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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by 정용섭 목사 posted Jul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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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2018년 6월17일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누군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특히 개신교도들에게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보다는 믿는 주체인 자기에게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 구호가 오용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듣게 설명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예수가 누군지를 아는 방법의 하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살피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서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많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비슷한 내용으로 된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생각을 알게 되고, 예수의 생각을 알면 예수가 누군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


예수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와 같다.’라는 말로 가르침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인 26절과 30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유대인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3:1)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의 세상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주변의 패권 국가들에 의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 역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이 패권 국가들에 의해서 부패했고 정의와 평화가 철저하게 손상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왜곡된 역사의 회복은 사람의 힘에 의해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세상의 악한 질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순간이 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것만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예수 재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오심으로써 생명 심판이 실현된다고 믿습니다. 이런 재림 신앙을 탈(脫)역사주의나 패배주의로 비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부패하고 망할 것이니까 예수 재림만 바라보고 살아야한다는 주장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재림 신앙은 가장 역동적인 역사 참여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으로만 세상이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에 현재의 악한 질서에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미 지금 이 순간에 미리 당겨져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악한 질서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이미 내다본 사람들의 싸움과 같습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일상을 허무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 충만하게 살아냅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상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역동적인 자세로 세상을 삽니다. 여기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의 종말 심판을 의식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자영업자나 정치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신과 이웃들에게 생명 충만한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교사는 학생들의 인격과 영혼을 보살피려고 합니다. 상투적이기는 하나 좀더 적나라한 예를 들겠습니다. 6개월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껍데기는 제쳐두고 삶의 알맹이에 집중합니다. 더구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 완성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완성이 우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무엇에 영혼의 촉수를 기울이면서 살아야할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신앙형식에만 매달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느끼십니까? 혹시 그런 것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걸 알지 못해도 신앙생활이나 세상살이에는 아무 지장이 없긴 합니다. 역사가 무엇인지,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양자가 무엇인지, 우주의 흑암물질과 흑암 에너지가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정의와 평화가 무엇인지 몰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의미이기에 죽을 때까지 그 세계를 향해서 구도 정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인으로서 불행한 일입니다. 테니스장에서 실제 게임을 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머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막 1:15) 말씀하셨습니다. 자칫하면 이런 표현은 관념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일단 그 단어가 공간적으로 들립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릴 때의 생각이 여기서도 작동되는 겁니다. ‘나라’는 영토가 아니라 통치 개념입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 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자이니까 이 말은 생명의 능력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구원이 임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확실하게 받아들여질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남의 이야기로 머물 것입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는 땅


예수님은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장에는 농부, 씨, 땅, 뿌림이 등장합니다. 뒤로 가면 씨의 ‘자람’이 나옵니다.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서 열매를 맺습니다. 씨처럼 신비로운 것도 지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텃밭을 가꾸거나 아예 시골에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일 이 신비로움을 실감할 겁니다. 민들레 씨는 날개가 있어서 바람을 타고 여러 곳으로 흩어집니다. 해바라기 씨는 날기에 무겁지만 사람 손을 빌려서 여러 곳으로 갑니다. 씨 비유에서 씨는 밀로 보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긴 했지만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랍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농부라고 하더라도 씨를 뿌린 다음에 싹이 나고 자라는 걸 현장에서 계속 지켜보지는 않습니다. 지켜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순간과 모르는 깊이에서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실증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확인될 수 있다면 예수님이 굳이 비유로 말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생명을 자라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거기에 영혼의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난하거나 몸이 약하거나 외롭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마 5장에 나오는 팔복의 주인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만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복 받을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고 사는 사람들은 삶의 열악한 조건에 절대적으로 지배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삶의 어려운 실존에 떨어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업 목사로 사는 제가 하나님 나라를 이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저는 제가 목격하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선하고 신비로운 능력을 봅니다. 자연세계만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그리고 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는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그렇게 봅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이 제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든 않든, 그 모든 것이 다 귀한 일입니다. 제 설명이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제 생각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 제 삶이 충족하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걸 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존재론적 기쁨입니다. 제가 존재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에 제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제 삶에 가까이 있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막 4:28절에서 예수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일구거나 세울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진정성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물학자가 해바라기 씨를 실험실에서 하루 만에 싹을 틔우고 일주일 만에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게 맞는 말일 겁니다. 자연의 생명 현상만이 아니라 인간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후반기만 하더라도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에 돌고 있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평화의 기운을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연과 역사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이 반복적으로 겹치는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바로 그 역사를 섭리하는 존재가 바로 성서에서 고백되는 하나님입니다.

 

겨자씨 비유


예수님은 막 4:30-32절에서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는 겨자씨의 두 가지 성격이 나옵니다. 하나의 성격은 겨자씨가 유독 작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겨자씨처럼 하나님 나라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더더욱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천문학적인 숫자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소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세계를 밝히 보도록 해보십시오. 예컨대 어린아이의 웃음과 울음소리에서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될지 모릅니다.


다른 하나의 성격은 겨자씨가 훗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자라서 무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게네사렛 호숫가에 심긴 겨자씨는 나중에 3미터 크기로 자랐다고 합니다.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든 씨는 대단한 능력을 보입니다. 금년에도 저는 해바라기 씨를 마당에 심었습니다.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8월이면 씨앗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해바라기 꽃이 필겁니다. 기대가 됩니다. 모든 씨는 이런 잠재적 능력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씨처럼 우리 영혼에 심기면 생명의 풍요로움이라는 결실을 얻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경험을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자신이 왠지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과 술 취한 사람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현실의 많은 문제들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그러워집니다. 이해심이 많아집니다. 돈도 통 크게 씁니다. 술 취한 사람은 자기 정신을 놓친 상태에서 그렇게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은 제 정신을 똑바로 차린 상태에서 그렇게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은 자기 행동을 나중에 후해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삶에 대한 태도가 더 단단해집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기에 여러분도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되기를 바랄 겁니다.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이미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미 부자이지만 그게 실감이 나지 않을 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부자 여부는 재산의 크기가 아니라 부족한 것을 얼마나 덜 느끼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재산이 많으면서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고, 재산이 많지 않지만 부족한 게 전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이 실제로 많으면 그걸 관리해야 할 책임만 늘어나니까 실제로는 불편합니다. 아닙니까? 지난 수요일에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선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을 것이고, 떨어진 사람은 크게 낙심했을 겁니다. 그건 실체를 뚫어보지 못하는 데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시장이나 도의원이 된 사람은 그만큼 할 일만 늘어난 겁니다. 당선된 순간만 즐거울 뿐이지 모든 것이 일상으로 떨어집니다. 시장이나 도의원의 업무만을 통해서 존재의 기쁨을, 생명의 환희를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거나 공장에서 냄비를 만드는 사람들의 업무와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감만 많아지는 업무를 왜 나서서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요.


하나님 나라는 이와 달리 작은 씨에서 무성하게 자란 겨자나무처럼 우리 영혼의 안식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앞에 왔기에 공연한 것에 한눈을 팔 겨를이 없습니다. 저는 앞에서 어린아이의 웃음과 울음소리에서도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나뭇잎이 뒤척이는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습니다. 태아가 처음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과 죽는 순간은 또 어떻겠습니까. 작곡가들은 어떤 소리를 통해서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이런 경험의 공통점은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서 다른 것들이 소소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경험의 실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절대적인 힘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으로 죽음까지도 극복되는 경험입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죽어도 좋다는 경지까지 이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습니다. 예수에게서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험의 내용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의 삶을 훼손시키는 율법적인 책임감과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예수가 씨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인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근본 토대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를 가리켜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저 자신은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함으로써 영혼의 자유가 풍요로워졌을까요? 구원에 접근하고 있을까요? 저의 대답은 여러분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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