 보이지도 않고 실감 나지도 않는 존재를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믿으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억지로 시인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도 억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가장 궁극적인 현실로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시 23편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로 시작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는 말로 끝나는 시편입니다. 삶의 조건에 관계없이 이 사람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자신의 인생이 의미심장하고 생명 충만하다는 사실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높이는 시늉을 내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장 의미 충만한 삶이기에 높이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비록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이 임한 사람이니 세례를 주어도 된다고, 즉 기독교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오늘 본문이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행 44-48절 사이에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11장에서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 삶이 매우 비상한 사태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상한 사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은 곧 창조의 영입니다. 살리는 영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입니다. 성령을 어떤 사람은 귀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치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경험한 사람은 영혼이 거룩한 화염에 휩싸이게 됩니다. 다른 별에서 살다가 지구라는 별에 놀러온 것과 같은 이상한 충격에 사로잡힙니다. 삶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방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딱 한번 인생을 지구에서 삽니다. 매 순간도 단 한번입니다. 행복하신가요? 의미 충만하신가요? 삶이 매 순간 새롭게 경험되십니까?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 생각할 틈이 없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형편이 좋아져도 이런 질문에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새롭고 비밀스러운 언어 경험인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높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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